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분으로 몰아넣은 빛 바랜 사진 두 장(글/김희곤)몇 년 전 유기원(柳基元) 옹이 연구실로 빛 바랜 사진 두 장을 가져 오셨다. 그는 안동을 대표할만한 독립운동가 가운데 한 사람인 동산 유인식(東山 柳寅植)의 손자이다. 몇 차례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던 터라, 잔뜩 호기심을 가지고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한 장의 사진은 상당히 많은 인물이 어느 집 앞에서 어떤 기념행사에 참가하고 찍은 것이고, 다른 하나도 역시 어떤 모임을 담은 것인데, 역시 많은 사람들이 가파른 산기슭 바위에 앉거나 서서 촬영한 것이다. 두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보다가 필자는 점차 흥분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짜릿한 전율에 사로잡혔다. 아니 세상에, 이런 사진이 남아 있을 줄이야!
우선 인원이 많은 사진부터 들여다보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이 서 있는 뒤로 함석 지붕의 집 한 채가 서 있고, 그 지붕 아래로 전선과 만국기 및 유리창이 보인다. 사람들 머리 위로 행사 내용을 써 붙인 글씨가 보이는데, 그 테두리에는 꽃 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다. 글씨 내용은 위쪽에 오른편으로부터 '安東靑年同盟'(안동청년동맹)이란 글이, 그리고 중간에 '第二回'(제2회), 다시 아래로 '定期大會場'(정기대회장)이라는 글이 쓰여 있다. 결국 이 사진은 안동청년동맹의 제2회 정기대회 기념 사진인 것이다. 안동청년동맹은 1927년 5월에 창립된 청년운동단체로서, 당시 민족운동에 참여하던 젊은 안동인들의 집결지였다.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옷차림이 여름철이라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렇다면 이 사진이 촬영되던 시기는 창립 총회 이후에 다시 모임을 가진 1927년 여름이라고 생각된다.
일단 여기까지 읽어낸 필자는 다시 하나 하나 뜯어보기 시작하였다. 사진 왼쪽으로, 건물의 기둥을 보면 간판이 하나 세로로 길게 붙어 있다. 돋보기로 들여다보니 '安東靑年同盟安東支部'(안동청년동맹안동지부)라고 쓰여진 것을 읽을 수 있다. 그렇다. 이 건물이 안동청년동맹의 안동면지부의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었다는 말이다. 당시 안동청년동맹은 면 단위로 지부를 갖고 있었다. 이곳은 그 가운데 안동면지부이자, 안동청년동맹의 본부인 셈이다.
다시 왼쪽에서 두 번째 기둥을 보면 전선이 연결되어 있고, 그 아래로 현판이 하나 있다. 안타깝게도 깃발과 사람에 가려 '安東'(안동)이라는 글자만 보인다. 현판의 크기나 글씨로 보아 안동청년동맹이라는 글씨가 아닐까 추측해 본다.
그 다음 오른쪽 기둥에는 간판이 두 개가 걸려 있다. 높은 것에는 희미하지만 돋보기를 들고, 또 스캐너를 동원하여 고해상도로 읽어보니 세 글자가 희미하게 드러난다. '安東勞'(안동노)라는 글이다. 그렇다면 이 글을 바로 안동노우회(安東勞友會)를 의미한다. 안동노우회는 조선노동공제회안동지회를 계승한 노동운동단체인데, 1925년에 결성되었다. 그러므로 이 건물이 노동운동의 본부라는 사실도 이 간판 하나로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아래쪽으로 '朝'(조)라는 한 글자가 있다. 글씨체로 보아 조선일보의 '朝'와 같은 글씨체이다. 그러니 이 건물에 조선일보안동지국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안동지역의 청년운동과 사회운동의 선두주자였던 김남수(金南洙; 예안면 오천 군자리 탁청정 출신)가 지국장을 맡았는데, 1927년에는 서울로 올라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당시 지국장이 누구인지 정확한 자료가 없다.
맨 오른쪽 기둥에는 글씨를 알아보기 힘든 간판이 붙어 있다. 수 없이 읽고 읽어가다가 겨우 끄트머리 글이 '學生會'(학생회)라는 글자를 알아보게 되었다. 위에도 아주 흐리지만 安이나 夜와 같은 글이 겨우 보일 듯 말듯하다. 결국 이 건물에 노동야학이나 어떤 학생회 사무실도 함께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된 셈이다.
다음으로 이 건물이 어디에 있었던 것인지 궁금해졌다. 앞쪽으로 말뚝 하나와 두 줄의 철망이 있는데, 단지 앞길과 건물 마당을 구분하는 것일 뿐, 어차피 담장의 의미는 없어 보인다. 뒤로 높은 나무가 보이지만 이곳이 어딘지 구분할 수가 없다. 이제 이 건물의 위치를 알아보는 길은 오직 한 가지이다. 당시 조선일보안동지국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일보사의 자료를 문의해 보았지만, 한국전쟁의 와중에 흩어져 버려 찾을 길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으로 당시 조선일보안동지국의 자료를 담고 있는 {김남수선생자료집}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당시 조선일보안동지국으로 보내온 여러 장의 엽서에는 단지 "경북 안동군 안동면 조선일보안동지국"이라고만 적혀 있다. 아쉽게도 그 건물의 현장을 아직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무척 안타깝다.
사진 전체를 바라보면서 이번에는 사람들을 하나 하나 들여다본다. 우선 몇 명이나 되는지 헤아려 보니, 그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몇 차례 거듭하던 끝에 모두 85명이나 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 가운데 여성은 행사 명칭이 적힌 글씨 아래에 한 명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이 흰옷을 입고 있고, 상당수가 양복차림이다. 나비 넥타이가 많고, 맥고모자를 쓰거나 들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모두들 가슴에 짙은 색의 무엇을 달았다는 점인데, 아마도 행사 기념을 만든 종이꽃이 아닌가 여겨진다. 옷차림으로 보아, 대개 초가을 혹은 햇볕이 좋은 가을날이 아닌가 여겨진다. 아주 무더운 날씨의 옷은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추운 날씨도 아니다. 앞쪽의 나무나 집 뒤의 큰 나무를 보아 아마도 초가을 무렵이 아닐까 생각된다.
사진을 가져온 유기원 옹은 이 사진에서 같은 고향(예안 주진) 출신 여러 사람을 지적하고 이름을 말해 주었다. 한결같이 당시 민족운동에 나섰던 인물들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사진을 들고 다니면 몇 사람의 이름이라도 더 확인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도 내다보게 해 준다.
그러다가 사진 뒷면을 보니 제목과 촬영자가 기록되어 있다. 붓글씨로 안동청년동맹 제2회 정기대회라는 글에 이어 '永生寫眞館'(영생사진관)이란 말과 '電話二五'(전화25)라는 글이 있고, '안동전화25번'이라는 내용까지 담은 영생사진관의 스탬프가 찍혀 있다. 그러니 이를 통하여 영생사진관에서 출장하여 기념사진을 찍었고, 또 그 사진관의 전화번호까지 알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이 사진은 안동사회를 움직여 나가던 청년들이 한 자리에 모여 총회를 열고 기념으로 촬영하던 1927년 가을의 어느 날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1927년 이후 신간회 안동지회 예안출신 야유회모임
다음 사진은 역시 여러 명의 인물이 모여 찍은 것이다. 유기원 옹은 이 사진에 대해 예안의 어느 곳에서 있었던 야유회 사진이라고 전해주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모임은 어떤 것일까? 문중인물들의 모임이라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다. 대개 문중 일족의 사진에는 구성원들의 나이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42명의 인물을 일일이 확인하노라면 대개 비슷한 연령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아마 어떤 사회단체가 아닐까 추정해 본다. 더구나 두 명의 여자가 포함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예안지역 출신 사회인들의 모임일 것 같다.
여기까지 추측하고서 인물들이 멋지게 포즈를 잡은 배경을 살펴본다. 과연 이 장소를 찾아낼 수 있을지 궁금해 하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이미 이 지역은 안동댐 건설로 물 속의 나라가 되었다는 사실을 뒤 늦게 생각해 냈기 때문이다. 아래쪽을 자세히 보면 모래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당시 안동군 예안면의 낙동강변에서 야유회를 가졌고, 가파르고 경관이 좋은 바위에 올라 단체 사진을 찍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어서 아래쪽 왼쪽 구석을 살피다가 그냥 모래밭인가 했더니, 글씨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사해보고, 스캔해보기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일부 글자를 확인하게 되었다.
우선 장소를 한 번 검토해보자. 이 자리를 정확하게 가려내는 일은 아예 불가능에 가깝다.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고 말았으니, 제 모습을 찾아 현장을 확인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석 줄의 글씨가 보이는데, 가운데 줄 오른쪽 두 글자가 간회라는 것과, 마지막 줄 두 글자가 긔렴이라는 사실을 간신히 확인하게 되었다. 그 순간 이것이 신간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온 몸에 전율을 느꼈다. 그렇다. 간회라는 글자 앞의 것이 비록 지워졌지만, 남아 있는 흔적이 신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 사진은 신간회 안동지회 가운데에서도 예안출신 인사들의 모임이 아닌가? 유기원 옹은 이 사진에서 5∼6명을 지목하면서 같은 집안 출신으로 신간회 활동을 한 분이라고 증언하였고, 실제로 그들을 신간회 안동지회에서 활동하던 인사들 가운데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사진은 언제 찍힌 것일까? 우선 신간회 안동지회가 결성된 시기를 보면, 1927년 8월 26일이다. 설립대회에 197명이 회원으로 참석하였고, 서울 신간회 본부에서 홍명희가 참석하여 축하해 주었다. 그 자리에서 회장에 유인식, 부회장에 정현모(鄭顯模)가 선임되었다. 안동지회는 전국의 신간회 지회 가운데 세 번째 안에 들만큼 큰 규모로 발전하였다. 1928년의 경우 회원수가 무려 600명을 넘었다. 그러므로 신간회 안동지회는 당시 안동사회의 엘리트들이 총집결한 조직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일단 이 사진이 1927년 8월 이후에 촬영된 것임을 확인했다. 그런데 신간회는 1928년까지 활발하게 활동을 보이다가 1929년부터는 일제의 탄압으로 자유롭게 활발한 활동을 보이지 못한다. 안동지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대개 이 사진은 늦추어 잡더라도 1929년 이전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하한선이 1929년이라는 사실이다.
다음으로 어느 계절인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다시 사람들을 들여다보니, 한 여름은 아니지만 왼쪽 여자의 짧은 옷소매가 조금은 더운 날씨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대다수가 흰 한복을 입었는데, 추위와는 관계가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풀이나 나무도 한 여름을 지난 뒤, 초가을의 모습일 성싶다.
이제 이 사진이 들려주는 옛 이야기를 정리해보자. 1927년이나 1928년 초가을 어느 맑은 날에 예안의 낙동강변 어느 경치 좋은 바위 비탈에서 신간회 안동지회, 그 가운데서도 예안지역 출신이 중심이 된 야유회가 있었다.
빛이 바랠 대로 바랜 이 두 장의 사진은 한 동안 필자로 하여금 그 날의 현장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마치 꿈속에서 여행을 하듯이 시간과 공간을 뚫고 긴 여행에 나섰다. 75년을 거슬러 올라, 안동의 역사를 만들어가던 당시의 인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안동청년동맹의 정기대회장에서 격론을 벌이는 젊은 포효를 듣고 보며, 낙동강변에서 그들의 웃음과 한숨을 느꼈다. 그들은 웃으면서도 가슴 아파했다. 일제의 침략과 통치라는 한계 속에서 안동을 일구고 가꾸어 가는 이야기를 열심히 말해주었다. 그 날 이후 필자는 빛 바랜 사진만 보면, 간혹 놀라기도 하고, 평소와 다르게 흥분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