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 이인용씨(글/박명옥)비단 방송스케줄이 아니더라도 공식, 비공식적인 일정이 적지 않은 이인용씨를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어렵게 약속을 잡았던 10월 10일에는 공교롭게도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발표가 있었다.
하루종일 뉴스특보가 나가면서 이인용씨는 브라운관을 통해 만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닷새쯤이 지나서야 여의도에 있는 MBC 방송국을 방문할 수 있었다. 보도국 한켠에서 그와 마주앉고 보니 뉴스데스크를 진행할 때의 모습이 머리속에 각인되어서인지 반백의 머릿결이 낯설어 보인다.
이인용씨는 시청자들에게 뉴스 앵커로 친숙하다. 1996년 11월부터 2000년 11월까지 만 4년 동안 저녁 9시 뉴스를 진행했으니 3년쯤 지났다고 해서 잊혀질리 없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전문기자?라는 이름으로 뉴스현장으로 돌아왔다.
신문사의 대기자 제도처럼 보도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전문기자 제도를 도입한 것은 방송사 중 MBC가 처음이다. 뉴스와 심층보도, 해설을 중첩시킨 전문적인 리포트로 일반 뉴스와는 차별화된 기사를 제공한다는 취지에서다. 그동안 기자에서 특파원, 앵커, 해설위원까지 뉴스와 연관된 모든 직무를 거쳐온 이인용씨는 외교와 남북관계, 국제문제 전문기자로 나섰다.
고교시절 보내며 우리 사회의 변화와 갈등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해법 찾고 싶어 기자가 되다
방송에 복귀하기 전 그는 지난해 7월부터 1년간 하바드대의 언론인 연수 프로그램인 니만 팰로우(Nieman Fellow)에 참가했다. 4년동안 뉴스를 진행하면서 자신의 지식이나 능력이 고갈되어 가는 듯해 앵커를 마치면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미국기자 12명과 전세계 기자 12명이 한 클래스를 구성해 자체 세미나와 워크샵을 진행하는 니만 팰로우 프로그램에 참가한 동안 그는 자신이 몸담아온 한국 언론에 대해 돌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언론은 사회적 현안이나 갈등에 대해 객관적인 공론의 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 한국언론은 스스로 갈등의 한 당사자, 축이 되고 있지요. 미국의 언론을 들여다보며 아직 미성숙한 우리 언론이 자성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진보나 보수라는 이데올로기를 잣대로 삼기 이전에 저널리즘의 기초를 얼마나 지켜왔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겠지요"
흥미로운 것은 이인용씨의 외삼촌인 유혁인 전공보처장관도 1971년 같은 프로그램에 참가했다는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때 니만 팰로우에 참가한 외삼촌을 보면서 자신도 나중에 기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가 실제로 31년이 지나 같은 자리에 서게 됐다고 소개했을 때 각 국의 기자들은 놀라워했다고 한다.
이인용씨의 외삼촌은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청와대 정무수석 비서관과 포르투갈 대사, 공보처장관을 지낸 인물. 그에게 신문이나 기자에 대한 눈을 뜨게 한 것도 외삼촌의 영향이 컸다. 초등학교 시절 동아일보 동경특파원을 지낸 외삼촌을 둔 덕분에 그는 신문을 펼치면 외삼촌이 동경에서 보내온 기사를 찾아보기도 했다.
"고교시절을 보낸 70년대 초반은 경제적으로는 고도성장에 접어들었지만 정치적으로 유신이 시작됐고 빈부격차와 계층간의 갈등이 커져가던 때였습니다. 우리 사회의 변화와 갈등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나름대로 해법을 찾고 싶어 기자가 될 생각을 굳혔지요."
대학졸업 후 MBC에 입사한 그는 국제부, 정치부를 거쳐 1차 북핵위기가 발생하는 등 남북관계 요동치던 94년부터 2년 7개월간 워싱턴 특파원을 지냈다. 그리고 돌아온 후부터는 4년간 뉴스데스크를 진행했다. 워싱턴 시절 미국의 유력지와 공영방송 뉴스 등을 접하며 방송뉴스마저 철처히 상업화되고 세계에 내세울만한 고급지 하나 없는 우리 언론의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꼈다는 그는 뉴스가 세상을 보는 창의 구실을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데스크에 앉았다.
언론 스스로의 자기검증과 성찰 필요하다
유학생활을 마치고 다시 전문기자라는 이름으로 돌아온 이인용씨는 정권과 언론이 대립하는 상황을 바라보는 마음이 편치 않다.
"지금 한국 언론은 힘은 세고 책임감은 약하지요. 비판을 넘어 ?때리기?하는 것 같은, 감정적인 증오를 드러내는 듯한 언론이 국정운영에 장애가 될 법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처럼 계속된다면 언론에 대한 인식을 바꿔나가기도 힘들겠지요. 그러나 노대통령의 대응도 언론과의 대립구도를 부각시킬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진단에는 공감하지만 처방에는 방법을 달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번 재신임 발표가 있던 날 그는 정치가 전문분야는 아니지만 방송을 통해 ?위험한 선택이다. 대통령은 국민과 국정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요지의 논평을 했다. 야당과 언론이 발목을 잡고있고 이것이 국정운영을 어렵게 할 정도라는 점에서는 노대통령의 좌절감을 이해하지만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상황에 대한 유불리를 따질 수 없이 무거운 자리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러나 언론도 지금처럼 플레이어가 되어 갈등의 축이 되어서는 안되겠지요. MBC 뉴스라도 건강한 공론의 장의 되도록 원칙과 기초에 충실해 권력과 언론이 건강한 긴장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가 되었다면 기자로 모든 것을 이룬 게 아니냐고 묻자 그는 언론인의 한 사람으로 갖는 책임을 언급했다. 언론에 대한 정책을 떠나 언론 스스로도 철저한 자기검증과 끊임없는 성찰이 필요하다는 말이 지금 권력과 대립하는 언론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비춰지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계시던 마음의 고향 안동
"친가와 외가가 전부 안동에 있었고 중학교 2학년 때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방학 때마다 안동에 갔습니다. 일찍 떠나오기는 했지만 제 정서적인 뿌리가 거기 있다는 생각은 늘 하고 살았지요. 물리적 공간은 서울에 있었지만 주변의 정서나 분위기는 안동이었으니까요."
고성이씨 집안인 이인용씨는 안동철도국에 근무했던 부친과 율세동에서 살았고 조부댁은 법흥동에 있었다고 한다. 외가는 전주유씨로 지금은 임하댐 건설로 수몰된 박실(임동면 박곡동)에 있었다고 하니 친가와 외가가 모두 낙동강을 바라보고 있었던 셈이다.
그는 부친이 서울 본청으로 발령받으면서 다섯 살 때 서울로 거주지를 옮겼다. 외조부가 공직에 계셨기 때문에 그의 가족들이 서울로 왔을 때 외가 식구들도 대부분 서울로 온 후였다고 한다. 그래도 열다섯 되던 중학교 2학년까지는 매년 방학마다 안동에 내려갔다. 30년이 훨씬 넘은 옛날일이 되었으므로 그 때의 기억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단락단락 끊어져서 기억에 남아있다.
연세 드신 집안 어른들이 사랑채에 모여 계시던 풍경, 조부댁에 가면 어른들이 너는 서울서 지내는 게 어떠냐, 공부는 어떻게 하느냐고 점잖게 물어오셨던 기억, 된장을 버무려 담은 사발무지로 물고기를 잡고 놀았던 추억이 그것이다. 아직 안동댐이 건설되기 훨씬 전, 그 시절에는 강가에서 놀기가 좋았다고 한다.
그에게 안동이 마음의 고향으로 남아있는 데는 조부의 영향이 컸다. 안동을 떠나서도 방학 때마다 안동을 다녀갈 수 있었던 것도 조부가 계셨기 때문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할아버지댁에 가면 사랑방 문밖에서 절을 올리고 들어갔는데 인용이 왔느냐고 말씀하시던 눈빛이나 표정이 지금까지도 기억납니다. 요즘같은 분위기가 아니라 할아버지를 어려워하기는 했지만 편안하고 따뜻하신 모습은 마음에 깊이 남았지요."
조부는 집안의 구심점이었다. 집안 뿐 아니라 문중의 대소사가 조부를 통해 결정되었고 진행되곤 했다. 단아한 품성으로 늘 인자하시고 공정한 모습은 주변에서 존경을 샀다.
6.25가 발발하고 피난을 가야했을 때는 근무지를 옮겨다녀야 했던 아버지 대신 조부가 가족들을 돌봤다. 집안의 땅을 돌보던 제궁지기 집으로 들어가야 했는데 세상이 바뀌었어도 소작인들은 조부를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자신들은 형편없이 끼니를 때우면서도 조부의 식사는 정성을 들였다는 이야기를 전하며 모친은 평소 소작인들에게도 따뜻하게 대했던 조부의 인품을 알 수 있었노라고 했다.
당시에는 할아버지 대신 큰아배라는 호칭을 썼다는 이인용씨는 중학교 2학년 때 돌아가신 조부를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 많이 그리워했다. 곁에 계셨으면 이것저것 여쭤보고 싶은 것들도 많았고, 이제는 조부가 부르시기 전에 먼저 다가갈 수도 있을 것 같아 조부의 빈자리가 아쉬웠다는 것.
지금도 조부의 빈자리가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이제는 친가, 외가쪽 식구들이 모두 서울에 거주하고 있어 안동에 자주 갈 일이 없고, 가도 마땅히 들를 곳이 없어서 더 그렇다.
“지난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에 안동을 한번 다녀왔습니다. 정서적인 뿌리, 마음의 고향이라고 생각해온 곳이지만 등 붙이고 누울 집 하나 없다는 것은 안타깝고 서글프지요.”
안동을 떠난 지 40년이 넘었고, 이제 오십줄을 바라보고 있지만 조부를 기억하는 한 이인용씨는 유년시절을 보낸 고향 안동을 잊지 못할 것 같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