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인 이철진이 꿈꾸는 하늘(글/이희수_프리랜서 작가)
대구가 고향인 이 경상도 남자는 7남매의 막내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극의 길을 택했다. 중년인 지금도, 부모님벌인 큰 형님과 누님 그리고 나머지 누나, 형들에겐 아직도 신경 쓰이는 ‘막둥이’란다. 그는 만 시간의 법칙을 적용받은 행운아다. 흔히 어떠한 일에 전문가가 되기 위한 시간을 하루 3시간씩 10년간 적용했을 때 일만 시간이라는 단순한 통계적 수치에 따른다면 말이다.
사실 안동에서 연극을 ‘제대로’ 한다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요샛말인 돌직구로 얘기하자면 ‘먹고 살기 힘들어서’다. 다른 직업 없이 연극만 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일까.
한데 대구에서 나름 연극배우로서 꾸준한 길을 가고 있던 한 연극인이 얼마 전 안동으로 왔다. 문화콘텐츠다 뭐다 해서 문화산업이 부흥하고 있다지만 안동에서 여전히 연극이라는 정통 공연은 찬밥 취급이기 때문에 그의 행로에 대해 다소 궁금증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안동은 연극산업과 관련된 기반이 아직은 척박하기 때문이다. 상연하는 공연의 표를 구매해서 보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 초대권 없냐는 질문을 되레 받는 것을 보자면, 사람들은 지방에서 하는 공연과 서울에서 하는 공연에 문화적 차별을 스스로 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만큼 소공연 문화에 대한 혜택과 배려의 기회가 적었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더운 날씨 가운데 소낙비가 내릴 것처럼 하늘이 울상이었다. 우산의 매듭을 풀고 비가 오면 재빨리 써야지 하며 그와 약속한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베레모를 쓴 한 남자가 곁을 지났다. 작은 키와 굳게 맺은 입매, 깊은 주름마다 사연을 각인해 놓은 듯한 아우라는, 순간 그가 ‘오늘 만날 사람이구나’ 라고 짐작케 했다.
작은 연극인, 이철진. 연극을 하기 위해 안동으로 오게 된 그의 여정에 잠시나마 동무가 되었다.
연극인, 이철진
서울예전(현 서울예술대학) 연극과를 졸업한 그가 고향인 대구에서 오랜 시간 연극 인생을 다지고 있었기에 사실 안동이라는, 연극과 같은 소공연 문화의 불모지와 다름없는 이곳과의 인연이 생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세한 곡절을 얘기하지는 않았어도 오로지 연극으로만 점철되었을, 그의 삶에 대한 몇 마디에서 주린 배를 안고도 연극인으로서 끈을 놓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온 집안 식구들이 대구를 떠나 서울로 이사를 오면서 이철진 씨는 건강이 좋지 않아 한 동안 요양을 하고 군대를 늦게 다녀올 수밖에 없었다. 방위라는 완장을 차고 다니던 방위시절에 연극과 관련된 고참을 통해 연극구경을 다니며 자연스레 연극을 접하게 된 그는 ‘내가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가졌다. 비록 또래보다 늦은 나이였지만, 늦깍이 대학생이 되어 연극과를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방송, 연예, 공연 계통에서 유수의 연기자들을 배출해낸 서울예전 연극과는 전국에서 날고 기는 학생들로 복작였다. 막상 들어가고 보니 그 기에 눌리고 말았다고 한다.
얼마 전 서울을 방문했을 때 그는 연극과 후배인 배우 손병호 씨를 만났다. 안동으로 적을 옮겼다는 이런저런 근황을 나누면서 안동에 고모며 이모며 친척들이 많다는 손병호 씨의 고향이 다름아닌 안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얼마 전 본지에서도 인터뷰를 했던 인연이 있었던 지라 연극과 선후배가 나란히 안동지에 실리게 된 것도 보통의 인연은 아닌 것 같다.
기타도 곧잘 치고 노래도 부르고 미술에도 소질이 많았던 그에게 연극은 그가 좋아하는 종합예술을 펼칠 수 있는, 그만의 아지트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극을 좋아하고, 하고 싶었을 뿐 제대로 된 기량을 닦을 기회가 없었던 탓일까. 1983년 졸업 후 서울에서 4년이라는 시간을, 그는 ‘방황기’라고 정의 내렸다. 연극에 대한 목마름과 생계의 배고픔 사이에서 그는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다. 1987년 즘, 그는 무작정 고향인 대구로 내려가 1년간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단다.
모든 것을 내려놓았기에 원하던 것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일까. 여전히 연극에 대한 정을 붙이고 있었기에 대구로 내려온 그는 불과 1년도 채 안되어 결국 사고를 치고 만다. 연극을 하고 싶다고 마음먹은 지 거진 10년이 다되어서야, 연극인 이철진으로서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대구에 연고도 별반 없는 후배들이 잔뜩 모여 별칭 외인부대라 부르며 극단을 만들게 되었다.
첫 번째 창단 극단인 한사랑 극단은 시대와 역사문제, 도시빈민, 국가보안법등을 다룬 연극 <단발령> <비풍초똥팔삶> <벽> 등을 선보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을 꼽아달라는 요청에 선뜻 <벽>을 얘기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첫 창단 극단에서 배우로서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 것이 가장 기억에 남았나 보다. 오로지 같은 뜻으로 모인 연극인들의 작은 극단이 하나의 이름으로 오래 지속되기란 쉽지 않은 법이었다.
한사랑에 이어 극단 시월과 한사랑의 통합 극단인 가인을 창단하면서 후배, 동료들과 다시 한 번 뭉치면서 연극의 길을 이어갔다. 창작극이 가진 자부심도 대단했지만 바로 우리가 사는 이곳의 문제들을 들추어 낸 작품들이 많아 많은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배우도 그렇거니와 연출진이나 스태프를 막론하고 연극이라는 부제 아래서는 다들 ‘하나의 일에 미친’ 혹은 ‘괴짜’와 같은 아집을 가진 범상치 않은 사람들로 보이는 작은 선입견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그들을 둘러싼 미스터리한 ‘무언가’로 보이기도 하고 알게 모르게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카리스마’로 여겨지기도 한다. 다시 한번 새로운 도전에 꿈을 꾸던 몇몇의 동료들과 뭉쳐 극단을 열게 된 것이 바로 지금의 ‘꿈꾸는 하늘’이다. 아마도 그 즈음이 2007년 6월 <심연> 의 공연으로 시작하게 된다.
“오케이, 오케이! 통과, 통과!”
한 번도 그냥 넘어간 적이 없었다. 극단 내에서의 극단이 지향하는 모토란 곧 연극의 성격을 얘기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다양하고도 뚜렷한 성격을 가진 연극인들 사이에서 방향을 하나로 맞추기란 쉽지 않았을 터, 추측컨대 매번의 연극마다 많은 설전을 벌이지 않았을까도 싶다.
꿈꾸는 하늘의 극단 대표이자, 배우, 연출자, 극작가이기도 한 이철진 씨는 이제는 사소한 결정사항에 대해서는 무조건 ‘오케이, 오케이~’, ‘통과, 통과~’ 란다.
간판 좋다고 장사 잘되는 거 아니라며 우스갯소리인 양 넘겼지만 그 말 속에도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그의 세월이 느껴졌다. 살짜기 지친감도 들었지만 오랜 시간 극단을 이끌어오며 짚어왔던 많은 일들이 정작 연극을 하는데 있어서 그닥 중요한 것들이 아니었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연극을 하는 것이다. 어쩌면 사소한 결정들의 연속도 연극을 하고 있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오랫동안의 생활고가 그를 평탄한 길로만 이끌었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스스로도 얘기한다. 행복하다고. 나는 연극을 사랑한고. 사랑하니까 하는 것이라고.
이철진은 대중적이지 않다?
몇 년 동안 빚을 많이 졌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연극과 관계된 끊을 놓지 않고자 생업이 있어야만 했다. 아이러니하지만 연극을 계속하기 위한 다른 생계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 우리나라 예술계의 안타까운 현실이면서 또한 일반화된 얘기이기도 하다.
이철진 또한 그러했다. 연극 문턱이 닳아라, 드나들었지만 청년에서 중년이 되어가는 그는 평범한 직업하나 변변하게 경력을 쌓지 못했던 터라 맞아주는 데도 흔치 않았다. 철공소며 공장이며 영업까지. 안 해 본 일이 없다며 넉살스레 웃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진정으로 연극을 하자면 외려, 다른 것들을 그만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트레스도 많았지만 연극을 계속하기 위해 돈을 벌자고 한 일들이 오히려 연극에 매진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연극과 하나, 관련 없던 생계를 위한 직업만 가졌던 그가 2년 전 왕의 나라 첫 회 공연의 연기 지도강사를 맡게 된다. 그때는 안동에 적을 둘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무대에 서는 것이 아닌 연극과 관련된 일을 통한 수입원이 있었다는 것에 뿌듯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안동에서 알게 된 지인들과 선후배들이 안동에서 함께 연극을 해보자며 심한 콧바람을 불어 넣게 된다. 급기야 지난해 10월 무렵 그는 터닝 포인트를 만든다. 안동으로 이사를 오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대구의 집을 내 놓고는 그 동안 지고 있던 빚을 다 갚고 안동에 오면서, 혼자 살만한 작은 집에 세를 얻었다. 마음이 편했고 사는 것도 외려 넉넉해졌다. 올해 봄에 들어서는 경북문화콘텐츠진흥원의 1인 창조기업으로 선발되어 입주를 했다. 극단 꿈꾸는 하늘에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입주하고 머지않아 모노드라마인 <붕타우의 자전거>를 지난 6월 안동문화예술의전당 백조홀에서 공연하게 되었다. 극단 꿈꾸는 하늘의 5번째 정기공연이었다. 비록 사비로 모든 준비를 했기에 적자를 면하지 못했지만 그나마 주변에서 도와준 많은 후원업체와 지인들에 대한 깊은 감사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언젠가, 그들에게 보답해 줄 거라며 머릿속의 리스트를 하나 둘씩 되새기고 있었다.
<붕타우의 자전거>는 다소 대중적이지 못하다는 평을 받았다. 사람들이 불편한 연극을 싫어하고 불친절한 작가와 연출자에 대해 냉소적이라는 것은 연극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원하는 입맛에 맞는 연극이 아니라는 것일 뿐이다. 그저 남들처럼 조미료를 치지 않은 것일 뿐.
지역문화를 적절히 가미해 영악하게 만들 수도 있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단숨에 “영악하게 연극하는 게 싫다, 나는 영악하게 연극을 하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많은 값어치를 가진 미술작품들 중에는 당대에 인정받지 못하고 작가가 작고한 후 시대를 거치면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된 것들이 많다. 연극이라는 예술세계도 그런 것 같다. 지금은 대중적이지 못하다고 외면당할 수 있어도 언젠가 그 작품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시대와 사람들을 만난다면, 그 때는 감히 대중적이라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사실 올해 공연한 5회 정기공연인 <붕타우의 자전거>는 그가 배우로서 무대에 서기를 오래 전부터 꿈꾸었던 작품이었단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체력이며 능력들이 자꾸자꾸 무디어져서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안동에서 연을 맺은 서동석 씨에게 맡겼다. 극단의 경제적, 인적인 한계가 드러나는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1,2인 극 이상의 공연을 진행할 수 없었던 까닭에 또 어렵사리 준비한 <눈물>에 이은 두 번째의 1인극이란다. 주변의 좋은 의견도 참고하고 꼼꼼한 수정를 거쳐 극단의 레퍼토리로 만들 계획이라며 정말로 잘 만들어지면 대학로에서의 공연도 생각중이란다.
사실, 여러모로 안동에서의 배우 자원에 대한 한계라든가 공연에 대한 인식문화가 아직은 턱 없이 부족하다. 그가 안동에 오면서 가장 고민했던 부분이다. 하지만 그는 연극을 해 오면서 단 한 번도 도전을 받지 않았던 적이 없단다. 안동으로 오게 된 지금도 또한 ‘또 다른 도전’ 과제를 수행중인 것이다. 오로지 내가 좋아하는 연극을 위해.
꿈꾸는 하늘을 창단하고부터는 3번의 정기공연의 희곡을 직접 썼다. 배우로서의 욕심을 조금 더 보태, 연극인으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자 연출에 대한 준비도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가 걸어온 길이 비단길이 아니었던 터라, 그에게는 스스로 연출하고 극본 쓰고 작곡하고 연기하고 노래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주어졌다. 그래서 그에게는 ‘연극인’이라는 말이 맞춤하게 어울리는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 사이에서는 이철진 씨를 독고다이로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그는 그런 이야기에 대한 크게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예술하는사람에게 ‘아집’은 곤란하지만 ‘고집’은 필요하다는 것.
후배들이 열정적인 모습으로 무대에 서는 모습을 보면 너무나도 보기 좋고 내가 저기 서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가진단다. 그는 매일 같인 경북문화콘텐츠진흥원 사무실에 출근해서, 계속해서 공부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 책도 보고 연구를 한다. 뒤처지면 연극도 없다.
벌써 연말 공연할 작품을 위해 이미 구상을 마치고 있었다. 이번에도 지인들의 도움이 절실하다지만 지역에서도 관심을 갖고 이러한 작은 소공연에도 투자가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도 내심 놓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내년 즘엔 그도 지원금을 받기 위해 보다 바빠지지 않을까 싶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고, 사람들은 얘기한다. 이철진 씨 역시, 연극인으로서의 길을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걸어오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장 크게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가끔은 힘들고 지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 일을 하는 이유를 묻는 필자의 우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연극을 하는 내 모습이 좋고 연극도 좋다. 나는 연극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