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호에서 30호까지(글/편집실)
‘안동사람의 삶과 생각을 담는 책’ 격월간 《안동》지가 해를 넘겨 만 스물여섯이 됐다. 20년이 훌쩍 넘는 세월에도 꼬박꼬박 회비를 내주고, 아낌없는 글 부조에, 발간이 늦어질 때면 궁금증에 전화 주는 독자가 있어 《안동》지는 이렇게 묵묵히 존재해 왔는지 모른다. ‘내 인생의 책’을 추천해 달라는 말에 ‘세상의 모든 잡지’라고 하던 소설가 김중혁의 글이 새삼 떠오른다. 과월호는 기껏해야 라면냄비 받침대로나 쓰일 ‘잡지’라는 존재는 생생한 우리네 삶을 구체적으로 담기에는 가장 적합한 매체이다. 그래서 감히, 《안동》지가 ‘안동사람의 삶과 생각을 담는 책’이라는 꾸밈 문구가 어색하지 않음에는, 오랜 세월 소박한 우리 안동사람의 이야기를 보탬도 뺌도 없이 해왔기에 가능했노라 말하고 싶다. 인터넷 시대에 넘쳐나는 글 속에서도 여전히 안동사람의 이야기에 귀기울여주는 독자들에게 《안동》지의 창간호부터 지금까지의 내용과 변화를 대강이나마 훑어보고자 한다. 《안동》지에 담긴 내용이 곧 안동의 이야기이자 변천사이기도 하니까.
기록의 힘,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자료
1988년 봄, 전통문화의 화려한 역사는 지녔으되 문화의 변방에 떨어진 안동이 처한 한계를 극복하는 신선한 새바람이 불기를 기대하며 안동지는 첫발을 내딛었다. “바람밭에 뿌리내린 조선솔이 커서 대들보감이 되듯이, 함께 이 디딤돌을 하나하나 맞들어 놓아 우리의 보금자리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을 가꾸어나가겠다”는 창간 당시의 의지를 다지며 안동지는 1990년 겨울호를 끝으로 1991년 3,4월호인 통권13호부터 격월간으로 발행됐다. 이즈음 사무실도 운흥동에서 지금의 서부동으로 이전했다. 목성교 사거리에 4층짜리 건물을 신축하며 권방사선과의원을 개원한 권세홍 편집위원장이 4층 사무실 한 칸을 사랑방 안동 사무실로 무상으로 내어주면서 지금에 이르게 됐다. 그는 2006년 권방사선과의원을 정리했는데 주인보다 객이 더 오래 머무르고 있는 형국이다.
13호에서 눈여겨볼 내용은 단연 1991년 2월 19일 있었던 길산吉山국민학교의 마지막 졸업식을 다룬 <특집>기사다. 학교 세종대왕상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에는 졸업생 최종렬, 김경일, 이후남 학생과 교장, 교감, 담임선생님의 씁쓸한 모습이 보인다. 당시 안동의 학교사 하나가 종결되는 의미 있는 행사에 평소 얼굴 내밀기 좋아하는 ‘내빈’이나 교육청 당국, 어느 언론사에서도 주목하지 않았던 썰렁한 졸업식이었다. 1945년 4월 20일 지례간이학교가 길산국민학교로 정식 개교한 이래 반세기의 역사를 마무리하는 장소에서는 이들의 마지막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려 참석한 사랑방 편집진과 마을에 편지를 배달하려고 들른 집배원 아저씨가 졸지에 귀빈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축구선수가 되겠다던 종렬이, 과학자가 되겠다던 경일이, 간호사가 되겠다는 후남이의 꿈이 30대가 된 지금 이루어졌는지 어떤지 무척 궁금하다. 교실 안 현수막에 “앞날의 성공과 영광을 빈다”는 문구가 마음 한편을 시리게 한다.
1991년 5,6월 통권14호부터는 <일간지 안동관련기사 색인>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인터넷도 일반화되어 있지 않던 시절에 일일이 일간신문을 읽으며 기록했을 손품, 발품 모두 팔았을 지난한 작업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새해 안동호에 주진교 가설공사 착공 -영남일보 3.6일 12면’, ‘안동 · 임하댐 인근주민 36명 농성. 안개로 농사피해 보상 요구 -영남일보 3.10일 12면’, ‘안동지역 셋방, 하숙비 폭등 -매일신문 3.12일 12면)’, ‘지방의회 선거, 주민에 물품 돌린 출마자 3명 입건 -매일신문 3.12일 13면’, ‘폭설피해, 축사 무너져 닭 2천마리 압사 -매일신문 3.12일 11면 경북일보 3.13일 13면)’, ‘용정교 올해 착공 -영남일보 3.16일 12면’, ‘현금, 하이타이 돌린 선거운동원 조사 -영남일보, 매일신문 3.26일 12면’, ‘비판세력 없는 시군의회, 야권 인사 거의 없어 행정시녀화 우려 -매일신문 3.28일 1면’등의 기사를 색인, 수록했다. 1991년 3월에 주진교 가설공사에 착공했고 용정교가 그해 착공, 지방의회 선거를 앞두고 현금과 하이타이를 돌린 선거운동원이 있었고 지방의회 선거는 여권의 일방적 승리로 끝나 행정시녀화가 우려된다는, 당시의 모습을 한눈에 읽을 수 있는 생생한 기사를 색인, 수록했다.
1991년 7,8월 통권15호에는 10월 개관을 목표로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는 안동민속박물관에 관한 글이 실렸는데 당시 필자는 안동대학박물관 조교 송승규 씨로 현재 그는 안동민속박물관장이다. 한 개인의 역사도 고스란히 안동지를 통해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가령, <안동인이 함께 읽는 시>등에 원고를 싣는 시인 중 교직에 몸담고 있는 필자가 대부분인데 그들의 발령지 변화까지도 알 수가 있으니 말이다.
바로 안동이기에 가능한 일
창간 5년을 맞았던 1992년 3,4월 통권19호에는 “이런 정도의 모양을 갖춘 책을 내려면 적잖은 부담이 있을텐데, 판매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가능하냐”는 외지인의 우려 섞인 질문에 “그것은 바로 안동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안동사람의 대답이 소개되어 있다. 전통과 문화에 대한 안동사람의 남다른 자긍심이 오늘날 안동지가 성인의 나이를 훌쩍 넘을 수 있도록 이끌어왔는지 모른다. 통권19호는 창간5년을 맞아서인지 뜻 깊은 내용들이 유독 많이 실려 있다.
먼저 안동댐 건설로 뒷동산만이 겨우 목을 내밀고 있는 고향마을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수몰민들의 설움을 달래줄 것을 호소하는 남윤수 씨의 <독자투고>글이 눈에 띈다. 시군통합이 되기 전인 당시 수몰민들을 위한 전시관과 공원묘지 건립, 와룡에서 예안 도목방면으로 배를 타고 가는 불편함을 호소하며 안동댐 횡단교 건설, 명승고적지를 관광코스로 개발하는 것과 순환버스 마련, 안동댐 오염방지책 마련 등을 안동군수에게 지면을 빌어 청원하였다. 그는 안동지의 후원회원으로 서울에서 법무사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안동지의 오랜 애독자다.
<문화시평>에는 새로운 세태로 자리 잡은 노래연습장에 대한 글이 있으니 세월의 변화가 놀라울 따름이다. 1992년 1월 당시 안동에 성업 중인 노래방이 8개, 곧 문을 열게 될 노래방도 서너 개였다고 한다. 3백 원을 넣고 노래 한곡을 부르는 시스템이었으며 방 하나 이용하는데 2천원의 사용료가 붙어 1시간에 거의 1만원의 비용이 들었다. 당시 취재를 맡았던 이금수 씨가 직접 노래방에서 노래까지 부르며 생생하게 취재했는데 마이클 잭슨과 람바다 화면을 보면서 불렀다고 하니 지금 보면 소박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참고로 이금수 씨의 노래 점수는 66점. 당시는 그나마 한곡의 노래도 끝까지 불러야하는 미덕이 남아있던 시대다. 시간당으로 계산하는 요즘은 별 호응이 없는 노래는 1절만 부른 후 가차 없이 강퇴를 당하는 형편이다.
영가지, 권정생, 천주마을이 모두 책 한권에
<서평>에는 국역 영가지에 관한 내용이 실렸다.‘드디어 햇빛을 봤다’ 는 표현은 영가지가 한글 완역본으로 출간된 뜻 깊은 해임을 알리는 내용이다. 향토한학자 이용구 선생과 안동지 편집위원 임세권 안동대 교수 등이 번역자로 참여했다. 영가지의 국역본이 발간되면서 영가지의 현장을 지상답사한 뜻 깊은 기획 취재물 <영가지의 현장> 연재를 길원여고 이동신 선생이 필자로 참여해 집필했다. 약 4백여 년 전 안동에 있었던 나룻터를 찾아나선 이 기획물에는 광탄 나루, 선어대 나루, 납오탄 나루, 와부탄 나루, 영호 나루에 관한 내용이 실렸다.
<안동에서 활동하는 문화예술인>그 첫 번째 인물로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에 관한 글이 실렸다. 가난과 병마를 글쓰기로 극복하고 있던 권정생 선생 댁에 안상학 시인이 김복영 발행인과 방문해 그의 작품세계와 근황 등을 소개한 내용이다. 1968년경부터 일직 조탑동에 기거한 선생은 당시 통 동화를 쓰지 못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동화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그는 “노신은 잡문이 중요하다고 했지만, 저는 아직도 동화에 미련이 커요. 잘된 동화 한편 읽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지요. 하물며 내가 한 편의 동화를 탈고하게 되면 그렇게 마음이 맑아질 수가 없어요.”하고 말했다. 좋은 동화 한편은 백번 설교보다 낫다는 선생의 명언이 떠오른다.
건강이 허락한다면 제일 하고 싶은 것이 장가가는 것과 논밭 두어 마지기 사서 농사를 짓는 것이라던 선생은 2007년 5월 우리 곁을 훌쩍 떠났다.
또, 초창기 <산촌기행>을 집필한 수필가 계화순 씨가 쓴 ‘학가산 꼭대기에 매달린 마을 서후면 천주’는 당시 10여 가구 2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오지마을 천주를 소개했다. 2백여 년 전에 상아동에서 옮겨 앉은 해주오씨들의 집성부락 천주마을은 최근 문화방송의 예능프로 ‘아빠 어디가’에서 아빠와 아이들이 다녀가며 유명세를 치르기도 했다.
수몰의 아픔, 풀 한포기도 기록으로 남기다
<안동인이 함께 읽는 시>에는 글밭동인 김윤한 시인이 쓴 ‘월곡 詩’가 실려 있다. 월곡 출신인 시인이 노래한 수몰의 아픔은 “명절 같은 날 오후쯤엔 무언가 자꾸 잇새에 끼인다.// 면소 붉은 양철지붕, 교남병원 마당 끝 작은 물도랑, 여름 초저녁 가설극장에서 틀어주는 낡은 노래소리, 대중식당 앞을 지나면 먹고 싶어라 짜장 볶는 내음, 장날 ‘아이-스께끼’를 외쳐대는 얼음장수, 달밤 우일약국 젊은 주인이 켜는 은빛 아코디언 소리// (중략) 방북허가서도 잠입 탈출도 소용없는 나라, 물 속 깊이깊이 갈앉아 이승에서는 도저히 갈 가망 없는 나라// 새벽 꿈 꾸다 일어나 잠시 아프다가 쓰린 기억 접어두고 부질없이 새로 돋아난 흰 머리칼 하나씩 뽑아내지만// 뽑아도 뽑아도 끈질기게 다시 돋는 흰 머리카락.”으로 그려진다. 당시 화두인 수몰지와 수몰민들에 대한 관심이 기획취재기사, 시, 독자투고 등을 통해 꾸준히 제기되고 실렸다. 안동지는 이렇듯 빨리 소모되는 다른 대중매체에 비해 심층 있는 내용을 다룰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으나 동시에 격월간 발행으로 시대흐름을 놓칠 수 있다는 단점도 있었다. 지역언론의 역할이 질적으로 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한 지금에 보니 발품 팔고 몸으로 직접 부딪치며 취재를 했던 무던하고 우직했던 예전의 안동지가 더욱 신뢰가 가는 대목이다. 시사적인 내용이 더욱 풍성하게 다루어진 예전에 비해 최근의 안동지는 어느 년 월을 갖다 붙여도 특별히 어색함을 느끼지 못하는, 즉 시대정신을 담아내면서 논란거리를 정면 돌파해 다루어내는 점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토착세력들의 자아비판과 상호비판이 자유롭게 오가고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는 지면도 부족하진 않았는지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
1992년 통권20호부터는 <안동지역의 산과 들에 피는 꽃>을 연재했다. 소백산 비로사 앞에서 찍
은 으름, 주왕산 중왕지 계곡의 금낭화, 풍천면 신성동 입구의 범부채, 일월산 중턱의 이질풀, 학가산 중턱의 떡갈나무, 소백산 초암산의 생강나무, 와룡 길가의 고들빼기, 주왕산 절골에서 솔나리, 도산면 의촌의 고구마, 청송 부동에서 낙동구절초와 투구꽃 등 소박한 우리네 꽃을 계절별로 시의적절하게 담아내 독자에게 그 유래와 의미, 분포지역 등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단 한쪽의 지면을 할애했음에도 이름 모를 길가의 풀 한포기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주는 정말 ‘안동’다운 기사였다.
광고의 변화
대학교 교양과목으로 채택되기도 했을 정도로 한때 볼링인구가 많았던 적이 있다. 안동시내 볼링장이 몇 군데 성황을 이루었는데 1990년대 초반 정점에 이르는 인기를 누리다가 점차 사라졌다. 한양아파트 지하에 있던 한양볼링장과 안동볼링장의 양대산맥을 이루던 AMF볼링장 광고가 눈길을 끈다. 구 안동교도소자리에 위치한 법흥동의 ‘AMF 볼링센터’의 광고지에는 단종된 차종이 보인다. 지금은 안동문화예술의전당이 문을 열면서 지하에 볼링장이 생겨 그나마 볼링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전화기 모양의 광고를 실은 ‘서안동전화사’는 지금은 택시운전을 하며 명물 ‘털보 아저씨’로 불리는 하회별신굿탈놀이보존회 전수조교 권태경 씨가 운영하던 사업체였다. 1992년 통권20호에는 용상동에 있다가 지금은 수상동으로 이전한 안동병원의 개원 10주년을 기념하는 광고가 게재됐다. 1982년 개원한 안동병원이 어느덧 30년을 훌쩍 넘어 백여 개 병상을 운영하던 규모에서 천여 개가 넘는 병상을 운영하는 규모의 병원이 되었다. 또 안동문화의 중심이자 상징이었던 동부동 안동문화회관의 광고도 여러 번 실렸는데, 1993년 9,10월 28호에는 개관 20주년을 맞이한 안동문화회관의 광고가 실렸다. 당시 500석의 대강당과 200명을 수용하는 연회장, 신용협동조합, 성바오로 서원, 식당, 여관 등이 입주해 있었다. 지금은 신축 건물에 경북문화콘텐츠진흥원이 들어서 있다. 이처럼 지금도 운영되는 사업체와 이제는 없어진 사업체, 그리고 남아 있는 사람과 가버린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그저 담백하게 실린 안동지. 예나 지금이나 강과 호수와 바다가 범람해도 고요하고 또렷하게 갈길 가는 시냇물처럼 흐르고 싶었다. 이 하 수상한 세상에서.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5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