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를 깍으며(글/정인호)입동이 지나고 기온이 내려가던 날, 택배로 사과 한 상자를 받았다. 고향인 안동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 나의 삼종제(三從弟)가 추수하자마자 내게 먼저 보낸 선물이었다. 검은 매직으로 주소를 삐뚤삐뚤 눌러 쓴 글씨에서 그의 순수한 농심을 대하는 것 같아 더욱 반가웠다.
지난 번 ‘매미’라는 태풍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달려가서 거들어주기는커녕 변변한 위로조차 못해 무척이나 가슴이 아팠던 터에 사과를 받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과를 좋아한다는 것을 그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 상자 속에 담긴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니 담홍색으로 착색이 되어 나를 쳐다보고 미소 짖고 있어서 얼마나 반갑던지. 꼭지가 싱싱하여 수확하자마자 보냈기에 그의 정성은 더욱 돋보였다.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다가 몇 개를 담아내어 맛있게 먹는 방법을 연구하며 깨끗이 씻었다.
‘탱글탱글’하는 소리가 나는 것이 양지밭에서 수확한 것으로, 맛도 특별할 것 같았고 굵기나 색깔도 예뻐서 향내가 은은하게 코를 간질었다. 그에게 어떻게 인사를 할까 생각하면서 나의 무심함을 또 한번 깨닫는다.
나는 매일 아침 사과를 먹는다. 시장에서 사온 것을 먹을 때도, 따스한 차(茶)한 잔을 마실 때도 습관이 되긴 했지만, 사과농사를 지은 사람의 마음과 차를 끓인 사람의 정성을 생각하고 맛있게 먹었다.
사과의 섬유질은 창자의 기능을 활발하게 해주어서 변비예방에 도움이 된다고 한 탓인지, 아침에 변을 볼 때 한없이 시원함을 느끼지 않았던가. 아침운동으로 광안리 바닷가를 달리고 집으로 돌아오면, 냉장고에서 빨간 사과를 꺼내 내 손으로 껍질을 벗기는 것이 재미가 있다. 이 과정이 나의 일과이고 이젠 손에 익어 자연스럽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행복감을 맛보기도 한다.
아침에 사과 한 알씩 먹으면 의사가 필요 없다는 영국 속담을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굳이 그 말을 믿고 먹는 것은 아니다. 더러는 만병통치약이라고는 하지만 믿어본 적도 없고, 약효
같은 것은 따지지 않으며 그저 좋아서 먹을 뿐이다.
사과를 먹을 때만은 나는 욕심쟁이가 된다. 하나를 깎으면 혼자 다 먹어야 직성이 풀리기 때문이다. 마침 우리 집은 사과를 나누어 달라는 식구는 없고, 아이들도 딴 살림을 하기 때문에 우리 내외뿐이다.
그 때마다 껍질세포에 꿀이 고인 부분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한다. 비타민과 당분을 보호하면서 얇게 깎다보니 이젠 제법 손놀림이 자연스럽다. 깍지 않고 그대로 먹자니 품위도 없을 뿐 아니라 ‘자기 밉다’라는 소리를 아내로부터 듣기 십상이다.
아내는 사과를 먹을 때마다 의미 있는 미소를 보내준다. 순전히 자기 몫을 챙기려는 눈치다. 나는 한 개를 그대로 먹고, 아내는 반개 꼴이다. 이때만은 아내 몫 반개조차 왜 그리 아깝던지.
사과를 앞에 두고 아담과 이브의 원죄를 따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부부간의 금슬이 좋다는 정표로 한 두 조각을 나누어 줄 뿐이다. 내 마음대로 그 양을 정하기 때문에 사과를 깎을 때는 독재자가 된다. 그 때만은 어쩔 수 없었다.
내 고향의 사과는 맛과 향이 뛰어나다는 평이 전국에 알려져 있다. 맛과 향기만 일품이 아니라 껍질이 얇고 부드러워 깎는 소리도 눈 내리는 소리처럼 사각사각 거려서 온통 마음을 흘려놓는다.
굵고 색깔이 고운 놈을 손에 잡는다면, 엄지와 검지사이에서 느껴지던 묵직한 촉감 때문에 난 사과 깎기를 더욱 즐긴다. 곱게 벗겨진 껍질은 손아래로 길게 매달려 출렁출렁하다가 광주리 속으로 담기며 방안에 번지는 사과의 향기는 어머니의 사랑처럼 포근하다.
나는 아침마다 사과를 깎는다.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도, 내 고향 안동(安東) 길안(吉安)에도 풍년이 들었으면 좋겠다. 사과를 먹을 때마다 고향생각과 나의 삼종제에 대한 미안한 생각을 하면서 오늘도 사과를 깎는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