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안동생활(글/남용우)어느 날 구시장 난전에서의 일이다. 채소를 파는 아낙과 사는 아낙간에 돈의 건넴과 받음이 분명치 않아(5천원권 1장) 시비가 일었는데, 급기야 파는 아낙이 전대를 풀어헤쳐서
"어디 있니껴 업니더"
"한번 보시더"
지폐를 한장 한장 펼쳐 보이며 상대방의 의심을 풀어주는 것을 어깨 너머에서 유심히 보았다.
심한 육담(肉談)으로 꽤 소란스러울 것이라는 나의 예상을 깨고 그들은 너무도 조용히 마치 정감어린 대화를 나누듯 하였는데, 나는 한참을 넋을 잃고 그런 모습을 주시하였다.
시장판에서 흥정이 거래로 연결되지 않거나 돈의 수수가 불분명한 경우가 더러 있지만, 그럴때는 대개 상스런 십원짜리 시비가 붙으면서 자칫 봉변당하기가 십상이기에 나는 이번에도 필시 그럴 것이라 생각했는데 결과는 그 반대여서 적잖이 놀랬다. 지금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왠지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문향을 자처하면서 은근한 자긍심까지 지녔던 안동이지만 상업화의 물결에 밀려, 박제화되지 않고 살아 숨쉬는 전통의 향기를 일상에서 느끼기란 쉽지 않은 터에 나는 그들에게서 안동인의 범절스러움을 자연스레 느낀 것이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곳에서 살아오면서 그들의 가사(家事)에서, 동리(洞里)의 공동체 생활에서 언행으로 체화( 化)되고 몸에 밴대로 천연스레 표출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이러한 광경은 그후 5일장이 서는 북문의 난전에서도 종종 목격한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방인의 눈에는 너무도 귀하게 보였다.
안동 일원엔 산재한 동성부락(同姓部落)과 역사의 때가 묻은 고택 등 유형적 자산들이 고도의 분위기를 느끼게 해 주지만 안동의 유산은 아무래도 무형적 자산이 더 큰 것 같다. 일상속에서 보이지 않게 녹아 있는 그 무형적 자산은 이곳의 선인들이 배움과 행동을 일체화(學行一致)시킨 데서 비롯된 이 지역 특유의 차별화가 아닌가 싶다.
나는 그동안 이 지역 선인들의 여러 유·무형의 삶의 흔적을 찾아다니며, 어떤 때는 내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역사의 시간속으로 빠져들기도 하고 그 값어치가 무엇일까 사색도 하며 지냈다. 그것은 단순히 구경하려 했다기 보다는 느끼려 했고, 도처에 묻어있는 앞서 살았던 사람들의 풍류와 정신을 배우려 했던 것이다.
때마침 비슷한 처지의 동향선배(同鄕先輩)를 만나 긴 여름날 탁족처를 찾아 만음리, 금곡리, 대사리 구석구석을 누비기도 하고, 그와 더불어 조동일 교수의 '문학과 철학'을 논하기도 하며 봄·여름·가을을 난만(爛漫)하게 지냈었다. 게다가 가끔씩 즐기는 취미생활(그림)은 선방생활과도 같은 독신자의 단조로움과 고적감을 달래주기도 하고, 그러기를 3년. 세번 째 맞는 이번 겨울은 전과는 달리 모질고 가혹하다.
이미 생활의 한 부분으로 되어버린 새벽의 산행. 나는 오늘도 어둠이 웅크리고 있는 숙소 뒷산 잔월의 냉냉한 빛을 받으며 오른다. 서걱거리는 낙엽소리와 뽀드득 뭉개지는 서릿발 소리를 들으며, 새벽을 가슴 저 깊은 곳까지 끌어들여 바람처럼 이 상태 그대로 끝까지 가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명징한 달빛에 스스로를 비춰보면서 또다른 이상적 인생의 논리를 생각하기도 했다.
이제 안동에서의 생활은 종반부를 치닫고 있다. 생각해 보면 과거의 편력으로만 치부하기엔 너무 아쉽고 소중한 경험들이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아 서서히 곰삭여 줄 것이고, 이것들은 다시 먼 시간을 두고 틈틈이 하나씩 옛그림자를 회억(回憶)하게 할 것이다.
영국의 여왕이 다녀간 후로 안동은 유명세를 타고, 특히 하회는 안동의 대표적 방문처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다녀갔다. 그러나 하회를 보고는 '장터'니 '촬영세트'니 하면서 저으기 실망하는 사람들이 많고 방문객 수도 점차 줄어든다고 한다. 하회도 동성부락의 하나인데 집성촌에 대한 사전지식이라도 알고 오면 보다 실감있게 보고 느낄 수 있지만 백화점에서 물건 쇼핑하듯 하니 주마간산이 될 수밖에 없다.
안동인의 입장에서도 '상업주의적 관광개발'이 아닌 문화 산업주의 시대에 걸맞는 '문화적 인식'이 아쉽다. 옛것으로 무조건 돈을 벌어보자는 태도에서 벗어나 '안동다움'과 '안동스러움'의 존속과 유지를 우선시 해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않고 어느 것 하나 훼손될 때 안동의 문화적 가치는 줄어들 것이고, 그것은 또한 경제적 가치의 동반추락을 의미할 것이다. 반면에 당장의 유리함만을 쫓기보다는 전통과 현재의 만남을 고민하고, 지속적으로 추구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때에 경제적 가치도 덩달아 상승할 것이다.
이제까지 지역의 여러 행사를 참관하면서 외화내빈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전통의 무게중심은 보다 무형적이어서 '정신'을 빼버리면 형해(形骸)와 같고 참여자의 '신명'이 없는 축제는 그저 '行事'일 뿐이다.
첨단산업사회를 살아가면서 전통과 현재의 양립을 끊임없이 지향하는 일본을 보노라면 우리의 모습은 서글퍼지고, 그런면에서 안동도 예외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자연성과 완숙함이 돋보이는 가치창출'을 할 줄 아는 정서가 필요한 게 아닐까. 이러한 의식의 공유와 대중화를 위해 문화지킴이들의 역할과 실천적 연대가 어느 때보다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끝으로 안동을 방문하려는 자에게 권하고 싶다.
"안동엔 하회만이 아니라 처처(處處)에 골골(谷谷)이 보고 들을 것이 많소이다. 가이드북을 읽으면서 사전지식과 방문지를 미리 정하시고, 그런 다음 와서 보세요. 이때 보는 것은 김병종의 '마음의 시점에서 이미 경치를 완성한 사람이 그 심경을 확인하는 절차'가 될 것입니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