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김치국씨 환장하다>와 <아버지>(글/임지희_안동대 국문과 겸임굣)

연극 속에서 그려지는 인생의 단면은 실제보다 더 실제처럼 느껴진다. 지난 5월 26일 안동문화예술의 전당 백조홀에서 공연된 <김치국씨 환장하다>는 주인공 김치국의 삶을 통하여 통일의 문제를 다룬 연극이었다. 또한 6월 1일 안동문화예술의전당 웅부홀에서 공연된 <아버지>는 재민의 삶을 통하여 ‘가장’이라는 무거운 짐을 어깨에 메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남북문제에 대한 풍자와 상징 <김치국씨 환장하다>
김치국은 6.25전쟁 직후 삼팔선을 넘어와 온갖 고생을 하며 김밥장사를 하여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어느 날 김치국은 자신이 18억이라는 돈을 적십자사에 기증했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당황해 한다. 이때 느닷없이 방송국 리포터와 카메라맨이 집에 찾아오고 김치국을 우상으로 선전하기 바쁘다. 김치국은 자신이 기부한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텔레비전에 나와 인터뷰를 하는 인물이 자신과 매우 흡사하다. 김치국은 자신의 통장을 빼돌려 적십자에 기부한 인물이 자신의 쌍둥이 형 김평천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한편 정치권과 수사기관에서는 이미 영웅이 되어버린 김치국을 국민의 영웅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려는 남파공작원이라고 몰아세운다. 김치국은 자신이 기부한 것이 아니라 쌍둥이 형의 저지른 일이라고 항변하지만 수사관은 이를 믿지 못하게 된다. 김치국과 형인 김평천의 대질심문이 이루어지고 이 둘은 서로 자신이 김치국이라고 주장한다. 너무나 똑같이 생긴 쌍둥이여서 김치국의 아내도 자신의 남편을 가려내지 못 한다. 김치국과 김평천의 실랑이가 벌어지고 시청률을 의식한 방송국에 의해 사건은 점입가경을 치닫게 되고 김치국이 그야말로 환장하는 순간 그는 잠에서 깨어나게 된다.


이 작품이 통일에 대하여 집약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장면은 김치국이 기부를 한 후(정확히는 쌍둥이 형인 김평천이지만)에 방송된 인터뷰와 요리프로그램이다. 특히 통일을 이야기하는 인터뷰와 김치국의 김밥 맛있게 만드는 비법 장면은 미리 찍어둔 영상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 영상으로 처리된 장면은 관객들에게 ‘거리두기’효과를 줄 수 있다. 관객들은 연극이 진행될수록 김치국이 겪는 사건 속으로 빠져들어 김치국과 감정의 동일화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 영상으로 처리된 장면은 관객들에게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제공한다. 이 장면에서 관객들은 ‘왜 갑자기 영상이 나오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며 연극에 이입되었던 감정이 빠져나오게 된다. 감성보다는 이성적으로 연극을 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 영상장면은 이러한 거리두기를 통하여 이성적으로 통일에 대해 생각하는 장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인터뷰 장면에서 “나 김치국 노랭이다 뭐다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랬다고 내 돈으로 북한동포 몇 명이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니갔소?”라는 대사에서 나눔이라는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김밥 맛있게 만드는 비법에 출연한 김치국은 “붉은 색이 퍼진다고 소시지 빼버리고 신맛 퍼진다고 단무지 빼버리고 푸른색 퍼진다고 시금치 빼버리고 나면 그것이 어디 김밥입니까?”라고 이야기하면서 이질적인 요소들이 모여 조화를 이루어 맛있는 김밥이 되는 김밥통일을 설파한다. 이 장면에서는 분단을 뛰어넘어 화해와 통일로 나아가자는 주제의식을 찾을 수 있다.
북한에 대한 나눔과 화해는 정치적 이데올로기 아래에서 제약을 받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이 영상장면을 보면서 북한에 대한 모든 통로가 막혀버린 지금의 정치적 현실에 대한 답답함이 밀려온다. 분단의 아픔을 넘어 언제쯤 화해를 통한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모든 것을 제쳐두고라도 이산가족의 문제는 해결되었으면 좋겠다. 가족과의 이별이 그리움의 눈물이 되어 가슴에 강이 되어 흐르는 고통을 우리는 함께 고민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영상장면을 보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이다.


이 연극은 쌍둥이 형제를 상징화하고 있다. 형인 김평천은 북한을, 동생인 김치국은 남한을 상징화하고 있는데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을 때 서로 자신이 김치국이라면서 형제간의 싸움이 일어난다. 이 두 형제의 싸움 장면에서 우리 민족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씁쓸했다. 이 연극은 이 형제의 싸움을 화해로 결말짓지 않는다. 두 형제의 싸움장면이 절정에 달할 때 김치국이 꿈에서 깨어나고 결국 이제까지 모든 것들이 꿈이었다는 해프닝으로 연극의 막이 내린다. 이러한 결말은 남북문제가 해결되기 힘든 현실상황을 상징화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인물이 가지는 결함의 문제와 결말을 연결 지을 수 있다. 김평천이 적십자에 기부한 돈은 동생의 통장에서 몰래 인출한 돈이고 형은 어릴 때부터 동생을 끊임없이 괴롭힌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므로 형 김평천이 기부한 돈은 도덕적인 문제가 있는 돈이다. 형 김평천이 방송에서 자신이 김치국이라고 주장하지만 막상 김치국이라는 인물은 통일에 대해 아무런 의식이 없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이 두 인물의 결함은 두 인물이 화해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게 되고, 연극은 화해의 답안을 제시하지 못한 체 꿈이라는 결말구조에 기대고 말았다.




현대인의 허무의식의 형상화 <아버지>
장재민은 평생 영업사원으로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가는 인물이다. 재민에게는 자신을 늘 믿고 따르는 아내 선희와 고교시절 축구 유망주였지만 서른이 넘도록 변변한 직업이 없는 아들 동욱, 계약직 신세를 면치 못한 딸 동숙이 있다. 재민은 한평생 세일즈맨이란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 왔지만 이제는 늙어 노쇠해진 몸 때문에 일하는 것이 힘들기만 하다. 재민과 아들과의 갈등을 깊어만 가고, 재민은 자신의 힘든 처지를 과거를 회상하면서 달랠 뿐이다. 어느 날 재민은 사장을 만나 지방근무에서 벗어나 본사에서 일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사장은 도리어 일을 그만 두라고 한다. 자신의 삶이 허무하게 느껴지기만 한 재민은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이 작품은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을 한국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아버지>와 <세일즈맨의 죽음>은 주제적인 측면에서 차이가 나지 않는다. <세일즈맨의 죽음>이 담고 있는 한 가족의 가장이라고 할 수 있는 ‘아버지’의 애환을 연극 <아버지>에서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인물들의 이름이 한국적으로 바뀌었으나 작품의 줄거리나 플롯은 거의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세일즈맨의 죽음>에서는 아버지인 윌리가 자신의 고뇌와 회환을 달래기 위해 과거를 자주 회상하는 장면이 있다. 자녀들과 즐거웠던 시절을 담아낸 과거의 회상장면은 현재 무능력해진 아버지의 모습과 대비되어 아버지를 더욱 더 절망적으로 느끼게 되고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세일즈맨의 죽음>에서의 현재와 과거의 잦은 교차장면을 <아버지> 공연에서도 그대로 사용하여 아버지의 몰락을 그려내고 있다.
또한 관객들은 이 회상 장면을 통하여 많은 정보를 얻게 된다. 아버지는 아들의 장래에 많은 기대를 갖고 있었다는 것, 아들과 아버지의 갈등은 아들이 아버지의 외도 장면을 목격하면서 비롯되었다는 것, 아버지의 형이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외국으로 가자고 해도 아버지는 단란한 가정을 지키기 위해 그 제안을 거절했다는 것 등이다.
외도 장면의 목격에서 비롯된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은 해소되지 않는다. 그것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있다. 서로의 처지와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소통의 부재는 갈등의 골을 깊게 할 뿐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커지는 아들과의 갈등과 영업 실적의 부진은 아버지를 ‘과거 회상’과 ‘환상’이라는 자신만의 세계에 가두게 된다.


아버지는 지방 영업에서 본사 영업으로 옮겨 달라고 사장에게 부탁하면서 사장의 아버지가 자신의 친구라는 점과 사장의 이름을 자신이 지어 주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것은 아버지가 가지는 온정주의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온정주의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사장은 새로 나온 최신 노트북을 보여주면서 이 제안을 거절한다. 영업 실적도 올리지 못하고 첨단 기계 하나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 아버지세대는 사장이 볼 때는 무용지물이다. 우리는 주인공 아버지를 통해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에서 기계화되어 버린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인간 소외의 모습을 한층 더 부각시키는 것이 ‘며루치는 국물만 내고 끝장이다.’라는 시이다. 이 시는 원작에는 없으나 <아버지>공연에서는 이 시를 삽입하여 주인공인 아버지가 낭송하게 연출되었다. 이 시의 비유적 표현은, 능력이 없으면 버려지는 소모품 같은 현대인의 허무함을 나타낸다. 이 시를 아버지가 낭송할 때 현대인의 비극적 현실이 더 강하게 다가온다. 이러한 허무의식이 아버지의 죽음과 연결되어 그 죽음이 더욱 처절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아버지>공연은 <세일즈맨의 죽음>을 한국적으로 많은 각색을 한 것은 아니다. <아버지>공연을 보는 내내 <세일즈맨의 죽음>을 보는 것과 거의 같은 느낌이었다. 1953년 미국에서 초연된 <세일즈맨의 죽음>이 재탄생되어 현재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공연되어 아직도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원작의 탁월함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 아버지는 가족을 사랑하는 평범한 가장이다. 주인공 아버지의 ‘행복했던 과거를 동경하면서 그 과거 속에서 행복할 수 있는 감정’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있을 수 있는 ‘인간 본능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가 겪는 내적 갈등도 지금의 현대인들도 충분히 공감하는 갈등이다. 어쩌면 우리도 주인공 아버지처럼 물질만능주의의 희생물일지 모른다. 이러한 ‘공감’의 코드와 현재와 과거 그리고 환상의 장면으로 자유자재로 옮겨갈 수 있는 기법 등의 드라마투르기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지금 이 시점에서도 감동의 연극으로 공연된다고 할 수 있다.


글을 마무리하며
극단 광장의 <김치국씨 환장하다>는 <아버지>공연에 비해 연출력과 배우의 연기 등 미흡한 면이 많은 공연이었다. 배우가 공연 도중 대사를 잊어버리기도 하고 주인공이 쓴 가발이 무척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또한 배우들의 동선도 매끄럽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이러한 공연에서의 결함은 극단 광장이 앞으로 연습과 공연을 통하여 발전시켜 나갈 부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단 광장의 <김치국씨 환장하다>의 공연과 <아버지>공연을 단지 공연 그 자체로 비교할 수는 없다. 극단 광장의 공연과 <아버지>공연은 환경자체가 다른 공연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이순재, 전무송이라는 스타급 배우를 주인공으로 더블 캐스팅하고 김명곤이라는 프로급 연출가가 연출을 한 작품이다. 또한 전문기획사를 통하여 홍보를 한 작품이다.


<아버지>라는 작품의 공연은 중소도시에 사는 안동사람들에게는 잘 만들어진 연극을 볼 수 있는 선물을 선사했지만 이 공연 뒤에 있는 자본주의의 논리를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극단 광장의 공연은 취미와 열정으로 뭉쳐서 프로를 지향하지만, 아직은 아마추어적인 성격을 지닌 지역극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극단 광장을 높이 평가할 면은 열악한 연극 환경에도 불구하고 꽤 오랫동안 활동을 하며 안동지역 극단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요즘 안동에서는 뮤지컬, 판소리극 같이 연극과 다른 장르가 결합된 공연을 많이 한다. 이러한 공연 속에서 순수연극을 추구하며 꾸준히 연극적 기반을 쌓아나가는 것은 극단 광장이 가지는 저력이라고 할 수 있다. 안동에서 주최가 되어 만들어내는 뮤지컬에서도 안동의 아마추어 배우를 출연시킨다. 하지만 뮤지컬에서 대사하나 없이 하는 퍼포먼스보다는 순수연극에서 대사와 행동의 배우가 하는 연극적 경험은 분명히 다르다. 지역극단은 그 지역의 문화적 자산이다. 극단 광장이 앞으로도 좋은 공연으로 많은 관객들과 만날 것이리라 기대한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긴 장마 끝에 햇살은 반갑고 아름다운 법이다. 지루한 장마가 끝나고 빛나는 햇살처럼 연극은 우리에게 햇살 같은 존재 그것일 것이다.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46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