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와의 조우(遭遇)(글/사진/이순구_안동대 교수)

첫째 장면
1971년 고3 여름 방학 때였다. 그러나 고3 교실은 방학이 없었다. 그는 그때 이과(자연계) 서울대반에 있었다. 당시에는 서울대만 본고사가 전과목이었기에 따로 반 편성을 해서 입시교육 지도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다닌 고등학교는 당시 서울대 진학률이 낮아서 부산의 부산고, 경남고에 상당히 밀리고 있는 형국이라, 학교의 자존심을 버리고 2차로 바꾸어 1차인 경남고와 부산고에 떨어진 우수한(?) 학생을 받아서 될 수 있는 한 서울대에 많이 진학 시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가 경남중학교 다닐 때, (도저히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이상하게 많이 놀아서(미술, 문예 등에 빠져서), 1차인 경남고에 떨어지고 2차인 그 학교 동래고에 치욕적으로 다니게 되었다. 그때 동래고 교장인 정사용 선생은 동래고보(일제강점기에는 경남-부산에서 조선인이 다닐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문계 고교) 출신으로 동고 중흥의 기치를 높이 앞세우고 동래고보 출신 서울대 교수 이십 여 명을 모교에 초청했다. 그리고 교수들을 그 교실에 모시고 와서 학생들에게 서울대에 진학하라고 강권하는 어떤 특별 수업시간이었다.
그때 왔던 교수들 대부분이 거의 부산 말 혹은 경상도 말씨로 말하였는데 유독 한 분만 서울말로 또박또박 얘기 하였다. 바로 서울대 문리대 국어국문학과 정병욱 교수였다. 그때 그 분이 무슨 말씀을 했는지 그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분의 고요하고 차분한 서울 말씨, 표준말이 다른 교수들과는 아주 다른 어떤 고상한 분위기와 특이한 인상(인간적 향기, 인품, 품격이 느껴지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을 그에게 준 것 같다. 그런데 바로 그분이 윤동주를 시인으로 만든 분, 바로 그 분인 것을 아주 먼 훗날에야 알게 되었다.



둘째 장면
1940년 봄, 4월이었으리라. 서울 신촌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한 정병욱은 기숙사에서 윤동주와 처음으로 마주쳤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는 서로의 사투리 때문에 의사소통이 힘들었다고 한다. 한 쪽은 두만강변의 심한 함경도 사투리, 또 한 쪽은 경상도 서부 경남 특유의 하동 사투리였으니. 둘은 일본 말로 대화했다고 한다. 1976년 정음사 출간 ‘나라사랑’ 잡지에 기고한 정병욱의 윤동주와의 추억담에, “그는 나의 두 반 위 상급생이었고, 나이는 다섯 살이나 위였다. 그는 나를 아우처럼 귀여워해 주었다. 나는 그를 형으로 따랐다”고 한다. 그렇게 만난 두 사람, 그 윤동주를 시인일 수 있게 한 역할을 후배인 정병욱이 하게 된다.


1941년 일본 유학을 떠나기 직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노트 원고 시집 한 부를 윤동주에게서 받아서, 그것을 아주 소중하게 하동 집(정병욱 어머니와 여동생 기거)에 보관하게 했고, 해방 후 그 원고를 가지고 정음사에서 1948년 첫 시집, 1955년 증보판 시집, 그리고 1967년에 제3판 시집을 낼 수 있게 한 노력은 순전히 바로 그 대학교 후배인 정병욱의 몫이었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윤동주의 시를 실을 수 있게 백방으로 노력하신 이도 바로 그 정병욱이었다.


윤동주가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고 포플러한 시인이 될 수 있게 한 이가 바로 그 정병욱 교수다. 또 1949년 두만강 넘어 만주 연길 현 용정에서 윤동주의 10살 아래 동생인 윤일주가 당시 서울대 국문과에 재학 중이던 바로 그 정병욱 집에, 두만강 넘어 기차를 타고 그리고 원산에서부터는 걸어서, 거의 거지 차림으로 찾아 왔다. 그 윤동주의 친동생인 윤일주를 자기가 데리고 있으면서 하동에 있는 여동생을 불러 그 두 사람을 혼인시키고, 그리고 다시 한국전쟁 때 윤일주 부부를 일본에 보내어 윤일주가 동경대에서 건축학을 공부할 수 있게 힘써 준 것도 바로 그 정병욱이었다. 윤일주는 그 후 귀국하여 성균관대학에서 건축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대학에서 선후배로 만나 2년여 같이 기숙사 및 하숙 생활을 하면서 그렇게도 깊은 우정을 나눈 그 두 사람, 그 선배의 동생에게까지도 그런 깊은 정을 주었던 그 정병욱은 참 대단한 사람이다. 멋있고 참 좋다. 다음은 정병욱이 추억하는 윤동주의 모습이다.


“뭐 대수롭지도 않은 시를 가지고… 빙그레 웃으면서 나를 흘겨보고 있다. 그는 이렇듯 겸손하고 자기를 나타내는 것을 무척 꺼려하는 성품이었다. 나는 동주의 꽁무니를 따라 주일날이면 영문 모르고 교회당엘 드나들었다. 그러는 가운데 나는 지난 날 몰랐던 전혀 새로운 세계를 발견할 수 있었고 새로운 영혼의 우주를 찾아 언덕 저쪽을 바라다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그의 성격 중에서 본받을 일이 물론 많았지마는 그 중에서도 가장 본받을 장점의 하나는 결코 남을 헐뜯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는 일이었다고 한다. 윤동주는 그가 읽는 책에 좀처럼 줄을 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결벽성이 심했다고 하겠다. 그는 “그 책은 그저 그렇게 읽는 거예요”라고 하기도 했고, 어떤 때는 “그 책은 그렇게 읽는 것이 아니라 무척 고생하면서 읽어도 잘 알 수 없는 책입니다” 이렇게 일러주기도 했다. 그만큼 그는 독서의 범위가 넓었다. 문학, 역사, 철학, 이런 책들을 그는 그야말로 종이 뒤가 뚫어지도록 정독했었다. 꼭 다문 입술을 팽팽히 조인 채 눈에서는 불덩이가 튀는 듯했었다. 그러고는 눈을 꼭 감고 한참 동안을 새김질을 하고 다음 구절로 넘어가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메모를 하기도 했었다.




셋째 장면
작년 여름, 2012년 8월2일 목요일 오후 4시경, 쿄토 도시샤(同志社)대학 교정에 있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시집의 첫 시로 일부러 작정하고 쓴 그 서시(序詩)가 우리말과 일본어로 새겨진 시비(1995년 건립) 앞에 그는 한참 서 있었다. 그는 식물병리학 전공자로서 마침 쿄토 국제회관에서 개최중인 국제분자식물병리학회(IS MPMI)에 참석 중이었다. 24년 전인 1988년 8월초(제5회 국제식물병리학회 ICPP도 바로 그 국제회관에서 열렸음)에도 그는 그 교정에 잠시 왔었는데 그때는 윤동주 시비가 없었다. 1988년에 갔을 때 그 도시샤대학은 온통 붉은 벽보판, 운동권 대자보로 가득 찬 캠퍼스였지만 작년에는 차분히 학기말 시험을 치르고 있는 학생들, 특히 여학생들이 특히 많이 보이는 학교였다. 벽보판에는 커닝하는 학생은 그 과목의 학점을 모두 몰수한다는 학장의 엄중한 경고문이 차갑게 붙어 있는 다소 오래 된 고색창연한 근대 서구식 벽돌 건물 앞 풍경이었다. 1988년에는 그 대학교 어느 여자 교직원을 교정에서 만나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인 윤동주와 정지용이 대학생활을 했던 캠퍼스라고 그가 오히려 가르쳐 주었지만 이번에는 교문 수위실에서 윤동주 시비 팸플릿을 하나 얻어서 윤동주 시비와 나란히 붙어있는 정지용 시비가 고요한 서녘 햇살을 받고 있는 것을 직접 보았다. 그 동안 일본에도 윤동주가 많이 알려져 있고 일본에서 한국문학을 전공하는 분들의 노력으로 윤동주 시들이 많이 읽히고 있었다.


일본 고등학교 현대문 교과서(츄쿠마쇼보(筑摩書房)간행 新編 現代文, 高校三年生 課程)에 윤동주의 ‘서시’가 들어있는, 이바라키 노리코(茨木のり子; 1926-2006) 시인의 에세이(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空と風と星と詩)가 엄연히 실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일본 지성인들이 사랑하는 윤동주>(이누가이 마츠히로 외 7인 엮음, 고계영 옮김. 민예당. 1998)라는 책에는 일본어로 완역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전체 시가 다 있다. 바로 그 이바라기 노리코 시인이 쓴 바로 그 글(일본 교과서에 실린) 중에는 마침 동경대학교에 연구교수로 와 있는 윤일주 교수를 1984년 가을에 인터뷰한 내용이 들어있는데 윤 교수뿐만 아니라 그 부인(바로 정병욱 교수의 누이 동생)과 따님도 같이 인터뷰 장소에 나왔다고 하며, 따님이 큰 아버지인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을 그 자리에서 낭독했다고 한다. 그때 그 윤일주 교수에 대해 이바라키 시인은 이렇게 찬찬히 기술해 놓았다.
“윤일주라는 훌륭한 ‘인간의 질(質)’에 접함으로써 드러난 것으로, 형인 윤동주 역시 이런 사람이었지 않았을까? 라고 상상하게 되었다. 조용하고 따스하며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이를 느끼게 했던 인격…” 앗, 이것은 바로 정병욱 교수한테서 그가 그 옛날, 고3 때 받았던 인상과 너무나 비슷한 바로 그것, 바로 기시감이었다.


이바라기 노리코는 당대 최고의 일본 시인이라고 한다(양동국 2012, 현대문학 5월호). 그녀는 나이 오십 대 후반부터 한글을 배웠으며, 윤동주를 읽었고, 그 윤동주의 인생과 시를 해설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산문이 츄쿠마 서점 발행의 일본의 고등학교 국어 현대문학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그녀가 현대 한국 시인들, 강은교, 황동규, 김지하 등 10명의 한국현대시인의 시작품 62편을 일본어로 번역한 한국현대시선(1990)은 일본 최고의 번역상인 요미우리 문학상(연구번역부분)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 한 편을 현대문학(2012년 5월호) 잡지에서 인용한다.


이웃 나라 말의 숲
 
숲의 깊이
가면 갈수록
뻗은 가지 엇갈려 교차하며 저 깊숙이
외국어의 숲은 울창하기만 하다
한낮 여전히 어두운 샛길 혼자 터벅터벅
구리(栗)는 밤
가제(風)는 바람
오바케는 도깨비
헤비(蛇) 뱀
히미츠(秘密) 비밀
기노코(耳) 버섯
무서워 고와이
 
첫머리 언저리에선
신명 나게 떠들어대었다
뭐든지 신기해
명석한 표음문자와 맑디맑은 울림에
히노 히카리 햇빛
우사기 토끼
데타라메 엉터리
아이(愛) 사랑


간서치看書痴 이순구 교수의 독서편력 – 윤동주 시인
기라이 싫어요
다비비토(旅人) 나그네
 
세계 지도 위 이웃 나라 조선국에
검디 검도록 먹칠해가면서 이 가을바람 듣네
타쿠보쿠의 명치 43년의 노래
일본어가 예전에 내차버렸던 이웃나라 말
한글
지우려 해도 결코 지워 없애지 못한 한글
용서하십시오 유루시테 쿠다사이
땀 뚝뚝 흘리며 이번에는 이쪽이 배울 차례이지요
어떠한 나라의 언어에도 끝내 굴복하지 않았던
굳센 알타이어족 하나의 정수에
조금이나마 가까이 가고 싶어
모든 노력을 기울여
그 아름다운 언어의 숲으로 들어가고 있지요
 
왜놈의 말예(末裔)인 나는
긴장을 놓고 있으면
순식간에 한(恨)이 담긴 말에
잡아먹힐 듯한
그런 호랑이가 확실히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옛날 옛적 오랜 옛날을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우스꽝스러움도 역시 한글만의 즐거움
 
어딘가 멀리서
재잘거리며 떠드는 소리
노래
시침 딱 떼고
엉뚱한 소리를 해댄다
속담의 보고이며
해학의 숲이기도 하고
 
대사전을 베개 삼아 선잠을 청하면
"자네 들어 오는 것이 너무 늦었어"라고
윤동주(尹東柱)가 다정하게 나무란다
정말 늦었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너무 늦었다고 생각지 않기로 했지요
젊은 시인 윤동주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
그것이 당신들에겐 광복절
우리들에겐 항복절인
8월15일을 거슬러 올라가면 겨우 반년 전이었을 줄이야
아직 교복을 입은 채
순결만을 동경하는 듯한 당신의 눈동자가 눈부시게 빛난다
 
----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이렇게 노래하고
감연히 한국어로 시를 썼던
당신의 젊음이 눈부시고 그리고 애처롭습니다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달빛처럼 맑은 시 몇 편인가를
더듬거리는 발음으로 읽어보지만
당신은 조금도 웃어주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앞으로
어디까지 더 갈 수 있을는지요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다 가다가 쓰러져 병들어도 싸리 핀 들녘
 
-“깊숙한 오솔길”의 소라(曾良)의 노래, 시집 <촌지 1982>에서




작년 3월 28일, 수요일 오후 5시경, 후쿠오카(福岡) 선착장, 그 전날 한일식물병리학회 공동심포지엄이 그 인근 국제회의장에서 개최되었고 다음날인 그날은 하루 관광하는 날, 그 후쿠오카 선착장(뱃머리)에서 그는 부산 쪽을 향해 바다를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었다. -동주 사망 시체 가져가라-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날아온 한 장의 전보를 받고 달려 온 윤동주 아버지와 윤형주(의사이면서 포크 송 가수)의 아버지인 윤동주 아버지와 사촌간인, 두 사람이 그 청천벽력 같은 전보를 받고, 두만강을 건너 기차를 타고 부산에 와서 다시 배로 후쿠오카로 온 것이다.


아들의 시신을 화장하고 유골함에  뼛가루를 다 넣지 못해 반이나 남아 있는 그 뼛가루를 현해탄 바다에 뿌렸다는 그 시커먼 바다를 한참이나 부둣가에 서서 그는 상념에 젖어 바라보고 있었다. 유골함을 안고 용정에 돌아간 그 아버지는 장남인 아들 윤동주의 무덤을 만들었다. 그리고 시인 윤동주의 묘(詩人 尹東柱之墓)라고 비석을 세웠다. 작년 8월 어느 토요일, 마침 그의 고교 동기의 딸 결혼식이 있어 서울에 올라가면서 그는 일부러 연세대학교 교정에 들어가 한국에 있는 윤동주 시비를 처음으로 보았다. 그 시비는 바로 윤일주 교수의 설계로 1968년 세워졌던 것으로 역시 서시가 새겨져 있었다. 윤동주 시비는 또 하나 만주 연길 현 용정에 있는 윤동주가 다녔던 명동 중학교 교정에도 있다고 한다.




넷째 장면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
得天下英才 而敎育之,  三樂也


부모님 같이 살아 계시고 형제들 모두 아무 일 없는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고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구부려 사람에게 부끄러움 없음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세상의 영재를 모아 가르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맹자(孟子)에 나오는 말이다. 인생삼락(人生三樂: 사람 살이의 세가지 즐거움) 대목이다. 자기 가족의 평안과 안락이 가장 중요하고 하늘(神)과 남(他人)에게 하등 부끄럼 없는 행동해야 하며, 그리고 (남는 힘이 있으면) 어린 신세대 교육에 힘 쓸 일인데, 이 모든 것을 즐겁게, 자발적으로 행한다는 것이다. 유교 혹은 유학의 가르침은 특히 사족(士族) 계층의 윤리 도덕 행동 규범으로 지배 받는 계층에 대해서는 철저히 소인(小人)으로 차별 지어 경멸한다. 그야말로 양반이나 선비들의 가르침, 생활철학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갑오경장과 한일합방 등을 통해 근대화되면서 노비 해방이 되었고 모든 사람이 다 양반이 되어 집집마다 거의 모두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신식 근대적 교육을 받지 않으면 아무리 양반이라 하더라도 양반 혹은 제대로 어른 대접도 받지 못하는 사회로 바뀌었다. 그리고 기독교와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의 사상이 우리 근 현대에 도입되면서 사민평등과 계층 분해가 더욱 가속되었다.


윤동주 서시에 나오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는 시 구절은 바로 여기에 나오는 말이다. 윤동주가 아무리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다고 해도 가정에서 부모로부터 알게 모르게 가르침을 받았거나, 초등 혹은 중고등학교 과정 중 수신(修身, 요즘의 윤리, 도덕 과목)시간에 분명히 이 말을 배웠을 것이다. 한국 사람의 무의식 혹은 생각의 원형(archetype)에 유학 유교의 내용이 거의 500여 년 이상 바이러스처럼 깊숙이 침투되어 있어, 지금도 우리의 사고를 거의 결정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의 학생들, 젊은이들에게도 거의 보편적으로 통하는 것 같다. 같은 한자 문화권이고 또 현재의 한국보다 더 많은 한문 한자 교육을 하고 있는 일본이기에 더욱 그럴 것 같다. 변방으로 갈수록 그 사상은 더 첨예하고 정교하게 침투되어 상투화되고 가식화된다. 그러면서도 최근세에 근대화와 함께 들어온 기독교는 끊임없이 자기가 지은 죄를 고백하라고 한다,


이번 부활절을 앞두고 그도 천주교 신자의 의무로서 고백성사를 보아야 했다. 윤동주의 시 구절과 맹자의 인생삼락 중 제2락 구절을 한 달여 늘 염두에 두고 있는 그에게, 기독교는 원죄를 강조하고 끊임없이 죄인임을 자각시키고 자기 죄를 고백하라고 윽박지르는 것 같았다.
“이제와 저희 죽을 때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하면서 묵주기도 하기를 강요한다. 죄를 고백하고 보속(補贖)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내가 무슨 죄를, 무슨 잘못을 지었는지 잘 모르겠다”고 그가 고백했더니, 고해성사를 보시던 신부님이 매우 곤혹해 하시는 것을 그는 체험했다. 그 일로 그는 마음의 상처를 받은 것 같다. 니체가 ‘기독교는 노예의 종교’라고 했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노예들은 끊임없이 뉘우치고 반성하고 땅을 치고 울어야 한다. 그러나 유교의 지배자 윤리 도덕, 군자 의식은 아무리 가난하게 없이 살아도 의젓하게 당당하게 살 것을 요구한다. 그야말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라고 한다.


윤동주의 많은 시들은 문학 소년의 습작기 작품들이다. 그 나이의 청소년, 젊은이들 같으면 누구나가 다 그런 순수한 마음의 원형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 정지용이나 백석 같은 고급의 우리 말 수사도 윤동주 시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그래서 그 시는 쉽게 읽는 사람에게 다가오고 우리들에게 순수한 인간의 해맑은 마음가짐을 새삼 되돌아보게 한다. 그래서 윤동주 시들이 한국 사회에 가장 포플러한 감성(感性)으로서 수용될 수 있었다.




다섯 째 장면
2001년 6월 21일 아침 6시경, 수원에서 아들을 돌보고 뒷바라지하고 있던 그의 처한테서 급한 전화를 받고 안동 법상동 집에서 수원으로 급하게 차를 운전해서 올라갔다. 차 안에서 구스타프 말러의 ‘대지의 노래’를 들으면서 그는 솟구치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올라갔다.


바로 두 달 전 4월 21일 그가 가장 좋아하는 지휘자 주세페 시노폴리(1946-2001)가 베를린 도이치 오퍼에서 베르디 오페라 아이다를 연주 지휘하다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급서했다는 비보를 들었는데, 이번에는 그의 고3 아들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말을 듣고 급하게 차를 운전해 수원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수원 도착하여 달려간 그의 아들의 사고 현장에서 바로 윤동주 시집을 만난 것이다. 아들이 안동에서 중학교 다닐 때 그가 대구 출장 다녀오면서 민음사 출간 세계시인선의 하나로 출판된 이남호 편집 해설의 윤동주의 <별 헤는 밤> 시집을 사 준 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 책이 그 교통사고 현장 아들 책가방에서 고3 문제집, 자습서 등과 함께 있는 것 보고 경악하였다.


아들의 빈소에 그의 대학교 지도교수와 사모님이 여러 신자들과 함께 연도(煉禱) 오시면서 그와 그의 처를 많이 위로해 주었다. 그런 것이 계기가 되어 그도 그 전후해서 바로 천주교 세례를 받았다. 천주교에서 그가 가장 마음에 든 것은 잘 알지 못하는 신자들이 연도로 그의 아들의 죽음을 같이 슬퍼해주고 위로해 준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늘, “내 탓이오, 내 큰 탓이옵니다.”라면서 잘못된 것을 먼저 자기 자신한테서 찾는 마음 자세에 호감이 갔다. 다가오는 영혼의 구원, 보속(補贖) 혹은 자유 같은 것, 어떤 가르침 같은 것을 미사 중에 간간히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그 당시 죽은 그의 아들보다 두 살 위인 그의 딸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어학연수 중이었는데, 그는 윤동주의 동시인 ‘편지’를 함께 인용해서 이메일로 딸에게 알렸다.


편지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 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후에 딸은 다음과 같은 메일을 보내온다.


“죽은 동생의 가방에는 아버지가 사준 윤동주 시집이 들어 있었지요. 한국에 잠시 한 달 있다가 다시 미국에 돌아가기 전날(2001년 9월쯤이었지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저도 잠이 잘 오지 않더군요. 그날 밤 아버지는 동생 꿈을 꾸었다 하십니다. ‘나도 누나 배웅하러 갈래요’ 하더래요. ‘그래도 저 누나 다시 먼길 간다니깐 빠이빠이 하고 싶은가 보다’ 하시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끝내 눈물을 보이셨지요. …… 아버지가 보내주신 이 시를 보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Southern California(서던 캘리포니아)에서 눈(雪)을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유난히 눈을 좋아했던 저와 동생이었으니까요…. 동생의 편지가 받고 싶었으니까요…….  신기하게도 다른 해보다 조금 추웠던지 딱 하루, 눈이 조금 왔더랬습니다. 홈스테이 아주머니께서도 “뭐, 이런 일이 다 생기나!” 하시며 놀라셨지요. 눈을 좋아하는 누나가 눈을 2년 정도 못 보고 겨울을 보내는 게 안쓰러웠는지 하늘에서 동생이 보내 준 선물이라고 아직도 믿고 있습니다. 짧고 간결한 예쁜 우리말로 되어 있고, 또 동시라서 영어로 옮기기가 쉽지 않다고 단정해버리고는 시도도 하지 않았었는데, 선생님(고 이창우 교수) 번역하신 것 보고 너무 반가웠습니다. 동생 사진 하나 올려 봅니다. 윤동주 시인처럼 젊은 시절의 아름다운 모습만 가진 아이…….”<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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