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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마른 영혼의 대지를 단비처럼 적신 책(글/이은경)

작은나무야 작은나무야}를 다시 꺼내 읽는다. 다섯 살배기 큰 애 앞세우고 두 살배기 작은 애 들쳐업고 끝없이 걷고 또 걷던 메마른 들길 끝에서 맨 처음 달려와 지친 내 영혼을 끌어 안아준 책이다. '작은나무야 작은나무야'하고 부르면 홍안의 인디안 소년이 금방이라도 달려나올 것만 같다.

인디안식 내음이 물씬 풍겨나는 이름을 가진 작은나무가 주인공인 이 책은 자연과 인간의 숨결에 귀기울이는 아름다운 영혼의 세계를 담고 있다. 문명의 다른 쪽에서 자연과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는 순수한 영혼의 변주곡이 쉼 없이 연주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이야기다.

이 책은 참으로 새로운 느낌의 즐거움을 주었다. 제각기 비밀장소를 지니고 있다든지, 영혼끼리 대화가 가능하다든지,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이해가 지극하다든지 하는 점이 그랬다. 이러한 가르침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이 어떻게 교감하며 살아야하는 지 넌지시 일러주고 있다. 위의 세 가지 느낌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다면 이 짧은 독후감은 나름의 의미를 지니겠다.

저 비밀장소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자. 이 책 속의 모든 인디언 체로키인들은 비밀장소를 하나씩 갖고 있다. 알더라도 서로 비밀을 지켜준다. 여섯 살배기 꼬마 작은나무가 산에 올라 아무도 모르는 자신만의 비밀장소에 앉아 자신의 영혼과 대화를 한다. 그 가운데서도 곁에 있는 나무의 영혼에게 말을 거는 장면을 읽을 때 나는 나의 현실이 불협화음으로 겹쳐지는 것을 느꼈다. 컴퓨터와 TV, 그리고 어른들의 욕심에 끌려 다니는 우리 아이들의 지친 영혼이 떠오른다. 문득 자신의 영혼을 홀로 고요히 들여다 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사랑은 다른 영혼에도 가 닿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아이들이 자신밖에 모른다고 탓할 것이 아니라 체로키인들처럼 자신만의 비밀장소를 갖도록 배려하고 그 곳에서 자신의 영혼을 단련시켜 가도록 한다면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로 영혼과의 대화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나누는 영혼과의 대화는 우리가 쉽게 잊고 지낸, 그래서 조금은 낯설기까지 하다. 작은나무의 할머니는 손자에게 "마음의 하나는 육신의 삶을 위해 필요한 것들과 관계된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마음을 통해 잠자리나 먹을 것, 그리고 그 밖에 우리의 육신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얻는 방법을 생각해 낸다. 남녀가 짝을 짓고 아이들을 갖는 등의 행위를 하는 데도 그러한 마음이 작용한다.

우리가 계속 생존하려면 그러한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일들과 전혀 무관한 또 다른 마음을 갖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영적인 마음, 곧 영혼"이라고 가르친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나는 그때 다섯 살이던 큰애를 단지 돌봐주어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그러나 일방적인 아이사랑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할머니와 작은나무가 나누는 영혼의 대화에서 깨닫게 되었다. 이후 나는 아이를 함께 살아가는 동료로 보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 그 때 이후로는 아이들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감성이 새록새록 솟아났고 마음가짐 또한 편해졌다.

작은나무의 할머니는 손자에게 영혼은 근육과 비슷한 성질을 갖고 있어서 자꾸 쓰면 점점 더 커지고 강해진다고 알려준다. 반대로 쓰지 않으면 점점 쪼그라들고 마침내는 없어져 죽은 사람처럼 된다고 말해준다. 이 얘길 듣고 작은나무는 모든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겠다고 다짐한다. 어린 나이에 이처럼 가슴 속 깊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겠다는 씨앗을 품고 자란다면 어른이 되었을 때는 모든 사람을 품고 이해하는 커다란 나무가 되어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해에 대한 이야기다. 작은나무의 할아버지는 서로 대화를 할 때 말의 의미보다는 그 말이 표현되는 방식 즉, 어떤 소리인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렇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난 다음 마음속에 오래도록 여운으로 남는 것은 소리인 것이다. 사람 몸도 악기와 같아서 진실하고 그윽한 마음일 때 조율이 잘 되어 어떤 말을 하더라도 아름다운 소리가 되어 듣는 이의 가슴에 와 닿는다.

말소리가 음악처럼 듣는 이의 가슴을 적신다면 이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영혼을 주고받는 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 다해 아껴주고 서로 이해하는 인간관계에 대한 소망은 사람들의 가슴 속 깊이서 별처럼 빛나고 있는 영혼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이러한 점들이 어우러져 체로키족만의 독특한 삶의 방식이 형성된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선물을 주는 방식이나 마음씨도 오래도록 가슴에 머물렀다. 그들은 결코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선물 같은 걸 하지 않으며 그저 줄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준다. 그리고 그들은 직접 주기보다 받는 이가 스스로 발견하게끔 그의 눈에 띄는 곳에 살그머니 놓아두고 간다. 받을 사람이 스스로 받을만하면 가져가고 그렇지 않으면 그대로 둔다. 그러니 주고받은 것에 대한 손익계산서가 있을 리 없다. 얼마나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들인가.

선 곳 안동에서 아이 둘을 혼자 손으로 기르던 삼십대의 내 소망은 어서 나이를 먹는 거였다. 그러면 아이들도 어지간히 자라 내 손을 덜 필요로 할 것이며, 그리되면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영혼의 갈증을 풀 수 있으리란 기대에서였다. 원이 간절하면 이뤄진다고 했는가.

나이 마흔에 나는 영혼을 나누는 친구들을 여럿 만났고 영혼을 실하게 하는 글쓰기도 다시 시작했다. 이제 마흔 한 살이 되어 새롭게 원을 하나 세운다. 내 영혼이 크고 강해져서 쉰 살쯤에는 세상 모든 만물을 이해하며 가슴 가득 사랑으로 꽉 찼으면 하는 바람 말이다. 마음이 아득하면 원은 이뤄진다고 믿는다. 나는 영혼이 세상을 움직여 간다는 걸 믿는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