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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팔리지 않는 세상을 위하여...(글/임세권)

그 친구는 지금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 문득 얼굴 하나가 생각났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때 친구였는데 지금까지 까맣게 있고 있다가 영화가 끝난 후 갑자기 또렷하게 얼굴이 떠올랐다. 계란형의 갸름한 윤곽에 무척이나 부드러운 인상의 학생이었는데 저고리 윗 단추는 풀어헤친 채로 모자는 언제나 삐딱하게 머리 위에 얹혀 있어서 머리칼이 모자 밖으로 길게 나와 이마를 덮고 있었다. 책이 별로 들어있지 않은 가방은 항상 옆구리에 끼워져 있었다. 그 때 내 생각에는 무척 순한 인상이었는데 고집도 있고 성깔도 부릴 줄 알았다.

성북동 산비탈에 있는 낡은 한옥에 살고 있어서 그 집도 어지간히 고달프게 사는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그 집에 갈 때마다 '이집은 말야 일제 때 독립투사가 살던 집이래'하고 자랑스레 말하곤 했었다. 그런데 얼굴은 또렷하게 기억이 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름이 생각나질 않는다. 또 어떻게 친해졌는지도 기억할 수 없다. 어쨌든 고등학교 2학년 한 해는 그 친구와 무척 붙어 다닌 기억만 있다.

그 때 나는 서대문 형무소에 갇힌 아버지 때문에 가정적으로 무척 힘들었고 유일하게 그 친구 하나가 나의 생활에 위로가 되었었다. 3학년으로 올라갈 때 그는 낙제를 했고 나는 그보다 석차가 한 등 위라서 낙제를 면했다. 그게 그 친구와의 끝이었다. 그는 불량학생은 아니었던 것 같고 또 책도 제법 읽었던 것 같다. 나도 학과공부는 별로였지만 책은 제법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내게 꽤 유식한 소리들을 늘어놓곤 했으니까. 꼴등한 주제에 이런 소리를 늘어놓는다는게 영 어울리진 않지만…

왜 그가 생각이 났을까? 그것도 알 수 없다. 그냥 갑자기 생각이 났다. 고등학교시절 가깝게 지낸 친구들은 여럿 있고 또 초등학교부터 무척 친하게 붙어다닌 친구도 있었는데 왜 그가 생각이 났는지….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에도 여름이 되면 소독차가 열심히 흰 연막을 뿌리며 다녔고 아이들은 열심히 그 뒤를 쫓아 다녔다. 화면에 가득 소독 연막이 쳐지고 아이들이 연막을 뚫고 내달리고 있었다. 연기가 한쪽으로 몰리면 작은 글자들이 흰 연막을 배경으로 나타났다가 연기가 바람에 날려 흩어지면서 글자들도 함께 날려가곤 하는 영화의 타이틀씬은 인상적이었다. 먼 옛날 추억들이 아슴프레 머리 한쪽에 나타났다간 바람에 흩날려 사라지는 듯했다.

적어도 영화 '친구'는 시작부터 이렇게 우리의 잊고 살던 옛 추억들을 되살려주었다는 점에서 좋은 출발을 보여주었다.

창문 밖에서 함께 놀자고 불러대는 친구들의 외치는 소리가 밥상 위로 떨어지면 먹던 밥도 제대로 못먹고 어머니의 잔소리를 뒷꼭지에 붙인 채로 밖으로 나가던 그 때 그 시절이 고스란히 화면 위에 재생되고 있었다. 준석(유오성), 동수(장동건), 상택(서태화), 중호(정운택) 이들 네 친구는 말 그대로 불알친구다. 어려서부터 같이 골목을 누비고 물장구도 치고 골방에서 벌거벗은 여자사진도 함께 보면서 그렇게 자랐다. 그들은 틈만 나면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골목길과 시장바닥과 육교가 가로놓인 한길가를 내달렸다.

19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에 이르는 기간, 그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들 무척 달렸었다. 그저 앞만 보고 냅다 달려왔다. 어른도 달리고 아이도 달리고 독재자도 달리고 전경들도 달리고 나라 전체가 뜀박질 선수로 가득 찬 것 같았다. 숨차게 달렸던 시절. 화면을 질주하는 시커먼 교복의 까까머리들을 보고 나는 내 고등학교 때도 무척 달렸던 시절임을 다시 생각했다.

영화 속 아이들의 중학시절에는 부마사태라는 것이 온통 나라를 뒤흔들었었다. 서울사람들도 부산과 마산에서의 엄청난 소식에 박정권도 얼마 못 버티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그리고는 가을이 되어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되었다. 1980년, 그 해는 광주의 그 잔인한 학살이 있던 해였고 81년에는 '구국의 영웅'처럼 등장한 박정희의 후계자 전두환이 정권을 이어받았다.

나는 영화 속에 찍혔다가 사라지는 '1976'이니 '1981'이니 하는 연대표기를 보면서 속이 상했다. 아이들의 입을 통해서라도 아니면 길가에 날리는 신문지 쪼가리에서라도 부마사태의 흔적이라도, 또 광주의 유언비어 한 조각이라도 얼핏 스쳐가기만이라도 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중학생이 되던 해 4·19가 있었고 그 다음해에는 5·16이 있었고, 4·19 뒤에는 골목 아이들이 데모놀이를 했고 5·16 에는 박정희에 의해 개교이래 일제때도 깍지 않았던 머리를 홀랑 깎이던 그 추억들이, 아직도 그 시절을 떠올릴 적마다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네 친구들의 머리 속에는 온통 치고 박고 여자친구나 홀리고 폭력교사와 맞서던 그런 추억밖에는 없는 것이 못내 서운했다. 적어도 그 정도의 조직이 운영되려면 국회의원이라도 하나쯤 연결되지 싶은데 그건 깡패조직에 대한 나의 지나친 오버센스인가?

시나리오의 문제인지 편집의 문제인지 아니면 영화를 보는 내 아이큐 탓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영화의 결말부는 도대체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동수를 죽인 것이 동수 쪽 조직인지 준석이 쪽 조직인지 아니면 준석의 지시에 의한 것인지 영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동수에게 직접 칼을 들이 댄 것은 동수의 부하인데 동수의 죽음 이후 극의 전개는 아리송하기 짝이 없었다. 동수 쪽의 조직에서 동수를 제거했다면 왜 그랬는지, 그렇다면 또 진석은 왜 자기가 죄를 덮어쓰려고 했는지 설명이 되질 않았다.

그러면 진석의 지시로 동수가 죽었나? 이건 극의 흐름으로 보아 가장 가능성이 많긴 하지만 도대체 그놈의 극중 대사들이 동수가 일부러 덮어썼다는 식으로 읊어지니 머릿속만 복잡했다. 아무려나 동수는 죽었고 진석은 동수를 위해서 죄를 덮어쓴 것처럼 보였다. 아니 영화를 본 후 나는 의례 그러려니 믿었다. 그런데 글을 쓰면서 다시 되짚어보니 도대체 앞뒤가 맞지를 않았다.

어쨌든 진석은 동수의 죽음에 대해 변명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모든 책임을 자기 혼자 뒤집어썼다. 왜 그랬느냐는 상택의 말에 그는 '쪽팔려서 그랬다'고 했다. 아, 그 쪽팔린다는 말이 이럴 때 쓰이는 말이구나. 실은 나는 쪽팔린다는 말을 한번도 제대로 써본 적이 없다. 그걸 보면 아마도 내가 어른이 된 후 퍼진 낱말 같은데 어쨌든 지금도 나는 그 말을 자연스레 쓰질 못한다. 아이들이 그런 말을 쓰는 것을 듣는 것도 귀가 무척이나 어색하곤 했는데 그런데 이 쪽팔린다는 말이 준석의 입에서 뱉어질 때 나는 그 말이 멋있게 느껴졌다.

그래 쪽팔려서 먼저 간 친구의 죽음을 덮어써야, 그래야 마음이 편해지는 그런 친구가 있다니 요즘 세상에 얼마나 신선한 일인가. 요즘 어디 쪽팔리지 말아야 할 짓 안하는 사람 본 일이 있는가? 쪽팔린다는 이유에서라도 친구도 위하고 의리도 지키는 그런 사람 한 번 보고 싶지 않은가? 아니 쪽팔리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은 정녕 오지 않을 것인가?

친구, '오래토록 가까이 두고 사귄 벗'이라는 의미란다. 깡패가 된 준석이가 공부잘하던 범생이 상택을 보고 하는 말이다. 나에게는 오래토록 가까이 두고 사귄 벗이 얼마나 되나. 그 옛날 친구는 지금도 친구인가? 가슴에만 담아두고 몇 년이 가도록 얼굴 한 번 못보는 친구도 있고 서두에서 기억해낸 친구처럼 아예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친구도 있는데, 지금 내 옆에 있는 친구들은 또 얼마나 오래 내 옆에 있어 줄 것인가? 수표 한 장을 내밀며 '남자의 의리는 이런거야' 라고 읊어대던 깡패 두목의 말을 우리는 얼마나 자신있게 부정할 수 있을까? 갑자기 나에게는 한 사람의 친구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내가 아무의 친구도 되지 못한 채 살아온 것은 아닐까?<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