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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덕비 하나 없는 고향(글/이원정_시인, 수필가)

안동 군청에는 고려 공민왕이 대문짝만한 글씨로 쓴 安東雄府(안동웅부)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물론 필치도 힘이 있어 좋아 보이고 그럴 듯하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웅부라고 하는 말에 우쭐대는 기분까지 생기곤 했다.
안동의 삼국시대 때 지명은 고타야(古陀耶)였다. 신라 경덕왕 때 고창군(古昌郡)으로 바뀌었다가 고려 태조 때부터 안동부(安東府)라고 하였다. 그 후에는 영가(永嘉) 길주(吉州) 복주(福州) 등으로 불렸다가 공민왕 때 안동대도호(安東大都護)가 된 후 '안동'이라는 이름이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지명에 얽힌 이야기를 한 가지 더 한다고 하면 1995년에 시 · 군이 통합돼서 지금은 '안동시'라고 하지만, 1963년부터 1995년까지는 안동시와 안동군이 따로따로 구분되어 있었다. 1960년 전후해서 비교적 인구가 많은 큰 군(郡)을 시로 승격시키면서 시와 군으로 나누었는데, 이 때 시와 군의 이름은 각각 달리 불렸던 것이다.

예를 들면 김천군이 군과 시로 나눠질 때, 시는 김천시 군은 금릉군, 포항은 포항시 영일군, 경주는 경주시 월성군으로 말이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시는 고유의 군 이름을 그대로 승계했고 상대적으로 세가 약한 군의 이름은 금릉, 영일, 월성 같이 옛 이름으로 고쳐졌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다고 보면 안동도 시는 안동시, 군은 영가군으로 됐을법한데 전국에서 유일하게 안동만은 시도 군도 모두 안동으로 불리어졌던 것이다. 이것은 시와 군 지역의 세가 팽팽해서 조정이 안 돼 그랬을까? 아니면 보수성향이 강해서 죽어도 안동이란 이름을 서로 양보 못하겠다는 고집 때문이었을까? 모르는 일이기는 하지만, 하여튼 간에 행정구역을 분할하면서 정부의 방침으로도 안동군의 이름을 바꾸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오늘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안동의 지명에 얽힌 이야기가 아니니 여기서 접어두기로 하고, 그렇게 오래고 큰 안동군청 마당에 어쩌면 전임부사의 치적을 기리는 공덕비나 송덕비가 하나도 없었을까? 하는 것이다. 전국 어느 고을을 가 봐도 군청 마당 구석구석에 돌아가며 공덕비, 송덕비가 즐비하지 않던가? 그렇게 흔하게 세워져 있는 비가 유독 안동군청 마당에는 하나도 없다는 것은 확실히는 모르지만 전국에서 유일한 곳이 아닐까? 그렇다면 다른 고을 수령들은 송덕비가 세워질 정도로 선정을 베풀었던 분이 많았고 유독 안동에는 그런 부사가 한 분도 없었다는 말인가?

안동은 예부터 학문이 숭상되고 도덕이 존중되던 추로의 고을이었으니 모르긴 몰라도 그런 고을을 다스리기 위해 다른 어느 지방보다 더 훌륭하고 덕망 있는 인물을 부사로 보내지 않았을까? 그런데도 송덕비 하나 없는 것을 보면 그 송덕비, 공덕비라는 것이 정말 선정을 베푼 전임 사또의 덕을 기려 세워진 것인지, 의문이 생기는 대목이다.

간혹 선정을 해서 세워진 비도 있겠지만, 대개는 수령이 임지를 떠날 때 요즘말로 하면 전별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첨하는 아전들이 앞장서서 돈냥이나 있는 백성들을 보고 송덕비를 세우자고 들쑤시고 다니며 돈을 긁어모아 적당한 비를 하나 세우고 나머지는 떠나는 수령에게 전별금으로 바쳤을 것이다. 그러고도 고물이 좀 떨어지면 그것은 아전들 주머니에 들어가지 않았을까? 물론 떠나는 수령은 모르는 척하고 겸연쩍게 받아 챙겨 떠났을 테고……
그렇다고 보면 각 고을 마당에 즐비하게 서 있는 비석의 이름 석 자 중에는 백성은 뒷전이고 치부에 눈이 어두워 가렴주구(苛斂誅求) 했던 몹쓸 수령들도 허다하지 않았겠느냐? 어쩌면 허물이 있는 수령일수록 잘못을 덮을 양으로 비를 세워줬으면 했을 런지도 모를 일이다.

잘 모르는 일이지만, 안동에 송덕비가 하나도 없었던 사유를 그렇게 짐작해본다. 안동은 선비의 고장이라 정말 선정을 베푼 부사가 허다했을 것이나 누가 비를 세워주겠다 해도 "안동이 어떤 고장인데 감히 내가"하며 사양하지 않았을까? 거기다가 안동 아전들의 행실이 반듯하기로 소문날 정도였다고 하니 부사의 이름을 팔아 돈을 긁어모으는 일에는 마음이 없었는지도 모를 일이고…… 하여튼 간에 안동군청 마당에 그 흔한 송덕비 하나 없다는 것이 내가 고향을 자랑하는 좋은 걸목 중에 한가지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안동 선비가 외지에 나가 수령을 하다가 돌아올 때 그곳에 송덕비를 남기고 돌아왔을까? 글쎄, 정말 치정을 잘 해서 그곳 백성들이 사또가 떠난 뒤에 은혜를 잊지 못해 세웠다면 모르는 일이지만, 전별금 챙기기 위해 아전들을 앞세워 돈을 거둬들이고 명예롭지 못한 비를 남겨놓고 온 일은 없었을 것이다.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4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