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휴정 이야기(글/윤천근)


폭포수가 여는 또 하나의 세상

   묵계는 아직도 맑은 시내이다. 묵계를 따라 2차선 도로가 치달리는 탓에 사람들의 출입은 많아졌지만, 주변에 인가가 그리 많지 않은 탓에, 오염물질이 과도하게 흘러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 묵계의 종가가 있는 마을에서 길을 건너고 내를 넘으면, 마을 뒤쪽으로 산 속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을 따라 좁직한 길이 평탄하게 뻗어 있는 것이 보인다.


 


마을 곳곳에 늘어서 있는 감나무 가지마다에 주렁주렁 주홍빛 감들이 매달려 있고, 그 중 몇은 이미 홍시가 되어서 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떨어져 내리는 계절, 가을의 한가운데쯤 되는 시절이기 때문인지, 계곡의 물은 그렇게 수량이 풍부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물이 호호탕탕 소리치며 거칠게 흘러내리지는 않을지라도, 마을의 마지막 집 어림에서 나이든 아낙이 계곡 가에 나앉아 빨래 방망이를 내두를 수 있을 정도는 되었으니, 아주 가물 때에도 완전히 물이 마르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계곡 바닥에 무수하게 깔려있는 크고 작은 돌들은 백색의 피부를 매끈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검은색 육질을 내보이고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이 근처의 산천이 화강암을 모암으로 하는 탓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흰색의 색감을 드러내고 있는 돌과 바위 사이를 타고 청량한 물이 한줄기 흘러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주변 산들은 그리 험해 보이지 않았고, 단아한 몸짓으로 나직하게 눌러앉아 있었는데, 소나무들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었다. 소나무들은 그리 키가 커 보이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땅이 너무 척박하여 성장이 더딘 탓이지, 연륜이 어린 때문은 아니었다.



길은 좁았으나 정성스럽게 포장되어 있었고, 산 속으로 기어들고 있었는데도 평탄하였다. 그러나 길은 걷는 사람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조금씩 산 중턱을 향하여 솟구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느 사이엔가 계곡의 바닥은 저 아래 쪽으로 물러나고, 길은 산 중턱에 올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촤르륵거리는 물소리가 귀를 후비며 파고들고 있었다.



   동행한 김복영씨는 익숙한 몸짓으로 길을 버리고 비탈을 두어걸음 걸어 내려갔다. 비탈의 끝은 절벽으로, 계곡의 한쪽 끝을 이루고 있었는데, 거기 내려서자 시선 방향으로 폭포와 함께 그 위에 옆으로 비켜 서 있는 만휴정의 한옥 지붕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나와 동행한 김복영씨를 포함하여 카메라를 들고 만휴정을 찾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번쯤은 내려서서 사진을 찍는 장소인 것 같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거기서 만휴정은 거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폭포가 너무도 강력한 힘으로 나의 시선을 끌어당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높이가 한 10여미터는 되는가? 화강암 바위는 계곡을 가로질러 버티고 서 있었다. 갈라진 틈 하나 없는 한덩어리의 거대한 바위였다. 그 거대한 바위의 중앙을 타고 물길이 열리고, 그리로 물이 쏟아져 내려 폭포를 이루었다.


단단한 바위의 중앙을 후비고 물길을 열기가 그리 쉽지는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수다한 세월의 인고가 필요하지 않았겠는가? 물의 역사는 그렇게 늘 인고의 세월을 동반하는 것이리라. 오래 기다리고, 오래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물은 드디어 작은 길을 내고, 끝내 장려하게 떨어져 내리는 폭포까지를 이룬 것이다.


바위는 위쪽이 조금 안으로 넘어박혀 5도 쯤의 기울기를 이루며 버티고 서 있었다. 바위 꼭대기에 한줄기 길을 낸 물은, 그 벽면을 타고 내려 아래쪽의 커다란 소로 떨어진다. 바위벽을 수직으로 낙하하거나, 바위면의 단층 때문에 단숨에 허공을 낙하하여 그 아래쪽의 소에 이르는 모양이 아니었으므로, 폭포의 물소리는 생각만큼 그리 크지는 않았다.


물은 츠츠츠거리기도 하고, 쏴쏴쏴거리기도 하면서 바위의 벽면을 타고 내렸다. 너무 빨리 흘러내리기 위해 게거품을 물은 탓인지, 아니면 너무 빨리 흘러내리지 않기 위해 발을 버틴 때문인지, 바위 면에는 물비늘 같은 흰 거품이 포도송이처럼 일었다. 그것들은 수십 개로 나뉘어 일선, 이선, 삼선의 대오를 갖춰 아래 쪽 소를 끊임없이 침범하였다. 이미 자신의 세상이 되어버린 소의 영역을 끊임없이 그 투명한 물빛으로 지배하기 위한 몸짓인지, 포도송이 형상의 물의 대군은 거듭하여 거칠게 소 속으로 뛰어들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 소리에 복종하듯, 주변 산천은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묵계마을 산골짝 깊은 곳, 바위산이 물에 의해 나뉘어져 있는 그곳 계곡 속에는 그렇게 폭포수가 지배하는 하나의 세상이 조용히 움을 틀고 있었다.


만휴정 영역

   산기슭의 한켠에 쭈그리고 앉아 폭포를 보고 있노라면, 그 위 한쪽으로 만휴정이 비켜서 있는데도, 우리는 만휴정이 거기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폭포수가 온통 우리의 의식을 잡아매서, 우리가 그것 외의 다른 것에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쯤에서 보는 만휴정은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의 건축물이 아무리 아름답게 지어졌기로서니, 자연의 건축물을 당해낼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적해야할 상대가 거대한 바위를 타고내리는 폭포임에 있어서랴! 그러니 만휴정이 폭포와 단층을 이루며 그 위쪽으로 올라서서 한켠으로 물러서 있는 것은 조금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하겠다. 그렇게 함으로써 만휴정은 폭포와 경쟁하고자 한다는 혐의를 벗을 수 있고, 폭포 위쪽에 자신의 영역을 따로 갖추어낼 수 있게 되는 때문이다.


만휴정의 주인인 보백당 김계행의 《년보》에 의하면, 폭포와 만휴정이 들어서 있는 이 계곡은 송암동이라 불리워졌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은 일찍이 송암동 폭포 위에 정자를 짓고 만휴정이라 이름하였으니, 만년에 휴식한다는 의미를 취한 것이다."


이 계곡이 소나무와 바위의 골짜기로 이름붙여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계곡 주변은 거대한 바위형태를 드러내고 있는 산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바위 산은 어디 할 것 없이 소나무로 뒤덮여 있기 때문이다. 폭포 위쪽, 만휴정 영역도 그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라고 하겠다.


만휴정 영역에 이르려면, 우리는 폭포를 버리는 선택을 하여야 한다. 폭포가 바라보이는 지점에는 집을 앉히기에 마땅한 공간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굳이 폭포와 대결하는 위치를 차지하지 않고자 하는 주인의 의식이 투영된 결과라고도 하겠다. 사실 폭포는 가끔씩 감상하기에는 좋은 경관이지만, 매일같이, 매 순간마다 바라보며 살기에는 부담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그 거친 소음이 조금은 순화되어서 들려오고, 그 기세좋은 물의 약진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지점에 만휴정이 앉아있는 것은 편안한 쉼터를 찾고자 하는 의식의 소산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폭포를 썩 올라서면 정자 영역이다. 폭포 위쪽은 평탄한 계곡이다. 계곡은 마치 평지를 흐르듯이 수평의 선을 그으며 길게 흘러내리고, 그 끄트머리에서 폭포를 통하여 단숨에 낙차 큰 하향을 시작하기 직전의 자리에 정자가 들어차 앉아 있는 것이다. 수평의 선을 그어내리는 골짜기는 아주 깊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만휴정 중수기>의 일절을 여기 인용하여 보도록 하자.


"상류는 전의곡으로, 이곳으로부터 계곡이 동쪽으로 멀리 치달려 오는데, 굽어지고 휘어진 것이 10여리에 이르러 홀연 마당같이 넓은 바위가 나타나니,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것이 산과 계곡이 모여든 듯 하고……"


위의 일절에서 말하여지는 마당같이 넓은 바위가 있는 곳이 바로 만휴정 영역이다. 이 마당같이 넓은 바위는 만휴정 위쪽에서는 너럭바위의 형상을 이루는데, 그 너럭바위의 아래쪽은 아주 완만한 사면을 그으며 흘러내리고, 물은 그 사면을 타고 지렁이 몸짓으로 흘러내려 그 아래쪽 소에 이르고, 소로부터 바위가 깔린 평탄한 계곡을 따라 태극의 형상을 이루며 흘러서 다시 아래쪽의 바위로 차단되어 있는 작은 소에 이른다.


 


이 아래쪽의 소는 물이 폭포로 나아가기 전에 잠시 몸 추스르기를 하며 머물러 있는 곳이다. 위쪽의 소에서 아래쪽 소에 이르는 사이, 물이 10여 미터의 거리를 두고 평탄하게 태극의 형상을 지어내는 곳 한쪽에 만휴정은 서 있다. 이곳이 만휴정 영역, 바위와 물과 인간의 건축물이 한데 어울려 지어내는 작은 화음의 공간이다.


만휴정

만휴정은 너무 탈속한 자연 속에 들어앉아 있다. 마을이 바로 지척인데, 그만쯤의 거리를 걸어들어와서 이렇게 선계에 오른듯한 느낌이 드는 자연의 공간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만휴정 영역은 그렇게 속기를 떨쳐내고 있으면서도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을 갖추고 우리를 내려다 보는 것은 아니다. 주변 자연이 작고 나직하고 부드러운 모습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만휴정 취재를 갔다왔다고 하니까 국문과의 한선생이 말하였다.
"만휴정은 앞의 담만 없으면 참 좋았을 것 같아요."
"나는 만휴정이 없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는데요."
"만휴정 취재를 하셨다면서 만휴정이 없기를 바라면 어떻게 해요, 선생님!"


그러고보니 나의 말은 딴지를 거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만휴정을 바라보고 섰을 때 내가 가졌던 솔직한 감상이었음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 그만큼 만휴정 영역이 너무 탈속한 느낌을 담고 있었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여 주었으면 한다.


만휴정은 커다랗고 둥그런 바위를 등에 지고, 물길로부터 조금 안쪽으로 움푹 패여 들어간 공지 안에 서 있다. 만휴정이 등지고 있는 바위는 아래쪽은 상당한 단층면을 이루고 있었으나, 위쪽은 밋밋한 곡선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 위에는 여기저기 세력이 그리 왕성하지 못한 소나무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소나무들 중에는 고사목도 눈에 띄었다. 바위는 만휴정 높이의 두배를 훌쩍 넘지 않는가 여겨질 정도였는데, 그저 병풍처럼 만휴정을 감싸안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의 규모였다.


만휴정은 물길 흘러가는 것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그 앞쪽 산허리의 중도막쯤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물길의 흐름, 산허리의 흐름과 직각으로 만나는 시선방향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앞쪽 산허리의 흐름을 따라 만들어저 있는 좁직한 소로와도 90도의 각도로 교차하는 시선방향을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만휴정에 들어가려면, 오던 길을 버리고 계곡을 건너야 하였다.


만휴정에서 길까지는 좁은 다리가 가설되어 있었다. 다리는 만휴정의 축대 한끝과 이쪽 길 아래쪽의 솟아오른 바위의 한 면을 잇고 있었는데, 중간에 시멘트 기둥이 하나 있었고, 한 사람이 자유롭게 걸어갈 수 있을 정도의 폭을 갖추고 있었다. 노면은 양쪽에 옛날 전신주 같이 검게 기름먹인 원통형 나무를 걸쳐 놓고 그 사이를 아스팔트로 채워놓은 것이었다.


   그 길을 걸어서 만휴정 앞에 이르면 가장 먼저 우리를 맞는 것은 안내판이다.
   "경북 문화재 자료 173호.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이 정자는 보백당 김계행(1431-1517) 선생이 독서와 사색을 위하여 만년에 건립한 정면 3간, 측면 2간의 정자이다. 정면을 누마루 형식으로 개방하여 자연경관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고, 양쪽에는 온돌방을 두어 학문의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선생은 50세가 넘어서 과거에 급제하고, 대사성, 대사간, 홍문관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으나, 연산군의 폭정을 당해 낙향하였다. 조선 초 청백리로 뽑혔던 분으로 내 집에 보물이 있다면 오직 맑고 깨끗함 뿐이다라는 유훈을 남겼다."
   안내판에 쓰여있는 글이다.


만휴정은 적절하게 차단되어 있는 공간이다. 앞쪽에 담이 없더라도, 만휴정의 아늑함에는 부족함이 없었으리라. 그러니 앞쪽 담의 가설은 사족에 불과하고, 오히려 만휴정이 갖고있는 허물이라고 하겠다. 그것은 만휴정의 가장 큰 자랑인, 앞쪽을 흐르는 투명한 물과의 만남을 심리적으로 차단하는 효과를 행사하기 때문이다.


만휴정 마루에서는 위쪽으로 계곡의 물이 너럭바위의 사면을 타고 지렁이 몸짓으로 내려와 이룬 소와, 그것이 또 태극의 형상을 지으며 짧은 유영을 한 끝에 아래쪽에 만들어 놓은 소가 내려다 보인다. 아래쪽 소의 한쪽을 칼끝처럼 비집고 들어와 사선으로 차단하고 있는 커다란 바위 위에는 보백당만휴정천석, 그러니까 보백당의 만휴정이 있는 샘의 돌이라는 글자가 횡으로 새겨져 있다. 글자들은 세월에 의해 탁마되어, 끝의 석이라는 글자는 거의 알아볼수 없을 정도이기도 하다.


벽은 회칠되어 있으나 색깔은 일정하지 않다. 백회를 칠한 곳도 있고, 시멘트를 칠한 곳도 있으며, 뒤쪽에는 그냥 흙벽을 그대로 놓아둔 곳도 있다. 마루 영역은 가장자리로 낮은 난간을 둘러쳤고, 마루 위 천장 석가래 아래쪽으로는 여기 저기 현판들이 달려있다.


동쪽에 있는 방 앞에 달려있는 나무판에는 겸손하고 신중하게 몸을 지키고, 충실하고 돈후하게 사람을 대하라라는 뜻의 글자가 선생의 유훈이라는 설명을 달고 쓰여져 있고, 서쪽 방의 앞 나무판에는 안내문에 나왔던 것처럼 내 집에는 보물이 없으니, 보물이라면 오직 맑고 깨끗함이 있을 뿐이다라는 글씨가 선생의 집 마루 편액(보백당)은 이 뜻을 취한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쓰여져 있다.


현판들은 여럿 걸려있지만, 여기서는 동쪽 끝에 걸려있는 현판에 쓰여져 있는 시를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기로 한다. 후에 중수하면서 김양근이 지었다는 시이다.
 
층층이 급한 물 쏟아져 내리니             
물 돌아가는 곳에 저절로 물가마가 생겼구나
십장 높이에 옥처럼 푸른 빛 떠오르니
그 속에 신의 손길이 담긴 물건이로다


폭포와 연못은 가끔씩 널려있고 
너럭바위는 넓게 펼쳐져 있구나
희디 흰 것이 갈아낸 돌과 같으니
가히 백사람쯤은 앉을 수 있겠도다


 


앞을 보니 세 개 물가마가 어울려 있어
시흥이 날개짓으로 솟구쳐 오르네
지천으로 피어난 꽃들은 웃음을 다투고
마치 산 전체가 물 속에 든 형국이로다


 


물소리가 들린다. 위쪽 너럭바위를 지렁이 몸짓으로 타고 내리는 물소리는 졸졸 정겹게 들려오고, 아래 쪽 절벽바위를 타고내리는 물소리는 댓잎 사이에 바람 파고들 듯 조금은 음조를 높여 들려온다.


그러나 만휴정의 평정을 깨는 것은 물소리가 아니다. 물소리는 시끄러울 정도는 아닌 것이다. 만휴정의 평정을 깨트리는 것은 말벌들이 일으키는 소란이다. 말벌들은 만휴정 마루 위에 잠시라도 머무를 마음을 내지 않게 한다. 턱밑으로 한 놈이 날아가는가 싶으면, 눈 가로 한 놈이 날아가고, 머리 위로 한 놈이 솟구치는가 싶으면, 팔 주변으로 한 놈이 달려든다. 어디서 이렇게 많은 말벌들이 날아든 것일까?


 


돌아나오며 보니 만휴정 마루 위 천장의 동쪽 끝에 수박덩이만한 말벌 집이 붙어있는 것이 아닌가! 말벌만이 아니었다. 마루 위에는 또 수북히 박쥐 똥이 떨어져 있기도 하였다. 그러니 지금 만휴정은 온전히 말벌과 박쥐가 주인이 되어있는 셈이라고 하겠다.


보백당 김계행

   보백당 김계행은 자가 취사이고, 호가 보백당이다. 그는 김선평으로부터 가계의 흐름을 시작하는 안동김씨, 그러니까 신 안동김씨로, 김선평을 일세로 할 때 세계상 11세에 속한다.
   "명나라 선종황제 선덕 6년(세종대왕12년), 신해년 2월 9일 신묘일 미시에 선생은 안동부 서쪽 풍산현 남쪽의 불정촌에 있는 집에서 출생하였다."
   《년보》의 기록이다.



그는 향교에서 공부하였으며, 17세에 이천 서씨를 첫부인으로 맞았다가 23세에 사별하고, 24세 되던 해에 의령 남씨를 둘째 부인으로 맞는다. 그가 묵계와 관계를 맺는 것은 30세 때의 일이다.


《년보》에는 30세 때 거묵에 새로운 전장을 열었다는 기록 아래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거묵동은 안동부 길안에 있다. 숲과 골짜기가 깊고, 물과 바위가 절승을 이룬다. 선생은 항상 그곳을 왕래하며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져서 따로 전장을 두어 만년에 기거할 곳으로 삼았다."



이 글은 원래 묵계가 거묵동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워졌으며, 김계행은 이곳의 자연이 깊고 아름다움을 좋아하여 전장을 마련하게 되는 것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년보》에서는 묵계를 묵촌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앞부분에서는 주로 거묵, 또는 거묵동이라고 지칭한다. 김계행에게 있어서 묵계는 이렇게 일찍부터 만년을 위해 준비된 땅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김계행이 30세의 젊은 나이에 아주 묵계에 입향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32세에 성주교수를 시작으로 관리생활을 시작하는데, 45세에 충주교수를 역임하면서 아들 극인을 먼저 거묵촌에 거주하게 한다. 그러나 이때 그의 본집은 풍산 사제에 있었다.


그는 50세에 과거에 급제하며, 이 때로부터 홍문관 부제학, 대사간에 까지 이르는 그의 본격적인 벼슬살이가 시작된다. 그의 벼슬살이는 67세까지 계속되지만, 말기에는 사직소를 올리기에 바빴다.


《년보》의 63세 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이 때부터 풍산과 묵촌 사이를 오가면서 즐기며 노닐었다."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김계행의 만년이 시작되며, 이 시절 이후에는 그에게 있어서 벼슬살이보다는 산간에 묻혀사는 삶이 더욱 중요하게 받아들여진다는 암시라고 하겠다. 그러나 아직 그의 삶은 묵촌보다는 사제에 더 무게중심이 놓여지는 것이었다. 그의 나이 68세 되던 해에 사제의 옛집 곁에 작은 집을 짓고, 보백당이라고 편액하는 것을 통하여서 이 점은 확인된다. 그가 완전히 삶터를 묵계로 옮기는 것은 그의 나이 71세 되던 해의 일이다. 그러나 사제의 집과 보백당은 그대로 두고 이용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71세 이후 묵계로 삶터를 옮긴다는 것은 그때로부터 87세에 임종하기 까지 그의 만년의 삶이 주로 묵계에서 펼쳐졌다는 점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묵계의 한 골짜기 속, 송암동 폭포 위에 위치하는 만휴정도 그의 만년의 삶에 있어서는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곳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만휴정이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앞에서 인용한 바 있는 만휴정 건립과 관계된 《년보》의 기록은 71세 때 일의 관계기록으로 나오는데, 일찌기 만휴정을 지어놓고 있었다는 이야기이지 그때 만휴정을 지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므로 만휴정은 그의 나이 71세가 되기 이전의 어느 때인가 건립되었다고 할 수 밖에 없겠다.


그러나 김계행이 지은 만휴정은 지금 우리가 보는 만휴정이 아니다. 지금의 만휴정은 처음의 만휴정이 지어진 백년쯤 뒤에 중수한 것이다.   


돌아오는 길

내가 만휴정 영역을 돌아보고 있는 동안 사진을 다 찍은 김복영씨는 밤을 줍고 있었다. 만휴정 영역을 다 돌아보고 나서 나도 합세하였다. 밤은 벌레가 먹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였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우리를 행복하게 하였다. 김복영씨는 자신은 한 두 개 까먹고는 한주먹 되는 밤을 내게 다 건네 주었다.


   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우리는 다시 폭포 아래서 머물렀다. 폭포가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머물러 서자, 폭포는 거칠지만 매끄러운 동작으로 거침없이 나의 시선 속으로 파고들었다. 어느덧 나의 시선 속에 폭포수가 흐르는 길이 마련되고, 그 길 속으로 만휴정이 물빛 안개에 흽쌓인채 떠올라 있었다.



이곳, 물빛으로 휘둘러 있는 계곡 속에 만휴정을 마련한 보백당 김계행의 만년은 과연 어떠한 빛깔의 삶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갑자기 나의 마음 속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자연 속으로 걸어들어간다는 것은 분명히 그것만으로도 이욕에 사로잡힌 마음과는 일정한 차이를 갖게 하는 선택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세속은 언제나 우리의 이익과 연계되어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 점이 전통시대라고 해서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러나 이욕으로 뒤덮인 세속을 벗어나서 자연 속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누구나 다 자연이 되고, 누구나 다 자연의 빛깔을 제 한몸 속에 갈무리해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자연 나름이지 않겠는가? 이곳, 만휴정이 자리잡고 있는 자연 정도라면, 그 속에 든 사람이 아무리 세속의 끈을 놓지 않으려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이곳 자연의 무한한 흡인력에 이끌려서 깊숙히 자연 속으로 끌려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곳이라면 이 세상 누구라도 순화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리라 여겨지는 자연, 그런 느낌에 누구도 이의를 달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의 순결한 자연 속에 만휴정은 고즈녘히 물러나 하늘 한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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