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그 길위의 인연(글/노영옥)"아, 그 사람요?"
"차∼암, 선이 고운 사람이지요."
누가 물으면 단박에 이렇게 칭찬해 주고픈 사람이 있었다. 묘하게도(?) 길 위에서의 만남이 잦았던 그녀와 나. 왜 하필 길 위에서였을까? 그녀는 전주에 계신 조소녀(曺小女) 선생에게 동초제를 배우러 가는 길이었고, 나는 나대로의 발길이었을 테지만 말이다. 하기사 모든 것은 길로 통하고 그 길 속에서 삶의 이유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처럼 여기 판소리라는 길 위에서 삶의 이유를 찾은 사람이 있으니 바로 안동의 참한 소리꾼, 현재 '한음국악원'의 원장으로 있는 권정씨(30)다.
쥔장과 닮은 소담한 분위기
용상초등학교 부근에 있는 그의 공간을 찾아 살그머니 문을 여니 그 터의 쥔장을 닮은 듯 소담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국악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왠지 정리된 마음을 선물로 안겨줄 것만 같은 곳. 지금은 비록 고장난 몸이지만 한 시절이나마 권정씨의 고운 손길을 원없이 탓을 가야금과 하루가 멀다하고 두드려졌을 장고와 북, 그리고 한 구석을 메꾸고 있는 검은색의 피아노. 또 그 공간을 채우고 지났을 수많은 소리들…
내 눈과 작업실과의 만남이 그러했다면 그녀와 소리와의 만남은 "보기만 하여도 울렁…" 이렇게 나가는 장사익의 노래처럼 열 아홉 장미꽃보다도 붉고, 진주빛보다고 고운 순정이였다. 초등학교를 다닐 적 교실에서 아이들이 장난스레 튕기던 고무줄 가야금 소리가 가슴을 울렁이게 하더니만 그 소리가 평생의 업이 될 줄 그녀는 이미 알은 듯 했다.
원래는 가야금을 하고 싶어서 들어선 길이었지만, 소리와 인연이 닿아, 권씨 집안에 이런 아가 없다는 애꿎은 소리를 덤으로 듣고 떠나 온 열 아홉의 길이 서른을 넘긴 나이가 됐으니, 소리공부를 한 지도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을 후룩 넘어서고 있었다.
소리 공부에 입문하여 겪게 된 우여곡절이야 구곡간장(九曲肝腸)이 다 녹을 듯한 일들이지만, 그 중 그녀를 가장 안타깝게 한 것은 변변한 연습용 악보하나 없다는 것이었고, 나아가 답습도 답습이지만 창작소리도 하고 싶다는 그녀 자신의 의지를 달래줄 만한 것이 없다는 현실이었다. 그런 바탕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이론이 깔려 있어야 당당한 소리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이론이 깔려 있어야 제대로 된 소리를 할 수 있고 때문에 권정씨는 나름대로는 이론 공부도 열심인 소리꾼이다. 연습실 구석에 이방인처럼 앉았는 저 피아노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확실한 음감을 잡기 위한 그녀만의 노력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안동엔 온지는 벌써 한 2년 반이 되었지만, 국악원을 운영한지는 올해 1월부터라고 하니 그리 오래지는 않았다. 영양에서 소리공부를 하다 좀 더 넓은 세계로의 진출을 모색하며 안동의 국악단체나 국악협회를 문의하던 중 유난히도(?) 전화를 친절히 받은 권두현(국제탈춤페스티벌사무국장)씨와 놀이패 등근과의 인연으로 그녀는 안동으로 새터를 옮기고 크고 작은 안동의 문화예술행사에 서게 된 것이다.
하여간 사람들은 그녀의 소리에 대해서 "소리가 예쁘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자신의 소리가 가늘고 힘이 없어서 넘어야 할 벽이 많은 소리라고 겸손해한다. 그렇다면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소리란 무엇일까가 궁금해졌다. 단숨에 그녀는 "나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소리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소리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확언하고 있었다.
도대체 앳되고 가녀려 보이는 저 작은 체구 어디에 저런 강단진 기운이 숨어있을까 싶게 소리에 관한 얘기를 할 때면 그녀에게서는 자그마한 체구를 다 덮고도 남으리만치의 강단진 기운이 넘쳐 흘렀다.
그런 그녀에게 정신적인 지주로 남아있는 분은 다름아닌 단아한 모습으로 평생을 채우고 간 김소희(1917-1995, 전북고창출생, 인간문화재 5호) 명창이라 했다. 열심히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에게 그 모습만으로 감동이 되어 다가드는 스승의 존재란 지극히 소중한 것임을 다시 말해 뭣하랴. 어린시절 자신의 치기어린 짧은 생각 때문에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지 못했던 선생님의 모습을 추억하는 그녀의 눈빛 속에 애틋함과 어느 사이 정신적인 스승의 자태를 닮아가고 있는 모습이 읽혀진다.
그녀에게도 내면의 소리에 대한 욕심은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지금의 나이는 기술을 익히는 나이지, 나의 소리를 하는 나이는 아니거든요, 깊은 소리를 낼려면 한 사십은 넘어야 되지 않을까 싶어요."라며 밝힌 그녀의 생각은 이러했다. "내면의 소리를 낼려면 기술(기교)의 극치로 가야 하거든요. 기술의 극치로 가야만 내면의 소리를 낼 수 있어요. 기교도 그것이 끝까지 가면 그게 더 오랜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고 보거든요." 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당당히 소신에 차 있었다.
소리는 삶의 숙명적인 예의 같은거
안동에도 이름을 열거하면 알만한 국악단체들이 제법 생겨났다. 소리없는 붐이 전국적으로 일고 있다고는 하지만 권정씨가 지적하는 것처럼 사람들한테서 소리란 어려운 것이라는 선입견은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국악원을 운영하면서 그녀에게 큰 욕심이란건 애초부터 없었다. 다만 소리가 사람들한테 조금이라도 쉽게 받아들여지기를 원하고 그래서 소리가 생활의 일부로 즐겁게 받아들여 질 수 있는 것, 그녀가 부린 욕심이라면 그것이었다.
그녀에게는 하고 싶다는 그 마음 하나로 뭐든지 할 수 있다며 버텨내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 애정으로 수강생들을 가르치다보면 자꾸만 학생들에게 욕심을 내게 되지만 그것이 욕심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되더라고 했다. 그러다 보니 "자꾸 마음은 항상 저만큼 앞서가 있구, 몸은 처지고 그렇네요."한다. 소리를 하면서 기쁜 순간이 있었냐는 질문에 그녀는 뜻밖의 답을 했다. "기쁨은 순간인 거 같아요. (아니...)별로 안 기쁜 것 같아요. 왜냐면... 힘..드..니까."
하고 싶은 맘보다 해야한다는 일종의 삶의 대한 숙명적인 예의같은 거. 삶의 무게에 대한 암묵적인 약속과도 같은 거. 그래서 이제는 안 하면 안된다는 불가항력적인 책임감을 떠올리면 솔직히 두렵고 괴롭워지지 않는 이가 있을까.
얼마가 될지 모를 정체기를 거친 뒤에야 다시 힘겨운 삶의 계단을 밝혀낼 수 있듯 그녀는 힘듦을 껴안고 참아내고 있다. 소리에 대한 내면적인 고민과 학원 운영에 관한 현실적인 고민, 그렇게 연습을 해야 할 시간에 자꾸 고민을 하게 되니까 그녀는 자꾸만 산이 그리워진다고 했다. 여력만 되면 산에 가고 싶다 했다(사람들 사이에 괜히 섬이 있다고 했겠는가?). 물론 일년에 두 번씩 일 주일 기간으로 국악원생들과의 정기적인 연수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론 도저히 아쉬어서 안될 듯 보였다.
"사람들한테 자신의 소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지길 원해요"라는 물음에
"감동을 주고 싶죠, 욕심같애서야, 울고 웃기고…. 욕심은 굉장히 크죠. 울게 만들고 웃기게 만들고도 싶은데 현대감각에 너무 안맞다보니까 젊은사람들이 들어서는 안 와닿죠. 대중과 교감할 수 있는 소리를 원하고, 라이브 공연장에서 대중가수가 대중들과 열광적으로 교감하는 모습같은 거 보면 자책감 비슷하게 느껴지거든요. 왜 소리는 저렇게 안될까, 분명히 될 수 있는 장르거든요."
인터뷰를 마치면서 괜한 호기로 "소리의 끝이 있을까요?"했더니, 우문(愚問)에 현답(賢答)이라 "노력하다보면 있지 않겠어요" 하는 권정씨.
어깨가 아프도록 손수 칠했다는 내부 인테리어 나무가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검은색 나무줄기와 흰 색 한지 간의 단아한 조화가 그녀와 많이 닮아 있다. 이 세상의 크고 많은 소리들에 다 다다르고 싶다는 마음, 그래서 한음 국악원.
좋은 고수에 좋은 소리가 펼쳐지듯, 어느덧 그녀의 교실이 그녀를 닮아가고 있는 것.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 국악원생들과 더불어 다같이 나아가려는 권정씨의 노력. 이 모두가 아끼고 사랑할만한 특히 내가 좋아하는 삶의 모습이다.
한복의 선보다 더 아름다운 선을 지닌 외유내강의 권정씨와 소리에 대한 가슴 징한 애정을 지녔던, 아름답다는 말보다 이쁘단 말이 더 어울릴 씩씩한 총무 박영옥님(한음국악원은 이 총무님이 있어 탄탄대로라 하겠다), 그리고 눈보다 흰 치자꽃을 들고 들어섰던 사랑방의 편집기자님과 이주일(개그우먼) 이후로 나처럼 희안하게(혹은 특이하게, 솔직히는 못?생긴) 사람은 첨 봤다는 박총무님말을 듣고도 즐겁기만 했던 나. 이런 4인방의 만남은 허허롭던 나의 하루를 유쾌하게 마감해 주고 있었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