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농사꾼 박상익, 바람과 구름이 머무는 곳에 ′안동책마을′을 열다(글/이미홍_객원기자)
산골 헌책방 ‘안동 책마을’ 소문을 처음 들은 지는 좀 됐다. 와룡 도곡에 있는 대동분교 자리 폐교에 헌책방이 생겼다더라, 북카페처럼 운영한다더라 하는 이야기들이 간간이 들려왔다. 그런데 도통 가 볼 기회가 생기질 않았다. 재작년인가 간신히 주인장과 연락이 되었는데,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고 나중에 놀러오라고 했다. 책에 관심이 적지 않아 개인적으로 들러볼까 하다가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안동 책마을’과 원래 인연이 닿을 운명인지 『안동』지를 복간하면서 이번에 결국 가볼 기회가 생겼다.
와룡 대동분교의 헌책방 ‘안동 책마을’
십 년 전인가 잡풀 우거진 학교 운동장에 가 본 기억이 있어 그저 조금 다듬어 놓았겠거니 했는데, 댐 호반 길을 따라 구절양장 가듯이 굽이굽이 돌아 들어간 곳, ‘안동 책마을’이라는 작은 간판 하나 입구에 달아놓은 길 끝에 자리하고 있는 학교는 다른 곳을 온 듯 새색시마냥 곱게 단장을 하고 서 있다. 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너른 운동장 나무 그늘 아래 차를 세우고 나서니 사람은 보이지 않고 어디선가 일을 하고 있는 듯 기계 소리만 들린다. 소리를 찾아 학교 건물을 돌아드니 그제야 사람이 보인다. 교실 옆 현관문에 빗물받이 작업을 하고 있다는 책방 주인 박상익(46) 씨다.
하던 일 얼추 끝내고 이야기를 나눌 양인지 먼저 학교부터 둘러보란다. 그래서 우리는 책마을 탐방에 나섰다. 학교 건물 뒤편 언덕에 있는 야외 서가부터 시작해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언덕길 화단들을 따라간 곳에 위치한 사택 앞에는 상익 씨의 아내가 심었다는 낮달맞이꽃이 함초로이 피어 있고 사택 앞 둔덕길 따라 호두나무, 앵두나무 아래 여름 꽃들이 한창이었다. 구름다리 건너 교실로 와서 우리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 이름이 붙은 서가들부터 새로 깨끗하게 단장한 화장실까지 둘러보고 다시 중앙 현관으로 왔다. 운동장에서 올라오면서 보았던 ‘마리서사’라는 작은 간판 때문이었다. 교실로 들어가는 정면에 ‘마리서사’라는 간판이 보인다. 목마와 숙녀를 쓴 박인환이 종로에서 운영했던 서점 ‘마리서사’에서 따왔다고 한다. 목마와 숙녀를 좋아하고 대서양 전투가 일어났던 ‘말리’라는 지명에서 따왔다는 이국적인 ‘마리서사’라는 그 이름이 좋아서 책방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런데 묘하게 책방 이름으로 참 잘 어울린다 싶다.
절경에 반해 머물게 된 곳
충남 부여가 고향이고 대학을 졸업하고 책이 좋아서 대학교에서 사서로 일했다는 상익 씨와 이층 책방에서 마주앉은 건 가을인가 겨울인가의 어느 방에서 벽에 꽂힌 책 목록을 훑어보고 난 직후였던 것 같다. 그제야 우리는 그가 이곳 폐교에 반해 안동에 터를 잡고 살게 된 이야기며 책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제가 원래 폐교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한 때 폐교 커뮤니티를 운영하기도 했었고요. 그래서 웬만한 폐교 관련 일을 하시려는 분들은 다 저를 거쳐 가거나 제 사이트를 보고 연락을 하고 그랬어요. 지금도 간간이 그런 전화를 받아요. 그때 모은 폐교 관련 사례들이나 자료들이 엄청났는데 정신없이 바쁘게 사느라 그걸 제대로 관리를 못한 게 후회되죠. 책마을 일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면서 기록의 소중함과 가치를 더욱 절실히 느끼니까 그 아쉬움이 더 크지요.”
그 전에 그는 홍천에서 당무분교를 임대해서 헌책서점을 했던 경험이 있다.
“3년 임대를 해서 직장일 하면서 주말마다 내려가서 폐교를 단장하고 운영을 했었어요. 동네 어르신들 도움 받아가면서 농사도 짓고요. 그런데 제 것이 아니다 보니까 제가 아무리 공을 들이고 애정을 쏟아서 해 놓아도 결국은 손을 놓아야 되더라고요. 그 무렵 아이도 태어나고 하다 보니까 육아에 직장 일에 몸도 피곤하고 정신이 없기도 했고요. 그래서 일단은 접고 길게 보기로 했어요. 그러면서도 폐교에 대한 관심은 늘 가지고 눈과 귀를 열어두고 있었죠. 그러다가 이곳을 알게 된 거죠.”
다음엔 제대로 준비를 해서 헌책서점을 제대로 해 볼 생각으로 틈만 나면 전국의 폐교를 찾아다녔다. 그러던 차에 2005년도에 안동교육청에서 한겨울인 1월에 폐교 관련 모집 공고가 났다.
“집사람이랑 안동엘 왔죠. 그때 안동에 모집 공고 난 폐교가 다섯 군덴가 여섯 군덴가 그랬는데 다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여길 왔어요. 1월이었는데 그해 겨울이 정말 추웠어요. 저 뒤 사택 앞에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정말 좋은 거예요. 날씨는 추운데 뭔가 따뜻하고 포근하고. 한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죠. 그리고 집사람하고 아무 말도 안하고 그저 참 좋다 그랬어요. 그리고 망설임 없이 결정을 하고 입찰에 응했죠. 다행히 운이 좋아 이 폐교의 주인이 될 수 있었어요. 몇 년간 주말마다 여기로 왔죠. 집사람도 제 뜻을 알고 지지를 해주는 입장이라 처음에는 아이들 데리고 같이 내려와서 많이 도와주고 했는데 나중에는 지치더라고요. 고맙고 많이 미안했죠. 주말에 아이들하고 제대로 된 여행 한 번 못 가고. 그래도 많이 이해해주고 해서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싶어요. 다행히 아이들도 아빠가 하는 일 존경한다 그러고 여기 오면 좋아해요. 어쨌든 그래서 나중에는 저 혼자 와서 이것저것 뚝딱거리다가 올라가고 그러다가 3년 전에 다 정리를 하고 사표를 내고 아주 내려왔죠. 지금은 한 주는 제가 올라가고 한 주는 식구들이 내려오고 그래요. 그러다 보니까 만나면 아내와도 서로가 애틋하고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는 거 같기도 해요.”
좋은 책 찾아 팔도를 누빈다
그 전 당무분교 때는 처음이라 마음이 앞섰다. 그저 좋아서 주말농장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일이 만만치 않았다. 돈도 시간도 체력도 문제가 되었고 남편과 아빠의 자리도 소중했다. 그래서 접어야만 했던 꿈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오랜 시간을 들여 준비를 했다. 서울과 도곡리를 오가며 잡풀만이 아니라 가시넝쿨 칡넝쿨이 우거진 학교를 베어내고 깎아내고 들어내고 해서 하나하나 정리하고 다듬는 일들을 했다. 그러면서 주말이면 헌책방이 있다는 곳은 어디든지 달려갔고 누군가 귀한 책들을 정리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새벽에도 달려가서 책을 얻어왔다. 그의 책 욕심을 아는 분들은 이사를 가거나 이민을 가거나 책을 줄여야 하는 일이 생기면 그에게 전화를 주기도 했다. 그렇게 틈나는 대로 전국의 헌책방 골목과 벼룩시장까지 누비며 월급 받으면 책을 모으는 한편으로 몇 년간 수입 없이 투자를 해야 할 상황을 대비하여 자금도 마련해야 했고, 책마을 운영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도 필요했다.
“사실 지금은 총알이 다 떨어진 상황이에요. 집사람이 학교 선생님으로 있지만 힘들어도 저는 한 번도 손을 내밀거나 어려운 내색을 한 적이 없어요. 고서적이나 중고 서적을 팔기도 하고 나름대로 운영을 알아서 하죠. 직장생활을 할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저희는 각자 수입을 몰라요. 그렇지만 어디에 얼마가 들어가는지 아니까 굳이 궁금해 할 필요도 없고 서로 믿음이 있는 거죠.”
그는 헌책방을 하는 사람들은 사냥꾼처럼 좋은 책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는 게 숙명이라고 한다. 그도 책을 찾아 팔도를 뒤지고 다니기도 했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헌책 서점을 운영하는 이들을 부지런히 만나러 다녔다. 그중에서도 완주에서 삼례헌책방을 운영하는 사장님 등 폐교를 활용해서 헌책 사업을 하시는 이들을 찾아다니며 경험을 나누고 정보를 공유하기도 하면서 공부를 했다.
“인맥도 중요해요. 좋은 책 귀한 책을 알아보시는 분들도, 그런 책들을 소장하고 계신 분들도 많거든요. 그분들이 돌아가실 때 그 책을 가져가시지 않잖아요. 그분들도 책의 가치를 아는 이에게 그 책을 물려주시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두 분도 책이 있는 자리에서는 제 생각을 해 주세요.”
취재를 하면서 느낀 건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헌책방 사업도 혼자서는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서로 책에 대한 정보를 나누고 서로가 필요로 하는 책을 찾아주고 그 책의 가치를 아는 이들과 연계를 시켜주고 때로는 서로가 필요한 책을 사기도 하고 또 팔기도 하는 헌책방 시장, 헌책을 사고파는 일도 결국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이었다.
영하21도, 폐교에서 맞은 혹독한 신고식
안동과 아무런 연고가 없던 박상익은 그렇게 안동과 인연을 맺고 3년 전 안동시 와룡면 도곡으로 전입을 했다.
“우리 어머니가 처음 여기 와 보시고는 멀쩡한 직장 때려치우고 처자식 놔두고 여기서 뭘 어찌하려고 하느냐고 미쳤다고 하셨어요. 처음 1년 정도는 걱정을 많이 하셨죠. 그런데 1년 정도 지나니까 어머니도 포기를 하시고 차츰 꼴을 갖추어 가는 학교를 보면서 안심이 되셨는지 어쩐지 걱정을 접으셨어요. ‘쟤가 저기서 또 혼자 잘 놀고 있구나’ 하시더라고요. 이제는 여기 오셔서 동네 분들하고 이야기도 하시고 된장 고추장도 담가 주시고. 아들 얼굴 보고 싶으시면 한 번씩 오시지요.”
그가 짐을 싸서 안동에 내려온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제가 내려온 3년 전 그해 안동에 20년 만의 추위가 왔다고 하더라고요. 우리 마누라가 ‘너가 내려간 걸 아나보다’그랬죠. 온도계를 재어 보니까 영하 21도에요. 그때는 정말 밤에 악 소리가 나올 정도로 춥더라고요. 그래도 서울 안 가고 오기로 버텼죠. 첫해라 멋모르고 스노타이어도 안 해서 온 겨울 내내 여기 대동골에 발이 묶여 눈 속에서 지냈어요. 그해 눈도 많이 왔죠. 혹독하게 입성 신고를 했죠. 그렇게 갇혀서 그 추위 겪고 나서는 웬만한 추위는 견딜만 하더라고요. 겨울에 난로를 피워놓고 눈이 막 내리면 정말 천상이 따로 없어요. 안동도 개발이 많이 되어서 대부분 손을 댔는데 여기는 시내에서 삼십오 분밖에 안 걸리면서도 손을 안 댄 오지 아닌 오지라 그게 너무 좋아요. 여기는 영원히 그냥 이대로 남아 있기를 바라죠.”
본격적으로 안동에 입성하고 그가 한 일은 수도 없지만 큰 틀만 이야기 하자면 학교 주변을 정리하고 학교를 새로이 보수하고 서가를 짜 넣는 일이었다. 책장을 짜 넣고, 책들을 분류해서 정리하고 그 많던 돌들을 치우고 다듬어 화단을 만들고 꽃길을 내었다. 그러면서 그는 이곳에 온전히 마음이 묶이고 말았다. 마음이 묶이고 나니 이곳의 모든 것들이 소중하고 예뻤다.
“대체로 폐교가 터가 좋아요. 우리 선조 분들이 옛날부터 애들 공부시키는 곳인데 좋은 자리 내줘야 한다고 지역 유지 분들이 선뜻 제일 노른자 땅을 내놓으시고 한 게 많거든요. 이곳은 원래 절터였는데 저 아래 있던 학교가 물에 잠기면서 여기 있던 탑을 없애고 이곳으로 학교를 옮겨지었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청소하고 정리를 하면서 보니까 옛날 대동초교 때 사진들이랑 학교 서류들, 서예작품 같은 학생 작품들도 많이 남아 있더라고요. 제가 그것들 하나도 안 버리고 철제 캐비닛 속에 그대로 보관하고 있어요. 사진이랑 기록들을 더 찾아서 언젠가는 이 학교 졸업생들을 위한 조그만 전시회를 열 계획이에요. 소책자 같은 걸 하나 만들어서 찾아오시는 분들에게 하나씩 나눠주고 싶기도 하고요. 학교가 철거되거나 아주 없어지지 않고 이렇게 다시 살아나 책마을이라는 문화 공간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이 마을 분들만 해도 학교가 이쁘게 단장이 되고 무엇보다 밤이면 학교에 불이 켜져 있어서 좋다고들 하시거든요. 마을에 이장님 댁을 비롯해 대여섯 가구가 있는데 학교 운동장 그늘에 와서 쉬시기도 하고 어머님 건강은 어떠냐고 물으시기도 하고 간혹 김치며 반찬거리를 갖다 주시며 학교가 훤하니 얼마나 보기 좋냐고 하실 때 맘속으로 혼자 뿌듯하죠.”
사실 홍천에서 처음 당무분교를 시작할 때는 폐교를 얻어서 도서관을 할 수 있다는 거 자체만으로 좋았다.
“나도 폐교를 얻을 수 있구나, 기회가 되면 폐교에 도서관을 지어 그동안 모은 책을 여러 사람들과 나눠보기도 하고 원하는 이들이 있으면 팔기도 하면 좋겠다 하는 생각으로 시작을 했죠. 그때도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의 지원이 컸죠. 텃밭이 딸린 교실 세 칸의 아담한 분교였는데 학교 청소를 하는 날은 그 학교 졸업생인 마을 사람들이 다 도왔어요.”
그런데 이곳에서 첫날 그는 당무분교의 경험이 아무 도움이 안 되리라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장소랑 건물에 따라서 모든 게 다 달라지더라고요. 당무분교는 작은 교실 세 칸짜리 목조 건물이었는데 여기는 콘크리트 건물에 어마어마하게 크더라고요. 처음에 엄두가 안 나고 당황스럽더라고요. 무작정 엉킨 나무 덩굴부터 제거해 나갔죠.”
무서움을 잘 몰랐던 그도 처음에는 힘들었다고 한다. “혼자 자는데 무섭더라고요. 그때는 사택도 정리가 안 된 상태라 교실 바닥에 침낭 깔고 들어가자는데 휘잉 하는 바람소리가 장난 아니었죠. 폐교사서 다 만들어 놓고는 팔려고 내놓으시는 분들이 많은데 제일 큰 게 무서워서라고 해요. 그분들은 저처럼 하나하나 직접 못 박고 돌 들어내고 마음을 쏟은 게 아니라 돈으로 사람 사서 학교 꾸미고 하다보니 자신들의 마음이 안 들어가 있으니까 산골 오지에 춥고 바람 불고 산짐승 소리 들리면 무서운 거죠. 자신의 혼과 정성이 들어가 있으면 안 무서워요. 지금은 밤에 자리에 누우면 마음이 고요해지죠. 대신 감성이 풍부해져서 술 한 잔 생각 날 때도 많지만요.”
홀로 하는 작업, 고독마저 즐긴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래도 맑은 날이면 하늘에 별이 지천이고 꽃 피고 비 오고 단풍 들고 눈 오는 사이사이 전기공사, 수도공사, 화장실 공사 그리고 사택공사까지 다 마쳤다고 한다. 해 지면 들어가 곯아떨어지고 날 밝으면 일어나 일하느라 그 좋아하는 책도 제대로 못 읽었는데 이제 조금 여유가 생겨 요즘은 그동안 읽고 싶었던 책도 읽고 글도 더러 긁적이곤 한다는 상익 씨, 이제 산골 사람 다 됐다. 시골 농군 같은 차림새로 교실 옆 현관문에 빗물받이 설치한다고 손님이 와도 일 끝날 때까지 학교 구경하고 있으라 하고는 뚝딱뚝딱 위이잉 공구 소리 울리며 공사에 한창인 그를 보고 누가 대학도서관 서가에 익숙한 사서 출신인 줄 알까 싶다. 혼자서 뚝딱뚝딱 하는 그가 카페에 올린 글 일부 구절을 옮겨보자면 이렇다.
혼자 하는 일
누구 하나 쳐다보는 이, 간섭하는 이 없이 혼자 하는 일
오직 나만이 시작하고 나만이 끝내야 하는 혼자 하는 일
혼자 일하다 혼자 일한 것이 맘에 안 들면 혼자 중얼거리다 혼자 흥분하다 혼자 소리치다 그럭저럭 해가 저 산마루를 넘어갑니다.
어스름한 불빛에 혼자 밥을 먹습니다.
혼자 밥을 하고 반찬을 꺼내고 숟가락을 들며 혼자 밥을 먹습니다.
그러다가 맘이 동하면 막걸리를 꺼내 혼자 술잔을 기울입니다.
한잔 술에 어느새 잠은 쏟아지고
몸을 가만히 이불위에 내려놓습니다.
그래도 혼자서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해 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 외로움과 고독마저도 좋다는 상익 씨다. 계절이 변하면서 요즘 같으면 바깥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좀 더 많이 한다는 상익 씨, 이제는 큰일은 대강 끝나서 큰 작업은 없다고 한다. 비가 오거나 더운 날은 그가 안에서 책과 관련된 일도 하고 독서도 하고 못다 한 책 정리를 하는 날이다.
“지금 서가를 교실 별로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렇게 이름을 나누어 놓았는데 제 나름대로 분야별로 분류를 해서 이름을 그렇게 지은 거고요, 아직도 책 정리는 계속 진행 중이에요. 끝이 없지만 천천히 해 나가고 있어요. 그래도 어디에 무슨 책이 있는지 저는 다 알죠.”
책 정리 말고 아직까지는 책과 관련된 일이 많지는 않다. 책 정보를 올리고, 더러 가지고 있는 책 중 고객이 찾는 책이 있으면 배송도 하고, 구하는 책이 나왔는지 다른 이들의 온라인 중고서점도 부지런히 들락거린다. 서울 갈 일이 있으면 지금도 오가는 길에 부지런히 책을 찾아다니는 건 물론이다.
“사회과학 서적들은 이제 거의 맥이 끊겼죠. 사회과학 책을 만들던 그분들이 이제 경제 논리에 밀려서 요즘 유행하는 가벼운 트렌드의 서적들을 출간하는 쪽으로 다 방향 전환을 해 버려서 중고 사회과학 서적들이 더 귀해졌죠. 그런 책들도 저는 환영합니다. 사실 제가 가장 애착을 가지고 모으고 있는 분야는 문학 쪽이에요. 20년대의 백석 시인 작품이나 50년대 작가들의 초고가 실린 문학잡지 같은 게 있다는 소식이 있다면 불원천리 달려가야죠. 또 어떤 특정인이 특정 분야에 대한 책을 일생 동안 모은 것이 있다면 그 책의 가치는 어마어마하죠. 누군가에게는 쓰레기가 누군가에게는 찾고 있던 바로 그 책일 수 있거든요. 책의 가치를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의 깊이를 말해주는 거죠.”
오직 책이 좋아 선택한 문화귀농
“이 책마을을 소개하면서 제가 가장 염려하는 부분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흥미 위주로 인증사진 찍으러 왔다 가시는 분들이 많을까봐 그게 걱정이에요. 진짜 책이 좋고 숨어있는 책을 찾는 재미를 아는 이들이 오기를 바라죠. 책을 통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모임을 하시는 분들이 오신다면 언제든 환영이고요, 언젠가 작가 선생님 모시고 책 가지고 소모임 같은 거를 하는 게 제 꿈이고요. 그런데 그런 일들은 어느 정도 분위기가 익어서 성숙해야 가능한 것들이지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책을 좋아하시는 분들, 책을 아낄 줄 아는 분들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옛날 주막집 같은 공간을 만들어서 막걸리 나누며 역사와 철학을 이야기하고 문학을 이야기하는 그런 자리를 만드는 것도 그의 계획 중 하나이다.
“안동이 문화적으로 많은 것들이 잘 되어 있는데 책에 관한 것들은 의외로 잘 안 돼 있는 거 같아서 놀랐어요. 특히 중고서적 같은 경우는 다루는 곳 자체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모든 콘텐츠는 책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이 책마을을 통해 안동에서 조금이나마 책과 관련된 문화를 만들어가고 싶다고 생각을 하죠. 책을 좋아했다는 거, 그게 지금의 저를 만든 거 같아요. 제가 만든 말인데 저는 귀농의 형태 중에 문화귀농을 한 거라고 생각을 해요. 제가 이 공간 속에 책을 싸들고 와서 그걸 가지고 여기 사람들하고 뭔가를 하고 싶다고 할까요? 안동에도 저하고 뜻이 맞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그런 분들과 제가 같이 만들어 갈 수 있는 부분들이 있을 거라고 믿어요.”
그 말을 들으면서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안동에 있던 헌책방들이 생각났다. 잃어버린 교과서랑 같은 걸 구하러 들렀던 학교 골목길에 있었던 책방이며 목성교에서 천리교까지 뚝방길 따라 있었던 『빨간머리 앤』 같은 만화책 한 질을 통째로 샀던 헌책방들, 방학식을 하던 날, 친구들과 참고서며 교과서며 잡지 같은 것들을 모아서 헌책방으로 몰려갔던 기억들도 난다.
그때도 책을 좋아했던 나는 책방 구석에서 돈이 부족해 사지 못하는 책들을 한참이나 쭈그리고 앉아서 보곤 했었다. 그 책방들이 하나도 안 남고 어느 날 다 사라져 버려서 괜히 뭔가를 잃어버린 것 같았었는데 이제 도곡 산골마을에 책마을이 생겼으니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주 걸음을 하고 싶지만 꼭 가지 않더라도 그곳에 가고 싶을 때 찾아갈 수 있는 헌책 서점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하다.
그는 이 공간을 사랑하고 아끼지만 기꺼이 함께 나누고픈 마음도 있다.
“지난 1월엔가 이탈리아에 가서 와인을 전공하고 온 분인데 여기 1층을 임대를 해서 카페를 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분은 ‘오직 카페!’인 거예요. 저는 이왕이면 저희 책마을 하고 연계도 하고 싶고 어떻게든 책과 연관 있는 분들에게 임대를 해드릴 예정이거든요. 화가 한 분도 화실을 임대하고 싶다고 찾아오셨는데 임대를 해 드린다면 저는 그분한테는 이곳 책마을에 가장 어울리는 그림 한 점, 이곳의 사계를 그린 그림 같은 걸 받고 싶어요. 조각 하시는 분들한테는 조각 한 점, 시를 좋아하시는 분이나 소설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있으시면 사택을 내드릴 마음도 있고요.”
헌책을 사랑하는 낭만의 시대가 도래하길
스마트한 시대에도 여전히 특유의 고유한 정취와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는 헌책방의 의미는 남다르다. 시간을 들여 책을 읽는 대신에 가벼운 책을 찾고 스마트폰 속에서 그 책에 대한 찾고 싶은 정보를 손쉽게 찾아 읽으면서 우리는 대신 생각하는 힘과 의미를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각기 다른 농도와 색깔로 변색되고 탈색된 오래된 책들에는 그 책만이 가지는 고유한 냄새가 있다. 추억이 있고 문장이 있다. 또한 헌책방에는 그 공간을 지키는 이들의 삶의 흔적들이 곳곳에 묻어있다. 박상익의 안동 책마을에는 나무 하나 돌담 하나 아기자기 심어진 화단의 꽃 한 포기에도 책마을 주인장 박상익이라는 사람의 삶과 취향이 고스란히 진하게 묻어난다. 그래서 더 사람 냄새가 나는 공간이다.
지금까지 그는 너무 욕심을 내거나 서두르지 않으면서 천천히 하나하나 책마을을 만들어 왔다. 그 일을 하는 과정 자체가 크나큰 즐거움이었다. 앞으로도 서두르지 않고 멈추지 않고 계속 ‘안동 책마을’을 만들어 가려고 한다.[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5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