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물내용

나의 26년 회고(글/권오신_시인)

26년은 만 68년의 내 전 생애에서 3분의 1이 조금 넘는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많은 일들이 이 26년 사이에 일어났다.
나는 다니던 직장에서 퇴직을 했고, 병으로 죽을 고비도 넘겼고, 아이들도 성가시켜 할아버지 소리도 듣게 되었고, 시인이랍시고 시집도 1권 내었다. 그러나 그 26을 가장 끈질기게 내 가까이에서 나를 괴롭힌 것은 기나긴 병마와의 싸움이었다.

1989년 간염을 앓은 이후 나는 병원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고 입원도 여러 차례 했으며 죽을 고비도 몇 번 넘겼다. 1999년 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직장 친목회에서 문병을 왔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친목회장이 다시 찾아와서 집사람에게 두툼한 봉투를 주고 갔다. 나는 앓는데 정신이 없어 자세히 살피지도 못했는데 봉투에는 50여만 원의 거금이 들어 있었다. 퇴원 후 들었는데 문병을 왔다간 친목회장이 직원회 석상에서 비장한 목소리로 이런 말을 하더라는 것이다.
자기가 보기에는 내가 살기 힘들 것 같으니 친목회 규정에는 없지만 사망 시에 부조금 중 반을 먼저 반을 먼저 떼어 주자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저승 돈을 가불해 받은 셈이 되었다. 저승 돈까지 미리 받는 놈이 맹랑해서인지 하나님께서 돌려보내주어 나는 이렇게 남은 생애를 살고 있다.

2004년 대구 경북대 병원에서 사경을 헤맬 때 친한 친구 부인이 자주 문병을 왔다. 그 부인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데 올 때마다 꼭 나를 위하여 기도를 해 주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 친구 부인이 나를 낫게 해달라고 교회에서 철야기도를 하는데 그 말을 들은 그 교회 신도 두 사람이 동참하여 3명이 3일간 철야기도를 했다고 했다. 짧은 세상 남에게 베풀고 가도 부족한데 나는 이렇게 갚지도 못할 빚을 많이도 받은 셈이다.
2006년 다시 입원했을 때 나는 내 아픈 것은 둘째고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부끄러웠다. 입원하면서 바로 근무하던 학교에 사표 의사를 밝혔다. 이리하여 나는 22세살부터 만40년 동안 내 청춘을 송두리째 바친 교단을 물러났다.
나는 친구와의 교제도 끊었다. 문학과도 담을 쌓았다.
매일 뒷산에 올라가 푸른 하늘을 우러르며 솔바람 소리를 벗 삼았다. 풀숲에 앉아, 때로는 잔디 위에 누워 돌아가신 부모님 모습도 떠올려 보았다. 지나간 추억도 되새기며 그리운 사람들 이름도 하나하나 불러보았다. 이상하게도 건강이 급속도로 제자리로 돌아왔다.

사람만치 간사한 동물이 있을까.
그런대로 건강이 회복되고 해가 바뀌자 내 지금 생활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아침저녁으로 산에만 가서 소나무와 친구하는 삶을 진정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마음을 바꾸었다. 그리고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이제 남은 생애는 내 하고 싶은 것이나 하자고 마음먹었다.
하루 종일 집에 있으니 심심하면 텔레비전 퀴즈프로그램을 즐겨 보았다. 신기하게도 내가 아는 문제가 많이 나왔다. 어려서부터 역사를 좋아했고 문학에도 취미가 있으며, 또 고서도 늘 가까이 하여 한문도 어느 정도 아니 문제가 재미있었다. 나도 시청자가 아닌 출연자의 자리에 서고 싶었다. 망신 당하지 말라는 아내를 설득하는데 한참이나 걸렸다.
2010년 11월 8일 방영된 KBS 퀴즈대한민국’에 출연하여 나는 젊은이들과 겨루어 당당히 역대 최고령의 나이로 제47대 퀴즈 영웅이 되었다. 복에 없는 유명 인사가 되어 신문에도 얼굴이 나고 방송사에서 인터뷰도 들어왔다. 길에 나가면 낯모르는 사람에게서 인사도 받았다.

다시 나는 제 자리로 돌아왔다. 전에 시간이 없어 못 보던 책을 원도 한도 없이 보았다. 공부를 할수록 부르는 데도 많아 문화원에서 전통문화아카데미 강사로 나가 강의도 했다. 도립도서관에서 요청이 와서 동양학 강좌를 개강한 지도 어언 3년째로 접어들었다. 작년에는 내 고향지인 〈풍산읍지〉를 공저로 발간했다.
26년 세월은 길다면 긴 세월인 모양이다. 그때 초등학생이던 아이들이 다 자라 성인이 되었다. 2004년 4월 당시 나는 병실에 누워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우리 집은 대대로 명이 짧아 저도 조부님 얼굴을 모르고, 제 아이들도 제 할아버지 얼굴을 모릅니다. 지금 제 며늘아기가 한 달만 지나면 출산을 한답니다. 제 손자에게는 제 할아버지를 볼 수 있는 은총을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그 손자가 지금은 10살이고 그 아래로 손자 손녀가 셋이나 더 있다. 교회에는 다니지 않지만 정말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5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