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의 초상을 마주하면서(글/김용헌)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쓴다고 했던가? 열심히 일해서 좋은 일에 쓰라는 교훈으로 받아들일 법하지만, 어차피 돈을 번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할 짓이 못되므로 쓸 때나 인간답게 쓰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삐딱한 해석이 용인된다면, 내 주머니의 돈은 결국 남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라는 은밀한 뜻을 확인하기 위해 "재산이란 도둑질한 것이다"라는 프루동의 말을 들먹이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다 아는 얘기지만 중세 시대에 '면죄부'라는 것이 있었다. 돈을 받고 발행한 일종의 천국행 티켓이 그것인데, 돈으로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이 로마 카톨릭의 본질일 리가 없고 하나님의 뜻은 더더욱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종교개혁의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을 보면 이 티켓으로 천국행 열차를 탔던 사람이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무튼 무슨 짓을 해서든 돈만 있으면 천국이 보장되는 셈이었으니, 세속적인 욕망을 버릴 것을 가르쳤던 예수 그리스도의 입장에서 보자면 개탄해마지 않았을 일이다.
천 원 짜리 지폐에 그려진 퇴계의 초상을 마주하면서 중세의 면죄부를 연상하는 것은 결코 지나친 비약만은 아니다. 그의 얼굴 때문에 돈의 추함이 조금이라도 감추어 질 수 있고, 그래서 그의 후손들이 양심의 가책을 덜 수 있다면, 그것은 곧 현대판 면죄부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퇴계 선생으로서는 기겁할 일이지만, 결국 그 지폐를 통해서 돈이란 것은 개처럼 버는 것이 아니라 퇴계처럼 버는 것이라는, 그래서 아주 숭고한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상징 조작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길들어져 있는 우리는 유교의 현대화나 퇴계 되살리기라는 이름으로 또다시 퇴계를 상품의 논리에 끌어들이고 있다. 퇴계와 상품의 기묘한 동거, 그 근원적인 부조화가 무엇보다 눈에 거슬리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상품만 있고 진짜 퇴계는 보이지 않는다는 엄연한 현실이다.
사실 전통의 현재적 가치는 오늘날 써먹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써먹을 수 없는 것이 얼마나 있느냐에 달려 있다.의 삶과 가치론적 거리가 멀면 멀수록, 그 과거는 오늘날의 삶을 반성하고 교정하는 거울의 역할을 충실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주의적인 삶의 양식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퇴계가 의미를 지닌다면,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그가 경제주의적인 삶을 추구하지 않고 그것과 대결했다는 점이다.
세속적인 권세가들에 대해 "그들이 부를 추구한다면 나는 어짊을 추구하고 그들이 벼슬을 추구한다면 나는 옳음을 추구한다"고 했던 퇴계의 삶에서, 상품화를 거부했던 그 정신마저 상품화할 수밖에 없는 오늘날의 음울한 삶의 양식을 반성하고 비판하는 준거를 발견하기 때문에 퇴계는 소중한 것이다. 그냥 두어도 괜찮을 길을 깔고 뚫고 하는 것을 보면서 또는 무슨 무슨 개발 계획을 접하면서 자꾸만 도산서당에서 지역개발론이나 관광경영학을 가르치는 퇴계 선생의 일그러진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진짜 퇴계를 살리는 길은, 나아가 안동을 살리는 길은 퇴계를 천민자본주의의 공모자로 끌어들이기보다는 천민자본주의의 비판자로 남겨두는 것이 아닐는지?<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