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호에서 10호까지(글/편집실)

응답하라 1988

‘안동사람의 삶과 생각을 담는 책’ 격월간 ‘안동’지가 해를 넘겨 만 스물여섯이 됐다. 20년이 훌쩍 넘는 세월에도 꼬박꼬박 회비를 내주고, 아낌없는 글 부조에, 발간이 늦어질 때면 궁금증에 전화 주는 독자가 있어 ‘안동’지는 이렇게 묵묵히 존재해 왔는지 모른다.

‘내 인생의 책’을 추천해 달라는 말에 ‘세상의 모든 잡지’라고 하던 소설가 김중혁의 글이 새삼 떠오른다. 과월호는 기껏해야 라면냄비 받침대로나 쓰일 ‘잡지’라는 존재는 생생한 우리네 삶을 구체적으로 담기에는 가장 적합한 매체이다. 그래서 감히, ‘안동’지가 ‘안동사람의 삶과 생각을 담는 책’이라는 꾸밈 문구가 어색하지 않음에는 오랜 세월 소박한 우리 안동사람의 이야기를 보탬도 뺌도 없이 해왔기에 가능했노라 말하고 싶다.

인터넷 시대에 넘쳐나는 글 속에서도 여전히 안동사람의 이야기에 귀기울여주는 독자들에게 ‘안동’지의 창간호부터 지금까지의 내용과 변화를 대강이나마 훑어보고자 한다. ‘안동’지에 담긴 내용이 곧 안동의 이야기이자 변천사이기도 하니까. 오늘의 안동사를 객관적으로 기록하고 정리해서 남기는 역할을 혹 게을리하지 않았는지 되짚어본다. 지나간 앨범을 들춰보며 감회에 젖는 이 기분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느껴보고 싶다. 안동의 예사 사람, 누군가 말해주지 않으면 잘 모를 평범한 안동 사람들의 이야기를 동네 사랑방처럼 편히 들을 수 있는 곳, 사랑방 ‘안동’지의 지난 세월을.

‘이 책이 디딤돌이 되어 문화전통의 화려한 역사는 지녔으되 문화의 변방에 떨어진 오늘의 안동이 처한 한계를 극복하는 신선한 새바람이 불기를 기대한다’는 창간호의 발간사는 아직도 유효하다.  

 




다방아가씨 이양의 삶과 희망, 기획력 돋보이는 기사

1988년은 지금처럼 컴퓨터와 디지털카메라가 일반화된 시대가 아니었다. 필름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어야 했으며 취재원과의 약속도 유선전화가 아니면 불가능했다. 핸드폰과 이메일이 없었으니까. 원고청탁과 원고를 받는 것조차 직접 대면을 해야 가능한 시대였다. 내비게이션이 없었으니 물어물어 길 찾기가 예사였을 것이다. 취재여건과 자료 구하기가 여의치 않았음에도 지금보다 오히려 더 밀도 있는 기획기사와 원고를 보면서 감탄을 하게 된다. 잘못된 내용이 무한 반복 퍼 날라지는 인터넷 시대보다 더 정확한 내용을 수집하게 되고 직접 확인하게 되니 기사에 대한 신뢰가 간다. 

당시의 시대상과 안동문화의 생생한 모습을 지금보다 훨씬 많은 필자들이 참여해 알차게 구성했다. 특히 1989년 9호에 실린 ‘다방 아가씨 이양의 삶과 희망’과 같은 기사는 평범한 20대 아가씨가 어떻게 다방까지 흘러들어오게 되었는가를 얘기하며 고단한 다방 아가씨의 삶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까지 고스란히 보여준 기획력이 돋보였다.

창간호를 비롯한 초창기 ‘안동’지는 40쪽 내외로 지금의 반에도 못 미치는 분량이었지만 30꼭지에 이르는 다양한 내용을 담아내며 알찬 구성을 선보였다. 더군다나 각계각층의 다양한 필진들의 참여로 더욱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조금은 촌스러운 표지, 그래서 정감가는 표지

먼저 1988년 4월 1일 발행한 1988년 봄 창간호를 보자. 창간호 표지는 1884년 1월 3일 임동 상박실에서 태어나 당시 임하댐 수몰지구 ‘맛재’에 살고 있는 김봉이 노인이 그 주인공이었다. 조선말기부터 숱한 격변기를 거치면서도 오직 땅만을 일구며 묵묵히 안동과 더불어 살아온 안동의 예사사람을 창간호 표지인물로 정하면서 ‘안동’지의 상징성을 더했다.

안동지의 표지는, 풍경사진을 넣은 중간에 몇 번을 제외하고 지금까지도 안동의 평범한 사람들, 소문나지 않은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이웃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장식하고 있다. 세련된 디자인의 많은 잡지가 트렌드를 쫓을 때에도 ‘안동’지는 여전히 소박한 사람들이 자신의 집 앞에서 일터 앞에서 미소 짓거나 환하게 웃는 모습을 담아냈다. 계절별로 발간된 초창기의 표지인물중 2호에 구시장에서 국수집을 운영하는 조미화씨가 있다. 시집올 때 어머니가 지어주신 아홉세 삼베옷을 입고 표지를 장식했던 그녀의 모습은 앞으로 안동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우리네 보통사람이 혼수로 지어 입은 삼베옷을 입고 잡지 표지에 등장할 일이 없을 것이기에, 이 다시 볼 수 없는 풍경이 이채롭고 애잔하다. 3호에는 1988년 8월 1일 준 인간문화재(하회별신굿탈놀이 기능보유자)지정을 받은 이상호 씨의 모습을 담아냈다. 당시 15년 넘게 탈놀이에 몰두해왔다는 그는 지금은 40년 넘게 탈놀이에 몰두한 ‘인간문화재’가 되어 있다. 또 4호의 표지는 열세 살 나이에 세 동생과 한집안 살림을 떠맡은 열일곱 소녀가장 ‘김순희’양의 사진을 실었다. 우리는 이후 그녀가 궁금해 특집호에서 간호사가 된 그녀를 만났었고 100호 특집에도 그녀의 근황이 궁금했으나 연락할 길이 없어 만나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첫사랑 안동

1988년 가을 제3호에는 청빈하고 헌신적인 삶으로 존경받는 두봉 주교의 머릿글이 실리기도 했다. 때묻지 않고 순수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잡지이기를 바라며 고향은 안동이 아니더라도 이곳에 뼈를 묻고 사는 사람이 바로 안동사람이라는, 그리하여 두봉주교 자신은 ‘안동사람’으로 불리길 희망한다는 글이었다. 또 제4호에는 신부로서 첫임지인 안동을 ‘첫사랑 안동’이라 표현한 고 김수환 추기경과의 인터뷰 글이 실렸다. 충분히 공부하지는 못했으나 유교의 도덕과 윤리관이 가톨릭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고 말한 추기경은 그해 안동행에서 첫사랑에 대한 미련 때문에 예정에 없는 일정으로 하루를 더 묵으며 도산서원과 수몰지역 등을 둘러보고 상경했다는 내용이다.



 

당시의 유행을 알 수 있는 지면광고

전화국번이 한자릿수 2국으로 시작하던 그때, 지면에는 운영에 도움이 되는 상업광고가 지금보다 더 많이 실리곤 했다. 오랜 시간 사랑방 운영위원으로 함께 한 故 신경균 사장이 구시장에서 운영한 조양상회 광고가 전화국번이 한자릿수인 2국의 번호를 달고 박스광고로 실렸고 역시 구시장에 위치한 대구백화점 슈퍼체인, 시청앞 중앙통 네거리 영창피아노, 한때 청춘스타로 이름 날렸던 최수지가 광고모델로 나온 코카콜라 광고와 안동문화의 메카인 안동문화회관, 대광카메라, 서안동전화사, 대도카메라, 안동병원, 금호도시락 등이다. 특히 쌍방울 모시메리 안동대리점이었던 조양상회, 16bit 교육용 컴퓨터인 아이큐 슈퍼, 휴대용전화기 금성핸디폰 광고는 당시의 트렌드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시민들의 적극적인 지면 참여도 활성화

지금보다 훨씬 더 시사적인 문제도 많이 다루고 있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꼭지에서는 길안댐 건설에 대한 시민들의 의견을 싣기도 했다. 당시에도 길안댐 건설계획이 논의되었던 모양으로, 안동댐과 임하댐만으로도 대기오염과 호흡기질환으로 고통 받고 생태계 파괴를 우려하는 지역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총4명 시민들의 글이 실렸는데 이미 안동댐과 임하댐으로 인해 초가삼간일망정 정든 고샅길을, 손바닥이 거미줄처럼 갈라져가며 일군 산기슭 채마밭을 깡그리 수장하고 떠나는 이주민들의 아픔을 살피지 않고 국가발전이라는 공감되지 않는 정책 운운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주요 내용이었다.

글밭 동인이었던 故 백승초 시인은 〈안동인이 함께 읽는 시〉를 통해 ‘새벽녘 댐 긴 방죽에 나가보면 자욱한 안개의 군락/ 때문에 우리는 간혹 우리들 야윈 가슴에 슬픔이 물감/ 처럼 배어있음을 쉽사리 느끼게 될 것이다//(중략) 새벽녘 댐에 나가보라. 반란처럼 출몰하는 안개의/ 입자들이 예측할 수 없는 우리들 후박한 슬픔임을 우리가/ 스스로 알아야 할 때까지 그들은 끝내 발길을 돌리지 못한다.’(詩 댐, 안개, 슬픔 中)고 노래했다. 돌아갈 고향이 없는 수몰민들에겐 상실의 아픔을, 안개 자욱한 소도시에 거주하는 이들에겐 안개처럼 퍼지는 슬픔이 배가 되는 시다.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동네나들이>를 통해 가장 큰 변화를 이룬 옥동의 옛 모습도 볼 수 있다. 지금은 유흥업소와 아파트가 즐비한 옥동은 불과 25년 전에는 하이마, 미륵당, 관청골, 써랫골, 낙양촌, 추자나무골, 뱃머리, 절골 등 여덟 개 자연부락에 성좌원, 재활원, 복지원, 안동위생처리장 등 사회특수시설이 들어 있는 마을로 주민의 70%가 영세민인 동네였다. 1983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사한 안동농림고등학교(현한국생명과학고)에는 당시 총21 개 학급에 학생 수는 779명 그중 45명의 여학생이 있었다. 현재는 21개 학급에 총462명 그중 여학생이 121명으로 예전과 다르게 1/4정도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당시 마을 사람들의 주수입원은 비닐하우스 농사였다. 그러나 공사판 막노동에도 못 미치는 소득으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당시 토지구획사업으로 60만평의 대규모 신시가지 조성 계획이 이루어졌다고 하니 불야성을 이루며 시내 중앙통에서 ‘밤’의 거리로 바통을 이어받은 옥동의 변화가 새삼 놀라울 따름이다.

도시구조나 외관이 이렇듯 급변했다면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것은 사랑방 회비다.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후원회원, 정회원, 준회원, 일반구독회원이 후원회원, 사랑방회원, 구독회원으로 바뀌었지만 회비는 10만원, 4만원, 1만원으로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언제나 안동인이 필요로 하는 읽을거리의 제공자로, 향토문화와 지역발전의 방향을 모색하는 제언자로, 건전한 문화활동과 수준 높은 창작을 위한 비판지로서의 역할을 통하여 궁극적으로는 안동발전의 디딤돌이 되고자 한다”는 발간이념과 함께 해왔다. 계간에서 격월간으로 바뀌고도 26년 동안 한 번도 빠짐없이 발행된 ‘안동’지는 기차역과 안동병원, 시내 중심지인 삼산우체국 앞 성광칼라 등에서 시민들에게 무료 배부했다. 또 각 학교 도서실, 동사무소 등의 관공서에 지속적으로 우편발송을 했다. 아마 회원 중에는 창간호부터 빠짐없이 고이 간직하고 있는 분도 있을지도 모른다. 초창기 안동지를 보며 초심으로 돌아가 좀 더 안동사람들에게 고향의 따뜻한 사랑방 아랫목 같은 잡지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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