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깍이 학생아줌마 장세화씨(글/노영옥)

"이찌, 니, 산, 시, 고, 로꾸, 시찌,……"
시커먼 구두약이 묻은 크고 투박한 손, 엄지와 검지에 침을 '탁'하고 뱉은 신기료 장수는 그 날 번 꼬깃꼬깃한 종이돈을 한장 한장 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이처럼 세기 시작했는데 그러다가 단위가 커지면, "열 너이, 열 다섯,… 거, 거, 좀 조용히 해 봐라, 헤깔리잖나. 다시 한나, 둘, 서이, 너이,……" 그렇게 한 소릴 하곤 센 돈을 꼭 다시 한 번을 더 헤아리는 것이었다.


 


그런 뒤에라야 그의 시선은 벌써부터 옆에 웅크리고 앉았던 그의 어린 딸에게로 모아지곤 했는데, 그러면 딸아이는 다 안다는 듯 익숙해진 폼으로 한 손에 다 모아쥐지도 못하는 종이 돈을 아버지 꼴을 흉내내어 셌다. 그런 다음 가장자리가 닳을대로 닳은 늙은 아비의 노트에 야물딱지게 생긴 고사리손으로 '0월 0일은 얼마'하면서 적고는 여린 목청을 돋우어 "오늘은 만 오 천원 적었어요"한다.


 


그 말 들은 장수는 꼭 어린 딸을 향해 "아이쿠, 똑똑타." 했고, 어린 딸은 자신이 무슨 큰 일이라도 해낸 듯 씨익 흐뭇히 웃곤 했다. 그랬던 아이는 고학년이나 되서야 제 아비가 초등학교도 못다닌 사람이란걸 알았고, 그런걸 유식한 말로다가 문맹이라고 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늦깎이 학생들의 배움터 마리스타 야간학교

할머니가 지어주신 세화(世花)란 예쁜 이름을 갖고 있는 아줌마, 장세화(37세)씨와의 만남은 그렇게 내 어린시절의 아련한 기억을 피어오르게 했다. 의료원 앞뜰의 모과열매 빛깔이 적당히 참해질 무렵, 우리는 마리스타 야간학교를 찾았다. 늦깍이 공부에 열심인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그녀를 만나기 전 옥상에 있는 교무실에서 학교에 관한 대략적인 설명을 듣기로 했다. 학교는 초등, 중등, 고등 6개 반으로 구성되었고, 다만 검정고시 대비를 위주로 하기에 그 시험날짜에 맞추다 보니 9월달이 1학기가 된다는 것 외에 정규교육과정의 학교와 별다른 차이점은 없었다. -9월 7일이 바로 입학식이었다.-


천주교 교구청에서 지원을 받아 시작된 마리스타 야간학교는 벌써 30년을 넘기고 있었고, 안동대학교 동아리 선모임-먼저선(先)자와 착할선(善)자를 모두 써서 먼저 선을 행하자는 의미로 출발한 봉사활동 동아리-에서 교사를 전담하기 시작한 것은 한 20년 정도가 된다고 했다.


현재 마리스타 야간학교의 교사는 반년동안 교사교육을 받고 교사연수회을 거친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학교의 교무과장, 서무과장, 연구과장, 학생과장 등을 맡고 있었고, 교장선생님은 수녀님이, 교감선생님은 현직교사분이 자원봉사활동을 해 주고 계셨다. 그 이전에는 천주교 수녀님들이 직접 가르치시거나, 천주교재단에서 외부교사를 영입하는 등의 방법으로 운영했다고 한다.


현재 학교에 다니고 있지 않은 사람이면 누구나 입학이 가능하고, 학습교재 또한 무료로 제공된다. 입학생은 입학자격 시험을 거친 후에 개인별 능력에 따라 반 배치가 이루어지며, 보통은 초등, 중등, 고등반을 거쳐 최종적으로 검정고시에 합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중학과정까지를 이수했을 경우라도 사회에서와 같이 학력인정이 되는 것은 아니고 오로지 검정고시를 통과해야만 공식적인 학력인정을 받게 된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면이 있었다. 


초등1반의 경우는 글이나 숫자를 익히시러 오시는 분들이 많고(따라서 나이드신 분들이 많고), 중등반을 거쳐 고등반에 이를수록, 어려운 집안사정 때문에 학업을 이루지 못하신 분들이나 학업을 중도포기 하셨던 분들이 많이 온다고 한다.


현재 등록된 학생은 약 150명에 이르고 연령층도 20대에서 70대까지 매우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지만 다들 직업이 있고, 가정을 이루고 계신 분들이라, 사정이 여의치 않은 까닭에 대략 꾸준히 나오시는 분들만 하면 한 50여 명 정도에 이른다.


연령층이 다양하다니까, 내심 학생들의 분위기가 궁금해 물어보니, "가끔은 말 안 듣는 젊은분이 계시긴 해요. 제가 수업을 들어갔을때 학교땜에 바쁘고. 또 피곤하고, 시험기간 걸리면 솔직히 정말 하기 싫거든요.. 근데 딱 들어가서 선생님 아프시냐고 감기 걸리지 말라고 막 음료수 놔주고 걱정해주시고 이러면 정말로 가슴이 아프죠(웃음). 길에서도 만나면 아∼유, 선생님 하면서 손 잡고, 집에 놀러오라고 막 그러시거든요. 그리고 정말로 배우실려는 열의가 대단하세요. 조금만 빨리 마치면 선생님 쪼금만 더 하지요. 쪼금만 더하지요, 그러시고요."


범생이아줌마의 학교다니기

  오늘 만난 장세화씨는 초등2반을 목전에 둔 매우 모범적인 범생이 학생이었다. 아직껏 젊고 순하게만 보이는 외모와 달리 그녀는 벌써 고등학교 2학년, 중학교 3학년, 초등학교 6학년짜리 세 자녀를 둔 아줌마였고, 시부모까지해서 일곱 명의 대가족을 거느리며 사는 며느리란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압도한 것은 그녀에게서 품어져 나오는 당당한 기운이었다.


독자가 예상한 바처럼 그녀를 대해 제일 먼저 던진 물음은 어떻게 서른 일곱이라는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 새삼스레 한글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느냐는 것이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전 그녀는 잠시 기억 저편에 접어 두었던 시린 기억을 토해낸다.


"애들이 국민학교 드가고 입학하고 그랄 때 갈켜줄라이께네 뭐, 알아야 갈켜주지요. 진짜 기역, 니은도 몰랐어요, 전엔. 아휴, 진짜 속상하고, 안타깝고, -많이 우셨겠어요?- 예, 그래 못가르쳐 주니까, 남편한테 미루코, 갈켜주라카고, 안그러면 우리 시어머님은 옛날이라도, 그 때 중학교도 다 나오셨어요. 그래, 어머님이 가르쳐주고. 그런거보니까, 하∼, 나(나이) 많은 분도 가르쳐주는데, 젊은 사람이 자식을 못가르쳐주니까 너무 속상하고, 너무 그렇더라구요."


몽당연필을 꼭 움켜쥐고 삐뚤빼뚤하게나마 숫자를 그려대던 어린 딸을 바라보던 내 아버지의 심정이 꼭 이런 것이었겠지. 부모된 자로서 제 자식을 못 가르쳐주는 이의 심정은 굳이 말로하지 않아도 알 것이요, 이미 자식들은 다 자라버렸지만, 지난 시절의 그 시린기억만큼은 그녀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듯 했다.


문맹에 대한 서러운 기억 때문만이 아니라도 공부는 생활해 나오면서 계속 해야겠다고 생각했단다. 그런 그녀가 학교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마리스타 야간학교가 목성교 성당 아래에 있던 시절부터니 이미 꽤 오래다. 그러니까 90년부터 93년까지 한 2, 3년을 다니다가 집에서 쉬어야 한다는 병원의 진단에 따라 안그래도 몸이 불편한 남편을 쉬게 할려고 학교가기를 그만 뒀었다. 한 달 정도만 쉬고 다시 나오리라 생각했는데 그만 여의치 않은 형편 때문에 미뤄지다가 이번 9월에야 재입학을 해서 다시 다니게 된 거였다.


초등학교 3학년과정까지를 배우고 그만뒀던 그녀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결석 한 번 안하고, 즐겁고 해가 잘 다녔거던요. 상도 받고. 우수상도 받고, 개근상도 받고, 주는 상은 거진 다 받았어요. 잘한다고. 그 때는 배와도 글이 참 머리에 쏙쏙 잘들어와요."


"정말이지, 억씨기 재밌었다"는 그녀의 이 한 마디로 그 시절에 대한 흡족함은 역력히 이해됐지만, 꾸준하게 다녔으면 지금 고등학생이 됐을 건데…하는 말에서는 그 시절에 대한 아쉬움 역시도 진하게 밀려들었다.


시부모님과 남편 도움으로 만난 새로운 세상

제법 똑똑하다는 소릴 듣고 살았다는 세화씨가 정규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된 데는 그만한 딱한 사정이 있었다. 입학서류를 받아 놓기까지 했는데 그만 동생을 돌보다가 쇠죽 끓이는 솥에 동생을 업고 빠져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 바람에 오른 팔에 심한 화상을 입었는데, 병원에 가면 팔을 자른다고 하는 통에 집에서 낫게 한다고 부모님이 고약으로 임시방편을 삼아오다가 화상을 입은 팔이 다른 균에 심하게 감염이 되면서 상처가 덧나는 바람에 팔을 잘라내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었다.



아무리 정신력으로 이겨내려 해도 육체적인 고통이 너무 심해 그녀의 기도는 항상 다른 것은 어찌해도 좋으니 그저 팔만 낳게 해달라는 주문이었다.


"너무 아파서 죽을라고도 여러번 했어요. 그 얘기 다 나오면 나 눈물 날 꺼 같애."(이 말을 하는 순간 그녀의 눈이 벌겋게 충혈되는 기운이 역력하다)



 있으나마나한 곪아터진 팔을 시집오기 전까지 12년을 달고 살았으니, 그 고통이며 무지함은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그저 가슴 애린 한이 될 뿐이었다.  


어머니가 그녀 나이 열 다섯이 되던 해 일찍이도 돌아가셨고, 딸 많은 집이긴 했어도 다들 외지로 돈벌러 나가 있어서, 집안일은 어쩔 수 없이 몸이 불편해 집에 있던 그녀의 몫이었다. 그녀는 또 아픈 팔을 하고도 억척같이 모든 일을 잘 해내서 동네사람들의 칭찬이 늘어졌었단다.



옛날엔 다 그랬다고 하지만 그녀 역시 아무것도 모른체 집에서 시집 가라고 해서 19살던 해에 고향 온혜를 벗어나 남편 강진구(46세)씨를 만나 안동시내의 운안동으로 시집을 나왔다. 그녀의 표현따나 사회에 눈뜬게 아무것도 없이, 문맹인 체로. 시집을 간다고 수술은 하긴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런 장애를 너그러이 이해해주시는 시부모님과 남편을 만나 지금은 남편의 이해 덕분에 이렇게 공부도 하게 됐다고 내심 자랑섞인 속정이 대단하다. 그녀의 홀로 남은 아버지마저도 그녀의 첫 딸이 6개월이 됐을 무렵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긴 했지만.



현재 남편은 안기동에서 미성소리사란 이름의 전파사를 경영하고 있다. 몸이 불편한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늦깎이 공부하는데 대해 불만없이 그저 이해해주고 다독거려주고, 집에 가서 하루 공부한 내용을 보여주면 못했는데도 그저 "잘 한다, 잘 한다." 칭찬해주는 맛에, 그 바람에 신이 나서 집에서도 공부를 조금 더 하게 되더라나.


영락없는 초등학생 그대로의 얼굴

하루중에 제일 좋은 시간이 학교에 와서 공부할 때라는 그녀는 집에서 나오는 오후 6시 10분 차를 타는 순간부터 설레기 시작한다.



"여 오면은 마음이 어린 아들(아이들)마음 있잖아요. 진짜 그 마음으로 돌아가거든요. 고만 국민학생으로 돌아가는거야."


여기를 나오면서부터 삶이 즐겁고, 생기가 있어 졌다는 그녀다. 학교 다닌다고 예쁜 자주색 가방까지 산 그녀의 표정이 영락없는 초등학생 아이의 얼굴이다.


"신기하고, 희안하죠." 처음에 글자를 배워 스스로 읽을 수 있게 됐을 때의 그녀 마음이 이랬다. 어려운 것을 한 가지씩 읽게 되면 그것이 그렇게 즐겁고, 보람있고, 선생님들한테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고. 이래서 낮은 자의 겸손은 더욱 빛나는 것일까.


시간표를 보니 국어, 수학, 특활활동 시간도 있다. 특활활동시간에 그녀는 노래를 못해서 노랠 배운다고 한다. 얼마 안 있으면 경주문화엑스포에 가서 야간학교 전체가 모이는 가운데 작품발표회 및 전시회도 갖는다고 했다. 소풍가서는 달리기며, 술래잡기 이런 거 다한다고 말하는 그녀의 표정이 어찌 그리도 신나 보이던지……. 그녀에게 노랠 시키면 아마도 그녀는 마른나무 가지에서 떨어지는 작은 잎새하나……하는 노랠 할 것 같다. 그 노랠 배웠다고 했으니, 하여튼 소풍도 가고, 체육대회도 열고, 또 1년에 한 번씩은 학생들의 작품을 모아 {달맞이}란 문집도 발간한다.



보통 20여명 정도의 학생이 참석하는 수업에서 장세화씨는 젊은 축에 낀다. 당장에 초등2반으로 가도 되지만 받아쓰기를 조금 더 잘해서 가고 싶어서 아직 초등1반에 머물러 배운다. 호기심에 그녀의 책과 노트를 좀 보여 달라고 했더니 왼손으로 쓴 글씨가 예사롭지 않게 깔끔하고 예쁘다. 내 입이 와∼! 벌어져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아직까지도 글자의 받침이 젤 어렵다고 하는 늦깍이 학생이면서도 그녀는 배움에 대한 욕심이 많다. 영어도 배우고, 컴퓨터도 배우고, 하여튼 죽을때까지라도 배우고 싶단다. 마음 같아선 열심히 배워서 야간학교 선생님도 하고 싶긴 하지만 갈수록 기억력이 약해지니 글 배우기가 전에 비해 쉽지 않고 그러니까 솔직히 조금 자신이 없어지기도 한다고 했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사랑의 편지 쓰고 싶다

글자를 몰랐던 시절. 은행 갈 일을 남편에게 미루고, 어디를 찾아갈때도 간판을 읽지 못해서 불편했던 경험들, 진구라는 남편이름과 진국이라는 시동생 이름간의 된소리 발음을 헷깔려 전화를 잘못 바꿔주던 에피소드하며, 교회를 다닐려다가도 글을 몰라 찬송가를 제대로 따라부르지 못해 속상해 하던 기억을 이제는 선생님들의 친절한 도움과 배움들 덕분에 얼마간은 해결할 수 있게 됐지만 아직도 서툴다는 느낌을 그녀 자신은 지우지 못한다.



대충 다 읽긴 하지만 지금보다 좀 더 능숙하게 읽고 쓰기가 가능해진다면 남편한테 사랑의 편지도 써주고 싶고, 자신의 지나온 이야기를 글로도 쓰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써 놓고 보면 말이 안 되는 통에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필력이 야속할 따름이라고.



한 번은 딸 아이에게 짧은 메모를 남겨두고 외출했다 돌아와서 "엄마가 편지 써 논거 봤나?"했더니, "봤는데, 엄마 글씨 많이 틀렸어. 뭔 말인지 하나도 몰라"하더란다. 못 배운 엄마의 심정을 헤아려 이 담에 교육학과에 가서 엄마처럼 못배운 사람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겠다는 착한 딸아이는 지나는 말이었을테지만 듣는 나는 왜 그리 목이 메던지…



불편한 팔과 글 모르는 서러움 중 어느 것이 더 절실했냐는 우문에


 


"지금은 글 같애요. 지금은 글 같은데, 생활하는덴 지금 내가 팔이 안아프면 생활전선에 나가서 돈을 벌어 오니까, 내 자신 하나만 두고 보면은 글이고, 가족을 돕고 싶은데 못 도와주는 것은 팔이고. 팔만 있으면-그녀의 오른 팔은 의족이니까- 가족을 책임질 수도 있잖아요. 지금 남편도 힘들어하는데 어디라도 다녀갔고, 돈을 벌어갔고, 가정에 보탬이 될 수 있고, 자식들도 좀더 도와줄 수 있고……"


사는게 수월치 않다고 때때로 불평하던 나는 이 말에서 더 이상 그녀의 당당한 눈을 쳐다볼 수 없었다.


아픈 남편과 착한 자식들을 생각하는 맘 고운 그녀. 자연스럽게 웨이브진 아름다운 머리결과 한참을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았던 얼굴, 그런 그녀에게서 뭣보다 젤 욕심이 난 것은 바로 그녀의 당당한 눈빛이었고, 오랜동안 식지 않을 그녀를 휩싸고 돌던 당찬 기운이었다.


마침 수업 시간에 맞추어 들어오는-날 며느리 삼고 싶어하던- 넉넉해 보이는 아주머니께  장세화씨에 대해 물었더니 "응, 저 새댁이는 참 열심히 해요. 오는 것도 엥가이 열심히 오고……"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녀는 당당하게 말한다.


"배울 때 자신있게 나오셔 가지고 부끄러워하시지 마시고 배우시라구요. 근데 대부분 남들이 아까봐 부끄러워가지고 못 오는 분들이 많더라구요. 그라고 남편과 가족들이 협조 안해줘갔고 못나오는 분들도 많구요. 가족들 협조 많이 해주시고, 좀 몰르는 것을 배우게 가족들이 도와주시고. 그리고 배우고 싶으신 분은 부끄러워 하지 마시고, 왜 부끄러워해요. 글 배우는데, 몰르는거 배우는데"


뒷통수가 뜨끔하다는게 이런 것이로구나. 무슨 말이 필요하랴. 유구(有口)하나 무언(無言)일 수밖에 없음을.


"이찌, 니, 산, 시, 고, 로꾸,…"를 손으로 꼽아 외던 내 아버지의 모습을 쉬이 잊지 못하는 것처럼, 내 뇌리속에 얼마간은 아니 꽤 오랜동안 그녀의 마지막 이 말은 머무를 것이다. 왜냐면 늦깍이 공부에 대한 당당함! 이것이 바로 그녀가 내품는 매력의 실체였고, 나를 반하게 했던 세화씨의 솔직한 힘이었으므로.


이제 제법 발길에 차이는 붉은 낙엽… 그리고 여운처럼 울리던 그녀의 마지막 말 "왜 부끄러워해요. 몰르는거 배우는데…." 이 말 앞에 내 젊은 얼굴은 붉은 단풍잎보다도 더하게 붉어졌다. 정규교육을 16년 동안이나 받은 넌 도무지 아는 게 뭐니? 있기나 한 거니? 자신에게 되묻는 말이었다.


문득 젊은 날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정말 열심히 사랑해 본 기억마저도 없다면 그 인생은 참으로 서글플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저 파란 하늘 밑 익어가는 가을을 버텨내기가 너무 힘들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저 하늘의 시리도록 푸른 기운이 늦깍이 공부를 향하는 장세화씨의 마음인 것 같아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안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