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례와 장례, 죽음을 모시다(글/정진영_본지 편집위원, 안동대 사학과 교수)

유교에서의 삶과 죽음

조선시대 양반들의 학문이었던 유교는 단순히 학문의 차원에서만 머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삶과 의식을 규제하는 규범이었다. 그리고 유교적인 삶의 규범으로서 가장 전형적인 예를 든다면 조상숭배祖上崇拜도 그 하나가 될 것이다. 

유교의 조상숭배는 유교의 인간존재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유교에서 인간존재란 인간이 심성心性과 신체身體로 구성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궁극적인 존재인 하늘로부터 성품을 부여받고 부모로부터 육신을 부여받아 태어난다. 인간은 하늘로부터 받은 성품만큼이나 부모로부터 받는 신체도 중요하다. 따라서 부모는 하늘과 더불어 인간생명의 근원으로 일컬어진다.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인식하는 것은 󰡔주역周易󰡕의 건괘乾卦와 곤괘坤卦로서 이를 상징하는 표상으로 쓰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유교에서 하늘이 인간에게 성품性品을 부여한다는 것은 인간 개개인에 개별적인 성품을 부여해 준다는 것이 아니다. 곧 성품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부여된다.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성품만이 아니라 인간과 사물의 성품도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되기도 한다. 따라서 하늘은 인간에게 보편적인 품성을 부여해주고, 인간 개개인의 특성은 부모로부터 부여받는 신체에 의하여 결정된다. 따라서 인간의 신체를 소중하게 여기는 의식은 유교적 생명관 속에서 깊이 뿌리 박혀 있다. 

그러면 유교에서 죽음이란 무엇인가? 양반들은 죽음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성호星湖 이익李瀷과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죽음이란 양의 기운[陽氣]이 떠서 흩어짐(浮散)을 뜻하며, 흩어진 양의 기운은 둘로 나눠진다. 하나는 하늘로 올라 양으로서 신(神)이 되고, 하나는 지하세계로 내려가 음으로 귀(鬼)가 된다.”



“천지간의 만물에는 기(氣)가 있다. 기란 정령(精靈)을 말하며, 양기의 정령을 혼(魂)이라 하고, 음기의 정령을 백(魄)이라 한다. 죽음이란 양기가 떠서 하늘로 올라감[昇天]을 의미한다. 승천하는 것은 신명(神明)이 되지만 생전의 원한이나 미련으로 승천하지 못한 양기는 사방에 흩어져 있다가 음기가 되어 자의로 행동하니 이것이 소위 귀신이다.”



인간이 죽은 후에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이 확인되면 죽은 자를 소생시키는 의식이 행해진다. 이를 초혼招魂 혹은 고복皐復이라 한다. 즉, 죽은 이가 평소에 입던 웃옷을 지붕 위에서 북쪽을 향해 ‘아무개 복復’이라고 세 번 외치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떠난 혼백을 돌아오라고 부르는 것이다. 돌아오라고 세 번 부르는 것은 한번은 위를 향해 불러서 혼이 하늘에서 내려올 것을 축원하는 것이고, 한번은 아래를 향해 불러서 백이 땅에서 돌아오기를 축원하는 것이고, 한번은 북쪽을 향해 불러서 혼백이 천지사방에서 올 것을 축원하는 것이다. 

아무튼 유교에서의 인간존재란 죽음 자체로서 완전히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죽은 다음에 신체와 영혼이 분리되었다가 서서히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죽은 다음 돌아간다는 것은 개체성個體性의 상실이다. 따라서 인간의 개체는 신체와 더불어 유지되고 죽은 뒤에 신체의 소멸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 개체성이 자신의 신체적 분신인 자손의 생명을 통하여 유지․계승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정에서 양반들은 후손이 끊어지는 것을 가장 큰 불효不孝로 여겼다. 그래서 최후에는 양자養子를 들인다. 양자를 혈연적 유대가 어느 정도라도 있는 혈족에서 들여오는 것도 이러한 생명관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조상이란 자신의 생명을 부여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과 일체가 되는 후손으로 번성해 가는 연속성의 선구자이다. 아무튼 유교에서의 조상은 생명의 뿌리로서 소중하게 받들어져야 하며, 소중히 지켜가야 할 내 생명의 모습이기도 하다. 조상의 존중은 바로 자기 존재의 존중으로서의 의미를 지닌 것이다.




영원한 이별, 그리고 떠나보냄

조선시대 양반들은 상례喪禮와 장례葬禮를 당연히 유교적으로 치렀다. 유교적인 상례와 장례에서 가장 특징적인 형식의 하나는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다. 곡哭은 슬픔의 가장 상징적인 표현이다.

곡은 그냥 슬퍼서 우는 것과는 좀 다른 일정한 형식을 가진다. 곡이란 너무 슬퍼해서 난잡해 지거나, 한바탕의 울음으로 슬픔을 다해 버리는 것을 적절하게 통제하여 일정 기간 동안 지속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슬픔과 관계없는 형식적인 것이 되기도 하고, 지루하지 않게 그 자체로서 고저장단을 가지기도 한다. 곡은 상주만이 아니라 조문객도 당연히 해야 한다. 그러나 상주와 조문객의 곡은 다르다.

아무튼 양반의 상례에서 곡이란 필수적이고, 또 그것은 끊어져서도 안 된다. 그래서 양반가문에서는 곡비哭婢라는 곡을 하는 여자 종을 두고 밤낮으로 곡이 끊이지 않게 하였다. 왜 곡을 하는가? 슬프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왜 슬플까? 너무 어처구니없는 질문인가!

유교에서는 내세來世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죽음이란 존재와 존재로서의 영원한 이별을 의미한다. 부모와의 영원한 이별, 자식으로서는 이보다 더 큰 슬픔이 없다. 그래서 거친 옷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으며, 곡을 하는 것이다. 슬픔을 주체할 수 없어서 상주가 입는 옷에는 가슴과 등에 눈물받이[최衰]와 등받이[부판負版]를 달아 흐르는 눈물을 받고 슬픔을 등에 짊어진다. 먹지 못하고 애통하기를 지극히 하다 보니 허약해진 신체를 상장喪杖인 지팡이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 높이 또한 심장부분까지 이니 상주는 죄인이라서 고개를 들 수 없기 때문이다. 유교에서의 죽음이란 이렇듯 슬픈 것이고, 곡이란 슬픔을 표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죽음, 곧 영원한 이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떠나보내는 절차와 의례가 크게 달라진다. 언제나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항상 슬픈 것으로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시대에 따라, 종교에 따라서는 달리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원시 인류들이 죽음을 슬퍼했을까? 어쩌면 그들의 입장에서는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그저 자연스런 현상으로 인식했을지도 모른다. ‘돌아갔다’는 표현은 원시사회 이래 죽음에 대한 우리들의 원초적인 생각일 지도 모른다. 더욱이 이 세상을 고난과 고통으로 가득 찬 것으로, 그리고 죽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천당이나 극락에 간다고 생각한다면, 이별의 아쉬움은 있을지언정 그리 슬퍼할 일만은 아닐 것이다. 

유교에서는 죽음이 슬픈 것이니, 장례 또한 슬프고 엄숙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장례가 항상 유교식으로 엄숙하고 슬프게만 치러졌던 것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술과 노래와 춤이 오랫동안 함께 하였고, 불교가 전래되면서는 화장火葬 또한 일반화되었다. 조선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다양한 형태의 상 · 장례喪葬禮가 행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유학자들은 화장이 풍속과 인륜을 해침이 심하다고 걱정하기도 하였고, 상가喪家에서 밤에 제사를 올릴 때 남녀 수십 인이 모여 노래하고 춤추거나, 잡스런 오락으로 밤을 지새우는 풍속을 엄히 금해야 함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유학자들의 걱정과 주장은 다름 아닌 유교적인 상 · 장례가 아직 정착되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있어서 유교적인 상 · 장례는 예禮의 실천일 뿐만 아니라 뭇 하층민과의 차별성을 과시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하층민들의 입장에서는 절차와 형식을 몰라서도, 또 그럴만한 경제적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의 정서가 아직은 유교적인 딱딱하고 번잡한 의식을 그리 쉽게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층민에게도 점차 유교적인 상․장례가 일반화 된 것은 17세기를 거친 이후였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우리의 장례는 어쩌면 유교적인 것에 우리 고유의 전통이 적절하게 조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유교식이 아니라 한국식인 셈이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날 상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저히 용납되지 못할 것만 같은 행위들도 새롭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한 예로, 음주와 고스톱은 전통사회에서 행해지던 잡스런 오락이나 음주 가무의 변용이라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억측일까? 전통의 변용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상가 한 모퉁이를 차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 3년 상인가?

조선시대 양반들의 유교적인 상례의 또 하나의 특징은 3년 상喪에 있다. 3년 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이 부모상을 당했을 때뿐만이 아니다. 장자長子나 남편이 죽었을 때 부모와 아내에게도 해당한다. 반대로 장자가 아닌 차자 이하나 아내의 상喪이라면, 그것은 1년 상에 불과하였다. 유교가 남자, 그것도 맏아들 중심의 사회질서를 추구하고 있음을 여기서도 잘 볼 수 있다.

아무튼 전통상례로서의 3년 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그리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은 아니다. 고려시대에는 100일 상이 행해지고 있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군역軍役을 지고 있는 군인들에게 상례를 위해 주어진 휴가는 100일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고려와 조선 전기 일반 서민들이 100일 상을 그대로 지켰다고는 보기 어렵다. 

고려시대는 물론이고 조선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불교식의 화장火葬이 성행하였고, 사찰에 빈소를 마련하여 승려나 노비로 하여금 제祭를 올리게 하였던 것은 흔한 일이었다. 물론 이것은 하층민의 경우가 아니라 지배층 일반의 사정이다. 유교적인 상례로서의 3년 상이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일반화되었던 것은 조선후기이후였다. 

유교에서는 왜 3년 상일까? 1년, 2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3년이란 너무 길다는 생각도 들 수 있다. 3년이 너무 길다는 것은 오늘날의 생각만은 아니었다. 공자의 제자였던 재아宰我라는 사람도 공자에게 3년이 너무 길다고 푸념을 하면서 1년으로 하면 어떠냐고 물은 적이 있다. 

왜, 3년인지 분명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혹자는 공자의 말을 빌려서 자식이 태어난 지 3년이 되어야 부모의 품을 떠나듯이, 자식도 그 기간만큼 죽은 부모를 가슴에 품어야 떠나보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육신이 땅에 묻히어 3년이 지나야 온전히 흙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는 이렇게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3이라는 숫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성성과 절대성을 가지며, 그 자체로서 완결됨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양반들의 3년 상은 단순히 기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시묘살이와 관련되었을 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시묘살이란 장례를 치른 후 묘 옆에 여막이라는 집을 지어 3년 상을 마칠 때까지 신주神主를 모시고 사는 것을 말한다. 시묘살이는 조선 양반들이 모든 예의 규범으로 삼고 있던 《주자가례朱子家禮》나 조선의 학자들이 편찬한 예서禮書에서도 아예 언급이 없거나 반드시 지켜야 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시묘살이가 상당히 성행하여 부모에 대한 절대적인 효의 실천으로 이해되었다. 효를 중요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에 나라에서도 적극 권장했다. 그래서 이 기간 동안에는 관직에도 나아갈 수 없었고, 고기를 먹거나 술을 마시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 외의 행동에도 많은 제약이 따랐지만, 양반들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양반들이 시묘살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은 그것을 하나의 형식적인 행위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시묘살이를 한다하여 3년 상을 치르는 동안 전적으로 여막에서만 지낸 것은 아니었다. 여막은 임시로 지은 초막이었기 때문에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에는 기거하기가 사실상 어려웠다. 대부분의 경우 여막을 지어놓고는 초하루 보름에 왕래하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상례를 치르는 기간이라 하여 집안의 일상 대소사를 외면할 수도 없었다. 상중喪中만이 아니라 빈소殯所가 차려진 시기에도 하루 종일 곡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역시 찾아오는 조문객을 맞이하는 것은 물론이고 인근의 사람들을 방문하거나 농사일을 감독하는 등 기본적인 집안 대소사와 사회생활은 평상시와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식육과 음주도 전적으로 금지된 것만은 아니었다. 몸을 상하게 한다면 이 역시 불효가 된다. 어른이 억지로 술을 권한다면, 그리고 체력이 약해졌다면 음주와 식육은 허용되었다. 고기뿐만 아니라 술도 체력적 혹은 정신적인 보약으로 인식되었다. 술은 소소한 질병이나 추위를 이기는 묘약으로 여겨져 오늘날 커피 못지않게 흔하게 애용되었다.

아무튼 3년 상이 어떠한 형식이 되었든 그것은 조선 양반들의 중요한 예속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3년 상은 조선의 양반사회가 기반하고 있던 사회경제적인 조건 속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즉, 조선 사대부들에게 있어서 3년 상은 학문의 실천이며, 지주地主로서의 경제적 기반과 유한계급으로서의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더욱이 그것은 지배층으로서의 사회적 지위와 권위를 확보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조선사회에서 ‘효행孝行’은 단지 사회적 명

성을 얻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출세의 길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양반들에게 3년 상은 부담이 아니라 특권이었다.

3년 상이 마쳐지면 신주는 사당에 모셔진다. 그러나 영원히 모셔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기간 동안이다. 물론 그 기간은 신분에 따라 달라진다. 이에 따라 조상에 대한 제사의 기간도 달라진다. 천자天子는 7대代, 제후諸侯는 5대, 대부大夫는 3대, 선비인 사士는 2대, 보통 사람인 서인庶人은 1대에 한하는 것이 원칙이다. 즉, 벼슬에 나아간 경우라도 3대에 걸쳐 제사함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후대에는 누구 없이 4대동안 봉사하는 것이 하나의 관습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시조나 성현 등 후손에게 큰 영향력을 미친 조상의 신은 소멸되지 않는다고 보아 그에 대한 제사는 폐지하지 않고 계속하였다. 영남의 명문 양반가에서는 별도의 사당에서 현조를 불천위제사로 모시고 있다. 




후손들의 책무, 봉제사奉祭祀

양반들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가 봉제사이다. 제사에는 일반적으로 기제사忌祭祀와 시제時祭, 절사節祀 등이 있다. 기제사란 조상이 돌아가신 날 지내는 제사이고, 시제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철마다 지내는 제사이다. 절사는 설, 한식, 단오, 추석에 지내는 명절제사로 이를 차례茶禮라고도 하였다. 기제사와 절사가 사당에서 지내는 제사인데 반해, 시제는 묘소에서 지내는 묘제이다. 이러한 제사는 조선전기와 후기에 따라 설행여부와 경중이 조금씩 달랐다. 

우선 전기에는 대부분이 3대 봉사를 하였다. 그리고 명절제사도 설, 한식, 단오, 추석뿐만 아니라 달리 3월 3일, 4월 8일, 6월 6일, 7월 7일, 9월 9일, 동짓날 등에도 사당에서 차례나 차사茶祀를 올렸다. 이 밖에도 자신 또는 조상의 생일날에 제사를 올리기도 하였고, 초하루 보름에 행하는 삭망례朔望禮, 또는 새로운 산물이 생기면 사당의 제상에 올리는 천신례薦新禮도 있었다. 이러한 사정에서 가문마다 1년간 행하는 제사는 대체로 30여 회가 넘었다. 실제로 16세기 말 오희문吳希文이라는 사람은 임진왜란 피난 중에서도 30여 회에 달하는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조선전기의 제사에서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현상은 다름 아닌 윤회봉사輪回奉祀이다. 중국의 예서禮書에는 제사를 종가에서만 지내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여러 아들딸들이 돌아가면서 지내는 것이 17세기 중반까지의 관례였다. 윤행輪行하는 방법은 다양하였다. 해마다 주관자를 바꾼다던가, 부모의 제사를 아들과 딸이 나누든지, 아니면 기제사는 아들, 명절제사는 딸 등으로 분담할 수도 있었다. 물론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당연히 딸과 외손이 담당하였다. 이를 외손봉사外孫奉祀라 하였다. 아들딸 아무도 없는 경우에는 특정한 친척이나 노비에게 제사를 부탁하기도 하였다.

윤회와 외손봉사는 이 시기 자녀균분子女均分의 상속제도와 함께한다. 부모의 재산이 아들과 딸에게 균분되었듯이 사후의 봉사에 있어서도 아들딸이 똑 같은 권리와 의무를 가지게 됨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점차 부모의 재산이 아들과 장자 중심으로 상속되어 갔듯이 제사 또한 아들과 장남의 의무

로 되어 갔다. 종법宗法이 정착되면서 아들과 딸, 친손과 외손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갔다. ‘나의 자손’으로 인식되던 사위(딸)와 외손이 점차 ‘남의 사위와 외손’으로 바뀌어 갔다. 마찬가지로 ‘나의 조상’으로 인식되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도 점차 ‘남의 조상’으로 인식되어 갔다. 이러한 사정에서 17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적장자 중심의 상속 관행과 함께 제사 또한 장자의 몫으로 정착되어 갔다. 

조선후기의 제사는 윤회봉사에서 적장자 중심으로 바뀌어 간 것만이 아니었다. 이전까지 대체로 2대 혹은 3대만을 봉사하던 것에서 4대봉사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이르러 명절제사는 설과 추석, 한식 등을 제외한 고유의 명절 제사는 더 이상 설행되지 않았다. 초하루 보름마다 지내던 삭망례 또한 소멸되었다. 주자朱子의 《가례家禮》에 따라 고유의 제사들이 크게 정리된 셈이다. 따라서 제사의 횟수에 있어서는 도리어 크게 줄어들었다. 

조선 전후기를 막론하고 일반 제사의 참석자는 대체로 10여 명을 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안동 김령(金坽, 1577-1641)의 《계암일기溪巖日記》에는 제사 참석의 권유를 “청객請客”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이것은 제사 참석자 대부분이 직계 자손이었음을 의미한다. 아마 누구 없이 제사가 빈번하였으니 남의 집의 제사에까지 참석할 겨를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조선시대의 제사에 수십 명 이상의 제관이 모여서 성대하게 거행되었을 것이란 우리의 상상은 크게 어긋나게 된다.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은 당연히 가장이다. 그러나 삭망례는 물론이고 설 제사조차 어린 아들이 홀로 주관하기도 하였고, 혹 유고有故가 있을 경우에는 기제사도 아들이 주관하였다. 또한 집안에 출산이 있다던가, 질병이 있으면 궐행闕行하거나 지방이나 신주만 모시는 ‘권설權設’이 행해지는 경우도 많았다. 

이상과 같이 조선시대 양반가의 제사는 그것이 빈번했다기보다는 생활화 되어 있었다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제사 곧 조상숭배의 생활화는 새로운 산물이 생기거나 먼 길을 떠나기 전이나 돌아온 후에 반드시 사당에 배알拜謁하는 것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제사의 폐단으로 흔히 지적되는 형식화와 허례화도 역시 조선후기 늦은 시기부터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사가 효孝의 실천으로서 조상숭배라는 차원을 넘어 후손들의 사회적 지위 즉 가문의 우열을 구별하는 수단이 될 때, 제사는 불가피하게 형식이 되고 격식이 될 수밖에 없었다. 19세기 이후 향촌사회에서는 가문을 단위로 하는 다양한 시비와 대립이 있었는데, 이것은 곧 양반들의 지체와 위세 싸움이었다. 이제 봉제사를 통한 조상숭배가 그 자체로서 생활이 아니라 후손들의 지체와 위세의 상징으로 활용되어 갔다.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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