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더니…….(글/박인수_본지 운영위원, 경희한의원 원장)설렘 안고 출발한 부산행
토요일 아침 부산의 H가 모친상을 당했다는 부고가 날아왔다. 일요일에 내려가도 되지만 그 친구와 긴히 의논할 것도 있고 해서 당일에 내려가기로 했다. 마침 집에는 멀리 사는 아내의 동창생 둘이 대학생 딸들을 데리고 영덕대게를 먹으러 오기로 되어있어 내가 집을 비워주면 오히려 더 좋은 상황이었다. 아내에게 오늘 진료를 마치고 곧바로 부산에 내려가서 하룻밤 자고 올라와야 한다고 하자 그러시라고 했다. 비록 부음을 듣고 나선 길이지만, 고향을 찾아가는 길이라 설레는 마음으로 나섰다.
없다가 생긴 좌석, 운수 좋은 날?
진료를 마치고 안동터미널에 간 시각이 오후 3시 40분경 이었다. 터미널은 주말이라 혼잡했는데 좌석이 매진되어 가장 빠른 것이 55분 후에 출발하는 것이라 했다. 인터넷으로 미리 예매하지 않은 나의 불찰이었지만 진료에 신경쓰다보니 깜빡하고 지나쳐서 예매할 타이밍을 놓쳐서이기도 했고 문상 예정시간이 저녁 8시라 시간 여유가 많았기에 굳이 예매하지 않아도 다음 차 타면 되지 하는 안일함도 있었다. 그런데 막상 와보니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이런 땐 나를 한 대 쥐어박고 싶어진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뭔가 방도가 있을까 싶어 왔다 갔다 하다가 무작정 기다리는 것보다는 혹시라도 앞 차에 빈 좌석이 있을까 싶어 승강장으로 나가봤다. 거기엔 나 보다 먼저 줄서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오늘 참, 일이 시작부터 잘 안 풀리는구나!’ 하며 되돌아서려는 찰라 동대구행 고속버스 바로 옆에 부산행 고속버스가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가만 보니 좌석이 꽤 많이 비어있는데 3분 후에 출발이다. 이런 행운이 어디 있을까 싶어 부랴부랴 매표소로 뛰어가서는 대구행 표를 취소하고 부산행 표를 끊었다. 출발하려는 고속버스를 세워 후닥닥 자리에 앉으니 웃음이 실실 났다.
부산엘 가면서도 부산행 고속버스를 탈 계획이 없었던 이유는 안동에서 부산간을 운행하는 고속버스의 수가 서울이나 대구에 비해 턱없이 부족해 많이 기다려야 하는데다가 터미널도 외곽에 있어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터미널이 위치한 부산 북쪽 끝에서 남쪽 끝에 있는 고신의료원까지 가려면 전철을 타고서도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가서는 중간에 내려 시내버스로 다시 갈아타야하는 불편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러니 차라리 안동에서 동대구까지는 고속버스를 타고 갔다가 동대구역에서 KTX를 타고 부산역으로 가서 시내버스를 타는 게 여러모로 나았기에 그리 결정했는데 그런데 막상 안동터미널에서 50분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리자 차라리 지금은 곧 바로 부산행 고속버스를 타고 가는 게 조금 더 나은 상황이 되어버렸다. 돈도 적게 들어서 좋고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어쨌거나 나는 운이 좋았다.
고향에 와도 이제는 이방인
부산 고속터미널에 내려서 전철을 타고는 남포동역에서 내렸다. 자갈치나 토성에서 내리면 송도에 더 가까워 택시비가 절약되지만 한 두 정거장 못 미친 남포동에서 내린 것은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뻔질나게 들락거리던 남포동 거리를 다시 보고 싶어서였다. 지하철역에서 나오자 L백화점의 불빛이 휘황찬란하게 눈부셨다. 그 왼편에 영도다리가 있는데 그쪽으로 가볼까 하다가 시간이 지체될 것 같아 남포동 거리만 둘러보기로 했다. 거의 20년 만에 둘러보는 남포동. 예전과는 다른 풍경들이라 처음엔 낯설었다. 주변 건물들의 외관이 거의 대부분 바뀌는 바람에 여기가 예전의 거기가 맞나 긴가민가했었다.
그런 생각으로 길을 걷다보니 나는 어느새 이방인이 되어있었다. 안동시골에서 온 촌놈이 바로 나 자신이었던 것이다. 20년 전 부산의 서쪽인 감천동에서 동쪽 끝에 있는 해운대로 이사를 가다보니 안동에서 부산으로 자주 내려오기는 해도 남포동으로 올 일은 없었다. 그러니 생소한 것은 당연했고 옛날 기억을 더듬어 걸어가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건물은 바뀌어도 길은 그대로여서 찾아가기 어렵지 않았다. 거리를 걸으며 구석구석을 살피는 데 도로의 폭도 넓어지고 설치물들도 많았다. 남포동거리는 예쁘게 꾸민 성형미인이 되어있었고 예전보다 훨씬 세련되게 변해있었다. 그나마 바꾸지 못한 본바탕이 좀 남아있어 내가 길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는데 여기저기 남아있는 예전 모습들이 이정표가 되어주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것을 볼 때마다 기뻤고 반가운 친구를 만나는 듯 했다. 그러면서 예전의 남포동 거리가 더욱 그리웠는데 그건 아마도 예전의 그 길에는 내 흔적이 남아있지만 지금의 이 거리에는 추억마저도 다 쓸려가 버리고 남아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리라.
나는 허허로운 마음으로 천천히 걸어 남포동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멈춰 서서 왔던 길을 잠시 뒤돌아보았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기약할 수는 없지만 또 다시 와보고 싶은 거리가 그리운 남포동이었다. 자갈치 입구에서 택시를 타고 고신의료원으로 향했다. 문상 예정시각보다는 좀 이른 시간이었지만 장례식장에는 벌써 인천의 K와 마산의 P가 먼저 와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제 울산의 C만 오면 되는데 그는 대구에 상갓집 한 군데를 먼저 들리고 내려와야 하니 8시 반 가까이 되어야 올 수 있을 거라 했다. H는 담담한 표정으로 조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모두 문상을 핑계로 모였지만 긴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결정할 것부터 결정했다. 상주인 H도 중간 중간 와서 이야기를 거들었다. 그렇게 대강의 틀을 짰을 무렵에 C가 도착했다. 문상을 마친 C와 계획에 대해 조금 더 논의를 하고는 앞으로의 일 진행상황을 보며 다음 대책을 논의하기로 했다.
이게 아닌데? 일행들과 어긋나는 일정
H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고신의료원에서 송도해수욕장까지 걸었다. 따뜻한 겨울바다가 우릴 반겨주었다. 일행은 해변을 산책하며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았다. 거기서 회를 시켜 밤바다를 보며 술 마실까 했는데 인천의 K가 내일 아침 긴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10시 30분 KTX를 끊어놓았다며 미안해했다. K는 자기는 급한 일 때문에 먼저 가지만 다른 분들은 1박하고 천천히 올라오시라고 했다. 그러자 울산의 C도 자기도 내일 아침 일찍 집안에 큰 일이 있는데 대구에 문상을 가느라 울산 KTX역에 차를 세워놓았으니 K가 올라갈 때 그 편에 자기도 따라 가겠다고 했다. 갑자기 주먹으로 머리를 한 대 둔탁하게 맞은 듯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남는 것은 나와 마산의 P인데 순간적으로 혼란스러웠다. 둘은 가지만 그래도 P가 있으니 둘이 어찌되겠지 했는데 잠시 고민하던 P 마저도 마산으로 가는 시외버스가 새벽 1시까지 있으니 자기도 오늘밤에 돌아가겠다고 했다.
결국 나 혼자 외톨이가 되고 말았다. 그들의 생각엔 내가 부산이 고향이니 갈 데가 많다고 생각했었나보다. 나만 입장이 난처하게 되어버렸다. 그 상황에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으니 일단 부산역으로 가서 거기서 가볍게 한 잔 하고 각자 헤어지기로 했다.
후미진 골목의 불쾌한 술집
부산역 맞은편에 텍사스촌이라는 곳이 있다. 한때는 미군들이 많이 놀러오는 클럽들이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었는데 지금은 러시아 인들의 출입이 많은 곳이다. 그 거리의 반대쪽에는 상해거리라는 차이나타운 특구가 있는데 화교학교가 있고 중국음식점들이 많은 곳이다. 거기서 이국적인 분위기에서 한잔 하자며 갔는데 막상 가보니 외국인은 눈을 씻고 봐도 없고 나이 든 러시아 여인들이 거리에서 어설픈 한국말로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시간도 별로 없고 거리의 분위기도 썰렁하여 더 가봐야 별게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다들 대충 아무 곳이나 들어가자고 했다. 러시아어로 적힌 술집 앞에서 호객하는 여인을 따라 2층 카페로 올라갔다. 계단은 폭이 좁은데다 조명이 어두워 침침했다. 대여섯 평 남짓한 가게에는 손님이 아무도 없었고 러시아 여자가 있으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주방장 겸 사장으로 보이는 50대 남자가 한명이 카운터를 지키고 있었다.
황당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넉살좋은 P가 “여기 러시아 아가씨가 있다 해서 왔는데 어디 갔는교?” 하자 그 여자는 15만원하는 양주를 시켜야 부를 수 있다기에 그럼 됐다며 그냥 기본으로 술을 가져오라고 했다. 기본은 4만원인데 기본이라고 나온 게 수준이하의 바가지였다. 2홉들이 360ml 국산 맥주 세병에다 애 손바닥 만한 오징어 피데기와 한 줌의 땅콩. 게다가 땅콩은 눅눅하여 껍질이 벗겨지지 않았는데 그나마 깐 것도 시커멓게 변색되어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입에 넣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더 가관이었던 것은 호객행위를 하던 그 여자가 볼일이 끝났으면 내려갈 일이지 접대부인 것처럼 우리 옆에 앉아 피데기를 잘게 찢으면서 술 좀 따라 달라고 했다. 기분이 언짢아서 한 소리하고 내보내려 하는데 넉살 좋은 P가 제지 하면서 맥주를 따라주었다.
문상을 핑계로 힘들게 모인 자리이고 P가 저러는데 그냥 오늘 재수에 옴 붙어서 그런 거려니 생각하고 그 여자가 하는 행동에 신경 끄기로 했다. 우리는 우리끼리 이야기했다. 변장수준의 화장으로 나이를 감춘 40대 후반인 듯한 여자는 우리를 번갈아보다 다 마신 빈 맥주잔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그러자 P가 뒤늦게 눈치를 채고 “이런, 술 떨어졌네.” 하며 다시 한 잔을 더 따라주었다. 그녀는 쭈빗거리며 잔을 받았다. 운전 때문에 술을 못 마시는 C를 제외하고도 남자 셋에다 불청객 한 명이 더 끼었으니 몇 모금 마시지 않았는데도 맥주가 금방 동나버렸다. P는 지갑에서 5만원권 지폐를 꺼내어 안주는 필요 없고 맥주만 3병 더 달라했다. 그 여자는 3만원을 거슬러주었다. 여기 맥주 값이 왜 이리도 비싸느냐는 P의 불평에 대해 주인도 그 여자도 대꾸하지 않았다. 다시 맥주 세 병이 더 들어오고 그것도 다 비워갈 무렵 약속 된 시간 10시 15분이 되었다. 우리가 일어서서 나가자 그녀는 등 뒤로 “안녕히 가세요.”하고 메마른 인사를 했다. 그녀는 우리가 이곳에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을 것이다.
부산역, 광안리, 해운대 졸지에 부산투어
P와 나는 둘을 배웅하러 부산역사 안으로 들어갔다. 주말이라 꽤나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며 북적이고 있었다. 안내방송이 쉼 없이 흘러나오고 열차 시간표에는 시시각각 출발하는 열차의 시간과 행선지가 빼곡히 불이 들어와 있었다. 언뜻보니 부산발 강릉행 열차도 있었다. 그걸 보자 초등학교 6학년 때 비둘기호 열차를 타고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가 생각이 났다. 저걸 타면 곧장 안동으로 갈 수 있으니 ‘나도 그만 여기서 저 차를 타고 집에 갈까?’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오늘은 어떻게든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도 가보고 부산 구경도 제대로 하다가 올라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인천의 K와 울산의 C를 배웅하고서 부산역 광장으로 걸어 나왔다. P에게 새벽 1시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으니 한잔 더 하자 했더니 재미없다며 일찍 집에 가야겠다고 했다. 내게 어떻게 할 거냐고 묻기에 다들 가고 없으니 해운대나 가봐야죠 했다. 택시 승강장에서 P 마저 떠나보냈다. 이젠 어쩔 수 없이 정말 나 혼자만 남았다.
이런 난감한 상황에서 어찌해야하나 잠시 고민했다. 답답한 마음에 일단은 바다를 보러가기로 했다. 광안리에 가려고 좌석버스를 탔다. 고등학교시절 익숙하게 봐왔던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버스가 광안리에 가까워질 무렵 어디서 내려 걸어가는 해변에 가장 가까울지 따져보았다. 그러다 한 정거장 두 정거장 놓쳐버리고 그만 내려야 할 곳을 지나치고 말았다. 버스는 머뭇거리지 않고 광안리를 지나 수영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에이,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이대로 해운대로 가서 그곳 바다를 볼까?’하고 시간을 봤는데 11시 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한겨울 야심한 밤이라 해운대에 가 봐도 별게 없을 테고 그렇다고 광안리에도 나를 반겨줄 이는 없었다. 혼자서 모텔에서 자야한다 생각하니 갑자기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이렇게 갈 곳 없이 방황하는 것보다는 기차를 타고 대구까지라도 가서 거기서 택시를 타고 안동으로 되돌아가는 게 낫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졌다. 가까운 지하철역부터 찾아보니 저쪽에 수영역이 보였다. 그때가 11시 40분. 해운대에서 양산으로 가는 2호선을 타고 서면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야 했다. 전철이 끊어지면 택시를 타면 된다 생각하고 있으니 불안할 거야 없는데 막상 환승역인 서면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다들 뜀박질을 시작했다. 내겐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하고 그냥 평소 걸음으로 걸었는데 점점 주변에 사람이 없어지자 이러다 여기서 막차를 놓치고 닭 쫒는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될까봐 같이 뛰기로 했다. 그렇게 뜀박질 대열에 합류하여 막차는 탈 수 있었다.
지하철 안은 피곤하고 지친 승객들로 만원이었다. 그 중에는 나도 있었다. 서면에서 열 정거장도 채 못 되어 부산역이었다. 전철역에서 내려 광장으로 걸어들어 가는데 아까와는 달리 분위기가 이상했다. 화려한 불빛을 자랑하던 광장의 설치물 조명은 꺼져있었고 역사 내부도 조금 어두웠다. 전기 절약차원에서 조명을 좀 줄였나보다 했는데……. 이런? 매표창구가 모두 닫혀있었다. 시시각각 출발시간을 알려주던 전광판에는 다 지워지고 첫차의 출발시각과 다음 차의 시간이 적혀있었다. [05:00 KTX 서울 05:05 무궁화 서울]
뒤에 알게 된 사실은 부산역에서 출발하는 막차는 밤 12시 10분이고 첫차는 새벽 5시는 되어야 운행된다는 것이었다.
‘이제 부산을 떠나고 싶어도 떠날 방법이 없구나.’
드문드문 하겠지만 새벽까지는 계속해서 기차가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나의 판단착오였다. 나의 무지를 탓하며 돌아서던 그 시각, 서울에서 출발하여 부산으로 속속 도착하는 열차에서는 승객들이 내려서 썰물처럼 바삐 빠져나가고 있었다. 다시 부산역 광장으로 내려서자 맞은편에 도열해 있는 모텔들이 환한 얼굴로 손짓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긴 싫었다. 광장주변에 호텔들도 있었지만 거기는 더 더욱 가고 싶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는 이제 어디로 가야하지 하는 생각만 동심원처럼 뱅뱅 맴돌았다.
구세주, 여보 마누라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것처럼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아내는 동창들과 기분 좋게 와인을 마시고 있던 중이라 잔뜩 들떠있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러다가 내 설명을 몇 마디 듣고서는 기막혀했다. 평소에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계획성 없이 돌아다니는 나에 대한 불만이 화살처럼 내 귓전으로 쉴 새 없이 날아들었다. 이 모든 게 내 탓이니 가만히 듣고 있는 수밖에 없었고 지금은 아내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잠시 후 아내가 내린 결론은 택시를 타고 안동으로 올라오라는 거였다. 내가 몇 십 만원하는 차비도 문제지만 그보다는 장거리 밤길 운전에 따른 사고의 위험성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하자 그러면 우리가 두 번 가본 적 있는 광안리 H호텔이 어떠냐고 했다. 내가 거긴 너무 비싸서 안 된다고 하자 그래도 택시비보다는 쌀 테니 거기서 자든가 아니면 그 호텔 내의 찜질방을 이용하던지 하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일전에 그 호텔에 투숙하면서 올라가본 적 있는데 시설이 좋아 괜찮았던 기억이 있던 곳이었다. 그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 같았다. 역시 이럴 땐 아내가 구세주라는 생각이 들어 기쁜 마음으로 고맙다는 말을 했다.
어디로 가야할지 정해지자 일단 마음이 편해졌다. 추운 몸을 녹이려 역전 맞은편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커피를 마시며 2층에서 부산역 광장을 내려다보는데 황량하게 느껴졌다.
참, 오늘따라 되는 게 없다
새벽 1시 반이 조금 넘은 시각에 택시를 타고서 광안리 H호텔로 향했다. 카운터를 거치지 않고 5층 찜질방으로 곧장 올라갔는데 카운터에 직원이 없었다.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무작정 직원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십여분을 기다렸을 때 여직원이 나타나 지금은 찜질방이 만원이라 자리가 없어 잠을 주무시려면 통로밖에 공간이 없는데 그래도 괜찮다면 입장하셔도 된다고 했다. 난감했다. 해돋이 전망지로 광안리에서 가장 명당이니 사람이 많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정말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기왕지사 이리 된 것 호기롭게 이 호텔에서 숙박할까 망설이다가 아무래도 돈이 아까울 것 같아 그 호텔을 나왔다.
시간은 이미 새벽 2시를 넘기고 있었다. 1박을 하고 어릴 적 동네를 둘러볼 당초의 스케줄이었다면 모를까 지금은 한시바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숙박시설이 고급일 필요가 없고 싸구려라도 좋으니 잠시 눈만 붙일 공간이 있으면 되었다. 근처에 가격이 저렴한 관광호텔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다들 만원이라 방이 없었다. 해변에 붙어있는 객실은 이미 동나고 없었다. 해변 쪽에서 조금 벗어난 곳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그 곳은 방이 있긴 있는데 모텔이라는 간판을 달고는 있지만 여관보다 시설이 떨어지는 듯 했고 주중에는 숙박료가 7만원이지만 주말에는 12만원이었다. 기분이 상했다.
검은 바다를 보며 자작自酌
다시 광안리해변으로 걸어 나왔다. 바람이 무척 차가웠다. 겨울바람이 자꾸 코트의 안쪽을 파고들어 찬 기운에 장시간에 노출되기도 했지만 이미 멘탈이 붕괴되어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 어디든 들어가서 추위를 피해야 했다. 아까부터 유혹했던 해변거리의 술집으로 자포자기하며 들어갔다. 종업원은 내가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마도 일행이 더 있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내가 손짓을 하자 조금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와서는 메뉴표를 던져주고는 다시 자기 자리로 되돌아갔다. 나는 메뉴표를 쭈욱 훑어보다가 추천메뉴라는 걸 골랐다. 역시 맥주 3병에 안주 하나가 세트로 묶인 거였다. 부산역전 러시아카페 기본보다는 가격도 5천원이나 싸고 맥주는 호가든에다 오징어 피데기의 크기와 두께도 족히 두 배는 되었다. 달달한 과자는 무제한 리필로 덤으로 나왔다.
창가에 남아있는 한 자리를 차지하고 의자를 돌려 바다를 향해 앉았다. 광안대교의 불빛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검은 어둠을 가득 담은 밤바다는 고스란히 그 불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나는 깜빡거리는 불빛의 숫자를 헤아리다가 색의 변화가 몇 번 일어나는지를 그리고 어떤 불빛에서 가장 아름다운지를 관찰하고 있었다. 가끔 술 취한 사람들이 무리지어 시끄럽게 떠들며 그 앞을 지나갈 때도 있었지만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맥주 한 병을 비우고서 시계를 보았다. 시계의 작은 바늘이 3이라는 숫자를 지나 4를 향해 느림보 걸음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하루가 참 길었다. 이제 여기서 한 시간만 더 버티다가 부산역으로 가서 서울행 첫차만 타면 된다. 절망의 눈동자처럼 새까만 아무것도 들여다보이지 않는 검은 바다를 보며 술을 마셨다. 굉장히 괜찮을 것 같았던 고향으로의 여행이 무계획적이고 안일한 생각 탓에 엉망진창에서 헤매는 수난이 되어버렸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더니........ 내가 딱 그랬다.
세상에서 제일 길었던 무박 2일
4시 20분경에 광안리 술집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부산역으로 갔다. 택시기사가 너무 속도를 내는 바람에 채 15분이 걸리지 않아 도착했다. 표를 끊고 나서 대기하고 있던 기차에 얼른 몸을 실었다. 그렇다고 더 빨리 가는 것도 아닌데. 그런 내 행동이 우스웠다. 잠이 쏟아졌지만 잘 수가 없었다. 불과 50분이면 동대구역에 도착하는 데 깜박 졸다가 내릴 곳을 지나치면 그건 더 큰 낭패가 될 수도 있어 졸음을 억지로 참기로 했다. 드디어 5시 50분 동대구역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새벽 공기가 차가워 한기가 들었고 오들오들 떨면서 역사를 걸어 나와 안동행 중앙고속 터미널까지 왔는데 희미한 전등 하나만 켜져 있어 어두컴컴했다. 다행히 문이 열려있어 들어갈 수는 있었는데 노숙자처럼 보이는 남자가 불 꺼진 난로 앞에서 춥다며 툴툴거리고 있었다. 매표소 위쪽 버스시간표를 보니 첫차가 6시 40분이다. 앞으로 40분을 더 기다려야 있는데 이렇게 추운데서 어떻게 견뎌야 할지 막막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거기서 나와 가까운 동양고속 터미널로 향했다. 다행히 거긴 차들이 벌써 운행하고 있었고 승객들도 꽤 많이 있어 덜 추웠다. 한쪽 구석에 분식코너가 있기에 라면을 시켰다. 나는 소화력이 약한 편이라 라면을 푹 익혀야 하는데도 아주머니는 끓다만 라면을 내주었다. 좀 더 끓여서 제대로 익혀달라고 하려다 그만두었다. 내가 천천히 먹으며 국물에서 불리는 방법도 있으니까. 차갑고 쓰린 속을 데우려 뜨끈한 국물을 후후 불며 천천히 마시고는 면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건져 먹었다. 그러자 시간이 얼추 30분이 되었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안동행 첫차에는 승객들이 채 열 명도 되지 않았다. 히터를 켠지 얼마 되지 않아 버스 안은 냉골이나 다름없었다. 춥다고 불평할 틈도 없이 버스에 오르자마자 졸음이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이내 잠에 골아 떨어졌다. 눈을 떠보니 안동터미널. 택시를 타고 비몽사몽한 상태로 집에 실려 갔다. 집에 도착하니 아내의 친구들과 딸들이 쿨쿨 자고 있었다. 나는 그녀들의 눈을 피해 둘째 아이가 자고 있는 작은 방으로 가서 나머지 잠을 청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여행의 시작은 집을 나서는 것이고 그 끝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니 떠났으면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집이 좋은 것이로구나.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4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