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의 멋을 풍기던 풍모(글/김주헌)계박사님이 안동에 머무르고 계실 때 조석으로 만나 해학과 기지로 농세월하던 남정 김구직 회장님과 한 열흘 전 쯤 통화를 했을 때만 해도 박사님의 유고 사실을 전혀 모르고 계셨는데, 뒤늦게 박사님의 별세 소식을 접하고는 황망한 심사를 거둘 길이 없다.
세월이란 막무가내라, 계박사님도 즐겨 읊으시던 “유년나가주 백발불금생”(孺年那可住 白髮不禁生)란 한시처럼 어느 누구인들 자기의 생사를 미리 알겠는가?
근 20년의 세월을 계철순 박사님은 안동에서 살았었다. 박사님의 안동 정착은 동서되는 이가 안동군수로 재임했던 것이 그 동기로 작용하였다. 또한 박사님의 사진 취미가 안동사진회에 점화됨으로서 각계 각층과의 접촉, 특히 문화예술방면으로 참여가 이루어지면서 안동사진동호회, 한국사협 안동지부 발족, 초대 안동 예총지부장을 역임하셨다. 특히 안동사진동호회는 ‘대도카메라’가 활동의 본거지가 되고 안동대학 교수님들과 청년들의 참여로 많은 결실을 이루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안동의 추로지향적 지방색에도 불구하고 박사님의 지도적 역할에 힘입어 당시 안동의 문화예술계는 화합의 분위기와 원활한 조화를 이룰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토착 안동인들은 그분을 믿을만한 이웃으로 맞아주어서 후회없이 살아가셨다. 그의 변호사라는 직책, 국립대 총장 등 법조인으로서의 전력이 시대적인 요청에 따라 변하고 있는 안동에 무엇인가 유익한 것으로 기여 할 수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세월은 늙음과 더불어 흘러갔다. 그러다가 96년 자의반 타의반으로 장손이 경기도 분당으로 모셔갔다. 그때 뜻있는 이들은 백세를 내다보는 어른을 모셔가는 일은 옳다고들 말했다는 후문이었다. 계박사님의 분당생활은 비교적 쾌적했고 때로는 장손의 시중을 받아 종로1가의 교보문고 나들이는 물론 별거중이던 부인도 함께 기거하는 안정을 즐기시는 듯 했다. 그후 이태 만인가, 부인과의 사별, 손녀의 혼인 등으로 부산의 아드님이 뫼셔 감으로 부산 남항동 해변에 위치한 비치아파트의 부산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필자가 받은 서신에는 “지금 휠체어에 앉아서 바다를 내다보고 있소. 나는 컴맹이지만 삼손은 인터넷으로 외국 간 손녀와 통신을 한다니 부럽소!” 라고 써 있었다.
노자의 멋을 풍기던 풍모
인간 계철순옹의 인품과 고인의 지난 세월의 풍모를 약간 더듬어 보고 싶다.
박사님의 바깥나들이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다.
정장을 하고 출입할 때는 흔히 ‘보우타이’를 착용하였다. 이것은 호텔 종업원이나 악사들, 혹 가수들의 기성품 ‘보우타이’와는 달리 걸치는 게 아니고, 풀었다가 언제나 다시 매듭을 지우는 것이다. 당시 보우타이는 드물었다.
다음은 캐주얼 스타일이다. 캡, 점퍼, 외제 머플러, 죠다쉬 부루진 바지, 나이키 운동화로 서울의 명동이나 압구정동에 나타나도 손색이 없다.
세 번째는 사진촬영 나들이가 된다. 계박사의 카메라는 ‘핫셀브라드’신형이다. 카메라중에 왕자다. 거기다가 카메라 가방, 삼각버팀대가 아닌 알미늄 외나무 버팀대를 휴대, 이 또한 타의 추종을 반기지 않을 정도다.
또 하나 기억나는 것으로 제주산 덩쿨 모자(여름용)가 있다. 남정과 제주관광기념으로 구입한 이 모자는 노자의 멋을 풍긴다.
두 분이 폼을 잡고 안동으로 돌아오기까지는 대등했지만 그 후가 문제였다. 계박사님은 출사 등 나들이때 자주 이 모자를 착용했으나 남정에게 이 덩쿨 모자는 안동 양반의 고전적 취향 내지는 남의 눈 때문에 벽장식용 외에는 착용할 기회는 흔치 않았다.
젊은 마음과 신속 정확한 직관력추모 월파 계철순박사
다음은 계박사님의 내적 자세다. 평안도 선천출생으로 신의주 고보를 수석졸업,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거쳐 일본에서 고문을 패스했지만 계박사님은 분명 보통 사람이라고 필자는 생각했었다.
그러나 몇 가지 비범한 데가 있다. 그것은 노래(老來)에도 다이나믹한 폭발성을 갖고 있는 젊은 마음이었으며, 신속 정확한 직관력이었다.
박사님의 단호한 자세는 오랜 법관생활에서 얻은 것인지, 도덕률이 엿보여 필자는 후한 점수를 계상하곤 했다.
안동사진동호회는 연례적인 전시회를 열어왔다. 언젠가 한번은 누드촬영 작품 한 점이 나왔는데 그 작품중 여체의 일부에 눈에 거슬리는 검은 부분이 회장의 심기를 자극, 전시 부적절 판결이 났었다. 역시 단호한 부결이었으되 불평하는 회원은 한분도 없었던 것을 회상한다.
박사님은 자서전 회고록에서 ‘나는 종교가 없다’고 적었다. 흔히 머리 좋은 사람들이 신을 부인하는 무신론적 경향이 있는데 필자가 성경과 찬송을 선사한 적이 있었는데 몇 달후에도 서가에 그대로 뽀얀 먼지를 덮고 있었다. 필자는 그 책 두권을 도로 받아서 필요한 사람에게 주었던 적도 있다.
안동 ‘사랑방’이 안동을 고향처럼 알고 안동을 사랑했던 노학자 계철순박사를 지면을 통해서나마 추모와 회고의 정을 펴보자는 의도는 의당 쌍수로 환영하며 동참할 수 있게된 필자 역시 큰 기쁨으로 감사를 드린다.
김원길 지례예술촌장의 저서 『안동의 해학』에서도 뚜렷이 드러나듯이 안동은 품격높은 선비들의 해학의 고장이다.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에 감싸인 땅에서 수준높은 해학과 유머에 젖어 지내던 날들이 마냥 그립다.
“축축지일인데 파란 고무신 집에 가서 분냄새나 맡지”
‘습습지일(濕濕之日)’을 ‘축축지일’
로 바꿔 말하던 계박사님의 기지와 해학이 오늘 새삼 그리워지며, 칠언절구 졸시로 추모의 글을 맺는다.<안동>
寫景靜觀無上樂(사경정관무상락)
自御小車唯望海(자어소거유망해)
忽然閉眼向黃泉(홀연폐안향황천)
無伴遠行那可?(무반원행나가쇄)
(＊小車: 휠체어를 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