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글/임세권)영화가 시작된 초입의 지하철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출근길 지하철이 갑자기 멈추어서고 열차 안의 전기가 나갔다. 칠흑같이 캄캄한 스크린에 갑자기 푸른색의 별들이 하나둘씩 반짝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별들은 화면을 가득 메웠다. 나는 문득 몽골의 별 가득한 밤하늘을 떠올렸다.
몇 년전 몽골의 초원에서 야영을 하면서 땅 바닥에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을 때 나는 그렇게 넓은 땅을 본적도 없었지만 그렇게 넓은 하늘을 본 적도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별들을 본 적도 없었다. 암청색 하늘에 마치 은가루를 뿌려놓은 듯한 별들을 보면서 우주의 신비로움을 생각했다. 지금 이 표현은 너무도 흔한 그래서 식상한 표현이긴 하지만 내 무딘 글재주로는 달리 그날의 감동을 표현할 길이 없다.
도대체 저기 뿌려진 은가루 중 하나의 입자에서 이 광활한 대지를 가진 지구를 보면 어떻게 보일까? 아마 지구를 찾을 수도 없을지 모르지. 아니 그냥 은가루 중의 한 개의 입자에 불과할테니까. 거기 누워있는 나는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그날 밤 나는 엄청 외로움을 느꼈었다. 그처럼 장대한 밤하늘 아래 누워본 사람이라면 아마 나 아닌 누구라도 이러한 생각을 했었을 것이다.
내가 너무 거창한 기억을 떠올렸나부다. 그 별들은 바로 외부로 통화를 시작한 사람들의 휴대전화기의 불빛들이었다. 푸른 색의 불빛들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는 불이 들어왔다. 차안의 많은 사람들이 전화기를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 있었지만 김봉수(설경구)는 전화할 데가 없었다.
은행원. 하는 일이라고는 사람들에게서 돈 받아 입금시켜주고 계좌에서 돈 꺼내주고 예금 상담해주고 그저 그날이 그날이고 데이트할 여자도 없고 단 하나 있었던 친구도 장가를 가 버리고 못 생기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별로 잘 생기지도 않은 그런 남자가 김봉수다. 봉수는 어둠속에 떠다닌 수많은 푸른 별빛을 보고 한없는 고독을 느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봉수가 출근하는 은행 앞에는 어린 아이들 과외공부 시켜주는 보습학원이 있는데 거기에 아이들을 가르치는 여선생 정원주(전도연)가 있다. 어떤 아이 하나가 교실에서 울고 있길래 원주가 다가가서 왜 우느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이 나보고 선생님 닮았대요" 라고 했다. 그 학원 아이들간에는 선생님 닮았다는 것은 선생님 만큼 못생겼다는 것이고 곧 참을 수 없을 만큼의 욕이 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도 인기가 없고 매일 매일이 똑 같아서 별다른 일도 없고 점심때 맛있는 것을 먹어봤자 기껏 칼국수고 남자한테서 전화 한 통 오지 않는다.
맞은 편 은행의 김봉수와 한치도 다를 바가 없다. 영화가 시작되면서부터 거의 끝날 무렵까지 줄기차게 내리는 지리한 장마비처럼 사실 우리들이 사는 모습은 별다를 게 없다. 그날이 그날이다. 언제 이 장마가 걷힐까? 사람들은 그날을 기대하며 산다.
봉수와 원주도 그날을 바라며 산다. 두 사람의 그날은 그들의 절실한 문제를 해결하는 바로 그날이다. 그 절실한 문제란 서른 셋 근처에 있는 대부분의 총각들과 스물일곱 근처에 있는 대부분의 처녀들처럼 바로 짝을 찾는 일이다. 그 둘은 늘 얼굴을 맞닥뜨리면서도 등잔 밑이 어둡다고 서로를 자기의 짝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래도 먼저 상대를 알아본 것은 여자다. 여자가 먼저 남자를 찍었다.
이것이야말로 이전 세대와는 다르다. 나도 늘 남자가 여자를 먼저 찍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평범한 여자 원주가 봉수를 먼저 찍은 것이다. 봉수에게 원주는 아무 매력도 없는 여자다. 은행바닥에 다 큰 여자가 돼지저금통 헐은 동전이나 흘리고 다니고 잡지책에서 보고싶은 페이지를 찢다가 들키기나 하고, 그것은 아마도 연예기사가 틀림없을 거다.
어쨌든 여자는 봉수에게 이리저리 은유의 미끼를 던지는데 무심한 남자는 엉뚱한데로 짝을 찾아 나서고, 그러다가 아무것도 안되고 사우나 맛사지실 서비스걸에게서 스페샬 서비스로 만족하고.
그런데 두 사람이 사랑의 표현을 하는 것은 매우 의외의 방법이다. 그들은 우리가 상상도 못한 방법으로 프로포즈를 한다. 봉수는 이따금씩 비디오 카메라에 녹화단추를 눌러놓고 셀프비디오 편지를 만든다. 몇 년 뒤의 미래의 아내에게 지금의 심경을 전한다. 이야말로 시공을 초월한 사랑편지다. 편지를 쓰는 방법도 첨단 하이테크지만 몇 년 후의 미래의 여인과 현재의 봉수가 대화를 나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한다는데 현재와 미래의 대화는 무엇인가? 미래가 현재이면 현재는 과거이니 역사라고 해도 되겠지. 그러니 봉수의 이 뚱딴지같은 짓거리는 기가막힌 역사의 창조이다. `은행나무 침대`처럼 과거인물이 오늘날로 날아온다는 만화같은 이야기가 아니면서도 현재를 그대로 미래로 옮겨가고 미래를 다시 현재로 불러와서 그것을 비디오로 담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은 이미 우리의 시대가 그렇게 변해버린 때문일지도 모른다.
원주는 자기가 아무리 향기를 내뿜어도 도대체 눈치조차 못채는 봉수가 답답하기만 하다. 형광등을 가느라고 팔을 쳐든 봉수보고 배꼽이 예쁘다고 해도 무슨 뜻인지를 모른다. 여전히 장마비가 내리는 어느 날 저녁 원주는 아둔한 봉수에게 드디어 사랑을 고백한다.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나요? 봉수씨 난 봉수씨랑 얘기하는 게 참 좋아요. 아니, 참 좋았어요. 봉수씨 그거 알아요? 봉수씨 웃을 때 왼쪽 뺨에 살짝 보조개 잡히는거? 잘 안보면 아마 모를걸요? 잘 안보면 안보이는게 세상엔 참 많죠. 봉수씨! 건강하세요."
그런데 이 말은 봉수에게 직접하는 것이 아니다. 저녁 무렵 텅빈 현금 인출기 앞에서 폐쇄회로 카메라를 바라보며 하는 독백이다.
어느 날 기적이 일어난다. 숙직을 하던 봉수가 무료함을 달래느라 며칠 지난 폐쇄회로 비디오 테잎을 돌리는데 느닷없이 봉수 앞에 나타난 원주가 봉수를 올려다보며 무언가 말을 한다. 폐쇄회로 테잎에는 소리가 담기지 않는다. 봉수가 아무리 들으려 해도 몇 번을 다시 돌려도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래도 그 입술에서 `봉수씨` `사랑해요` 등은 알아들을 수 있다. 드디어 봉수는 원주의 프로포즈를 받는다. 아무도 없는 밤 중, 텅빈 사무실의 모니터 앞에서 이미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를 비디오 테잎을 통해 사랑의 고백을 듣는다.
그야말로 어느 날 갑자기 과거의 여자가 은행나무 침대도 없는데 불쑥 봉수앞에 나타난 것이다. 아니, 그 여자는 봉수가 셀프카메라로 쓰는 사랑의 편지를 받아야할 바로 그 미래의 여자이다. 봉수에게 원주는 과거이기도 하고 미래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아침이 되고 일상이 시작되면 그 여자는 다시 현재의 여자이다. 현재의 그 여자는 어제 밤처럼 과감히 사랑을 고백하지도 못하고 그저 무슨 건수가 없을까 하고 봉수 주위를 어리댈 뿐이다.
그래도 시간은 흐르고 현재는 다시 과거가 되고 미래가 새롭게 현재로 바뀌면 과거의 여자가 현재로 오게되고 또 미래의 여자가 현재로 와서 과거에 자기에게 사랑의 편지를 비디오로 담아 놓던 그 남자를 만나게 된다. 지루한 장마도 걷히고 그리고 푸른 잎이 노랗게 물들고 파란 하늘에 새털구름이 날리면 두 사람은 연인이 되어 손을 잡고 그들이 언제나 꿈꾸던 달콤한 미래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걸어 나간다.
영화는 너무나 평범해서 누구나가 다 꼭 자기를 닮았다고 생각할 만한 두 사람의 사는 모습을 따뜻한 시각으로 담아내서 보는 이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다. 일상의 섬세한 묘사가 보는 사람들을 공감시키고 그것이 아주 하찮은 일들임에도 너무나 아름답게 보이도록 찍은 화면 때문에 때로는 `저건 사기야` 하고 생각하게 하는 그런 영화였다. 해피엔드처럼 화끈하게 옷을 벗지 않아도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 없도록 만드는 그런 힘이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에게는 있었다.
그래도 내가 이 영화에서 느낀 재미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너무나 현대적인 대화의 통로였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시대를 보여준다. 이제 우리가 맞이할 시대는 지금까지의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송두리째 바꾸어야할 그런 시대일 거니까 나의 관심이 그쪽으로 쏠려있는 건 당연한지도 모른다. 또 이 영화는 바로 오늘의 이야기이면서 또 지극히 아나로그 방식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감각적 멜로드라마다.
박흥식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서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세상을, 그리고 그 미래와 이 현재가 서로 교신할 수 있는 채널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를 읽는 매우 뛰어난 감각을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