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 읽기(글/이순구_안동대 식물의학과 교수)

I.

밀란 쿤데라의 글 하나: 그는 이웃 사람들, 동료들, 자신의 아이들, 애인, 아내에 의한 저 끊임없는 감시가 고통스러웠다. “어디 있었니? 어디 가니? 왜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않니? 대답해 봐!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야? 무얼 생각하는 거지? 이 순간 무얼 생각하는 거야, 말해!” 어느 날 그는 문을 걸어 잠갔다. 사람들이 문을 두드렸다. 그는 침묵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창문을 통해 그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커튼을 쳤다. 그러자 사람들이 구멍을 뚫었다. 그는 자신을 관찰하는 눈을 보았다. 다음 날 아침 다섯 시에 그는 모자를 쓰고 몇 권의 책과 우산을 집어 들었다. 서른 세 시간을 걸어간 후에, 그는 텅 비어 있고 전망이 툭 트인 곳에 자리를 잡았다.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그는 영원히 그곳에 있겠다고 결심했다. 우선 그는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려고 했다. 혼자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완벽한 행복이었으므로 그는 그러한 행복을 순수한 상태로 즐기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는 신기하게도 저절로 채워지는 잔으로 이따금 한 모금의 커피를 마시는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화가가 그를 발견하였다. 그 화가는 망원경을 통하여 그 남자를 오래 관찰한 후 그를 그림으로 그렸다. 뒤쪽에서, 음흉하게, 마치 살인자처럼! 사진사의 더러운 놀이에 탐닉하는 화가들에게 재앙 있어라! 한 고독한 남자가 택한 도주를 욕되게 하는 저 자들을 처형하고 거세시켜 버려라! 여러분 모두에게 간청하는 바이다. 저 밀정의 그림이 눈에 띄는 즉시 그 자리에서 없애주시기를. 요컨대 그 남자가 그 그림을 보는 일만은 절대로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그림을 보자마자 그 남자의 행복은 부서질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 그 남자가 어떻게 될는지 나는 모른다, 정말 모른다!(책그림책(원제:BuchBilderBuch)/ 밀란쿤데라, 미셸 트루니에 외 저, 크빈트 부흐홀츠 그림, 장희창 옮김/ 2001/ 민음사)  



함부로 카메라를 들고 그 사람의 뒷모습을 사진 찍었던 내 자신! 참으로 한심하도록 부끄럽다. 비겁하게 뒤에서 손가락질했고, 안보는 데서 함부로 그를 비방했고, 비열하게 뒤에서 총을 쏘았다. 밀란

쿤데라는 사진 찍히는 것을 싫어해서 그의 사진은 단지 2-3종의 측면 사진만 나와 있을 뿐이다. 그가 이데올로지(Ideology)라는 말과 더불어 이마골로지(Imagology)라는 말(그가 지어냈다)을 무시무시하도록 싫어하는 것, 내 마음에 꼭 든다. 가출하여 책 속에 마냥 앉아 있는 달밤은 예전에 내가 꿈꾸었던 바로 그 세계다. 그림 속의 뒷모습을 돌려보면 바로 내 얼굴이 거기에 있을 것 같다. 



밀란 쿤데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났다. 1975년 프랑스에 정착하였다. 



소개문에는 그 두 문장만 집어 넣어주기를 고집하는 작가. 작가는 바로 그 작품이다. 그 작품(소설) 뒤에서 작가는 죽어야 한다. 작가가 자기 작품 앞에서 자기 약력을 소개하고 제 얼굴을 내미는 것은 정말 볼썽사납다. 작가의 그 내걸린 얼굴을 책 소개에서 아주 흔하게 많이 본다. 특히 우리나라 인터넷 서점에서 그런 경우를 많이 본다. 쿤데라는 자기 작품에 해설이 실리는 것을 원치 않고, 잘못된 설명이나 사견이 개입되어 자신의 소설이 곡해되는 것을 유달리 싫어했다고 한다.(밀란 쿤데라 읽기/ 박성창 외/ 2013/ 민음사.)


II.

1970년 봄, 아마 5월쯤이리라, 부산의 그 다니기 싫었던 시커멓고 어두컴컴한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때였다. 나는 그때 문과 특별반에 있었다. 내 짝은 문과 전체 수석이었던 고두헌 군이었다. 나는 그를 울산 촌놈이라고 했다. 1학년 때의 내 짝은 거제 촌놈으로 자기 말로는 거제중학교를 1등으로 졸업했다고 했지만 우리 반에서의 그의 석차는 거의 꽁지 수준이었다. 1학년 때는 문과 이과 구분이 없었지만 2학년부터는 문과 이과를 나누었고 문과 3학급, 이과 6학급이었다. 그 중 한 반씩 성적 좋은 학생들을 추려서 특별반을 만들어 S대 진학을 독려했다. 당시 그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잘한 친구들은 대개 촌놈들이었다. 촌놈들은 중학교를 부산 이외의 경남 지역에서 다닌 친구들이었다. 대부분 촌에서 부산으로 유학 온 셈으로, 집안이 가난해서 공부 이외의 다른 취미생활을 할 여력이 없어서 공부만 열심히 쫓았던 것 같다. 하기사 공부가 제일 헐한 취미가 맞기는 맞다. 문과 특별반 담임선생은 H선생으로 경북사대 영어과를 졸업하신 분으로 젊고 패기 넘치며 자신만만하면서 강직한 그런 선생님(당시 부산의 공립중고등학교 교사는 거의 대부분 경북사대 출신이었음)이었다. 어렵고 가난한 집 아이가 더 공부를 잘 했던 그 시절이 지금 세상보다 훨씬 더 정의로운 사회였음에 틀림없다. 우리 집도 다른 집에 비해 형편이 어려워서였을까, 나도 그런대로 공부를 잘 했다.



어느 날 H선생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책가방 검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내 책가방에서 흘러나온 헌 책방에서 산 구질구질한 소설책들과 시집들을 보고 그 분은 정말 분노하셨다. 책가방에는 교과서 참고서 문제집만이 있어야 하지, 그런 잡스러운 책들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뺨을 수없이 얻어맞았고 급기야는 엄마가 학교에 와서 그 담임 선생님께 빌어야 했다. 그 선생님은 그때 내게 자퇴하라고 했다. 내가 진정 가출할 여건만 되었어도 아예 집과 학교 모두를 도망칠 생각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냥 꾹꾹 참고(진정한 용기도 돈도 없어서), 학교를 다녔다. 다니기 싫은 학교를 그냥 억지로 억지로 다녔다. 출세와 일류대학만을 생각하며 입시공부만 해야 했던 시절, 그 시절. 지금도 무엇 하나 다를 바 없다. 오히려 있는 집 아이들이 공부를 더 잘하는, 더 나쁜 세상이 된 것이 다를 뿐이다. 2학년 2학기가 되어, 나의 성적도 많이 떨어져서 특별반에서 쫓겨나 문과 보통반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 굴욕감은 지금 생각해도 식은땀이 난다. 그 H 선생은 그 후 일선 교단을 떠나 문교부(교육부)에서 교육행정 근무도 하시다가 나중에 부산 시내에서 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 퇴임하셨다. 나는 그 후 한 번도 그 분을 찾아가거나 만난 적이 없다. 



그런 고교 때의 버릇처럼 지금도 나는 그 구질구질한 문학책들을 읽고 있다. 그 해 2학기에 보통 문과반으로 쫓겨난 나는 이전보다 더 문학책에 빠져서 수업시간에도 몰래 그런 책들을 예사로 읽었다. 어느 날 수학 시간에 풀어야 할 수학문제는 풀지 않고 교실 뒷자리에 엎드려 딴 책만 보던 나는 그만 그 수학 선생님(이동철 선생)에게 들키고 말았다. 눈앞에 불호령이 날 줄만 알고 둔 눈을 꼭 감고 맞을 자세로 서 있었는데 천사처럼 차분한 함경도 말씨로 그 선생님은, “야 이 친구, 순구야, 네가 이다음에 유명한 소설가 시인이 되더라도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이 수학 공부, 문제풀이를 하지 않으면 자네에게 손해나 불이익이 가는 거야. 이런 수학 공부할 시간은 다시는 오지 않는 게야. 지금 수학 공부하는 것이 자네한테 좋은 효과를 주는 것이지 결코 나쁜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니, 공부를 하게.” 그 말씀에 그만 내 마음이 스르르 녹아서, 그 시간 이후에는 하루 한 시간 이상 꼭 수학 공부를 스스로 했다.



그리고 학기말이 되자 문과에서는 내 수학 성적이 가장 높았다. 그리고 3학년 진학할 때는 문과 그 특별반에 다시 들어가는 것 보다 이과 특별반에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고3에 그만 자연계 대학 지망생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S대에도 그 덕으로 순조롭게 진학할 수 있었다. 3학년 때 내 짝은 밀양 촌놈 안병윤이었다. 그도 나와 같이 S대학교 농화학과를 진학했고 졸업후 KAIST에서 석사, 미국 피츠버그 대학에서, 박사 학위 취득하고, NIH(미국 보건연구소) 연구원으로 오랫동안 근무하다가 고려대학교 생물공학원 교수가 되었다. 어느 학회에서 바로 그 밀양 촌놈이 나를 보고, “오랜만이다. 이 안동 촌놈아!”라고 말한다.



 



 


III.

밀란 쿤데라의 소설이든 평론이든 거기엔 문사철文史哲이 다 들어 있다. 문文과 사史는 일본어로는 그 훈독이 ‘후미’로 똑같다. 문학 사학, 철학을 따로 따로 다른 학문인양 나누는 것을 작가는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다. 새로 나온 전집(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밀란 쿤데라의 전집이 작년(2013년)에 민음사에서 간행되었다) 속의 책 표지 그림은 모두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 1898-1967)의 그림들로 다 바꾸어 놓았다. 내가 그 화가를 좋아하는 줄 어떻게 출판사가 알았는지 모르겠다. 나만 좋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물론 좋아하는 것이 사실이리라. 표지 디자인 그것도 밀란 쿤데라의 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내가 민음사를 좋아하는 이유는 내 취향에 잘 맞는 책을 많이 출판하기 때문이다. 내가 시집 같은 것을 좋아하는 줄 어떻게 그 출판사가 잘 알아차리고 아주 저렴한 문고판이지만, 참 예쁘게 잘 만든 세계의 시인 선집이나, 우리 시인들의 시집들, 또 김수영 전집 같은 책들! 얼마나 내가 애지중지했고 또 지금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른다.



18:55, 20 April 2014, 방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 쿤데라 원작/ 1984/ 이재룡 옮김/ 1999/ 민음사 세계문학전집234) 다 읽다(독료讀了). 프랑시스 피카비아의 ‘열대’라는 그림이 표지로 되어있다. 그림이 소설내용을 그대로 잘 말하고 있다. 여자가 남자를 붙잡고 키스하려고 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풍경이다. 프란시스 피카비아가 누군지 나는 모른다. 그림은 아주 현대적이면서 표현주의, 야수파 그림이다. 오늘 일요일, 부활절이지만 거의 책상에 꼭 붙어서 꼼짝하지 않고 하루 종일 이 책만 읽었다. 읽는 사람을 꽉 붙잡는 그런 소설이다. 소설은 말한다.

“그러나 이 세계는 너무나 추해서 누구도 죽은 자 사이에서 부활하기를 원치 않았다.” 



1988년 가을, 민음사에서 발간하는 계간 ‘세계의 문학’에 실린 서울대 독문학과 송동준 교수의 번역으로, 맨 처음 나는 이 소설을 읽었었다. 안동에 이사 오기 1년 전이다. 그때는 독문역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으로 읽었고, 이번에는 불문역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을 읽었다. 작가는 이 소설을 1982년 체코어로 완성하고 1984년 프랑스어로 처음 출판했다. 밀란 쿤데라는 불어 번역본을 이 책의 저자 인정본이라고 주장했고 그것을 기본으로 해서 나중에 체코어로 다시 한 번 더 썼다고 한다. 발표된 쿤데라의 많은 소설 작품들은 거의 모두 7개 장章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로 일곱 부部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베토벤의 음악 중 가장 훌륭한 걸작으로 꼽고 있는, 후기 현악4중주곡 중, 제14번 작품번호 131번의 악장 구성을 그대로 흉내낸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마치 음악의 작품번호(opus number)처럼 밀란 쿤데라의 작품번호 제6번이다. 나의 이번 이 글도 그를 똑같이 모방하여 7개의 장으로 나누어 서술한다. 밀란 쿤데라는 그의 첫 장편 〈농담〉에서 사용했던 다성악적인 구성을 이 소설에서도 그대로 사용한다. 소설의 다성악적인 구성이란 다수의 인물들이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말하면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방법이다. 러시아 형식주의 비평가인 미하일 바흐친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과 〈죄와 벌〉 등을 분석하면서 이 용어를 사용했다. 이를 대화체 구조(dialogic structure)라고도 한다.(한 권으로 읽는 밀란 쿤데라/ 김규진/ 2013/ 21세기북스.) 작가가 음악에 조예가 깊기에 소설도 마치 음악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소설의 미래는 에세이라는 것을 이 소설도 여실히 증명한다.



거의 26년 만에 이번에 그 소설을 다시 정독精讀했다. 거의 일주일 걸려서 샅샅이 혀로 핥듯이 게걸스럽게 읽었다. 여기엔 철학이 있고, 미학이 있고 문학과 현대 및 근대 체코의 역사가 고스란히 들어 있다. 그리고 베토벤의 현악4중주 16번 작품번호 135번의 4악장(Muss es sein? ; Es muss sein, 꼭 그래야 되는가? ; 꼭 그렇게 해야만 된다!)이, 책 속에 악보를 그대로 내밀고 있다. 책 속에는 아름다운 작가의 고집이 그대로 들어 있다. 레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리나〉가 이 소설 속에 통째로 들어와 있다. 〈안나 카레리나〉에 나오는 두 쌍 즉 안나와 브론스키, 레빈과 키티의 운명과 대비처럼 이 소설도 남녀 네 사람이 두 커플로 나온다. 두 소설 모두 한 커플은 한 사람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고, 다른 커플은 시골 전원에서 행복을 추구한다.  (한 권으로 읽는 밀란 쿤데라/ 김규진/ 2013/ 21세기북스.) 개 한 마리가 바로 또 다른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소설 속에 들어온다. 이름이 바로 ‘칼레닌’이다. 암캐인데도 남자이름(안나의 남편 성명)을 붙였다. 소설의 주인공 테레자가 처음에 들고 다니는 소설책이 바로 〈안나 카레리나〉인데, 나중에 테레자는 그 개에게 마음을 붙여 항상 데리고 다닌다. 그러면서 체호프의 유명한 중편 소설인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이 바로 주인공 테레자의 또 다른 분신으로 전환되기도 한다.?“기존의 삶의 사실에 거짓말을 하고 몰래 만난다. 어느 것이 그 자신의 삶의 사실인지 모른다. ……모든 것이 가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키치(Kitch)를 저주하면서 키치를 이용하는 그 교묘함에 탄복한다. 참을 수 없는 그 가벼움을 키치라고 하면서 그 키치적인 발상으로 가득 찬 소설이다. 징글징글하다. 



 


IV.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소설 첫머리에, 니체의 ‘영원한 반복(회귀; 回歸)’이란 철학적 명제를 언급하면서 이야기의 실마리를 제시한다. 그는 만일 영원한 반복이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우리의 인생은 찬란한 가벼움으로 그 짐에 대해 끝까지 버틸 수 있다고 언급했다.?“그러나 실제로 무거움은 무서운 것이며, 가벼움은 찬란한 것일까? 가장 무거운 짐은 우리를 짓누르고 우리는 그 밑에 깔려 결국 그 짐은 우리를 땅에 처박는다. 그러나 전 세기에 걸쳐 사랑의 시에서 여자는 남자의 몸무게에 짓눌림 당하기를 갈망하고 있다. 그러므로 가장 무거운 짐은 동시에 인생의 가장 집중된 충만이 만든 형상이다. 짐이 무거울수록 우리의 인생은 땅에 더 가깝고, 더 실제적이며 더 진실하다.’ 이어서 쿤데라는 기원전 6세기 경의 그리스 철학자 파르메니데스의 대립 이론을 언급함으로서 소설의 사상적 배경을 암시하고, 나아가 사랑과 성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규명한다. 인간이 가장 충만하게 느끼는 순간인 섹스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문제인 사랑을 네 사람의 주인공을 통해서 풀어나간다.?



“파르메니데스는 전 세계를 두 개의 대립되는 것으로 보았다. 즉 빛과 어둠, 부드러움과 거침, 따스함과 차가움, 존재와 비존재. 그에 따르면 이 대립의 한 쪽은 긍정적이며(빛, 부드러움, 따스함, 존재), 다른 한 쪽은 부정적이다. 우리는 이 긍정과 부정으로 양분하는 것을 유치할 정도로 간단하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법칙에도 예외가 있듯이 여기에도 예외가 있다. 무거움과 가벼움 중 어느 것이 긍정적일까?

파르메니데스는 가벼움이 긍정적이며 무거움이 부정적이라고 대답한다. 그는 옳았을까 틀렸을까? 그것이 문제다. 오직 확실한 것은 무거움과 가벼움의 대립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신비한 것이며 가장 애매한 것이다.”(한 권으로 읽는 밀란 쿤데라/ 김규진/ 2013/ 21세기북스)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으면서 줄 친 부분을 다시 되새김 한다. 나는 이 소설에 나오는 네 사람의 남녀 중 가장 중요한 주인공을 관찰자 혹은 서술자로 나오는 ‘사비나’로 본다. 그녀의 이름 자체가 유럽을 떠나서 먼 극동 15세기 일본에서 카톨릭을 전파한 자비에르(Xavier) 성인을 상기시킨다. 모험정신이 없이는 고향을 떠날 수 없다. 그리고 또 그 모험은 다시 아프리카 사반나(수목과 초지, 습지가 혼합된 생태계)에서 주로 야생동물을 사냥하는 것을 상기시킨다.



한 인생의 드라마는 항상 무거움의 은유로 표현될 수 있다. 사람들은 우리 어깨에 짐이 얹혔다고 말한다. 이 짐을 지고 견디거나, 또는 견디지 못하고 이것과 더불어 싸우다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 ……그녀의 드라마는 무거움이 아니라 가벼움의 드라마였다. 그녀를 짓눌렸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부모, 남편, 사랑, 조국까지 배반할 수 있지만 더 이상 부모도 남편도 사랑도 조국도 없을 때 배반할 만한 그 무엇이 남아 있을까?……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는 항상 베일에 가린 법이다. 결혼을 원하는 처녀는 자기도 전혀 모르는 어떤 것을 갈망하는 것이다. 명예를 추구하는 청년은 명예가 무엇인지 결코 모른다. 우리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항상 철저한 미지의 그 무엇이다. 사비나 역시 배신의 욕망 뒤에 숨어 있는 목표가 무엇인지 모른다.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이것이 목표일까? 제네바를 떠나온 이래 그녀는 이 목표에 부쩍 가까워졌다(제3부 이해받지 못한 말들 p.201-202).

“……마치 그녀 그림의 한 점처럼 토마시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마치 전경에 서툰 화가가 그린 가짜 무대 장치처럼 돈 주앙의 모습이 있다. 무대 장치 틈 사이로 트리스탄이 보였다. 그는 돈주앙이 아니라 트리스탄으로 죽은 것이다. 사비나의 부모는 같은 주에 세상을 떠났다. 토마시와 테라자는 (교통사고로) 같은 순간에 죽었다. 갑자기 그녀는 프란츠와 함께 있고 싶어졌다(p205).” 그녀는 바로 그 프란츠를 배반하고 떠났던 것이다. 프란츠는 대학 교수로 당대의 얼치기 지식인인 체하는 사람이다. 그 지식인 체하는 것이 바로 위선일진데 우리나라의 대학 교수들도 거의 같은 부류라고 할 수 있다. 그 위선의 농도가 얼마나 짙은가 묽은가의 정도 차이만 있을 뿐이다. 소설에서는 그것을 키치 (영어의 sketch에서 온 말로, 본래는 예술상의 저속한 값 없는 작품을 말하며, ‘시시한’, ‘보잘것없는’, ‘저급한’이란 뜻).라고 하면서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어 및 주제어로 부각시킨다. 소설 속에 키치에 대한 한 챕터가 있을 정도로 그 설명이 길게 전개된다. 



나는 이 키치를 위선으로 번역하고 싶다. 진정한 예술 작품이 아닌 이발소 그림 같은 것이 바로 키치인데 우리 사회에는 정말 그 키치들이 많다. 너무 많아서 그것이 오히려 진짜배기 도덕, 진실이라고 호도하기도 한다. 마록馬鹿을 일본 발음으로 ‘빠가’라고 하며 ‘바보’를 지칭한다. 사슴을 보고 말이라고 하는 이를 바보라고 하듯이, 그것을 강요할 때 어쩔 수 없이(자기가 바보라는 생각은 추호도 없이) 말을 보고 사슴이라고 거꾸로 생떼를 쓰기도 한다. 특히 어린 사람이나 젊은이들의 고집에서 그런 것을 많이 본다.



소설 속에서 토마시는 영어식으로는 토마스다. 토마시는 ‘einmal ist keinmal(한번은 중요하지 않다. 한번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다. 한번은 셈에 들지 않는다)’이라는 문장에서 태어났다. 인생은 1회성(一回性; einmal), 단 한 번 뿐인데 1회성은 또 아무 것도 아니다(‘einmal ist keinmal’). 테레자는 배 속이 편치 않을 때 나는 꾸르륵 소리에서 태어났다(제2부 영혼과 육체 p69, p94). 그 여자는 마치 아기 모세가 강물에 바구니로 띄워서 도착했듯, 오디푸스 아기가 또 그렇게 우연히 주워서 키워졌듯이 그녀가 처음 프라하에 와서 그의 아파트를 찾아 왔을 때, 그녀의 뱃속이 안 좋은 바람에 아주 우연하게도 필연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



나의 가톨릭 세례명도 그 이름이다. 그 이름을 내가 선택했다. 토마스 성인(예수의 부활을 의심하여 직접 그 상처를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려고 한다)은 의심이 많고 탐구심이 많다. 토마시는 특히 여자, 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을 성적性的으로 다 알고 싶어 한다. 그가 알고 싶은 것은 성적으로 아주 미세하게 다른 여자들 반응의 그 작은 차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내용이 나쁘거나 아주 사악하게 읽히지 않는 것이 이 소설을 읽는 재미다.



이 소설이 영화화되어 우리나라에서는 “프라하의 봄”이라는 이름으로 상영되고 비디오 및 DVD로 출시되었지만 청소년 절대관람불가다. 소설로서는 청소년도 절대로 봐도 됨이다. 1988년 필립 카우프만에 의해 할리우드에서 영어대사로 영화화되어 나는 1989년 청주의 어느 영화관에서 그 영화를 보았고 나중에는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려도 보았으며, 그리고 최근에는 성인인증을 하고 그 DVD를 샀다. 영화를 근 다섯 번도 더 본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줄리엣 비노쉬가 테레자 역을 하고 다니엘 데이루이스가 토마시 배역을 맡았다. 



영화는 한 남자를 사이에 둔 애정의 삼각관계로 원작을 왜곡시켰다. 토마시는 돈쥬앙 행사를 하지만 그를 그 누구도 강간범으로 고발하지 않는 그 재주와 용기, 그리고 그 유혹적인 눈초리와 잘 생긴 얼굴 용모는 정말 가상할 정도다(상상력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꼭 영화를 봐야 한다). 그리고 그런 수많은 여자를 건드린 그도 진정 그를 떠날 수 없는 여자, 마누라 같은 여자가 있으니 바로 테레자다. 테레자라는 이름은 땅, 토지, 경작지를 상기시킨다. 남자가 하늘이라면 여자는 땅이다. 바로 소설 속의

테레자가 그 땅 역할을 한다. 토마시가 남자로서 하늘처럼, 제우스처럼, 또 어떤 때는 헤르메스처럼 행동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나 헤르메스는 보통 바람둥이가 아니다. 그런 그가 테레자를 결코 내치지 않고 오히려 보호하려고 애쓰는 모습은 바로 바그너의 가극 ‘트리스탄과 이졸데’처럼 테레자를 극진하게 사랑하는 것이다. 토마시는 의사에서 유리창 청소부, 그리고 도시근교 농사일을 돕는 트럭운전수로 전락하는 것도 그의 “오디푸스가 자기 잘못(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잘못)을 알고 자기 눈을 찔렀다”는 신화를 공산당 사람들을 빗대어 잡지에 쓴 글과 그의 테레자를 향한 애정 때문이다.?“우리 모두는 사랑이란 뭔가 가벼운 것, 전혀 무게가 나가지 않는 무엇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반드시 이런 것이어야 한다고 상상한다. 또한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삶도 더 이상 삶이 아닐 거라고 믿는다. 침울한 베토벤도 “Es muss sein(틀림없이 그렇다)!”을 우리의 위대한 사랑을 위해 연주했다고 확신한다(제1부 가벼움과 무거움 page 63-64)”. “앞은 파악할 수 있는 거짓이고, 뒤는 이해할 수 없는 진리였지.” 토마시는 사랑과 성행위는 서로 다른 두 세계라는 생각을 그녀(테레자)에게 이해시키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녀는 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그녀는 세상일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며 매사를 비극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육체적 사랑의 가벼움과 유쾌한 허망함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가벼움을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시대착오적인 사고로부터 벗어나는 법을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키치의 풍경들: 1) 그녀(사비나)는 공산주의, 파시즘, 모든 점령, 모든 침공은 보다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어떤 악을 은폐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 악의 이미지는 팔을 치켜들고 입을 맞춰 똑 같은 단어를 외치며 행진하는 사람들의 대열이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3부 이해 받지 못하는 말들의 조그만 어휘집 행렬 p169.) 어디서 아주 익숙하게 펼쳐지는 풍경이다. 내가 어릴 때 본 4.19, 그리고 5.16 모습들, 중고교 때의 부산시가 행진 모습, 월남전이 한창일 때 부산 3부두에 전교생이 태극기를 들고 그 수송선에 탄 국군장병들을 향해서 손 흔들기, 깃발 흔들기, 리프케 서독 대통령이 부산에 왔을 때 수영비행장(지금의 센텀시티) 철망 뒤에서 차창 행렬에 깃발 흔들기. 대학 다닐 때 수없이 보았던 유신 반대 데모 행렬들, 구호들,…  2) 권위를 상실한 키치는 모든 인간의 약점처럼 감동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 중 그 누구도 초인이 아니며 키치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키치를 아무리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제6부, 대장정. 12 page 415.) 3) 잊히기 전에 우리는 키치로 변할 것이다. 키치란 존재와 망각 사이에 있는 환승역이다(제6부, 대장정. 29. p455.) 테레자의 꿈은 키치의 진정한 기능을 고발한다. 키치는 죽음을 은폐하는 병풍이다(제6부, 대장정. 10. p 410.) 4)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을 도와주는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어떤 시선을 받으며 살고 싶은지에 따라 네 범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익명의 무수한 시선, 대중의 시선을 추구한다…. …두 번째는 다수의 친한 사람들의 시선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다. ……. 세 번째 범주는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 속에서 사는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이 감기면 무대는 칠흑에 빠질 것이다. 테레자와 토마시가 바로 그렇다……. 아주 드문 네 번째 범주가 있는데, 부재하는 사람들의 상상적 시선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이에 속한다. 이들은 몽상가이다. 예를 들면 프란츠가 그렇다. 그가 캄보디아 국경까지 간 것은 오로지 사비나 때문이다. 버스가 태국의 도로에서 덜컹거릴 때, 그는 그녀의 시선이 오랫동안 그에게 고정되었다고 느낀다(제6부, 대장정. 23. p439-440). 



아, 나도 1993년 8월에서 다음 해 7월까지 1년간 태국정부 초청 장학금을 받아서, 태국 촌부리 방프라 농업대학(RIT)에 교환 교수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때 나도 메콩강 황토 물 흐르는 것 쳐다보면서 건너편 캄보디아에는 결코 갈 수 없었다. 또 다른 지역에 버스 타고 가서 건너 편 라오스 국경 지대를 하염없이 쳐다보고만 있었다. 당시 서양 백인 젊은이들의 손에 거의 한결같이 이 책의 영문판, “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이 들려 있는 것 보았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소설임을 거기서 보았다.


V.

“체코인이면 음악인이다”. 이 체코 속담은 체코 사람이라면 누구나 노래를 잘 하고 악기를 연주하며 인생을 즐긴다는 뜻이다. 지금도 프라하는 음악의 고향이자 음악의 나라답게 그러한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보다 모차르트 음악과 오페라가 더 자주 공연되는 것이 프라하라고 한다(김규진, 2006). 또한 체코는 인구에 비해 시집을 출판하는 시인이 가장 많은 나라 중 하나이다. 20세기 초 체코 문학의 황금기에 사이페르트, 호라, 네즈발 등의 시인들이 프롤레타리아 입장이나 초현실주의 입장 등에서 나름대로 주옥 같은 작품 속에 프라하의 이미지를 묘사했다(김규진, 2006).



밀란 쿤데라는 1929년 4월 1일(그는 자기 말로, 만우절에 태어났기 때문에 웃기기, 농담, 유머를 잘 한다고 했다) 모라비아의 도시 브르노에서 어머니 밀라다 야노시코바와 아버지 루드빅 쿤데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피아니스트이며 음악연구가인 아버지에게서 어릴 때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았고, 이어 카프랄과 하아스 문하에서 작곡 등을 배웠다. 그의 많은 작품이 음악적 모티브를 심도있게 다루고 있는 것은 이러한 교육적 배경 때문이다. 그의 초기 대표작 〈농담〉(1967)에서는 모라비아 민속음악이 자세히 다루어졌다(김규진, 2006).



체코에서 수입한 어느 음반의 선전 설명문: 찰스 매커라스의 야나체크, 뉴욕 태생의 찰스 매커러스 경(Sir Charles Mackerras; 1925-2010)은 스승 바츨라프 탈리히로부터 야나체크 음악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전수(1945년부터 3년간 영국정부 장학금으로 체코에 유학 가서 탈리히로부터 오케스트라 지휘법을 교육받았음) 받은 후 평생 동안 그 연주에 힘썼으며, 야나쳌 오페라가 현대의 걸작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매커라스의 공로일 것이다. 그가 체코 음반사인 수프라폰에 남긴 야나쳌 관현악 작품집과 ‘글라골리틱 미사’는 명실상부한 동곡 최고의 명연으로, 작곡가 자신의 오케스트레이션을 복원한 ‘영리한 암여우’, 모음곡이나 긴장감이 감도는 ‘신포니에타’가 특히나 감동적이다. 

“모짜르트나 헨델이 위대한 작곡가라고 말하는데는 아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야나첵이 위대한 작곡가라고 말하는 데는 누군가의 언급이 필요하다. 내 일생에서 무엇인가 이룬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내가 그 야나쳌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전파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찰스 매카라스 경의 말이다. 1978년 런던에서 체코 정부로부터 야나체크 메달을 받은 바 있었고,  1989년 벨벳 혁명 후 그는 체코에 초청받아서 체코 대통령한테서 1등 훈장을 받은 바 있다. 브르노에 있는 마사릭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10년 4월에는 체코 수프라폰 음반사에서 골든 플라티눔 디스크를 증정받기도 했다.…. 찰스 매커라스는 2010년 7월에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영국 음악계뿐만 아니라 체코 음악계에도 큰 손실이었다. 체코 밖의 지휘자 가운데 그만큼 체코 음악(드보르작, 야나쳌, 요셉 숙 등)을 잘 알고 사랑했으며 즐겨 녹음했던 인물이 달리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야나쳌 작품에 대한 찰스 매커라스 경의 감탄스러운 충실성은 곡 본질을 파악하고 옹호하는 것을 의미한다. 본질을 겨냥하는 것은 바로 야나쳌의 예도藝道이기도 하다. 규칙은 이렇다. 오직 절대적으로 필요한 (의미론적으로 필요한) 음정만이 존재할 권리가 있다는 것, 관현악 구성에 나타나는 최대한의 경제성이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다. 악보에 쓸데없이 덧붙은 군더더기들을 없애 버림으로써, 매커라스는 이 경제성을 복원했으며 이로써 야나쳌 음악을 더 한층 이해하기 쉽게 만들었다. (배신당한 유언들/ 밀란 쿤데라/ 1993/ 민음사/ P284.)



무엇을 통해 내 고국이 내 미학적 유전자에 영속적으로 각인되었는지 내게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할 것이다. 야나쳌의 음악을 통해서라고. 거기에는 전기적인 우연이 큰 역할을 했다. 야나쳌은 일생을 브르노에서 보냈는데, 그것은 내 아버지도 마찬가지였고, 젊은 피아니스트였던 내 아버지는 그곳에서 야나쳌의 초기 전문가들이자 지지자들로 이루어진 매력적인 (그리고 고립된) 모임에 속했다. 나는 야나쳌이 세상을 떠난 지 일년 후에 태어났고, 유년 시절부터 나는 매일 아버지나 아버지의 제자들이 피아노로 연주하는 그의 음악을 들었다. 1971년, 그 침울했던 점령(러시아 군대에 의한) 시대에, 아버지 장례식을 치루면서 나는 일체의 담화를 금지했다. 단지 네 음악가가 화장터에서 야나쳌의 두 번 째 현악4중주곡을 연주하기만 했다. 사 년 후에 나는 프랑스로 이주했고,. …. … 후에 나는 한 음악 잡지에 1990년대 초에 녹음된 그의 음반에 대한 비평을 쓰는 것을 기꺼운 마음으로 수락했다. …… 그 음반들 중 두 장 만이 나를 매혹했다. 알랭 플라네스가 연주한 피아노 곡과 빈의 알반 베르크 4중주단이 연주한 4중주곡이었다. 그들에게 찬사를 보내면서 나는 야나쳌의 스타일을 규정하려는 시도를 했다. “주제들이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촘촘히 병치되어, 중간 부분 없이 빠르게 이어지며, 종종 동시에 울리기도 한다. 최대한 축소된 공간에서 투박함과 부드러움 사이의 긴장이 존재한다. 나아가서는 아름다움과 추함 사이의 긴장이 있는데, 위대한 화가들이 체험하는 문제, 즉 예술 작품의 대상으로서의 추함의 문제를 음악에서 제기할 줄 알았던 드문 작곡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를 그렇게도 기쁘게 한 이 음반에도 야나쳌을 멍청하게 민족주의자 시각에서 조명하는 텍스트가 들어 있는데, 그를 ‘스메타나의 정신적인 제자’로 여기며 (사실 그는 정반대였는데 말이다!) 그의 표현성을 이미 지나가버린 한 시대의 낭망적 감상주의로 축소한다. 야나쳌의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불완전함이 아니라 그의 미학에 귀를 막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독창성에 대한 일종의 몰이해인 것이다! 이러한 몰이해를 나는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그의 음악 운명을 짓누른 저주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외다리의 위대한 달리기’에 관한 이 텍스트의 이유는 이런 것이다. 1854년 가난한 환경의 (아주 작은) 마을 초등학교 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열한 살 때부터 죽을 때까지, 프라하를 중심으로 하는 지성적 삶에서 소외된 지방 도시 브르노에서 살았다(프라하 역시 오스트리아-항가리 제국 안에서는 한낱 지방 도시에 불과했다). 그러한 환경에서 그의 예술적 발달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느리게 이루어졌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작곡을 했으나 자신만의 스타일을 발견한 것은 마흔 다섯 살 무렵에 ‘예누파’를 작곡하면서였다. 이 오페라는 1902년에 완성되어 1904년 부르노의 한 초라한 극장에서 초연된다. 그의 나이 쉰 살이었으며, 머리는 하얗게 세었다. 여전히 과소평가된 그는 무명 상태로 십사 년 동안 거부되었던 ‘예누파’가 프라하에서 공연되어 예상치 못했던 성공을 거두는 1916년까지 기다려야 했으며, 이 공연은 단숨에 그를 조국 국경 밖까지 알려지게 만든다. 그는 예순 두 살이며, 그의 인생은 현기증 날 정도로 빨라진다. 그에게는 아직 살아가야 할 십이 년의 세월이 남았고, 그는 마치 끊임없는 열병에 걸린 것처럼 핵심적인 작품들을 쓴다. 그는 ‘현대 음악을 위한 국제협회’ 주최의 모든 축제에 초청되어 바르토크, 쇤베르크, 스트라빈스키 옆에 그들의 형제처럼 (형제라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지만 어쨌던 형제처럼) 자리한다. 그런데 그는 누구였을까? 프라하의 교만한 음악학자들이 집요하게 표현했듯, 순진하게 민속에 눈이 먼 시골뜨기인가? 아니면 현대 음악의 위인 가운데 한 명인가? 그리고 이경우, 어떤 현대 음악인가? 그는 알려진 그 어떤 흐름에도, 그 어떤 그룹에도, 그 어떤 학파에도 속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달랐고 혼자였다.(만남/ 밀란 쿤데라/ 2009/ 민음사/ P179-182.)”



2011.09.14 13:17 제비, 요즘도 계속 레오스 야나쳌(1854-1928)을 듣고 있다. 그는 동시대인들보다 앞선 발걸음인지는 몰라도 그들(후기 낭만주의)과는 확실히 다른 소리를 내고 있다. 그 소리는 더 정직하고 소박하고 인간적인 것 같다. 그러면서 야나첵은 진정한 사랑을 예순 두살에 시작한다. 남 몰래, 그러면서 진지하게 편지를 서로 보내고 받으면서 32세나 연하의 유뷰녀와 연애를 한다. 번연히 자기 처와 자식을 두고서 그런 연애를 죽을 때까지 한다. 이때부터 그의 명작들이 속속 발표되어 유명하게 된다. 그 사랑의 이야기가 서로 거물망처럼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1Q84〉과 연결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야나쳌은 무척 종교적이다. 그가 성당(교회)의 오르간 주자였고, 그 부친도 그랬다.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지만 또한 무척 친러시아적이다. 당시 체코(보헤미아, 몰다비아)는 오스트리아 지배하에 있었다. 슬라브 민족주의에 젖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 음악이 독일적인 것과는 다르게 들리는 걸까. 요즘 나는 거의 야나첵 음악만을 듣고 있다. 그 야나첵 음악 속에서 모순과 잘못됨과 분노와 슬픔, 이별 등의 인간적 아픔을 모두 승화한 소리를 느끼기 위해서이다. 어느 선사(수불 修佛)에게 물었다. 공부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노력하는 사람이 공부가 된 사람입니다” (조선일보 2011년 9월 19일자. 조용헌, ‘살롱 간화선 사천왕’에서 인용)., 야나첵의 소리(음악)에서 그런 마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노력하는 소리를 듣는 것 같다. 서양 음악에서 우리가 많이 듣는 낭망주의 음악(쇼팡, 브람스 등)이 조금은 딜레땅뜨(제비족, 잘난체하기 위한 음악)들을 위한 음악, 위선적 음악이라 한다면 진정한 평민들의 노래,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를 부르는 노래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그런 점에서 제비 많이 반성하고 또 뉘우치고 있다. 제비가 처음으로 레오스 야나쳌(Leos Janacek; 1854-1928)의 음반을 산 것이 2000년 10월경인 것 같다. Andras Schiff씨가 치는 피아노 독주곡들 [안개 속에서, 소나타 1 x. 1905, 수풀이 우거진 오솔길을 따라(On an overgrown path, I, II, III), 그리고 회상(a recollection)]이 들어있는 ECM CD이다. 음반수입업체의 광고문에는 “짓눌린 육체, 흐느끼는 자유로운 영혼, 보헤미안의 정서를 가득 담은 레오니 야나첵의 피아노 작품집이다. <수풀이 우거진 오솔길을 따라>, <안개 속에서>, <피아노 소나타> 등 어느 한 곡도 빼놓을 수 없는 아름다운 20세기 피아노 음악의 결정체를 안드레스 쉬프는 한 음 한 음 정성스럽게 연주해가고 있다. 그 어떤 연주보다도 폭 넓은 음향으로 우리의 마음을 울리고 있는 그는 야나쳌 연주에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고 쓰여 있다. 음반의 11번 트랙이 They Chattered Like Swallows : (그들은)제비처럼 조잘거렸다: 야나쳌씨는 참새를 제비로 착각한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1Q84〉에 야나쳌의 심포니에타가 나온다. 나도 하루키의 〈1Q84〉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기에 이 음반(조지 셀 지휘, 클리브랜드 오케스트라 연주의 심포니에타)도 바로 그 하루키의 〈1Q84〉책을 살 때 부록처럼 끼워 주어서 집에 갖고 있다.



2011.11.01 13:52 제비 통신 31호(2011년9월14일)에도 썼지만 제비 요즘도 계속 야나쳌만 듣고 있다. 제비 우연히 2-3년 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1Q84〉를 읽으면서 소설의 부록으로 끼워 준 음악CD에서 조지 셀 지휘 클리브랜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심포니에타를 처음 듣고, 야나쳌을 알게 되었다. 제비가 무라카미 하루키씨를 좋아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그 소설가 자신이 클래식이나 재즈 음악 애호가이자 음반수집가이기에 제비하고 그 노는 생태 습성이 너무나도 비슷한 바로 그것 때문이다. 나이 육십이 넘은 사람이 자기보다 32세나 어린 유부녀를 사랑하면서 음악(피아노, 성악, 오페라, 관현악 등)작곡의 깊이를 더했다는 사람: 그러면서도 자기의 결혼을 깨지 않고 유지했던 사람. 나이 73세에 죽은 남자, 죽기 직전 13살 먹은 어린 아들을 숲 속에서 잃어버리고, 그 아들을 밤낮으로 찾아다니다가 감기 걸렸고 그 감기가 폐렴으로 진전되어 죽은 사람, 자기가 사랑했던 그 젊은 유부녀는 하등 자기를 사랑하지도 않았건만 혼자서 일방적으로 그 여자를 짝사랑하여 열렬하게 수많은 연애편지를 보낸 사람, ? 1928년 여름, 사랑하는 여인이 그의 두 아이를 데리고 작은 시골집으로 그를 보러 온다. 아이들이 숲 속에서 길을 잃자 그가 찾아 나서서 사방으로 뛰다가 고열과 오한이 나 폐렴에 걸리고, 병원으로 옮겨졌다가 며칠 뒤에 죽는다. 그녀가 그와 함께 거기 있다. 열네 살 때부터 나(쿤데라)는 그가 병원 침대 위에서 섹스를 하다 죽었다(복상사腹上死)고 쑥덕대는 소리를 들어왔다.) 배신당한 유언들/ 밀란 쿤데라/ 1993/ 민음사/ P296. ? 제비, 오늘도 한가히 야나쳌의 피아노 독주곡 듣고 있다. 마음이 차분해진다. 야나쳌의 “덤풀 우거진 오솔길”을 들으면 아주 마음을 경쾌하게 울려주는 곡이 나오는데 그 부분의 제목이 “제비처럼 지저귄다”이다. (On An Overgrown Path 1: They Chattered Like Swallows - Con Moto) 우리나라는 ‘참새가 지저귄다’라는 말이 있지만 체코에서는 그 말을 ‘제비가 지저귄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하여튼 제비 마음에 속 드는 부분의 제목이 제비라서 기분이 좋다. 제비가 아는 제법 유명한 피아니스트들은 거의 모두 야나쳌을 연주 녹음하고 있다. Andras Schiff 씨가 치는 피아노 독주곡들 [안개속에서, 소나타 1 x.1905, 수풀이 우거진 오솔길을 따라(On an overgrown path, I, II, III), 그리고 회상(a recollection)]이 들어있는 ECM CD이다. 그밖에도 가야하라 사치코의 피아노 연주 음반과 Leif ove Andsnes의 음반이 있다. 그 모두가 사람(제비) 마음을 하염없이 깊게 해준다. (그러면서도, 즐겁게 해 준다. (ON THE OVERGROWN PATH, SERIES 1: THEY CHATTERED LIKE SWALLOWS에서처럼)


VI.

2014년 6월 1일 일요일 오전 11:40분, 밀란 쿤데라의 소설, 〈향수〉 원제 L’ignorance/ 박성창 옮김/ 2000/ 민음사.를 다 읽다(讀了). 그 동안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 〈농담〉(1967), 〈불멸〉(1990), 〈느림〉(1995), 〈정체성〉(1997), 문학 예술론집 〈배신당한 유언들〉(1993)’을 다 읽었다. 지난 4월 14일부터 오늘(6월 1일)까지 그의 소설 책 6권과 평론집 한 권을 다 읽었다. 눈만 뜨면 밀란 쿤데라만 읽은 셈이다. 그리고 곧장 내게 깊은 우울이 왔다. 



어제 대학 동기생의 딸 결혼식 있어 서울 다녀 올 때도 그 책을 가방에 넣고 갔다. 예식이 시작하기 한 시간 전에 들어가 예식장 자리에 앉아 30여분 동안 읽었다. 예식이 끝난 후 우리 동기들끼리 같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그 중 가장 착실한 모범생인 C군에게 “지난 번 말러 이야기 쓴 것 어떻터노?” 하고 물었더니, 대답하는 말이, “너는 전공 공부, 연구는 아예 제쳐놓고 엉뚱한 짓만 계속 하는구나”고 

말해서 얼마나 가슴이 뜨끔했는지 모른다. 뜨끔한 정도가 아니라 아팠다. 그리고 그 예식장 밖을 나와 동서울 버스터미널 그리고 안동 집에 올 때까지 그 말이 송곳처럼 계속 가슴을 찌른다. 그 말은 C뿐만 아니라 마산의 경남대학교에 근무하는 L군한테서도 ‘그런 글 쓰려면 아주 책을 열심히 파고들어야 할 텐데….’하면서 걱정 담뿍 담긴 코멘트를 내게 문자로 보내준 바 있다. 누가 쓰라고 요구했거니 강요했으면 절대로 ‘시간 없다’고 핑계대고, 안 썼을 것이다. 누가 시키면 절대로 안 하고 안 시키면 제 발로 찾아 와서 일을 저지르는 청개구리 근성. 그것이 나의 본성인 줄 이제야 겨우 알았다. 그러고도 어제 집에 와서 그 소설 〈향수〉를 마저 다 읽었다.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이란 책을 산 적이 있다. 밀란 쿤데라가 쓴 책이다. 그 책에서 읽었던 내용 중 베토벤의 교향곡들(특히 그의 5번 교향곡에서)에서 약한 성부의 것들이 있기에 강한 음악이 존재할 수 있다는 그 말이 잊혀지지 않는데, 바로 그 책이 이번에 다 읽은 ‘배반당한 유언들’이라고 했다. 10년도 더 지난 지금 내가 다시 그 책,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을 아무리 찾아도 없다. 그때는 그렇게도 애지중지 했던 그 책이 지금은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없다. 정말 위선적인 대학 도서관

이나 도립도서관에서도 그 책은 없다. 위선적인 인간들은 그런 볼 품 없는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들 위선자들의 관행인 것이다. 그런데 바로 어제 저녁(2014년 6월 6일, 20:00), 시집 간 딸이 자기 집에서 밀란 쿤데라 책 몇 권을 가지고 왔다. 거기에 바로 그 책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이 있다. 1994년 10월 8일 안동 교학사에서 샀다고 내 사인이 들어 있다. 그 책도 내가 다 완독하지 않았던 것을 이번에 알았다. 바로 그 책이 이번 전집에서는 원제대로 〈배신당한 유언들(Les testaments trahis)〉로 나왔다.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은 청년사 출판의 책이다. 출판사 편집자 혹은 번역자가 자기 멋대로 붙인 그 멋있는 책 제목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이야말로 쿤데라가 그토록 미워하는 키치의 전형 아닌가.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은 바로 우리나라 청동 불상 모양인 반가사유상이 아닌가. 이런 식의 엉터리 제목과 해적판 출판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자신이 문득 부끄럽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체코어에서 우리말로 번역 했던 김규진 교수는 키치를 속물로 번역했다. 속물(Snob)이나 위선, 다 같은 뜻이다. 나도 그것을 내 인생의 적敵으로 여기며 여태 그것과 싸워 왔다. 키치 같은 사람도 있고 책도 있다. 위선적인 책들, 취업 시험 준비서나 자기 개발서가 바로 그런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인간과 책들이 ‘책 속에 길이 있다’고 외치는 도립 도서관이나 대학 도서관을 다 점거하는 요즘의 추세에, 있는 힘을 다해 항거하고 싶다. ? 열 서너 살 때, 나는 작곡 수업을 받으러 다녔다. 내가 신동이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점잖은 배려 때문이었다. 때는 전쟁 중이었고, 아버지 친구인 유대인 작곡가 한 분이 노란별을 달아야 했다. 사람들이 그를 피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에게 자신의 연대감을 말해야 할 지 몰랐던 아버지는 바로 그때 나에게 작곡을 가르쳐주도록 부탁해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던 것이다. 당시는 사람들이 유대인들의 아파트를 빼앗던 시절이라 그 작곡가는 끊임없이 새로운 장소로 옮겨 다녀야 했는데, 점점 더 좁은 곳으로 옮겨 다니다가 결국은 테레진(아우슈비츠에 버금가는 유명한 유대인 학살 수용소)으로 떠나기 전까지, 방 하나에 여러 명이 무더기로 묵는 작은 숙소에 자리 잡았다. 그는 숙소를 옮겨 다닐 때마다 꼭꼭 자신의 작은 피아노를 갖고 다녔고, 주변 낯선 이들이 자신들의 일에 빠져 있는 동안 나는 그 피아노 앞에서 하모니나 폴리포니 연습곡들을 연주했다. 그 모든 일들 가운데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그를 흠모하는 마음과 이미지 서너 개뿐이다. 특히 이 이미지가 그렇다. 수업이 끝난 뒤 그가 나를 바래다주다가 문 가까이에서 멈춰서더니 불쑥 이렇게 말했다. “베토벤에게는 놀랄 만큼 약한 이행부들이 많아. 하지만 센 이행부들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약한 이행부들이야. 잔디밭처럼 말이다. 잔디밭이 없으면 우리는 그 위로 솟아나는 아름다운 나무에게서 즐거움을 느낄 수가 없을 거야.” 묘한 생각이다. 그것이 아직도 나의 기억에 남아있다는 사실이 더더욱 묘하다. 아마도 내가 선생의 내밀한 고백 하나를, 어떤 비밀, 오직 터득한 자들만이 알 권리를 갖는 한 가지 위대한 꾀를 듣게 된 걸 명예로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건 선생님의 그 짧은 성찰은 일생 동안 나를 따라 다녔다(나는 그 성찰을 옹호했고, 그것과 싸웠으며, 한 번도 그 끝까지 가보지 못했다.) 그 성찰이 없었던들 분명 이 글은 쓰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 소중한 그 성찰보다 더욱 소중한 것, 그것은 그 잔혹한 여행을 떠나기 얼마 전에, 아이 앞에서, 드높은 목소리로, 예술 작품의 문제를 성찰하던 한 인간의 이미지다. (배신당한 유언들/ 밀란 쿤데라/ 김병욱 옮김/ 1993/ 민음사/ p263-264.)



 


VII.

진실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극복하지 안 되는 줄이 하나 있다.

그 줄은 특별하게 공중 높이 걸려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땅 가까이에 처져 있다.

그것은 진로를 도와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걸려 넘어지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 같다.

-카프카, 죄, 고뇌, 희망, 진실의 길에 관한 고찰



 



분명히 대학 1학년 독일어 수업 시간에 배웠던 말이다. 독일어 원문을 지금은 도저히 찾을 수 없지만 그때는 송영택 교수로부터 그 해석을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더듬더듬 번역하는 것을 하나하나 고쳐 나가는 식으로 배웠던 것인데,… 밀란 쿤데라는 “카프카는 거대한 미적 혁명이다. 예술적 기적 그 자체이다” 라고 말했다. (절망은 나의 힘/ 가시라기 히로키, 박승애 옮김/ 2012/ 한스미디어.) 카프카의 유언(법률적 의미로는 딱히 유언이라 할 수 없다. 발송된 적이 없기에 진짜 편지라 할 수도 없다)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고 한다.”…… 1921년…… 나의 유언은 아주 간단하네. 자네에게 부탁하네만 모두 불살라 버리게. ……”(배신당한 유언들/ 밀란 쿤데라/ 1993/ P380-381.)



카프카와 야나쳌. 둘 다 과소평가 받았고, 둘 다 파악하기 어려운 미학을 지녔으며, 둘 다 사회의 편협함에 희생되었다. 카프카에게 프라하는 하나의 거대한 장애를 의미했다.……독일어권 사람들에게 프라하는 체코인들에게 부르노가 그렇듯 하나의 작은 지방 도시에 불과하다. 카프카와 야나쳌, 결국 둘은 모두 시골 사람(촌놈)이었다. 카프카가 낯선 주민들이 사는 나라에서 거의 무명이었다면, 야나쳌은 같은 나라에서 자국민들에게 싸구려 예술가 취급을 당했다. (배신당한 유언들/ 밀란 쿤데라/ 1993/ P380-381.)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그토록 촌놈이라고 놀렸던 그 친구들에게 정말 미안하다. 안동에서 산 지 벌써 25년이 넘어 인생에서 가장 많이 살았던 곳이 되고 말았다. 고교 때 그 친구들(대부분 서울에서 산다)이 이제는 내게 손가락질하면서 “야 이 안동 촌놈아”라고 한다면 어떻게 항변할 것인가?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학교 공부만 열심히 하는 실용적인 인간을 ‘시멘트 콘크리트 머리(head; 대가리)’라고 마구 욕하며 다녔던 과오를 범한 것 같다. 그 당시 내 속으로만 사모했던 어떤 여학생한테 며칠 전 거의 42년 만에 편지가 왔는데 거기에 그런 문자가 들어 있어 소스라치게 놀랬다. 당시에는 공대 다니는 친구를 함부로 ‘공돌이’라고 칭하면서 거의 ‘시멘트 콘크리트 머리’와 동의어로도 사용한 것 같다. 지금은 그런 나쁜 말을 될 수 있으면 사용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쓰는 언어에 의해 그 인간의 비루한 마음과 행동이 그 말 그대로 실현되는 것을 이제는 경험상 알게 되었다. 바로 혀 밑에 도끼가 있는 것을 사십여 년 전, 나의 청년 시대의 시작점에서, 그때는 정말 뭘 모르고 함부로 지껄이며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또 잘난 체는 얼마나 병적으로 심했던지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미안하고 가소롭기만 하다. 현재의 내 자신도 그때의 그 어리석고 철없고 가소로운 인간이 겨우 겨우 여태껏 생존해 와서 지금껏 마음과 얼굴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 바로 그것이기에, 두고두고 미안하게 생각한다. 며칠 전, 사십여 년 전, 대학 1학년 때의 그 여학생은 오늘날의 내 사진 모습을 보고, 대번에 그때의 그 남학생을 알아보겠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내 마음 풍경도 상당히 변한 것도 사실이다. “지금은 그때의 그 어리석은 풋내기가 결코 아닙니다.”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다.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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