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끄러운 향촌사회(글/정진영_본지 편집위원, 안동대 교수)

향안, 양반들의 명부

향안鄕案이란 조선시대 대체로 16세기 이후에 각 군현단위에서 작성된 양반들의 명부이다. 향안은 그 자체로서만 작성되고 존재하였던 것이 아니라 유향소留鄕所라는 조직과 향규鄕規라는 규약과 함께 한다. 

유향소란 향청鄕廳 또는 향소鄕所라고도 하였는데, 위로는 수령을 견제하고, 아래로는 향리들을 감독하는 양반들의 향촌자치조직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좌수와 별감이란 바로 이 유향소의 임원들이다. 향규라는 것은 유향소 조직을 운영하고 향안이라는 명부를 작성하는 데 필요한 제반 규약이다. 말하자면 유향소 좌수를 어떻게 선출해야 하고, 향안을 언제 어떠한 절차를 거쳐 작성해야 하는 지 등을 규정해 둔 것이다.



향안은 양반들의 명부였지만, 모든 양반들을 당연하게 수록한 것은 아니었다. 양반중의 양반만을 엄선해서 이름을 올린 것이다. 그래서 향안에 이름이 올려진 사람들은 스스로를 세족世族이니, 문벌門閥이니, 또는 청문사족淸門士族이라고 표현함으로써 그러하지 못한 양반들과 스스로를 차별하고자 하였다.

아무튼 조선시대 향안은 각 고을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좌수와 별감은 물론이고 향안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의 권위도 대단했다. 특히 “안동의 좌수는 나라님도 어쩌지 못한다.”고 하였고, 어떤 경우에는 향안에 들어가는 것을 벼슬하여 조정의 벼슬아치 명부[사판仕版]에 이름을 올리는 것과 같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조선후기 영남 대부분의 양반가에서는 과거와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였다. 이것이 오래 지속되면 명문양반가로 대우 받기란 사실상 어려워지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향안에 이름을 올리면 당당히 명문양반으로 행세할 수 있었고, 따라서 혼인에서도 크게 유리하였다. 반대로 향안에 들지 못한 사람들은 고을의 공식회의인 향회鄕會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양반으로서의 실질적인 특권을 행사하지 못하였던 셈이다. 그러나 향안에 든 양반과 들지 못한 양반의 차이란 극히 애매모호하였다. 이름을 올리지 못한 양반들은 지극히 원통하게 생각했다. 향안은 원칙적으로는 5년마다 새로운 인물들을 등록해야 했지만, 이것이 제대로 지켜지지는 않았다. 



향안은 각 고을마다 궤에 넣어져 봉인된 후 향청에 소중하게 보관되었다. 이렇게 보관되는 향안은 열람 또한 엄격하였다. 향안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을 향원鄕員이라고 하였는데, 이들은 물론이고 임원인 좌수와 별감들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었다. 마음대로 열람하게 내버려 두면, 혹시나 특정인을 향회를 거치지 않고도 써넣는 부정한 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향안을 열람하기 위해서는 대체로 전현직 임원으로 구성된 원로들이 동원되어 대단한 의식을 거행한 다음에야 가능하였다. 대단한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범상하게 대할 일이 아님을 과시했다. 권위는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양반들은 이런 식으로 그들의 권위를 만들어 나갔다.



 




향안에 오르지 못하는 사람들

양반이라고 해서 아무나 향안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대상자에 대한 자격 심사와 절차가 엄격했다. 그 자격은 대체로 “내외內外 사족士族으로 허물이 없는 자” 정도로 간단했다. 사족은 양반의 또 다른 이름이다. 

양반이 그러하듯이 사족이란 말도 항상 일정하게 쓰인 것만은 아니었다. 시기에 따라 조금씩 그 의미를 달리했다. 16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대체로 6품 이상의 벼슬에 올랐던 가문의 후손과 적어도 유학적 소양을 연마하는 학생이나 교생(校生: 향교의 생도) 이상이면 사족으로 취급하였다. 이렇게

보면 사족이라는 규정은 그리 까다로운 조건은 아닌 듯싶다. 



사족은 비사족과 비교하면 보다 분명해 진다. 비사족으로는 향리가 있고, 서얼이 있고, 백성이 있다. 향리는 지방의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이고, 서얼은 첩의 자식이다. 백성이란 이들을 제외한 양인 신분의 농민들을 지칭한다. 이들은 하는 역할이나 신분에 있어서 사족 혹은 양반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이들이 향안에서 일차적으로 배제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사족가문에서도 초기엔 이들과 혼인한 경우가 없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향안에서는 향리 서얼등과 결혼한 사족 가문도 모두 배제시켰다. 말하자면 향안에 이름을 올리는 그 당사자뿐만 아니라 친가, 외가, 처가의 출신성분을 심사하여 문제 삼았던 것이다. 



향안에 입록될 수 있는 자격은 바로 이상과 같은 신분상의 하자가 없는 경우를 말한다. 따라서 이미 이전의 향안에 참여하고 있다면 그 자체로서 사족이라는 것이 증명된다. 향안에의 참여를 향참鄕參이라고 하였다. 부모와 함께 처의 가문에서도 이미 향안에 참여하고 있는 경우를 흔히들 삼향三鄕 또는 삼참三參이라고 하였다. 삼참인 경우에는 자신에게 중대한 결함이 없다면 곧바로 향안에 오를 수 있었다. 



삼참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족이란 자격은 그냥 자격일 뿐이었다. 기존의 가입자[향원鄕員]들에게 가부를 묻고, 다시 향선생鄕先生이라는 전임자나 원로들에게 아뢰어 의견을 들어야 했다. 누구라도 반대가 있다면 향안 입록은 불가능하였다. 그러니 향안에 이름을 올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반대로 이름을 올리지 못한 사람들이 지역의 양반사회에서 느껴야 할 패배감과 소외감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향안에 오른 양반과 오르지 못한 양반의 차이는 극히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았다. 또한 그 자격 기준이 일관되게 관철된 것도 아니었다. 신분이라는 경계 자체가 원래 애매모호할 수밖에 없는데, 좀 더 하거나 덜한 양반의 구분이란 애초부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늘 문제가 생겼고, 분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향안 입록을 주관하였던 좌수와 별감들은 도리어 누락된 자들이 다음 기회에는 원통함을 설욕할 수 있길 간절히 바라는 실정이었다.



 




서얼의 반격

향안을 작성하는 이유는 누가 세족世族이고 누가 문벌門閥인지를 구별하여, 이들로 하여금 향촌의 풍속을 바로잡고자 함이었다. 세족과 문벌을 구별한다는 명목으로 서얼과 향리를 철저하게 차별했다. 향리와 서얼들은 모두가 사족인 양반과 같은 조상의 후예였다. 따라서 농민이나 노비와는 달리 양반과 비슷한 처지에서 경쟁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18세기 이후에는 향리들은 거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향리와 사족은 같은 조상에서 분화되었지만 점차 대수가 멀어지면서 확연히 구분되어 갔다. 또 정치와 행정 또는 학문과 실무라는 점에서도 상호간의 역할분담이 가능했다.

그러나 서얼의 문제는 18세기 이후에 더욱 심각해졌다. 적과 서는 아주 가까운 형제와 숙질 사이로도 존재하였고 또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었다. 더욱이 서얼과는 상호 나눌만한 역할도 달리 없었다. 서얼은 정치 사회적으로는 차별되고 있었지만, 경제적 또는 학문적 식견에 있어서는 적손 못지않은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서얼은 18세기 이후 각종 변란變亂에 적극 참여하거나, 적손 중심의 사회질서에 저항하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서얼은 특히 18세기 이후에 법적 또는 정치적인 측면에서 그들에게 가해지고 있던 차별을 철폐하는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들은 중앙관직에서만이 아니라 향안에 있어서도 적손인 사족과 함께 그것도 나이에 따라[서치序齒] 기록되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서얼의 요구는 영조 연간에 부분적으로 수용되다가 정조 원년(1777)에 이르러서는 거의 관철되었다. 

이제 서얼은 중앙의 관직에 대한 차별 철폐와 함께 향촌사회에서도 우두머리 자리를 제외하고는 적손嫡孫의 양반과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조정의 조치가 향촌사회에서 그대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특히 영남지역에서 그러하였다. 영조는 그 48년(1772)에 경상도 서얼 유생 3천여 명의 향안 참여에 대한 상소에 허락하는 답을 내렸다. 그러나 다음 날 이를 번복하는 소동을 벌였다. 영남 선비들의 반발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었고, 서얼에 대한 차별철폐 정책은 이후에도 계속 되고 있었다. 따라서 향촌의 양반들이 조정의 법을 계속해서 거부할 수는 없었다. 영남이라고 하여 다를 바 없었다.

향안에 서얼의 이름을 올린다는 것은 적통의 양반들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조정의 법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이를 최소화하기 위한 온갖 방법이 동원되었다. 안동의 경우에는 향안의 마지막에 새로 소통된 사람들이란 의미의 ‘신통新通’이라고 표기한 후에 서얼의 이름을 따로 모아서 기록했다. 또 나이도 60세 이상으로 한정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서얼을 차별함과 함께 그 수를 최대한으로 줄이고자 했다. 서얼들 또한 이를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60세 이상 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야 서얼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니지만, ‘신통’을 별도로 설치하여 차별한 것은 분명 위법이었다. 서얼들은 나라 법을 거론하며 강력히 항의했다. 안동의 양반들도 어쩔 수 없이 이미 만들었던 향안을 파기하고[파안罷案] 다시 작성할 수밖에 없었다.

적통의 양반 입장에서는 불만이 아닐 수 없었다. 불만은 결국 향안을 더 이상 작성하지 않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향안 작성 목적이 서얼 등을 차별하고자 한 것에 있었는데, 그것이 가능하지 않은 상황에서 굳이 계속 작성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사족들은 이미 몇 세대에 걸쳐 향안에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향촌사회에서의 신분적 특권과 사회적 권위를 이미 확보한 셈이었다. 굳이 신향新鄕이라 불리는 서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서얼이 기록되는 상황에서 가계상의 미미한 하자로 향안에 오르지 못하였던 여타의 양반들에 대해 거부할 명분도 없게 되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이런 사정으로 말미암아 향안을 더 이상 작성하지 않았다. 그러나 향촌사회에서의 다툼은 여전하였다. 



 




서얼의 반격

향안을 작성하는 이유는 누가 세족世族이고 누가 문벌門閥인지를 구별하여, 이들로 하여금 향촌의 풍속을 바로잡고자 함이었다. 세족과 문벌을 구별한다는 명목으로 서얼과 향리를 철저하게 차별했다. 향리와 서얼들은 모두가 사족인 양반과 같은 조상의 후예였다. 따라서 농민이나 노비와는 달리 양반과 비슷한 처지에서 경쟁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18세기 이후에는 향리들은 거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향리와 사족은 같은 조상에서 분화되었지만 점차 대수가 멀어지면서 확연히 구분되어 갔다. 또 정치와 행정 또는 학문과 실무라는 점에서도 상호간의 역할분담이 가능했다.



그러나 서얼의 문제는 18세기 이후에 더욱 심각해졌다. 적과 서는 아주 가까운 형제와 숙질 사이로도 존재하였고 또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었다. 더욱이 서얼과는 상호 나눌만한 역할도 달리 없었다. 서얼은 정치 사회적으로는 차별되고 있었지만, 경제적 또는 학문적 식견에 있어서는 적손 못지않은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서얼은 18세기 이후 각종 변란變亂에 적극 참여하거나, 적손 중심의 사회질서에 저항하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서얼은 특히 18세기 이후에 법적 또는 정치적인 측면에서 그들에게 가해지고 있던 차별을 철폐하는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들은 중앙관직에서만이 아니라 향안에 있어서도 적손인 사족과 함께 그것도 나이에 따라[서치序齒] 기록되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서얼의 요구는 영조 연간에 부분적으로 수용되다가 정조 원년(1777)에 이르러서는 거의 관철되었다. 

이제 서얼은 중앙의 관직에 대한 차별 철폐와 함께 향촌사회에서도 우두머리 자리를 제외하고는 적손嫡孫의 양반과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조정의 조치가 향촌사회에서 그대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특히 영남지역에서 그러하였다. 영조는 그 48년(1772)에 경상도 서얼 유생 3천여 명의 향안 참여에 대한 상소에 허락하는 답을 내렸다. 그러나 다음 날 이를 번복하는 소동을 벌였다. 영남 선비들의 반발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었고, 서얼에 대한 차별철폐 정책은 이후에도 계속 되고 있었다. 따라서 향촌의 양반들이 조정의 법을 계속해서 거부할 수는 없었다. 영남이라고 하여 다를 바 없었다.

향안에 서얼의 이름을 올린다는 것은 적통의 양반들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조정의 법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이를 최소화하기 위한 온갖 방법이 동원되었다. 안동의 경우에는 향안의 마지막에 새로 소통된 사람들이란 의미의 ‘신통新通’이라고 표기한 후에 서얼의 이름을 따로 모아서 기록했다. 또 나이도 60세 이상으로 한정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서얼을 차별함과 함께 그 수를 최대한으로 줄이고자 했다. 서얼들 또한 이를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60세 이상 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야 서얼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니지만, ‘신통’을 별도로 설치하여 차별한 것은 분명 위법이었다. 서얼들은 나라 법을 거론하며 강력히 항의했다. 안동의 양반들도 어쩔 수 없이 이미 만들었던 향안을 파기하고[파안罷案] 다시 작성할 수밖에 없었다.

적통의 양반 입장에서는 불만이 아닐 수 없었다. 불만은 결국 향안을 더 이상 작성하지 않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향안 작성 목적이 서얼 등을 차별하고자 한 것에 있었는데, 그것이 가능하지 않은 상황에서 굳이 계속 작성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사족들은 이미 몇 세대에 걸쳐 향안에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향촌사회에서의 신분적 특권과 사회적 권위를 이미 확보한 셈이었다. 굳이 신향新鄕이라 불리는 서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서얼이 기록되는 상황에서 가계상의 미미한 하자로 향안에 오르지 못하였던 여타의 양반들에 대해 거부할 명분도 없게 되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이런 사정으로 말미암아 향안을 더 이상 작성하지 않았다. 그러나 향촌사회에서의 다툼은 여전하였다. 



 




끝나지 않는 싸움, 향전

조선후기 향촌사회에서의 대립과 갈등은 향안을 둘러싸고 전개된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아주 다양한 요인으로 촉발되고 있었다. 이런 향촌사회에서의 대립과 갈등을 향전鄕戰이라고 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정치 또는 사회,경제적인 큰 변화와 발전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한편에서는 양반사회 내부에서의 분화와 분열이 가속화되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양반 이하 계층의 성장과 도전이 두드러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양반사회가 재편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전기에는 양반의 수도 적었지만, 본손本孫과 외손外孫이 전혀 차별되지 않았다. 사실상 한 지역의 양반들은 혼인관계를 통해 재산을 주고받으면서 서로 얽히고설켜 있었다. 이로써 양반들의 혈연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었다. 그러나 16, 17세기를 거치면서 종법宗法이라는 것이 보급되고 확산되

면서 본손과 외손은 점차 구별되어 갔다. 종법이란 적장자를 중심으로 한 부계혈통의 친족체제를 수립해 가는 것을 말한다. 부계혈통을 중시하게 되면 외손이란 이제 큰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혼인을 통한 다른 성씨와의 관계는 점차 연대가 아니라 경쟁관계로 전환되어 갈 뿐이었다. 



조선후기에 문벌門閥이 중시되면서 지역사회에서는 성씨 간 심지어는 동성의 문중 간에도 우열 경쟁이 격화되었다. 양반사회 내부에서는 조그마한 문제에도 서로 시비하고 불화하였다. 서원에 선현先賢의 위패를 모시는데 누구를 왼쪽에 두고 누구를 오른쪽에 둘 것인지, 누가 누구의 제자인지 아닌지 등을 두고 치열하게 다툼을 벌였다. 문집 간행에 한 두 글귀를 두고서도 지루하게 왈가왈부하였다. 뿐만 아니라 집안 내부에서는 종통宗統 시비와 적서嫡庶 갈등이 심각한 경우도 많았다. 산이나 전답의 소유와 묘지 개설을 둘러싼 소송과 갈등도 심각했다. 이러한 대립과 갈등은 양반 상호간 혹은 양반과 서얼․하층민과의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양반 상호간의 갈등과 대립은 수십 수백 년을 두고 계속되기도 하였다. 



영남의 양반들은 정치적으로는 대체로 남인의 입장을 고수해 왔다. 그러나 17세기 중반이후에 점차 중앙관료로의 진출이 차단되고, 소외되면서 향촌사회에 대한 관심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일찍부터 영남의 양반들은 향촌사회를 기반 하여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집권세력과 대립해 왔다. 따라서 노론과 세도정권은 영남 남인들에게 향촌사회를 전적으로 내맡길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비판과 도전을 사전에 둔화시킬 필요가 절실하였다. 이들은 이 시기 새롭게 흥기하고 있었던 서얼이나 노론으로 전향한 세력들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고 두둔함으로써 이들로 하여금 영남의 전통적인 지배세력인 남인과 지루한 향전을 전개하게 하였다. 



안동에서는 새로 노론으로 전향한 세력들이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 서원을 건립하고자 하였다. 노론의 감사와 안동과 인근의 수령들이 이를 적극 지원하였음은 물론이다. 노론은 이 서원을 거점으로 하여 남인세력의 중심지인 안동을 제압하고, 나아가 영남을 조종하고자 했다. 안동의 선비들로서는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완공 직전의 서원을 부셔버렸다. 주동자가 귀양을 갔지만, 서원은 다시 새워지지 못하였다. 



영해에서는 수령이 향교에서 거행하는 석전제釋奠祭에 노론계 서얼들을 제관으로 추천하였다. 남

인계 적손들이 이를 거부했다. 수령은 이들을 구금하면서까지 서얼들을 참여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경상감사가 교체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영남의 여러 고을 선비들도 통문通文을 돌려 조직적으로 항의했다. 이로 말미암아 수령은 파직罷職 되고, 적,서의 핵심인물 14명도 함께 귀양길에 올랐다. 이렇듯 향전은 지역사회 내부의 적서나 남인과 노론의 대립, 갈등만이 아니라 그 배후에는 노론 집권세력의 적극적인 지원과 조종이 있었다. 



향전을 통해 노론 세력이 향촌사회를 장악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고서도 영남의 남인들을 향촌사회에 묶어 둘 수는 있었다. 반대로 향촌사회의 자질구레한 싸움에 늘 휘말려들었던 영남의 남인들은 노론과 세도권력의 전제정치에 무기력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영남의 남인세력은 오랫동안 재야세력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남인의 오랜 재야생활은 새로운 문물이나 세상의 흐름으로부터도 멀어지게 하였다. 자신 있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옛 것이었다. 옛 것을 고쳐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묵수하고 고수할 뿐이었다. 묵수와 고수로는 새로운 세상에 대응할 수 없었다. 



영남의 남인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정조의 등극이 그랬고, 대원군의 집권이 그러했다. 모두가 남인을 적극 지원했고, 남인으로 자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남의 선비들은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국정에 대한 경험도,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갈 경륜도 없었고, 새로운 비전도 갖추지 못했다. 이래선 기득권 세력이 아무리 문제가 많다 하더라도 그것을 역사의 뒤안길로 밀어낼 수는 없다. 그저 후견인의 운명과 함께 하는 종속적인 변수에 불과할 뿐이었다. 이것이 영남 남인의 한계였다.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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