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과 향산(글/권경인)'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세상에서 지식인 처신이 어렵다.' 이것은 내가 대학 2학년에 재학중이던 1984년 가을, 많은 학생들이 민주화를 외치던 그 시절, 과 학생들이 돌려읽으려고 발간하던 과 회지의 단상(斷想)으로 한 친구가 쓴 글의 제목이자, 매천 황현(梅泉 黃玹 1855∼ 1910)의 절명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총 네 수의 절명시중 한편인 그 시는 다음과 같다.
鳥獸哀鳴海嶽嚬 날짐슴도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울어
槿花世界已?淪 무궁화 세상은 이미 끝나 버렸네
秋燈掩券懷千古 가을등불 아래 책 덮고 천고를 회고하니
難作人間識字人 세상에 식자(識者) 처신 진실로 어렵도다
그 친구는, 나라가 일본에 병탄되었을 때 유교 이념으로 다스리던 조선이 망했는데 스스로 목숨 바쳐 이념을 지키는 선비 한 명이 없어서야 되겠느냐며 자결한 매천 황현을 소개하면서 난세의 지식인 처신의 어려움을 84년 당시의 시대상황에 빗대어 단상을 쓴 것이었다. 비록 그 친구는 절명시를 ‘힘없는 자조의 시‘라고 적었으나, 그 시는 나에게 처연한 느낌으로 남아 있으며 개인의 삶과 민족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게 해 준 글이었다. 그 후 매천은 나에게 의를 위해서는 목숨조차 초개같이 버릴 수 있는 선비의 한 극치를 보여주는 전형이었다.
근래에 나는 인생의 청년기를 벗어나는 길목에 서서 고향이나 가족, 친지 등 나와 가까이 있는 것들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졌다. 비록 안동을 떠나온 지 이십년이 가까워오지만 고향에 대한 관심은 더 커졌고 그곳에서 발간되는 {안동}지도 열심히 구독하고 있다. 그러던 중 지난호에 실린 [새로 발굴된 안동 의병 기록들]을 읽고 아주 진한 느낌을 받았다. 안동에서 중 고등학교를 다닐 때 들어보지 못했던, 그렇지만 바로 그곳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더 피부에 와 닿는 의병 항일 투쟁에 대한 기사였기 때문이다. 근대사에 대해 어두운 나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 흔히 의병 항쟁이나 독립운동 하면, 동학농민운동이 타올랐던 전라도의 고부나 치열한 격전지였던 충청도의 우금치 마루, 저 차디찬 북만주 벌판과 상해 임정이 떠오르고, 유림이나 선비들의 항쟁의 경우 심산 김창숙 선생이나 파리평화회의 청원운동 등이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이 기사는 안동지방의 유생들과 향민들이 일체가 되어 벌인 의병 항쟁을 생생한 자료와 함께 소개하고 있었고, 특히 내가 자란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퇴계종택이 타고 최근에 그 이름을 알게 된 예안 출신의 퇴계 후손 향산 이만도 선생(響山 李晩燾 1842∼1910)의 '향산일기'등이 등장하여 더 생생하게 그 느낌이 전해진 것 같다.
나는 먼저 밝히거니와 향산 이만도 선생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며, 그와 관련한 일화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매천 황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최근에 접하게 된 다음 사실은 충격으로 와 닿았다. 향산 선생은 퇴계 선생의 후손으로 예안에서 대대로 문과에 급제하는 명문가에서 태어나, 자신도 문과에 급제하여 두루 요직을 거쳐 일신의 영달이 보장되어 있었지만, 선비적 양심으로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인해 1896년에 봉기한 예안(禮安)의병대의 대장을 맡았고, 1910년 합방에 이르자 24일간의 단식을 감행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일본에 의해 자행된 만행과 퇴계종택 마저 불타 버리는 사건을 겪으면서, 사회 지도 계층으로서의 책임감으로 죽어야 되겠다고 결심했으리라. 단식을 통해 죽음에 이르는 길은 음독이나 할복에 비해 실행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무려 24일간의 단식을 통해 책임감을 통감하면서 스스로 죽음에 이르렀으며 단식 기간중에도 찾아오는 제자들과 경전을 논하기도 하고 주변의 일을 정리하고 자신의 장례절차까지 유언하면서 선비의 품위를 잃지 않았다고 하니, 그 처절하게 용맹스러운 결단과 실천력은 인격의 수양 정도가 어느 경지에 이르러야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그가 죽음에 이른 날이 한일합병조약이 조인된 8월 22일에서 17일 후인 1910년 9월 8일이고 그 무렵 매천 선생도 거의 동일한 배경으로 전라도 구례에서 다량의 아편을 음독하고 자결하는 것이다. 매천은 죽기 전 아우에게 "…내가 약을 삼키려다 입에서 뗀 것이 세 번이었다. 이다지도 어리석었던가."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매천은 당대의 대 시인으로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는 절명시를 남겼으되 향산은 그렇지 못함이 못내 아쉽다. 지금이라도 향산 선생을 연구하시는 분이 있다면 그분의 글 중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글들을 모아 소개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러한 향산 이만도 선생의 이야기는 내가 매천의 절명시를 안 지 근 18년 만에 알게 되었으니 가까이 있는 것에 어두움이 어찌 이렇단 말인가? 어릴 적 산골 마을에서 자라면서 이웃의 한 친구가 자기는 퇴계의 후손이라며 은연중 자부심을 나타냈을 때 어렴풋이 진성이씨 가문엔 무언가 있긴 있는 모양이군이라는 느낌을 가졌던 기억이 난다. 이제 난 그것이 무엇인지 더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 그것은 향산 선생 같은 분들이 지키고 몸소 가르친 바른 삶에 대한 모습, 그리고 그 가문에 속하는 사람들 모두가 그것을 배우고 지키려는 분위기에서 감지한 그 무엇이었을 것이리라.
한 개인의 삶이란 개인의 천품과 의지가 가문이나 사회의 분위기, 환경과 맞물려 고양되고 발현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좋은 환경과 사회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식자들의 임무이거니와 가까운 지역의 훌륭한 지식인상을 발굴하여 소개하는 것은 한 좋은 방법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