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글/서미숙)초고속 인터넷, 떼제베, 쾌속정, 패스트푸드, 즉석복권, 번개배달,……
요즘 우리 주변엔 이런 '빨리 빨리 문화'에 너무나 익숙해져 웬만한 빠름에는 속도감을 느끼지 못하고 더 빠른 것, 좀 더 자극적인 것을 찾아 질주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렇게 주변을 살필 여유와 숙성의 묘미도 잊은 채 앞만 보고 달리다보면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많은 것을 놓치고 마는 우를 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끔씩 서울 나들이를 할 때면 빠르다는 이유로 도심의 전철을 이용하곤 한다. 그때마다 복잡한 인파를 이리저리 헤치고 시간에 쫓겨 허둥지둥 계단을 뛰어가는 사람들, 그것도 부족해 에스컬레이터에 올라서도 기다리지 못하고 위쪽을 향해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럴 때면 아둥바둥 숨가쁘게 살아가는 대도시의 소시민들이 처연해 보이고, 변방에서 유유자적하는 삶에 위안을 받기도 한다. 어차피 누구에게나 한 번 뿐인 생을 자신을 돌 볼 겨를도 없이 분주하게만 산다는 것은 다소 억울하지 않을까.
느림의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
이런 나에게 적극 손을 들어주는 동지를 만났으니 바로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에세이스트 피에르 쌍소이다. 그는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나이들, 모든 계절들을 아주 천천히, 경건하고 주의 깊게 느껴가면서 살기를 열망한다.
그의 최근작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펼치면 느림의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을 끝없이 들려주는 나직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는 이 책의 서두에서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고요한 방에 앉아 휴식할 줄 모른다는 데서 비롯한다."는 파스칼의 말을 인용하여 말문을 연다.
그에게 있어 느림이란 "삶의 길을 가는 동안 나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능력과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겠다는 확고한 의지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그리고 "느림이란 민첩성이 결여된 정신이나 둔감한 기질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들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다 중요하며, 어떤 행동이든 단지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서 급하게 해 치워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한다. 누구나 한번쯤은 뼈저린 회한을 맛보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대목들을 그는 예리하게 짚어준다.
이 책에서 그는 "내가 삶을 행운의 기회로 여기는 까닭은 매순간 살아있는 존재로서 아침마다 햇살을, 저녁마다 어두움을 맞이하는 행복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며, 세상의 만물이 탄생할 때의 그 빛을 여전히 잃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에 어렴풋이 떠오르는 미소나 불만스러운 표정의 시작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듯이 평범한 일상에도 삶의 의미를 부여할 줄 알고 섬세한 혜안을 지닌 작가이다.
이 책은 크게 시간에 쫓기지 않기 위해서, 리듬의 교체, 과정,유토피아와 충고 이 세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먼저 저자는 우리에게 평안함을 보장해주는 느림의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자세히 일러주고 있다.
한가로이 거닐기, 꿈꾸기, 기다리기, 마음의 고향 갖기, 글쓰기 등이다.
그의 제안을 보는 순간 필자는 무엇보다 몇 달 전에 결성되어 매월 안동지방의 산을 오르고 있는 만주산악회가 떠올랐다. 필자를 비롯한 게으른 사람들의 모임답게 황소걸음으로 산천경개를 두루 살피기에 만주(慢走)라 이름하였다. 물론 만주에 얽힌 다른 뜻도 많이 있다.
만주산악회의 산행에서는 길가의 풀 한 포기 가녀린 들꽃 한송이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향기를 맡으랴 렌즈에 담으랴 스케치에 메모까지 하자니 세월이 없다. 일렁이는 나뭇가지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소리, 숲속으로 흐르는 물소리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작은 곤충들의 미묘한 움직임에도 다정한 눈길을 보낸다.
그뿐이랴, 산골짜기마다 불거져나온 남의 조상 음택이 풍수에 비추어 명당인지 여부를 가리기도 하고 이끼 낀 비문에선 족적을 더듬어 보기도 한다. 그리고 땀이 나기도 전에 마른자리를 찾아 커피 한 모금 막걸리 한 잔의 여유를 가지기도 하고, 하산길엔 사람이 그리운 외딴집의 촌부들과 한담을 나누는 인정미도 보인다.
산행을 거듭하면서 통감하는 것은 빨리만 간다고 능사가 아니고 만주산악회의 느림의 규칙을 고수하는 것이 나름대로 의미있는 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산행의 결과는 매월 지면을 통해 볼 수 있으니 이쯤 되면 만주산악회의 회원들은 느림의 선각자들이라고 자부해도 되지 않을까.
느림과 빠름의 교대
리듬의 교체에서는 "저속 운동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더 빠른 리듬의 움직임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느림의 정신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원할 때는 언제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데에 있다고 했다. 공감이 간다. 그 또한 느림 그 자체만으로는 미덕이 될 수 없으며, 느림과 빠름을 적절히 교대해 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할 만큼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이다.
이 부분에선 몇 년째 반복되는 필자의 웃지 못할 해프닝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별로 여유가 없는 아침시간이건만 화장실에 들어가서는 책과 함께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새별(초등 6학년 아들의 애칭)은 이 어미의 애간장을 다 녹이며 나올 생각을 않는다. 화장실 선반에 있는 책들을 깡그리 치워보기도 하지만 며칠 후면 어느새 다른 책들이 꽂혀있고. 때로는 옷 속에 몰래 책을 감춰서 들어가기도 한다. 갖은 협박과 강요를 견뎌내면서도 제 할 일을 다해야만 슬그머니 나온다.
한편으론 학교와 집 그리고 학원을 쉴새없이 오가며 시간에 쫓겨다니는 요즘 아이들의 입장을 고려하면 하루중 그 시간이 유일한 기쁨일 수도 있으리라. 그러면서도 바쁜 시간에 맞추라고 책려하는 필자의 조급증은 어쩔수 없는 자식에 대한 배려라 자위해본다. 그런 새별이건만 정작 또래 친구들과의 약속이 있거나 스스로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일찍부터 서둘러 황급히 집을 나서는게 아닌가.
창조적인 발상을 위해 화장실에다 노트북을 설치했다는 성공한 기업의 사례도 있다. 이제부터라도 좀 더 인내심을 가지고 새별의 소중한 시간을 방해하지 않고 빨리를 남발하지 않겠노라고 체면도 걸어본다.
문화를 거부하는 문화
마지막 장인 과정,유토피아와 충고에서는 문화적 흥분, 뒤늦은 도시계획, 분주하지 말기, 소박한 사람들의 휴식, 그리고 하루의 탄생을 지켜보는 저자 나름대로의 식견을 피력하고 조용히 충고를 한다.
"문화가 넘쳐나는 문화속에서는 문화를 거부하는 유감스러운 문화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비단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이제서야 대중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하는 미흡한 우리의 문화여건이지만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뒤늦은 도시 계획에서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머물 수 있고, 때로는 시름에 잠겨 발길 닿는 대로 산책도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공간을 보존하거나 회복시키자"는 제안을 하고 있다. "강둑을 포장도로보다 더 단단한 콘크리트로 온통 발라 버렸을 때, 강은 강만이 지닐 수 있는 미덕을 잃게 된다"는 것 또한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목격할 수 있는 풍경이기에 도시계획 입안자들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마음의 여유 갖기
그는 우리를 세월의 흐름에 따라 뒤틀리고 얽힌 포도밭을 거닐게 하고 , 포도주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성급하게 술병을 따버리고 마는 무례함을 나무라기도 한다. 때론 온통 책냄새가 풍기는 파리의 오래된 도서관에 앉아 기다림을 배우게 한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은 능력을 지니고 더 나은 가치를 지니지 못해 안달하는 자에겐 절도를, 예술가들에겐 인내와 겸손과 신중함의 미덕을 일깨운다. 모든 것을 문화화 하는 문화가 생겨날까봐 두려워하며, 따분한 시골에서 영혼의 안식을 찾고 삶의 풍취를 즐기며 나른한 몽상에 빠져보라고 주문한다.
이러한 느림을 선택하려면 일단 삶이 우리의 기대에 부응해 주어야 한다고 그는 전제 한다. 혹자는 스피드가 생명이라는 요즘에 느림을 실천함이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 치부할 수도 있으리라. 그런 사고의 소유자일수록 무엇보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느림과 빠름을 지혜롭게 조화시키라고 권하고 싶다. 모든 여건이 갖춰진 다음으로 미루다 보면 흐르는 강물은 영원히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을 것이기에.
물론 이 책은 번역본이라는 한계 때문에 표현이 장황하거나 어색한 부분도 더러 있지만 그다지 문제되지는 않는다. 또한 지역과 문화의 차이로 빚어진 내용들은 우리식으로 대입해보는 것도 즐거운 책읽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이나 추구하는 가치는 대륙이나 인종을 뛰어넘어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 또한 충분히 느낄 수 있으리라.
모든 것들이 곱게 영글어 자기 앞의 생을 관조하게 하는 계절이다. 깊어가는 가을밤 귓가를 스치는 샹송처럼 감미롭게 파고드는 이 책을 한 잔의 포도주를 음미하듯이 행간에 숨은 뜻을 파악하며 탐독해보는 것 또한 느림을 실천하는 방법이 아닐까.
이젠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누군가에게 금방 다가서기보다는 다가가기 전에 잠깐 그 사람 앞에 멈춰 서서 바라보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피에르 쌍소를 떠올리게 될 것만 같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