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효당과 서애 류성룡 선생의 말씀이 들립니까?(글/사진/정연상_안동대 건축공학과 교수)

충효당과 서애 류성룡 선생의 진정한 가치는?
안동 하회마을과 나의 인연은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다. 건축역사를 공부하면서 전통건축물뿐만 아니라 하회마을의 양진당과 충효당의 종부와 종손, 그리고 하회마을 사람들과 그들의 삶을 조금씩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충효당과의 인연은 양진당처럼 신영훈 선생님 옆에서 귀동냥으로 공부하면서 시작되었다. 하회마을 입구의 심원정사를 지으면서, 하회마을 건축순례를 하면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자료를 조사하면서, 최근 안동에서 살면서 하회마을을 자주 방문하면서 그간 몰랐던 하회마을과 종택, 충효당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하회마을 충효당의 가치가 높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하회마을과 충효당은 건축물로서 건축사적 가치가 높지만 더욱 높은 것은 인물로서 인문사적 가치가 더 높다. 우리는 안동을 정신문화의 수도라고 한다. 그 정신문화의 중심에 충효당 서애 류성룡 선생이 있다. 사람들은 서애 류성룡 선생을 임진왜란의 제일 공신이라 한다.


장구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우리나라는 외부의 위협과 국난의 위기를 겪으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애국애족의 정신으로 많은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을 희생하였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대표적인 국난은 임진왜란과 일제침략이다. 이 두 시기에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면서 국난 극복에 온몸을 받쳤다. 특히 경상북도 안동지역은 이와 관련된 인물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월등히 많으며, 그 중에서도 임진왜란과 관련된 인물로는 서애 류성룡 선생이 대표적이다.




충효당의 서애 류성룡 선생은 안동지역의 인물인 동시에 한국의 인물이이다. 서애 선생은 애국애족의 호국 정신, 사상 · 학문적으로 큰 발자취를 남긴 분으로 국가관이 필요한 오늘날 우리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서애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후손들과 후학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여 독립운동사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임진왜란 중에 관료로서 병조판서 · 도체찰사 · 영의정을 역임하였고, 명장인 이순신 · 권율 장군 등을 적극 천거하여 난세 극복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서애 선생은 파직된 학봉 김성일을 적극 변호하여 재기할 기회를 제공하여 국난을 극복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충효당은 일반적인 종택이 아니라 국난 극복의 중심인물인 서애 류성룡 선생의 숭고한 구국 정신과 행적을 통해 역사적 교훈을 피부로 체험하고 그의 정신을 계승할 수 있는 역사 체험 공간이다. 그리고 충효당은 서애 류성룡을 통해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국가적 정체성 및 국가관을 확립할 수 있는 공간이며, 오늘날 젊은 세대와 미래의 젊은 세대들이 애국애족의 구국 정신을 함양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따라서 하회마을의 충효당과 서애 류성룡 선생은 경상북도와 안동시가 신도청 시대를 열면서 전통 역사문화유산이 살아 있는 역사문화도시로서, 애국 애족의 구국 정신이 살아 있는 정신문화도시로서 차별화를 위한 시작점을 두어야 할 대상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와 같은 가치를 인정하여 충효당을 지속적으로 찾았고, 하회마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된 이후 더 많은 관광객들이 충효당을 방문하여 서애 류성룡 선생의 정신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있다. 이와 같은 가치를 인정한 영국 여왕도 하회마을과 충효당을 방문했다. 이후 일부 관광객은 여왕이 왔다 간 곳이라 해서 맹목적으로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지만 서애 류성룡 선생의 행적을 담고 있는 충효당을 보기 위해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올 초에 나는 터키 친구와 충효당을 방문한 적이 이었다. 늘 그래왔듯이 종손과 종부님은 서울에서 우리를 반겨 주었다. 종손은 예전에 신영훈 선생님과 김대벽 선생님을 따라 처음 뵈었을 때와 같이 종가를 이끌어온 엄격함과 타고난 성품의 자상함이 함양된 인격과 조화되면서 장중한 풍채가 우러나오고 있었다.




종가의 종손과 종부는 수없이 많은 내방객을 맞이했고, 맞이할 것이다. 현 종손은 한국 남성의 대표로 방문객을 만나는 것이다. 유구한 역사가 배어 있는 충효당 종손의 긍지가 그들을 감동시킨다. 충효당과 서애 류성룡 선생은 현 종손의 후광이 되지만 방문객들은 이를 통해 친견한 즐거움을 품고 충효당을 찾아보고 떠난다.
나와 터키 친구는 마루에 올라 종손과 맞절로 수인사를 했다. 종손은 늘 한복을 입고 사셔서인지 맞절하고 앉은 모습이 익숙하고 자연스러웠다. 충효당을 거쳐 간 종손들의 숨결이 살아 있는 대청과 대청 주변 나뭇결은 한복을 입은 종손과 종부님의 자태와 너무 잘 어울린다. 양복을 입은 우리는 주변 환경과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다. 나는 언젠 가는 한복을 입고 일상을 즐기고 싶었는데, 아직도 나는 행동으로 옮기지도 못하고 있다. 지금도 나는 고택을 방문하여 대청과 방에 앉으면 한복을 입지 못한 것을 후회하곤 한다.




하회마을 충효당의 건축 공간 엿보기
충효당은 담장과 중심 안길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하고 있으며, 서애 류성룡의 파종가다. 서애 선생은 조선 중기 임진왜란 당시 국가 최고의 관직을 맡으면서 국난을 이겨낸 훌륭한 정치가이자 학자이다. 지금의 충효당 건물은 서애 선생 사후에 지은 것이다. 서애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유덕을 기리는 수많은 유림들의 도움을 받아 서애 선생의 맏손자 류원지(柳元之, 1598-1674)가 ‘ㅁ’자형 안채를 지었고, 서애 선생을 위한 사당을 지었다고 한다. 그의 아들 류의하(柳宜河, 1616-1689)가 사랑채인 충효당을 지어 확장했다. 대문간 채는 서애 선생의 8대손인 류상조(柳相祚, 1763-1838) 때 지었다. 따라서 서애 선생은 나라를 위한 일에 신명을 바쳤지만 재물을 모으는데 능력이 없었나 보다.


서애 선생의 성품은 사랑채 당호인 ‘충효당忠孝堂’의 의미를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류성룡은 임종할 무렵에 자손들이 꼭 지킬 것으로 ‘충과 효 외에 달리 할 일은 없느니라(忠孝之外無事業)’를 남겨 후손들은 이를 당호로 삼았다. 그리고 사랑채에는 미수 선생이 위대한 선배를 추모하기 위해 ‘충효당’이라는 편액을 써서 걸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늘날의 모습을 보고 그 집의 구조를 논하고, 집의 의미 등을 설명하려 한다. 충효당과 같이 여러 대를 거치면서 조금씩 만들어진 경우도 적지 않으며, 살림집뿐만 아니라 궁궐이나 사찰도 같다. 충효당의 안채 정리나 사랑채 신작은 창건주의 의지에 따른 포치라기보다 누대를 두고 이룩한 것으로 당대의 식견을 따라 터를 잡고 축조한 결과일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한 집안의 종택은 그 집안의 역사다.


충효당은 집 뒤에 있는 화산을 주산으로, 앞으로 보이는 원지산을 안대로 해서 서향을 하고 있다. 충효당은 ‘ㅁ’자형 안채를 중심으로 안채 남측 모서리쪽으로 사랑채가 연결되어 있고, 사랑채와 안채 전면으로 행랑채와 솟을대문이 일렬로 연결되어 있다. 사당은 안채의 남동측에 있다. 그리고 사당 동남측에 전시관 영모각永慕閣 이 있다. 영모각은 서애 선생의 유품을 보관하고 전시하고 있다. 영모각은 1976년 6월 개관하였으며, 한옥 모양을 한 콘크리트 구조 건물이다.




충효당의 주 출입은 사랑채 전면의 솟을 대문으로 하며, 안채로의 출입은 북측 중심안길에 면한 대문을 이용한다. 토석담장은 사랑채 남측 끝에서 시작하여 안채, 사당, 전시관을 감싸고 있다. 사당은 별도의 담장을 두르고 있고 남서측 전면에 삼문을 만들어 출입하도록 했다. 동측 담과 사당 담장, 사당 담장과 안채, 안채와 북측 담, 안채와 행랑채 사이에 담장을 쌓아 충효당 내 외부 공간을 네 공간으로 구획하고 있다.


충효당 안채는 중앙에 안마당이 있는 ‘ㅁ’자형 평면구조를 하고 있으며, 동측면에는 우측부터 부엌, 안방과 대청, 건넌방이 있고, 서측에는 찬방과 곳간이 있는데, 부엌과 찬방 일부 상부에 다락을 꾸며 놓았다. 다락은 툇마루에서 오르내리도록 되어 있다. 안방 맞은편에는 중행랑채가 있는데, 중문과 곳간이 있다. 서측에는 방 2간이 있고, 사랑채와 연결부분에는 사랑채 후면으로 출입할 수 있는 대문이 있다. 대청의 기둥이 훤칠한 키를 자랑하고 있기 때문에 간살이가 좁은데 비하면 기둥은 매우 높다. 이런 모습을 마당에서 보면 종가의 위엄이 묻어난다. 안채는 전면 툇간 뒷열에 안방과 대청이 있으며, 대청은 전면으로 열려 있고 후면에 판문을 달아 닫혀 있다.


툇마루 끝에는 영국여왕이 왔다간 흔적으로 ‘영국 여왕표’ 쪽마루가 있다. 대청은 제법 넓어 대소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제사를 지내던 장소였다. 판문 너머 뒤뜰에는 화산의 정기기 흘러 맺힌 나지막한 봉우리가 있으며, 종가에서 엄격히 관리하고 있다. 종손은 대청에 앉아 화산의 정기를 완상한다. 대청은 우물마루구조로 길고 짧은 제목으로 오묘하게 교차시켜가며 조립한 그 기능과 재치에 묻어 있다. 대청에 면한 건넌방에는 노종부가 과거에 사용했다고 한다.




사랑채는 겹집 평면을 하고 있다. 평면은 사랑채 대청을 중심으로 큰사랑방이 북측의  안채와 연결되어 있으며, 방이 두 줄로 배열되어 있다. 전면의 방은 통간구조이며, 후면의 방은 두간으로 나뉘어 있는데, 전면 통간은 손님을 만날 때 사용하고, 후면 방은 주생활 용품을 넣어 두거나 물건을 준비할 때 사용한다. 이와 같은 겹집 구조는 산 곡간 집의 폐쇄적인 특색을 보여준다. 하회마을에는 홑집형태의 개방성을 보이는 집들도 있다.


사랑채의 대청도 전면 앞퇴의 기둥간살이가 활짝 열려 있고, 후면에는 판문을 달아 막아 놓았다. 큰사랑방 맞은편 작은사랑방은 단간이고 전면과 측면에 툇마루를 꾸미고 판문과 마루 끝에 난간을 둘렀다. 작은사랑방 젊은 사람들이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마련된 시설이다. 많은 방문객이 번성한 집에서 웃어른들의 출입에 일일이 참견하긴 어렵다. 특히 빤히 보면서 버티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슬쩍 가리 수 있게 하였다. 충효당은 서향을 하고 있기 때문에 겨울날 서북풍이 강바람을 타고 밀려온다. 강바람을 타고 들어오는 겨울바람은 몹시 매섭다. 이때 판벽은 매서운 겨울바람을 막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당은 사랑채 동측에 있는데, 사당만 남향을 하고 있다. 이는 양진당과 같이 마늘봉을 향한 것으로, 엄격한 종법질서와 풍수에 대한 관념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담장으로 둘러싸인 사당은 통간으로 배면에 위폐를 모셔 놓은 감실들 있다.


충효당은 양진당과 마찬가지로 집의 규모가 크고, 가구에는 드물게 장식된 부재가 사용되어 건축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니는 집이다. 유구한 역사가 배어 있는 충효당은 폐쇄성향과 개방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데 여러 대를 두고 이룩한 이들의 식견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어떤 모습을 여러분은 집이라고 합니까?
최근에 나는 시내에서 충효당 종손과 아들을 만난 적이 있다. 현재 종손은 학부시절 신영훈 선생님과 함께 만났던 종손의 모습이 세월 앞에 연로하신 모습으로 변하여 사라졌지만 종손의 곧은 모습은 예전이나 변한 것이 없다. 그리고 그동안 근황을 여쭈었던 적이 있었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전통가옥에 사는 일이 매우 불편하고 힘들다고 했다. 전통적인 부엌과 화장실의 불편함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몇 해 전 종부님께서 연로하신 몸을 이끌고 화장실에 가시다가 넘어져 팔을 다쳤다고 한다. 이일로 종가 사람들은 주생활방식을 개선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초기에 관에서는 원형 보존의 원칙을 고수하였다. 이에 종가에서는 사랑채 대문을 닫은 적이 있었다. 지금은 원만한 방법을 찾았다고 한다.



이런 모습을 보는 제3자는 왜들 저럴까하고 궁금해 했다. 주변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당신은 어떻게 생각 하냐?”고 나에게 종종 묻곤 했다. 이에 대하여 이렇게 답한 적이 있었다. “여러분은 건물이 중요합니까? 사람이 중요합니까?” 라고 되물은 적이 있다. 전통문화는 사람에서부터 시작하여 사람으로 전승되며, 그 많은 결과 중 하나가 집이다. 그리고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집이라 할 수 없다. 이는 숨을 쉬지 않고 호흡을 멈춰버린 물건이라 할 수 있다. 현대 문명의 편리를 따라 모두 바꾸는 것은 과거의 흔적을 없애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바람직한 방법은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최소한의 환경을 만들어 놓고 집에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특히 화장실 문제는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안동에는 많은 집들이 버림을 받고 호흡을 멈춰버린 집들이 많다. 전공의 대상으로, 먹거리의 대상으로, 관광의 대상 등으로 삼고 있는 집을 여러분은 산소 호흡기를 대도 영영 돌아 올 수 없는 상태가 되도록 구경만하고 있겠습니까? 우리는 고택을 방문하면 마당에서 집을 보면서 건물에 대하여 논하곤 했다. 하지만, 과거 고택은 방문객을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집주인을 위해 지었다. 집주인은 마당보다 방과 마루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세상을 맞이했다. 즉, 집은 객체 중심의 공간이 아니라 주체 중심의 공간이다. 따라서 올바르게 집을 이해하려면 집주인 위치와 시각, 여건에서 건물을 보면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이런 점을 고려해 충효당을 찾는다면 충효당과 서애 선생과 종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본다.


최근까지 우리는 호흡을 멈춰버린 문화유산을 찾아가 사진만 찍고 왔다. 그리고 우리는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이야기조차 듣지 않고 도망오곤 했다. 여러분 올 가을이 가기 전 호흡을 멈춰버린 우리 지역의 건축문화유산을 찾아가 쓰다듬어 주고 이야기를 나누고, 새로운 기운을 받아오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과거 선조들이 남긴 유무형의 자산을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전승하는 첫길이라 봅니다.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48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