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일마을 김진 할머니의 ′멋진 노년′(글/이미홍_객원기자)
가일마을 김진 할매, 팔순에 사진작가가 되다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일에는 아마추어 사진작가 김진 할머니가 살고 있다. 안동권씨 복야파 지차 집안의 며느리인 김진 할머니는 오래된 한옥을 지키며 살고 있는데, 사군자 치고 붓글씨 쓰는 대신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전국을 누비며 사진을 찍는 아마추어 사진작가다. 여든넷 나이가 믿기지 않게 지금도 순천만으로 제주도로 울릉도로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으러 나선다는 할머니. 김진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은 날씨가 조금 추웠지만 많이 설레었고, 내가 만나 본 할머니는 생각처럼 자존심이 강하셨지만 세월에 녹아든 듯 단단했고, 사진 이야기를 하실 때는 꾸밈이 없는 대신 담담하면서도 씩씩하고 거침이 없으셨다. 김진 할머니의 이야기는 가일마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6.25전쟁 나던 해 가일로 시집왔어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이 우리 윗대 어른 그러니까 내한테 시조부 되시던 어른 때 대부터 사시던 집이지. 우리 시할아버지가 안동권씨 복야파 둘째 집안, 그러니까 지차 집안의 구남매의 맏이셨는데, 장가들어 살림을 날 때 그 윗대 어른께서 이 집을 사서 주신 거지. 저 위쪽 산 아래에 큰집 종택이 있고, 집안 형제들이 다 일가를 이루어 사셨던 고택들이 지금까지도 마을에 많이 남아 있지. 지금은 윗대 어른들이 돌아가시고 조카들이 물려받아 사는 집이 많지. 나는 젊어서 이 마을에서 살다가 남편 직장 따라 안동으로 대구로 가서 살다가 남편 먼저 가고 아이들 다 키워놓고 내 나이 60에 다시 가일로 들어왔어. 그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 새 24년이 훌쩍 지났네.”
풍천면 가일마을 김진 할머니(84)댁을 찾았을 때 할머니가 제일 먼저 들려주신 말이다.
김진 할머니는 6·25 전쟁이 일어났던 1950년 초에 가일마을로 시집을 왔다. 그때 할머니 나이가 스물 하나였다. 풍기인삼조합장을 하신 부친 밑에서 어려움을 모르고 살다가 늦게 결혼을 한 셈이었다. 신랑은 가일에서 명망이 있는 집안의 맏이였고 교육청에 다니는 공무원인 일등신랑이었다. 그런데 한창 신혼의 재미가 쏟아지던, 시집 온 지 불과 서너 달 만에 전쟁이 난 것이다. 그때 할머니는 첫째가 막 뱃속에 들어선 상태였다. 인민군이 막 내려오고 난리가 나서 피난을 가야 했는데, 아이가 막 뱃속에 들어선 임신 초기라 새댁이었던 진 할머니는 겁이 났고 그런 젊은 아내를 두고 남편은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아 했다. 식구들은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산 하나 너머에 있는 어담마을 지나 병산서원 건너에 있는 월애로 피난을 갔다.
폭격 소리와 인민군의 자취를 피해 그 마을에서 세 밤인가 네 밤인가를 자고 인민군이 지나갔다는 소식에 마을로 돌아왔다. 그런데 형편이 나은 양반님네들이 좀 더 안전한 곳에서 몸을 피하는 동안, 갈 데가 마땅치 않아 마을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그동안 낮에는 인민군이나 폭격을 피해 저수지 둑 밑 개울이나 두렁 밑에 숨었다가 밤이면 마을로 몰래 들어가 쪽잠을 자고 새벽이면 다시 둑 밑 두렁 속에 숨어 지내는 생활을 반복했다고 했다. 하루하루 불안에 떨어야 했던 마을 사람들에 비하면 참 다행스런 피난 생활이었고 크게 다친 이도 없어 안도한 것도 잠시, 피난 간 임신한 아내가 걱정돼 들어왔다가 나가지 못한 남편이 직장에서 해고가 되었다.
“우리가 마을로 돌아오니까 인민군들이 들어와 있고 이곳 사람들 중 하나를 완장을 채워 놓았더라고.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람들한테 한 마디로 반동이 돼 있는 거지. 그리고 인민군들이 후퇴한 뒤에는 또 그간의 일들이 빌미가 되고. 그 시절이 그랬어.”
마을이 인민군이 지나가던 길가에 있었던 탓에 인민군이 지나가는 동안에는 그런 일들이 반복됐다. 인민군들이 마을에 있을 때면 마을 사람들은 쥐 죽은 듯이 지내야 했고, 그러다가 더러는 완장 찬 사람들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심부름도 해야 했다. 정말로 살아남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던 하 수상했던 시절이었다. 인민군들이 후퇴하고 나서는 그런 모든 일들이 지나갔다.
“처음 신혼살림을 안동시내 지금 시청 자리에 얻어 살았는데 내가 아이를 가진다고 마을에 들어와 있던 참이었어. 그런데 우리 식구가 거기 있다고 하니까 사촌형님이랑 그 집 식구들 하고 같이 남편이 보러 들어왔는데 그만 나가지를 못해서 거기 주저앉게 됐어. 그러다보니까 정부를 따라서 남하를 해야 하는데 그때 우리 신랑이 월남을 못하게 된 거지. 그런데 그게 나중에 빌미가 돼서 공무원이 나라 안 지키고 숨어 있었다고 빨갱이라는 소문이 돌아서 신랑이 공직에서 떨어지고 그걸 무마하느라 결국에는 군대를 가야 했어.”
난리 통에 소문은 무성하고 마을 인심도 전 같지 않았다.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겁에 질리고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제 한 몸 살아남기도 벅차 서로가 서로를 상처 입히고 상처를 입었다.
“애는 뱃속에 있지, 신랑은 갑자기 직장 떨어지고 군대에 끌려갔지, 그래도 어째, 시어른 그늘에서 어른 모시고 엄한 세월 견디다 보니까 남편이 군대를 제대하고, 남편이 원래 사상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 다시 직장에 복직도 하게 되고. 그리고는 안동시내로 나가 살았지. 우리가 그때 당북동에 살았는데 맏이다 보니까 우리 세대는 어른들은 당연히 우리 몫이라고 여기고 모시고 살았지. 대구로 가면서 둘째 시동생네가 잠시 모셨는데 이상하게 어른들이 맘을 못 붙이셔서 결국 우리가 모셔가서 사시다가 대구서 돌아가셨지.”
잿골서 만난 딸네들과 수다 삼매경
여기서 김진 할머니 안동시내 살림나서 살 적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잿골’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잿골은 지금의 화성동을 말하는데, 예로부터 법석골(법상동), 잿골에는 양반들의 후손들이 많이 살았다. 그래서 장날이나 무슨 날이 되면 이름깨나 있는 문중서 시집 온 딸네들이나 며느리들이 잿골서 만나 안부도 나누고 계모임도 하는 일이 많았다. 김진 할머니는 친정서 딸부잣집 다섯째였는데, 각 문중으로 시집간 언니 동생들을 장날 이 잿골에서 만나 친정 식구들 소식도 나누고 같이 밥 먹고 놀곤 했다고 한다.
할머니 원래 고향은 영주 이산면이지만 친정아버지가 초대인삼조합장을 하시다 보니까 자라기는 풍기 쪽에서 자랐다. 언니는 예천 호명 진성이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고, 또 다른 언니는 예천 산양면에 사는 최씨 집안으로 갔고 동생은 도산 의인에 있는 진성이씨 집안으로 시집갔다. 그 자매들이 한 번씩 안동에 올 일이 있으면 잿골서 만나곤 했던 것이다.
“그때 우리 며늘네 딸네들은 다들 잿골에서 만나고 모임하고 그랬어. 그때는 이름 대신 다들 택호를 썼는데 나는 우금댁이고 동생은 의인댁, 언니는 예천댁, 산양댁 그렇게들 통했지. 다른 이들도 내앞댁이니 계실댁이니 외내(군자리)댁이니 그렇게들 불렸지, 아녀자들이 어디 쏘다니고 하는 거 싫어하는 바깥양반들도 잿골서 며느리들끼리 모임하고 그러는 거는 뭐라 못했지. 우리 할아버지도 내가 잿골 며느리들 계모임서 전국 팔도 여행 다니고 그래도 암말 안하고 다 보내주고 그랬지.”
실은 그때부터 할머니는 여행이 좋았다고 한다. 모르는 낯선 곳으로 가서 새로운 것을 보고 안 먹던 것을 먹어 보고 봄 여름 가을 겨울 갈 때마다 새로운 풍광을 구경하는 게 좋아 어디 여행갈 일이 있으면 거의 빠지지 않고 열심히 다녔다고 한다. 구경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남편은 그런 아내를 알아서 본인은 안 가도 아내가 여행 간다고 하면 기꺼이 보내주곤 했다. 가슴에 여행을 꿈꾸는 바람이 살짝 들어간 젊은 아낙이었다고나 할까?
내 할 일 다했다 싶었을 때 가일로 돌아왔어
“공직에 복귀하고 대구로 가서 우리 아저씨가 성실하게 참 열심히 살았는데, 나이 50에 불귀의 객이 돼 버렸어. 남편이 죽었는데 그걸 슬퍼할 겨를도 나는 없었어. 간 사람 생각보다 애들 셋 데리고 살 길이 우선 막막하더라고. 나도 옛날 양반가 집안 며느리에 공직자 안사람으로 일하는 사람 두고 곱게 살다 보니까 험한 살림을 몰랐지. 그런데 산 사람은 산다고, 어떻게 살았는지 돌아볼 겨를도 없이 정신없이 살다 보니 아이들 대학 시키고 시집장가 보내고 다 했네. 그래서 내 할 일 다 했다 싶어 그제야 안동으로 다시 왔어. 여기 우리 집이 있으니까 이리로 왔지.”
40년을 나가 살다가 마을로 들어오니, 마을도 낯설고 사람들도 낯설었다. 사람들 걱정처럼 외롭거나 불편한 건 몰랐다. 남편 가고 아이들 자기 갈 길 찾아 다 떠나고 혼자 지내는 게 몸에 배어 혼자인 삶이 자연스러웠고 오랜 세월 건너 찾아든 가일마을은 도시에 비해 여유가 있어서 지낼 만 했다. 그런데 한 가지, 농사를 모르다 보니 시골 생활 적응이 쉽지는 않았다. 사람들도 많이 바뀌고 무엇보다 집 앞뒤 채전에 나물 두어 가지 심어 먹는 거 말고는 농사를 짓지 않다 보니 만나면 농사 이야기가 반이라 더 그랬다.
“그리고 내가 마실 다니는 재미를 잘 몰라. 시골 살면 농한기나 밤에 이웃에 마실도 가고 그러는 재미에 사는데, 처음에 와서 마을 어른들하고 눈 맞춤이라도 하려고 마실이라고 가서 있으면 다들 오늘 풍산장에 고추가 얼마고 마늘이 얼마고 담달에는 뭘 심어야 되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농사도 안 짓고 그런 것도 하나도 모르고 그러니 영 재미가 없고 십 원짜리 화투 치는 재미도 모르고 그러니 차츰 밤마실을 안 가게 됐지 뭐. 그거보다는 나는 혼자 노래 듣고 책 보고 공부하고 그런 게 좋으니 어째, 그러다 보니 저절로 자꾸 안동시내 쪽으로 발을 뻗치게 되더라고.”
집 앞 뒤로 채전이 있으니까 고기 먹고 싶을 때 조금 사 먹는 거 외에는 다 여기서 그냥 해결이 된다고 한다. “이제 채전밭 하는 것도 내 힘만으로 안 돼. 그래서 사람 써서 약도 치고 앞마당 뒷마당 잔디도 관리하고 그래.”
활달한 친구 덕에 배우게 된 사진
진 할머니가 이 마을로 들어오고 나서 얼마 안 있다 사귀게 된 이가 있다. 그이는 마산 있다가 안동으로 집을 사서 들어왔는데, 둘 다 외지서 와서 시골 생활이 어둔타 할까 그러다 보니까 자연 둘이 꼭 붙어 다니게 됐다. 지금껏 같이 다니는 절친 윤은애 할머니다.
“서로 외롭고 나이대가 비슷하다 보니 그때부터 줄창 붙어 다녔어. 그래서 지금도 떴다 하면 우리는 둘이 같이야. 배우는 것도 같이 배우러 다니고 모임도 여행도 무조건 같이 한다고 보면 돼. 서로 껌딱지 같은 존재지. 그래서 혼자 가면 왜 혼자 가냐고 다른 사람들이 물어.”
사진도 같이 다니던 그 친구가 우리 사진 배우러 한 번 가 볼래? 해서 시작하게 됐다. 안동영상미디어센터 실버 사진동호회와의 첫 만남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조그마한 디카가 있어서 그걸 가지고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러다가 제대로 배우기 시작하면서 카메라를 하나 장만한 거야. 아무래도 전문 사진가가 가지고 다니는 거랑은 다르지만 작고 가볍고 잘 찍히고 나한테는 딱이야. 물론 카메라도 우리 둘이 똑같은 걸로 샀지.”
그렇게 진 할머니는 사진에 입문하게 됐고 어느새 사진에 푹 빠져서 출사를 나가고 포토샵을 배우고 대회 출품도 하는 아마추어 작가가 다 되었다.
“사진 찍으러 다니고 활동을 하는 것도 동호회에서 앞에서 다 이끌어 주고 남들이 가니까 가는 대로 같이 따라다니는 거지, 나 혼자 하라 하면 쉽게 시작을 못했을 거야. 그나마 내가 아직은 건강하니까, 몸이 따라주니까 사진 활동도 하는 거지. 다른 분들은 6-70십대로 활동도 많이 하고 다들 젊은데, 친구하고 내하고 나이 많은 우리 둘이가 따라 다니는 거지. 팔십 먹은 우리 친구는 내보다 한 사년 아랜데, 내하고는 다르게 젊고 팔팔해.”
늙은이 주책이라 타박 않고 끼워줘서 고맙지 뭐
그렇게 발을 안동시내로 뻗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는 진 할머니, 다 늦은 나이에 젊은 사람들 따라 다니며 열심히 발품을 팔았더니 주책이라 하지 않고 다들 끼워 주고 인정을 해주고 대접을 해 주니까 고맙다.
“우리 나이대인 80대는 모임이나 활동하는 게 거의 없어요. 그래서 이래 다니다 보니까 내가 어울리는 이들이 층허리가 많아. 70대가 주로 주축인 모임들이 많지. 활동도 제일 활발하게 많이들 하고. 내야 어디 가도 고참이지, 그래 내가 나이를 묻지 말라고 하잖아.”
나이 가지고 유세를 하기는커녕 많은 나이가 부담이 되어 행여나 저어하는 이가 있을까 봐 미리 조심하고 배려하다가도 막상 출사가 잡히면 눈치 보지 않고 누구보다 열심히 따라나서는 이가 또 진 할머니다.
“내장산 단풍 사진을 찍으러 출사를 갔을 때는 새벽 3시에 출발해서 갔어. 가서도 아침 안개 필 무렵이나 밤 풍경을 찍느라 또 하루를 꼴딱 새면서도 찍고 그랬지. 봄 되면 의성 사곡에 산수유 찍으러 가고. 여름에는 숲에도 가고 계곡에도 가고, 가을이면 내장산에 단풍 찍으러 가고, 내가 찍은 담양 대나무 숲 사진하고 탈춤축제 사진은 보기가 좋다고 한참 동안을 안동영상미디어센터 입구 벽에 걸려 있기도 했어. 흉 안 보고 다들 격려해 주고 인정해주는 게 좋아서 사진을 계속 하게 됐지.”
사진을 찍다 보니 배울 게 너무 많았다.
“사진을 찍기만 하는 게 아니더라고. 포토샵도 배우고 사진 작업하는 기술도 배우고 홈페이지나 블로그에 사진이나 동영상 올리는 것도 배우고. 내 딴에는 열심히 한다고 해도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한테는 안 돼. 그래도 나이대접 한다고 그러는지 잘한다고 다들 그래주니 또 그 맛에 더 열심히 하기도 하고. 근데 무엇보다도 내가 좋으니까 하는 거지. 좋은 사람들하고 여행 다니고 좋은 풍광 보고 그걸 내 카메라에 담고, 배우면 배울수록 찍으면 찍을수록 더 욕심이 나는 게 사진 욕심이더라고. 청송 주산지 안개를 찍은 사진으로 내가 대회에서 입상도 했어. 비록 대상은 아니지만 열심히 따라다니면서 찍는 보람이 있어. 새록새록 재미도 나고.”
일어, 영어, 스포츠댄스, 민화 다 배우고 싶어
진 할머니가 포토샵을 처음 배울 때만 해도 요즘처럼 한글로 설명이 되어 있지 않고 영어로 설명이 되어 있어서 선생님이 설명해 주신 걸 눈으로 익히고 익혀서 클릭클릭 하고 그렇게 해서 간신히 포토샵 입문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이가 원수라고 배운 것도 자꾸 까먹어 다시 배우고 다시 배우기를 거듭했다고 한다. 다행히 나중에는 한글버전이 나와서 한결 수월하기는 했지만 문제는 기억력! 그래서 안동과학대학이나 평생교육원 같은 데서 사진 관련 강좌가 있으면 시간이 맞으면 되도록 들으려고 한다. 사진 작업을 잘 하려면 자꾸 다시 배우고 새로 배우고 그래서 많이 써 먹고 그래야 하니까 말이다.
“인제는 12월이라 올해 강좌나 프로그램은 다 종결이 되는 분위기고 다음 봄 학기 때 새로 개설되는 것들이 뭐가 있나 봐야지. 이 나이가 되니까 나는 더 못 배운 게 그렇게 한이 될 수가 없어. 어릴 때 소학교 다닐 때 일본어를 배웠는데도 다 까먹고 일본 여행을 가니까 말이 안 나와. 그래서 일본어를 다시 배우고 싶어서 강좌를 찾아보니까 사진 수업 하는 날이랑 날짜가 겹쳐서 안 되더라고. 시간이 맞는 게 있으면 지금도 배울 생각은 가득이지.”
사진도 사진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배우는 거 자체를 즐기시는 진 할머니다. 한 십 년만 젊었으면 아직도 배우고 싶고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는 할머니, 민화도 배워보고 싶고, 스포츠 댄스도 전에 슬쩍 배워서 다시 도전해 보고 싶고, 일어나 영어 공부도 더 해서 세계 여행도 한 번이라도 더 하고 싶고.
“남들은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단하시다고들 하지만 나이가 팔십이 확 넘으니까 마음은 빤한데 기억이, 몸이 잘 안 따라줄 때 속상해. 나는 하고 싶은데 안 되니까. 내가 그걸 속상해 하면 마카 날 보고 욕심 많다 그런다. 그것만 해도 대단타 하는데 나는 그 소리가 싫어.”
어딘가로 훌쩍 떠나는 걸 항시 좋아해
이쯤에서 잠깐 쉬어가는 의미에서 에피소드 한 토막을 이야기 하자면, 사진동호회에서 한 번씩 출사 여행을 갈 때면 봉고를 한 대 대절해서 가곤 했는데, 그 봉고를 운전하고 회원들을 태우고 같이 다니시던 기사 아저씨가 사진 찍고 블로그에 올리고 활기 있게 지내는 그 모습이 좋아서 자꾸 보다가, 사진이 매력 있다고 자신도 찍고 싶다고 하더니 어느 날 카메라를 장만해서 회원으로 가입을 했다. 맨날 운전하며 따라 다니다가 지금은 그분도 회원이 되어서 같이 사진을 찍으시는데 여전히 자신의 봉고로 회원들을 싣고 출사 여행을 다닌다고 한다. 작년에 제주도엘 갔는데 그때도 그 봉고차를 배에 싣고 가서 제주도를 돌면서 사진을 찍고 그랬다는 이야기다.
삼 년 전에 순천만 갈대하고 새 사진 찍으러 가는데, 순천만 전날 밤 여수에서 묶으면서 돌산 야경 찍으러 나가자고 해서 따라 나섰는데 십일월 바닷 바람이 얼마나 추운지 달 뜨길 기다려서 야경 찍느라 얼마나 떨었는지, 그리고 또 새벽 다섯 시에 나가서 일출 찍는다고 하지, 그때는 아직 사진 찍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때라 두꺼운 옷 준비할 줄도 몰라서 고생고생한 기억이 사진보다 더 오래 남았다. 순천만 갈대의 장관도 여수 밤바다의 추위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돌아오자마자 두 할머니, 두터운 겨울 패딩 점퍼 하나씩 장만했음은 물론이다.
“배우는 것도 좋아하지만 나는 여행을 정말 좋아해. 우리 남편은 가는 거 말리는 법이 없었어. 그 덕에 내가 우리 남편 살아 있을 적에도 주로 우리나라 방방곡곡 안 가본 데 없이 많이 가 봤는데, 요즘 사진 찍으면서 또 모르던 숨어있는 곳이나 절경인 곳을 또 갈 수 있으니까 그거 자체로도 사진이 매력이 있지. 그리고 내가 애들 다 키워 놓고 칠십 무렵부터 외국 여행을 많이 갔어. 우리 막내딸이 사위 따라 지금 독일에 가 있는데, 그 딸 사위 덕에도 유럽 여러 나라 많이 다녔어.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그렇게 유럽 여러 나라를 넘나들어 다니고 프랑스에서 배 타고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고 그랬지. 스위스 알프스 만년설 하고 그 푸른 호수 앞에서는 절로 ‘아’ 소리가 나와. 스위스에서는 고산병 때문에 벌벌 떨고 고생도 많이 했지만 그래도 기회만 되면 또 가고 싶지.”
안동영상미디어센터 사진 강좌하고 일주일에 네 번 정기적으로 나가는 날이 있고 그 중간에 문화원에서 하는 특강이나 답사 가는 일정이 있거나 친구나 반가운 이들하고 만날 일이 있으면 또 나가고 하니까 집에 있는 날이 적다는 진 할머니.
“여름철 되면 우리 집 마당에 영산홍도 곱고 봄이면 집 앞에 산수유 꽃 피고 저수지가 있어 여름에도 크게 덥지 않고 시원하고 마을 전경이 학의 모양 닮아 아늑하고 정겹고 그래서 나는 여기가 좋아요. 그래서 정기적으로 건강 검진하러 서울도 가고 그러지만 볼 일 끝나면 얼른 내 집으로 와요. 여기가 편하고 내 모임 있고 만나는 이들 있고 사진 찍으러 다니다가 끝나고 여기 내 거처로 찾아 들어오게 되는 거지.”
취미 맞고 맘 맞는 친구가 최고야
“동네 분들이 내가 보따리 많이 들고 가면 멀리 가는 줄 알고 차림이 간단하면 으레 안동 나가는 줄 알고 그러지. 버스에 오르면 안동으로 한 걸음이니까. 오히려 지척인 풍산장을 한 번씩 마음먹고 구경삼아 나가는 거지. 그런데 시골 장은 아직도 볼 것도 많고 인심도 좋아서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욕심은 앞서지만 하나라도 더 팔려고 애쓰는 아주머니들 보면 차마 사진 한 장 찍자는 말이 안 나와 그냥 구경만 하고 오기도 하고 그래. 선생님은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뭐 미안코 그런 거 생각하면 못 찍는다고, 우선 디밀고 찍기부터 하고 나서 양해를 구하든 인사를 하든 하라고 하지만 나는 양심상 미안해서 그러지를 못해. 내가 사진에 대가도 아닌데 차마 그렇게 못 하고 항상 뒤에서 차례를 기다려 때가 맞으면 찍고 그러지.”
옛날 어른들이 니도 내 나이 돼 봐라 하던 그 말씀이 이제 내 얘기가 되었다는 김진 할머니
큰 길 가에서 차에서 내려 살고 있는 집까지 걸어 들어오는데, 그 길이 한 오 분 거리 밖에 안 되는 거리라 들고 나기 쉽고 한갓지지만 한 여름이나 추운 겨울에는 거기서 여기 집까지가 참 마디다고 할까, 그럴 때면 가는 세월을 잡을 수도 없고 그저 속절없이 참 야속하기만 하다.
“내 친구는 시내 안기동 있으니까 뭐 배우고 싶은 거 있으면 일단 가서 내하고 둘이 같이 신청부터 해 놓는 거야. 발이 넓어 아는 사람도 많고 안동 시내 모르는 곳이 없는 마당발이라 친구 따라 나도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보니 모임에도 들고 젊은 사람들과도 친구도 되고 배우기도 하고 그러니 좋지. 지도 내 없으면 안 되고 내도 지 없으면 안 되고. 내가 작년에 몸이 안 좋아 제주도를 안 가려고 했는데 그러면 자기도 못 간다고 나중에는 나한테 성을 내더라고. 하도 성화를 해서 그럼 일단 등록부터 해 놓고 그때 가서 덜하면 가자고 해서 결국 다녀오게 됐는데, 가길 잘했어. 올해 울릉도도 무리를 해서 갔다 와서 돌아와서 집에 와서는 뻗어 버렸는데 그래도 정말 찍을 것도 많고 경치가 좋아서 잘 갔다 왔다 싶고.”
사진을 찍으러 출사를 나가면서 진 할머니는 홀가분한 혼자라는 존재가 너무 다행이라고 한다. 가족이 있으면 아무래도 마음먹은 대로 다 사진을 찍으러 다니진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처럼 나이가 많아도 식구가 있으면 마음처럼 다 다니진 못하지. 남자들도 그건 마찬가지고. 시간만 나면 사진 찍으러 나서는데 집에 있는 사람이 아무리 이해심이 있어도 허구한 날 그러면 누가 좋아하겠어? 우리는 친구도 나도 혼자 몸이라 밥하고 반찬 해 놓고 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어디 가자하면 언제든지 가방 하나 메고 나설 수 있고 밥이야 나가서 한 끼 사 먹으면 되고, 한없이 자유롭지. 내가 다 늦게 사진을 알아서 어찌 보면 분수에 넘치게 사는 거고 또 다르게 보면 나이를 잊고 신명나게 사는 거지. 울릉도를 갔다 오는데 일찍 도착해서 오다 보니 저 청송 쪽에 오늘 오토바이 대회하는 데 거기 가서 그거 찍고 가자해서 마음 맞는 일행끼리 또 그리로 갔어. 가다 보니 또 청송 쪽에 사과가 너무 예쁘게 익은 거라. 그래 빨갛게 익은 사과를 한 바구니를 사서 실었어. 나중 일은 생각지 않고 좋으니까 우선 저지르고 본 거지. 그 사과 때문에 안동 와서 택시 타고 왔으니 어찌 보면 손해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내가 좋으니까 하는 거지. 누가 뭐라 하는 이도 없고 그 사과 나눠 먹어서 좋고. 기운이 남아 있을 때까지는 그래도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거지.”
나중에 아들도 귀향한다니까 고향집 지켜야지
가일 마을도 요즘도 며늘네계 딸네계를 해서 일 년에 한 번씩 모이고들 하는데, 아들은 이곳에 조상 묘가 있고 하다 보니까 더러 문중 모임에도 참석을 하고 관심을 가지고 하는 것 같은데, 딸들은 어려서부터 나가서 살아서 고향 마을에 대한 기억도 친구도 하나 없다 보니 그런 모임이 있다는 것도 잘 모르는 눈치다. 알아도 남일 같나 보다. 엄마가 있어서 더러 들러 시골 정치 한 번씩 맡고 가는 게 다이다. 그래도 그게 어딘가? 자식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진 할머니는 가일 마을에 노년의 둥지를 틀고 그 옛날 새색시 적 애환이 서린 이 집을 차마 외면 할 수 없어 시내로 거처를 옮기지 않고 꿋꿋이 버티며 그 집에 살고 있다. 먼 훗날 언젠가 아들이 퇴직을 하고 이 마을에 다시 돌아와 이 집을 고쳐 살거나 그 터에 다시 집을 짓고 살기를 진 할머니는 바란다. 내 한 몸 편하자고 이 집을 버려두고 나가기는 싫은 게 진 할머니 마음이다. 그 마음을 알 것도 같고 짐작조차 못할 거 같기도 하다.
진 할머니는 불편하니 외롭겠거니 해도 이 집에 사는 게 나쁘지 않다. 다만 한 가지 오래된 한옥이라 겨울에 너무 추운 게 문제였다. 그래서 차라리 시내에 임시 거처라도 마련할까 하다가 친구가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이 집을 손 봐서 따뜻하게 지내라 해서 지금 거처하는 방만 단열을 하고 새로 수리를 했다. 그 수리 할 때도 친구가 자기가 아는 업자 데려와서 같이 자면서 감독도 해 주고 동무 해 줘서 무사히 수리를 마쳤더니 거짓말 같이 방이 따뜻해졌다. 온 여름 내내 마음을 쓰긴 했지만 덕분에 앞으로 추위 걱정은 덜었으니 고맙고 다행스런 일이다. 한옥이라 함부로 손대기가 저어돼 망설이다 우선 산 사람이 따뜻하게 사는 게 우선이다 싶어 저질렀는데 백 번 잘한 일이다 싶다.
“아들도 하나 밖에 없는데, 고향집이라 내가 함부로 팔아 치우지도 못해. 그래도 고향이고 터전인데 내라도 이 집을 지키고 있어야지 싶어 내 나름대로는 집 지킴이로 사는데, 한옥 집이 철 따라 수리비 하고 유지비가 생각보다 많이 들어. 그래 내가 속으로 이 집 하나 물려준다고 이렇게 지키고 있는데 이거 잘못하면 오히려 애물단지 물려주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 그런데 언젠가는 이 집도 문화재로 지정될 수도 있는 문제라 그러면 저 위 우리 텃밭이 있는데 거기에 아들이 집을 지어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 말하니 지도 그럴 생각이 있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이 집은 엄마 집이지 자기 집이라는 생각은 아직 없나 봐. 나는 지 아버지 나고 자란 집이고 내 시집와서 저를 낳은 집이고 저들 가문 터전인데 하는 마음에 이 집, 이 마을에 애착이 있고 향수가 있는데, 우리 애들에게는 이 가일 마을이 그닥 고향이라는 느낌으로 다가오지는 않나 봐. 나한테는 추억이 있고 지들한테는 없는 거지. 고향이라고는 하는데 추억도 없고 그냥 문화재 마을 구경하는 그런 마음인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추억을 뉘라서 강요할 수 있을까? 그저 지금 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나가면 살아있는 거고 들어오면 죽은 거다
진 할머니는 칠팔 십만 넘으면 뒤로 물러앉아 있거나 나이 들어 기운 없다고 집에만 들어앉아 있는 사람들이 이해도 안 되고 너무 안타깝다. 움직일 기력만 있으면 아직도 배울 게 얼마나 많고 그 나이에도 재미나게 사는 길이 얼마든지 많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진 할머니는 자신이 만약 십년만 더 젊다면 할 게 너무 많다고 한다. 그 중에서 제일 하고 싶은 건 역시 여행이고.
“내가 팔십일 때도 외국 여행을 했는데,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온갖 나라들을 다녔지만 내가 지척에 두고도 대만을 못 가 봐서 생전에 거기를 꼭 한 번 가고 싶은데 이제는 말을 못 꺼내. 이 나이에 비행기 타고 여행 하는 게 쉬운 게 아니어서 다들 걱정하고 부담을 끼쳐야 되니까 이제는 접어야 되지 뭐. 그런데 사진을 찍게 되면서 여행에 대한 욕심은 더 커지는 거지. 내가 사진 찍기 전에 앙코르와트를 갔다 왔는데 그때 내가 사진을 알았더라면 싶은 마음이 들고, 그 신비로운 전경을 지금 다시 가서 사진에 담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지.”
김진 할머니가 지인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나는 나가면 살아있는 거고 집에 들어오면 죽은 거고 그렇다.”
진 할머니가 살아가는 힘이 무엇인지 알 것 같은 말이다. 끊임없이 살아 있고 싶어서 진 할머니는 늘 여행을 꿈꾸고 사진을 찍고 또 찍는 지도 모르겠다.
“나는 낼이라도 누가 어디 사진 찍으러 갈 건데 같이 따라 나서실래요? 하면 군말 없이 따라 나설 판이라.”
몸만 안 아프면 언제든 고고씽이지 인생 뭐 있어? 하고 진 할머니가 웃는 것 같다.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4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