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가족구성(글/정진영_본지 편집위원, 안동대 교수)
처와 첩
조선후기의 양반사회는 절대적인 남성 중심의 사회였다. 가정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가장격인 남편은 자신의 정식 아내인 처(妻) 이외에 또 다른 아내를 둘 수 있었다. 이들 또 다른 아내를 흔히들 첩(妾)이라고 하였다. 대부분의 양반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첩을 두고 있었다. 양반들만이 아니라 왕이나 왕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말하자면 조선왕조는 일부일처제가 아니라 일부다처제 사회였던 셈이다. 이것은 불법이 아니라 합법이었다. 그래서 왕실에서는 비빈제도가, 양반에게는 처첩제도가 있었던 것이다. 비(妃)와 처는 혼례라는 절차를 통해 맞이한 부인이고, 빈(嬪)이나 첩은 이러한 절차 없이 들인 부인이다. 우리가 잘 아는 장희빈은 정식 비가 아니라 빈이고, 홍길동의 어머니도 처가 아니라 첩이었다.
양반들은 결혼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결혼 당사자가 아니라 그 가문이었다. 양반이 아닌 가문과의 결혼이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곧 그들 자신이 더 이상 양반이 아님을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어느 가문 없이 자신들보다 더 격이 높은 집안과 혼인을 하고자 했다. 이렇게 신분을 따지고, 가문의 높낮이를 따져서 하는 혼인은 처를 맞이할 때에만 그러했다. 물론 정식 절차를 밟아 혼인한 처가 사망하여 다시 혼인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남자들은 두 번, 세 번 혼인하는 일도 허다했지만 이것이 허물이 되지는 않았다. 이 경우에도 역시 혼례라는 정식 절차를 거쳤기 때문에 처로 호칭되었다.
첩은 이런 혼례라는 절차를 밟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신분 또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첩은 주로 상민의 딸이거나 자신의 종인 경우가 많았다. 간혹 관청의 종이나 기생을 첩으로 삼아서 큰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들은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나라의 재산이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의 재물에 손을 댄다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생존하고 있는 처는 한 명이었지만, 첩은 두세 명에 이르기도 했다.
양반들은 여러 이유를 들어 첩을 두는 것을 당연시 하였다. 남편은 첩과 그 자식들을 잘 감싸 거두는 것이 부인의 도리라 생각했다. 부인들도 대부분 겉으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려서는 아버지를, 시집가서는 남편을, 늙어서는 아들을 따라야 한다는 여자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늘 듣고 익혀왔기 때문이다. 더욱이 질투는 칠거지악(七去之惡)의 하나였다.
칠거지악이란 아내가 쫓겨날 수 있는 7가지의 악행을 말한다. 즉, 질투와 함께 부모에게 불손한 경우,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경우, 음란한 행위를 한 경우, 나쁜 질병이 있는 경우, 남을 험담하여 구설수에 오르는 경우, 도둑질을 한 경우 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보면 여자들은 쫓겨나거나 이혼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매일 매일을 살았을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혼이 거의 허락되지 않았고, 나라에서도 최대한 억제했다. 이는 정절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남편이 죽은 뒤에까지 정절을 지키게 하려면 재혼은 금지될 수밖에 없었고, 재혼이 금지된 사회에서 이혼녀가 양산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법이 아니더라도 혼인이 오늘날과 같이 개인적인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가문과 가문과의 결합이었기 때문에 이혼이란 결국 집안간의 문제로 비화되기 마련이었다. 가문의 체통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양반사회에서 이혼이란 피차간에 결코 명예로운 일이 아니었다.
이혼이 어려웠다는 것은 아내의 지위를 지켜주고 보호해 주었던 측면도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여성들을 더욱 더 큰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시부모와 남편이 며느리 혹은 아내를 이런저런 사정으로 내쫓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이혼 이상의 고통을 줄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였다. ‘소박’이라는 것이 그 한 가지 방법이었다.
소박이란 형식적으로는 부부관계를 유지하지만, 실제로는 남남으로 사는 것이다. 축첩(蓄妾)이 허용되던 당시의 관습을 이용하여 마음에 드는 첩을 들여 처를 소외시키는 것이었다. 가족이지만 가족으로 인정해 주지 않고 ‘따돌림’시키는데, 남편만이 아니라 때로는 시부모와 온 가족이 한 통속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우리 속담에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라는 말은 이 같은 사정을 잘 대변해 준다. 이러한 소박, 곧 전 가족 구성원으로부터의 따돌림은 칠거지악과는 달리 뚜렷한 이유 없이 생길 수도 있었고, 또 크게 드러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여성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가정에서 아내라는 지위는 법으로 보장되지는 못했지만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 물론 상대적이고 개인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아들딸 잘 길러내고, 부모의 삼년상을 함께 치른 조강지처라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칠거지악에서도 이 같은 경우에는 예외적인 조항을 두고 있었다. 아내에게는 자식이 든든한 울타리가 될 수도 있었다. 더구나 남편이 늘 도덕군자로서 자처했다면, 도덕은 아내에게도 큰 무기가 될 수 있었다.
16세기 후반 학자며 관료였던 미암 유희춘(眉巖 柳希春, 1513-1577)은 예순이 좀 덜 된 나이에 서울생활이 적적하다는 핑계로 첩을 들였으면 하여 시골에서 살림을 살고 있는 아내에게 편지했다. 부인은 대뜸 당신이 지난 몇 달 동안 독수공방을 보낸 것을 무슨 큰 은혜라도 베푼 양 떠들어 댈 수 있느냐고 쏘아 붙였다. 당신이 정말 군자라면 그럴 수 있느냐, 이러고도 어떻게 당신을 존경하라고 강요할 수 있느냐고 따져 물었다. 미암이 움찔했음이 틀림없다. 당신 정말 군자라고 할 수 있느냐는 아내의 항변에 달리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들 당연하게 들이는 첩을 자신은 몇 달간 독수공방을 보냈으니 묵인 해주리라 기대했던 미암으로서는 부인이 야속하고 못마땅하기 그지없었다.
역시 16세기 성주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묵재 이문건(黙齋 李文楗, 1494-1567)은 기생과 정분이 났다. 기생에게 사랑하는 것은 오직 그대뿐이라고 고백도 했다. 기생은 이를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녔다. 아내가 발끈하자 그럴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어깃장을 놓았다. 부인도 지지 않았다. 이문건은 부인이 질투가 심하고 성질이 모질다고 푸념을 했다. 부인의 노기가 계속되자 부인에게 이런저런 고자질을 해대는 종을 불러 자신은 오직 부인만을 사랑할 뿐 기생은 한때의 노리개에 불과하다는 ‘홍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정사는 내밀한 문제다. 함부로 논단하기가 쉽지 않음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모두가 16세기의 사정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여성에 대한 차별은 16, 17세기를 거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조선시대는 남녀도 유별(有別)했고, 부부도 유별했다.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라는 차별뿐만 아니라 서로의 역할도 달랐다. 집밖의 일은 남자의 몫이었고, 집안의 일은 여자의 몫이었다. 그래서 아들에게는 학문을 가르쳤지만, 딸에게는 바느질을 가르쳤다. 조선시대 남자가 집안일을 돕거나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가정에서 아내나 여자의 도움이 없으면 남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였다.
남편이 벼슬길에 오르거나 서울에서 생활하게 되면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먹고 입는 일들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었다. 이 또한 첩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반면에 남편이 벼슬길이나 과거 준비를 하는 동안 집을 관리하고 경영하는 책임은 온전히 아내의 몫이었다. 가계를 돌보아야함은 물론이고 무엇보다도 안팎의 종들을 잘 거느려야 했다. 종들은 기회만 있으면 도망갔다. 종없이는 농사는 물론이고 먹고 사는 모든 문제가 뒤죽박죽이 되고 만다. 더구나 큰집이나 종가(宗家)라면 그 많은 제사들도 일일이 챙겨야만 했다. 그러니 양반집 부인들이 집밖을 나선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부모가 계신다면 더욱 그러했다.
조선후기 여성들이 집밖을 나설 수 있는 경우는 친정 나들이가 거의 유일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라 주로 부모상을 당했을 때나 할 수 있는 가장 슬픈 나들이인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형편이었으니 남편의 객지 생활을 뒷바라지 한 것은 처가 아닌 첩의 몫이었고, 남편의 성공과 출세 뒤에는 아내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다.
조선후기 이후 오랫동안 남편들은 ‘내조(內助)’라는 얄팍한 이름으로 아내에게 너무 큰 희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지금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아내들 또한 내조가 최고의 미덕인양 자랑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아무튼 남자들은 내조라는 역할을 아내에게 부여함으로써 집안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아들과 딸, 그리고 적자와 서자
조선후기 양반사회에서 아들이란 절대적인 존재였다. 아들만이 가계를 계승할 수 있고, 조상의 제사를 받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들을 두지 못해 조상의 제사를 받들 수 없게 된다면, 이것은 불효 중에서도 가장 큰 불효가 된다. 아들을 낳지 못함을 ‘칠거지악’의 으뜸으로 삼았던 것은 이 때문이다. 설사 아들을 낳았다 하더라도 유아 사망률이 높던 당시에는 생존하여 성인이 된다는 보장이 없었다. 이래저래 아들을 두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들을 얻는다는 명분으로 첩을 두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정작 첩의 아들인 서자에게는 가계를 잇게 하여 조상에게 제사 지낼 자격을 주지 않았다.
처에게서 태어난 적자가 없으면 서자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양자(養子)를 들이는 것이 조선후기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양자란 주로 조카나 가까운 친척의 아들을 데려와 자신의 뒤를 잇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계후(繼後)니 입후(立後)니 하였다. 어린 시절에 데려오기도 하지만, 장성한 이후에 들이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친부모의 허락이 있어야 하지만, 특히 종손인 경우에는 집안의 어른들에 의해 결정되기도 하였다. 원래는 예조(禮曹)에 보고하여 허락[입안立案]을 받아야 했지만, 점차 대부분의 집안에서는 가문이나 가족의 문제로 처리하고 말았다. 오늘날에는 자신의 어린 아들을 다른 집의 자식으로 보낸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지만, 조선후기에는 이런 일들이 아주 흔했고 또 그래야 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어떤 경우에는 4-5대에 걸쳐 계속 양자를 들이기도 하였고, 양자를 주었다가 다음 세대에는 다시 양자를 받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양자를 들이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특히 종손이나 큰집의 장손일 경우에는 한 가문이나 집안의 흥망성쇠를 좌우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 함부로 처리할 문제가 아니었다. 너무 신중하게 생각한 나머지 미처 생전에 후사를 정하지 못하고 죽은 뒤에 양자를 들인 경우도 적지 않았고, 혹 대가 끊어질까 서둘러 양자를 들였다가 뒤늦게 아들을 얻는 경우도 있었다. 또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종가나 큰집으로 보냄으로써 정작 자신은 먼 친척으로부터 양자를 구해야 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종가나 큰집의 양자가 된다는 것은 종통이나 가통을 계승하게 됨으로써 조상에 대한 제사권과 함께 제위답이나 양부모의 많은 재산도 아울러 계승하게 됨을 의미한다. 자신의 어린 아들을 이런 종가나 큰집에 양자로 보낸다면 그 친부모는 후견인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게 된다. 대원군처럼. 아들 가진 부모들은 은근히 자신의 아들을 양자로 보내고자 이런저런 공작을 벌이기도 했다. 그 욕망이 너무 지나쳐서 자칫 화를 불러오거나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양자란 어린 아들을 빌리고 빌려준다는 점에서 참 비인간적이었지만, 부계혈통을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는 관행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그 결과는 철저한 부계중심, 아들 중심의 세상이 되었다.
아들이 중요한 사회에서 딸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였다. 딸은 혼인 후에 시집으로 들어가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래서 혼인한 딸을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 하였다. 젊은 나이에 남편이 죽더라도 다시 결혼을 할 수도 없었고, 비록 시집 식구들로부터 소박당하여 설사 쫓겨난다 하더라도 친정으로 돌아오기도 어려웠다. 친정 또한 가문의 명예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여 이런 딸을 선듯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았다. 따라서 한 번 시집간 딸은 살아서도 그러했지만, 죽어서도 시집의 귀신이 되어야만 했다. 이것이 조선후기 딸의 운명이자 며느리의 운명이었고, 모든 사대부가 여성들의 운명이었다. 물론 상민들의 경우에는 이와 달랐다. 이혼도 하였고, 남편이 죽은 뒤에는 재혼을 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유학이 발달하여 생활화되면서 이들도 크게 자유롭지는 못하였다.
아들과 딸의 차별이 확고하게 된 것은 조선후기의 일이다. 조선전기에는 그러하지 않았다. 조선전기, 곧 16세기 중후반까지만 하더라도 적어도 가정에 있어서는 딸도 아들 못지않은 지위를 누렸다. 여자들이 시집을 가는 대신에 남자들이 장가를 들었고, 시집살이가 아니라 아들이 처가살이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기에는 딸들도 아들과 똑같은 자격으로 부모 재산을 상속받았고, 조상의 제사를 모시는 것도 아들과 마찬가지였다. 가계계승에 굳이 아들만을 고집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양자를 들이는 것이 도리어 예외적인 일이 되었다. 이것이 우리의 오랜 풍습이고 전통이었다.
아들딸이 동등하게 대우받던 것에서 아들, 그것도 맏아들이 중요한 존재로 부각되게 된 것은 대체로 조선시대 16세기를 거치면서부터였다. 이렇게 된 데는 유학의 영향이 컸다. 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유학은 이제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삶의 지침이었고, 나침판이 되었다. 양반이나 선비들은 유학의 가르침에 따라 그것을 실천하고자 했다. 유학에서는 남자는 하늘이고 기둥이며 세상의 중심이었다. 중심인 하늘이 움직이고 기둥이 이리저리 옮겨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세상의 중심인 아들, 그것도 큰아들에서 큰아들로 이어지는 가계계승이야말로 중요한 것이 되고 법이 되었다. 이제 아들들이 장가가는 것도, 딸들이 친부모의 제사를 받드는 것도 점차 사라져 갔다. 오직 아들만이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
같은 아들이었지만, 아들 노릇을 할 수 없는 아들도 있었다. 서자(庶子)들이 그들이다. 처가 아닌 첩의 몸에서 태어난 자녀들을 서자녀(庶子女)라고 했다. 또 그 가운데서도 종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딸들을 얼자녀(孽子女)라 했다. 이들을 아울러서 신분상으로는 서얼(庶孼)이라 하였다. 이들은 홍길동이 그러했듯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를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서얼의 자손은 서얼의 신분을 계승했다. 양반의 자식이었지만 양반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가정에서나 사회적으로 많은 멸시와 차별을 받았다.
첩의 자식인 서자는 적자보다도 수적으로 더 많았다. 처는 한 명이었지만, 첩은 두세 명인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자들은 대부분 그들의 신분을 꼭꼭 숨기고 살았다. 자신의 출신을 숨기기 위해 멀리 고향을 떠나서 살기도 했다. 세상이 조금씩 변해 가기 시작한 영조와 정조 임금 때에는 서얼들이 집단적으로 상소하여 차별을 없애 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들의 요구는 일부 받아들여져, 서자들도 양반들의 일반적인 호칭인 ‘유학(幼學)’으로 자신의 신분을 표기할 수 있게 되었다. 일부는 벼슬길에도 나아갔다.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하여 이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여 개혁정치의 이론적 학문적 토대를 만들게 하였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차별이 여전하였다. 양반의 이름을 기록하였던 향안에 여전히 이름을 올려주지 않았다. 서원이나 향교를 운영하는 임원으로 뽑아주지도 않았다. 영남이 특히 그러했다. 마침내는 임금의 명령을 어길 수 없어 마지못해 향안 등에 이름을 올려 주었지만, 나이순이 아니라 그 마지막 부분에 서얼만을 몰아서 별도로 적었다. 서얼들이 이에 반발하여 나라에 다시 호소하자 이번에는 아예 향안 자체를 더 이상 작성하지 않았다. 양반들은 굳이 서자와 함께 이름을 함께할 필요가 없었다.
이래저래 적자와 서자는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여러 지역에서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지방의 양반들은 집안이나 고을에서 서얼과 다투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정작 중앙의 노론세력이나 임금의 외척세도가들이 전제권력을 휘두르는데도 제대로 대응 해 보지도 못했다. 조선후기 이후 지방의 양반과 선비들은 그들이 익히고 배운 바를 세상을 위해, 백성을 위해 실천해 볼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 그저 재야의 선비로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의 구성
가족이란 기본적으로는 남편과 아내로 구성된 최소 생활공동체이다. 여기에 부모와 자식, 그리고 방계(傍系) 친인척이라도 일상생활을 함께 한다면 이 또한 가족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가족은 ‘식구(食口)’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가족을 흔히 그 규모에 따라 대가족 혹은 소가족으로 나누기도 하고, 혈연적인 결합 유형에 따라 부부가족, 직계가족, 방계가족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양반들은 대가족을 구성하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양반들의 가옥을 ‘고래 등 같다’는 표현과 함께 한다. 여기서 대가족이란 대체로 부모와 결혼한 아들들이 함께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부모가 두 명의 아들을 두고, 그 아들이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가정하면, 가족의 수는 모두 열 두 명이 된다. 이들이 한 집에서 살기 위해서는 적어도 6개의 방이 필요하다. 사랑방, 안방, 큰 아들, 작은 아들, 그리고 손자들의 방 둘로 계산해 본 것이다. 이 정도의 가족이라면 적어도 광이 달린 1-2칸 규모의 부엌이 있어야 할 것이고, 마구간, 헛간, 안팎의 정낭(화장실)도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종가나 큰집이라면 조상신을 모신 사당도 별도로 갖추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양반들의 일상생활에 손발이 되는 종들 한두 가족의 생활공간도 확보되어야 한다. 이를 대가족의 규모로 본다면 적어도 고래 등 같은 가옥이 아니라면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래 등 같다는 규모는 대략 60, 70여 칸 정도가 될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의 대종가 건물로 추산하거나, 아니면 16, 17세기의 양반 명문가의 가옥 규모가 대략 40, 50여 칸 정도였다는 것에서 근거한 것이다. 칸이란 기둥과 기둥 사이를 말하는 것이니 대략 2.4m 남짓한 길이를 말한다. 따라서 60, 70여 칸이라 하더라도 앞에서 말한 여러 부속 시설을 제하고 나면 온돌이 설치된 거주 공간은 안채(안방과 건너 방)와 사랑채(큰 사랑과 작은 사랑) 합하여 4개의 방에 10칸을 넘어서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60, 70여 간의 호대한 양반가옥에 거주할 수 있는 최대 혈연가족은 부부와 노모, 미혼의 한 두 자녀, 그리고 1쌍의 아들 부부 정도에 불과하였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대부분의 양반집들이 고래 등 같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들의 가족구성이 대가족 제도였다고 말하기 어렵게 한다.
고래 등 같은 양반들의 가옥은 그 규모뿐만 아니라 구조에 있어서도 그들의 유교적인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음이 특징이다. 조선시대는 남녀가 유별한 사회였다. 따라서 집의 구조에서도 남자와 여자의 공간은 분리되어 있었다. 사랑채와 안채가 그것이다. 그리고 사랑채와 안채 가운데에 중문(中門)을 두어 함부로 넘나들지 못하게 하였다. 남녀의 유별뿐만 아니라 상하의 차별도 엄격하게 지켜졌다. 사랑채는 노비들의 거주공간인 대문 좌우의 행랑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와 재질로 높은 축대 위에 대체로 난간을 두르고 있었다. 그래서 양반주인이 난간이나 방에 기대어 앉아서도 마당에 선 종을 눈 아래로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종의 입장에선 주인인 상전은 언제나 우러러 보일 뿐이었다. 지체 높은 양반의 집들은 바로 이렇게 구조화 되어 있었다.
조선후기 영남의 양반들 모두가 이러한 집에서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서 산 것은 명문 양반가의 종손이나 부유한 일부에서나 가능한 것이었고, 대부분의 경우는 그러하지 못하였다. 1905년 경상도 단성현 어느 한 양반마을의 평균적인 가옥규모는 기껏 초가 3-4칸에 불과하였다.
양반들은 부자형제가 함께 사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았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대가족의 핵심은 가정을 이룬 형제가 부모를 모시고 한 집에서 함께 생활하는 것이다. 이 같은 형제동거는 유학의 주요 덕목의 하나인 ‘형제간 우애’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양반들은 형제간의 ‘우애 있는 삶’을 높이 평가했고, 또 그렇게 살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희망과 실제의 삶이 같았던 것은 아니었다.
결혼한 차남 이하는 대부분 분가하여 큰집 주위에서 살았다. 장남은 부모가 살던 집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분가할 이유가 없었다. 장남이 부모의 집을 물려받게 된 것은 물론 조선후기의 이야기이고, 이전에는 주로 사위가 처부모의 집을 물려받았다. 아들이 더 이상 장가를 가지 않고, 장남이 부모의 집을 물려받음으로써 비로소 종가가 생기게 되고, 같은 성씨가 마을을 이루는 동성마을도 생길 수 있게 되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남자 형제들은 대부분 그들이 자란 마을에서 함께 살았다. 매일 부모를 문안하기도 하고, 큰집에서 행해지는 이런저런 일들에도 함께 참여했다. 이런 생활은 형제가 마치 한 집에서 사는 것과 같은 것이었고, 또 그렇게 보여지고 이해되었다. 뿐만 아니라 나라의 호적에도 이렇게 꾸몄다. 이렇게 함으로써 형제간의 우애를 과시할 수도 있었고, 집[호戶] 단위로 부과되는 세금을 줄이는 효과도 가져왔다.
호적은 현재의 상황에서 가족의 규모를 살필 수 있는 유용한 자료이다. 그러나 유용하기는 하지만 호적의 성격에 대해서는 유념해야 할 부분이 많다. 아무튼 호적을 보면 물론 지역에 따라 아주 다른 경우도 있지만, 양반집이라고 하여 특별히 가족 수가 많았던 것은 아니다. 대가족을 구성하고 있는 경우는 10%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만히 그 속을 들여다보면 우선 양반집의 경우는 거의 대부분 딸들이 없다. 그리고 10여 세 미만의 아이들도 별로 없다. 아이들이 없기는 상민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호적이 현실의 가족구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면 양반이나 상민이나 다 마찬가지로 실제 가족구성은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역사란 기록을 아주 중요시 한다. 그러나 그대로 믿기만 하면 스스로 ‘광대’가 되고 말 때가 많다. 오늘날에도 별반 다르지 않다. 진실은 고사하고 사실조차도 제대로 전해주지 않는 많은 신문들은 그저 새로운 ‘소문’만을 양산해 낼뿐이다. “아니면 그만이고!”라는 식으로.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4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