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로부터 배운다(글/권세홍)가을은 인간의 반성적 자아를 흔들어 깨우는 시간이다. 어김없이 올해도 애잔하게 소멸하는 것들과 함께 가을은 문득 우리 곁에 왔다. 계절마다 떠오르는 상념이 다르듯이 가을이면 유난히 생각나는 것들이 있다. 스산한 풍경을 굽어 가로지르는 길들, 길이 떠올리는 몽상, 그리고 그 몽상의 배경에 흐르는 가을노래……
때로는 풍경들이 인간보다 더 겸허하게 보인다. 내외하는 처녀 총각처럼 서로 적당히 외면한 하회마을의 고가들, 비록 낮으막하나 월장은 생각도 못하는 담장을 따라 이리 휘고 저리 구부러지는 골목길엔 현대인이 상실해가는 품위와 지혜가 있다.
길에 관한 얘기를 좀 더 해 보자. 안동 주위에 새로 잘 닦은 도로를 달리다보면 옛길의 방치와 그 무용성에 안스런 마음이 간다. 길은 인간의 필요와 욕망이 낳은 인간의 자취이나 결국 인간으로부터 버림받을 운명을 타고났다.
얼마 전에 문경새재를 다녀왔다. 요즘 한창 방영되는 드라마 촬영세트장의 모조 성곽이나 건물은 보는 둥 마는 둥, 그 옛날 영남유림들이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넘었던 옛길의 행방에 마음이 쏠리다 왔다. 숲 속 군데군데 새끼토막처럼 흩어져 있는 옛길, 이는 필경 산허리를 깎아 만든 지금의 찻길로 인해 버림받았으리라. 물론 그 도로도 요즘 새로 뚫은 터널 때문에 이젠 사람과 차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
김훈의 산문집 {자전거여행}을 읽으면서 가을날의 한때를 행복하게 보냈다. 자전거 한 대에 몸을 의탁하고 길과 한몸이 되어 이땅 구석구석의 풍경과 인문의 의미망을 따라 읽어가는 동안 나는 아득하게 잊고 있었던 '가을'과 '길'이란 말을 되찾았다. 김훈의 말대로 이제 '길'은 더 이상 거쳐야 할 과정이 아닌 단축과 생략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마치 언제부터인가 '가을'은 여름과 겨울 사이 잠깐 스쳐가는 간이역처럼 지나가버리듯이 말이다.
가을엔 역시 천천히 걸으면서 만물이 쇄락하는 소멸의 미학을 몸으로 느껴야 제격이나, CD 몇장 들으며 자동차 속에서 이 진객을 떠나보내는 처지가 안타깝다. 이즈음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내 영혼의 친구 '슈베르트', 이 상처받은 로맨티스트의 [아르페지오네를 위한 소나타]는 깊어가는 가을 저녁 속으로 우리를 침몰시킨다. 어떤 이유에선지 이젠 사라져버린 악기 '아르페지오네' 대신 첼로로 연주되는 이 음악을 듣고 있으면 젊은날의 우수와 방황은 영롱한 음률로 옷을 바꿔 입는다.
마치 갈길 바쁜 나그네를 잡아끄는 단풍빛처럼, 각 악장마다 건반과 현악은 절묘한 만남을 반복하면서 우리의 영혼을 희롱한다. 느긋하게 여유를 가진 단풍객만이 저녁 햇살에 역광으로 타오르는 단풍빛, 비갠 구름 사이로 햇살이 희롱하는 단풍빛을 탄성과 함께 느낄 수 있듯이……
꿈과 야망도, 그것들을 짊어지고 넘던 새재의 옛길도, '아르페지오네'의 화려한 음색도 이젠 나의 것이 아니다. 왜 자주 전화하지 않느냐 성화를 부리던 친구도, 열심히 글 쓰지 않는다 나무라던 선후배도 이젠 먹통이다. 그들도 혼자서 가을을 보낼 줄 아는 중년이 된 것일게다. 이따금 짧은 메모하나 끼운 시집이나 논문집을 보내면서 서로를 잊지 않고 있음을 확인할 뿐이다. 그렇다, 애초부터 '아르페지오네'는 존재하지 않는 악기인지도 모른다. '로스트로포비치'의 첼로를 통해서만 들을 수 있는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란 곡명처럼……
그러나 한가지, 더 이상 젊지 않음을 슬퍼하지 않는 것은 소멸은 완성의 또다른 얼굴이며 새로운 시작의 배태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