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보겠다는 욕심안고 떠난 여행(글/노영옥)그랬다. 대학 일학년의 봄, 그 웃으시는 모습이 꼭 산수유꽃만하신 선생님이 계셨고 그런 선생님이 참 좋았다. 내친김에 산수유 꽃이라도 맘껏 볼까, 하는 단순한(?) 욕심에 이번 여행은 시작되었다. 선생님이 좋아하신 꽃이라… 흠…
모임장소인 시청앞 벤취에 잠시 앉았다보니 어설프게나마 홀로 돌아다녔던 옛시절이 떠오른다. 내가 왜 순간순간 여행을 동경해 그처럼 홀로 떠났었던가를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거창한 이유란 하나도 없다. 나름대로 삶이 고달퍼서 나선 길이었는데 여행에서 해결된 문제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잊혀져가는 문제들이 더 많았단 생각이 든다.
허기사, 무언가를 빨리 해결지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떠나는 것도 아니요, 무언가를 꼭 얻겠다는 욕심도 없이, 그저 앞서는 이의 발치를 쫓아 오르다보면 어느 사이 무심의 경지에 접어들고 있는 자신을 대면함이 무작정 좋았던 것이다.
삶이 그렇지 않은가. 얻는 것이 있담, 당연 잃는 것도 있다는 이치. 이 당연한걸 체화하기 까지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물론 여행길에 나서는 까닭은 확실히 잃는 것보단 얻는 게 많다는 생각을 하게 하지만 잃는 것이 있더래두 이 모두는 그 하루가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이라는 생각에 미치면 자연스레 수그러들기 마련이다.
봄꽃찾아 떠난다
3월 17일 토요일 오후 4시 10분.
사랑방 주최 봄꽃 찾아 떠나는 남도기행은 시작됐다. 예정시간을 10분 넘긴 시간이었다.
착석한 우리들에게 제일 먼저 전해진 것은 뜻밖의 답사자료집. 이 자료집은 이번 여행에 있어 아무런 사전 지식없이 출발하는 나 같은 이에게는 꽤나 쏠쏠한 이해의 길잡이가 되어 주기에 흡족한 것이었다.
가볍게 훑다 보니 책자에 실린 지도하며 참고 그림 등이 하나도 보이질 않게 인쇄된 것이 아닌가. 하~, 이를 놓칠세라, 여기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상황을 타개하는 고육지책(苦肉之策)의 기지를 소유한 인재가 있었으니, 다름아닌 우리들의 재치맨 서동석가이드였다. 왈(曰), "여러분, 안그래도 스트레스 받으시는 일 많아 피곤에 지치셨을 줄 알고, 복잡한 지도 보느라 스트레스 받으시는 일 없으시라고 아예 시커멓게 만들어 놓았습니다"고 너스레를 떤다. 버스안을 뒤흔드는 웃음! 역시 그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의 지혜를 운용할 줄 아는 라이브(live)에 강한 가이드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지인들에게는 속칭 방장으로 불리우시면서, 사랑방의 실제적인 업무를 담당하고 계신 김복영방장님의 답사구성원 소개가 있었다.
크게는 4개팀, 안동사진동호회분과, 안동축협사료공장의 직원분들, 자칭 용모임(안동의 7용(龍) 중 4명의 용이 참가하셨다)팀, 김재왕내과의 젊은 직원팀(참고로 이들은 답사팀의 평균연령을 낮추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렇게 총 37분이 참여 하셨다.
이번 답사는 전남 구례, 광양, 경남 하동 일대를 1박 2일의 일정으로 둘러보는 것이었다. 방장님의 말씀에 의하자면 여행의 취지 또한 어떤 전문성을 살리기 보다 머리와 마음을 식히는 그저 봄기운 쐬러 가는 정도의 편안한 여행이 될 것을 종용하셨다. 또한 배 이야기를 빗대어 여럿이 같이 하는 여행이니만큼 배가 산으로 가지 않도록 가이드의 말을 잘 따라줄 것도 말씀하셨다. 이러한 단체여행을 통해서 우리는 전체와의 조화를 생각할 줄 아는 배려의 마음을 배우게 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뒤를 이어 사랑방의 회장직을 맡고 계신 임재해 선생님께서 이번 답사를 기획한데 대한 소감 한 말씀을 하시는데, 짖꿎은 어른들(?)께서 그런 식상한 인사 말고 좀 땃땃한 걸로 다시 해보라는 말에 산수유가 조류현상(답사자료집 8쪽에 산수유가 남성의 조루현상에 좋다는 말의 오타)에 좋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는 지적을 하셨는데 그 왕 썰렁함이라니…(역시 회장님으로서의 자존은 끝까지 꿋꿋한 것이었다.)
일 이십 분이 지났을까, 윤원장님이 꽤나 분주하시다. 친절하게도(?) 모든 이들에게 캔맥주 한 잔 씩을 따라 권하시는게 아닌가. 덕분에 우리들의 1박 2일치의 간식은 수십분만에 동이 나고 말았지만… 여행에서는 이렇게 나서는 분이 있어야 재미가 쏠쏠한 거라고 하니 이하 동감이다.
남원 추어탕에 춘향주 한잔이라
대구에서 두 분의 객을 더 태운 후에 논공 휴게소를 거쳐 우리는 드뎌 땅거미가 깔릴 무렵에(7:00) 남원 MBC 옆에 위치한 새집(억새할 때 그 새의 의미라 했다)이란 향토음식점에서 추어탕을 먹게 됐다. 먹거리 인심이 후해서 많이도 주셨고, 밑반찬들도 깔끔했다. 아주머니가 어디에서 오셨나구 묻길래 안동(경상도)에서 왔다고 하니까, 안동에서 왔기 때문에 더 주는 거라고 인심자랑을 하신다. 거기에다 보태어진 춘향주… 캬 달다.(그나저나 춘향주 있음 몽룡주도 있겠지?!, 허~ 젊은 처자가 이렇게 밝히면 못쓴다는디)
그렇게 맛난 식사를 하고 -일단 첫날의 추어탕 메뉴는 지고하신 어른들께 인기였다. 다음 식사시간이 되어서도 많은 분들이 추어탕 입맛다심을 하신걸 보면…, 우리는 구례군 지리산자락에 위치한 숙소 송원리조트에 도착했다. 도착한 시간이 아홉시가 좀 넘어 있다.
사모님들의 방은 일찍이 숙면, 남자분들의 두 방은 조촐한 술판, 젊은 김재왕내과 간호사님들의 방은 게임에 열중이다. 필자는 그 날 밤 알아버렸다. 병원에 근무하시는 분들은 -어마한 주량을 포함한-주도에도 강하다는 걸. 벌칙으로 술과 노래를 선택하기로 했는데 벌칙에 걸린 사람치고 노래를 택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 쩝∼. 덕분에 음주가무(飮酒歌舞)(?) 네박자 모두에 젬병인 필자는 상쾌한 공기를 핑계로 주변정찰에 나섰다. 돌아와보니 새벽 1시가 넘은 시각. 자리를 접고 모두들 잠을 청하기 시작한다.
나와서 까지 자다 가면 왠지 억울하고, 또 쓸데없이 예민한 성격에 잠못 이루고 뒤척이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세수하고 홀로 산책길에 나선다. 시각이 새벽 여섯시 쯤이다. 공기가 그리 차갑지 않음이 우선은 반가웠고, 산책이나 한답시고 걸은 길이 낮은 산야를 한 바퀴 다 돌았다. 바람의 유혹은 향기롭고, 자고로 봄은 그렇게 여인의 계절인가!
논두렁 옆 실개천 둑으로 자란 산수유나무에게서 수줍은 첫 꽃봉오리를 보는 마음이 그렇게 설레일 수 없다. 선생님의 마음이 꼭 그런 것이었을까. 산자락에 걸린 새벽녘 흰 초생달, 논밭 중앙으로 또는 낮은 산야에 꾹꾹 눌러 담은 밥공기를 엎어 놓은 형상으로 자리하고 있는 무덤들을 보노라니 참으로 정겹다.
무덤하면 할미꽃이 고개숙인 처연한 슬픔만을 연상하던 나에겐 진정코 다감한 모습이다. 그래, 죽은이들을 위하여 저건 잘 된 일일꺼야. 가족들이 일하러 나올 적마다 보게 될테니, 아무렴 덜 외롭겠지하는 동화같은 생각을 잠시 한다. 논밭의 경계될만한 둑길을 올망졸망 돌로 쌓은 것도 귀엽고, (아 참) 또 집집마다 -송아지만하다면 믿을 것 같지 않고-염소만한 개들은 얼마나 많던지…, 문득 우리 고향집 백구 생각이 났다. 멋지게 잘빠진 꽤나 쓸만한 녀석인데, 그 녀석은 내가 지녀석을 이뻐하는 줄을 아는걸 보니 아무렴 나보다는 똑똑한게 분명했다.
그러고 나서도 시간이 남아 리조트의 5충에서부터 1층까지를 다 돌았다. 달밤에 체조 아닌 새벽에 산책 덕분에, 이처럼 허벌난 감상이 청승으로 변질되는 순간도 있었지만 깨어나는 아침을 읽을 수 있는 지극히 상쾌한 경험을 했다.
산수유마을
리조트 1층 식당에서 재첩국으로 아침식사를 했다(8:20). 숙소정리를 마치고 출발한 시각이 9시10분. 사람들이 하나같이 날씨도 좋고, 바람도 좋아서 다행이라고 했다. 바람하면 나는 괜히 설렌다. 그래서 풍경소리를 울리는 바람같은 사람이 그리 좋은 걸까. 그래서 그렇게 바람처럼 살다 가고 싶은 걸까.
창밖으로 보이는 정경. 가로수, 정원수, 모두가 마카다 산수유네하는 말이 터져나올 정도로 지천이 산수유나무다. 아침에 산책에서 보았던 모습들이 확대되어 다가오는 느낌이다. 산야에 박힌 바위가 소담할뿐더러 알맞은 높이의 돌담들이 정겹고, 참으로 골골이 아름답다. 바라보면서 생각커늘 여행이란 어쩌면 자연의 섬세함을 살피러 가는 길이 아니런가.
드디어 첫 행선지인 산수유 마을(상위마을)에 도착했다. 어디를 가서든 추억되는 사건이나 사람이 있다는 것은 여행의 기쁨을 배가하는 일이지 않은가. 그래서 추억을 만들러도 가지만 때로 추억을 좇아서 여행을 떠나기도 하는 거겠지.
차에서 내리기 전 가이드 선생님이 한 말씀을 하신다. 안동에서는 3월에 퇴계로에서 가로수로 심어진 산수유 꽃을 볼 수 있노라고. 안동에 벌써 7년째 살아오고 있으면서도 모르던 사실이었다. 산수유 꽃이 필때쯤 어떤 벗을 꼬셔서 꼭 한 번 가봐야 겠노라 생각한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큰 다리를 건너 돌담과 물소리를 벗하여 마을 쪽으로 난 소로를 따라 마을 끝까지 가니 온통 산수유나무 천지이긴 하다. 하지만 염려했던대로 우리가 한 주 앞서 찾은 까닭에 꽃봉오리만 달고 있을뿐 만개는 아직이다. 사진에서 보았던 찬연한 노란 빛깔의 황홀함을 기대했던 이들이 아쉬움을 뱉어내는 소리가 역력하다. 올해로 3회를 맞는 산수유 축제가 3월 24∼25일 있다고 했으니, 만개한 모습을 보려면 한 일주일 정도를 더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산수유나무 밑둥에 산수유열매 씨앗을 부려논 모양을 보고 옛날에는 산수유 열매의 씨와 과육 분리를 처녀들이 입으로 직접 하는 바람에 산동에서 나서 자란 처녀들의 앞니는 많이 닳아 있었다고. 그래서 타지역 사람들이 산동처자는 쉽게 알아보았더라는 자료집의 얘기를 생각해 내고는 피-식 터지는 웃음 한자락.
다양한 형태의 부도들 한자리에
덤덤한 마음으로 구경을 마친 일행들이 다음 목적지인 연곡사를 향해 출발한다(9:40).
차는 무작정 달리고 창밖으로 펼쳐진 풍광은 생동하는 봄기운을 표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본래 이름을 따르자면 모래내, 다사강이라 불리웠을 것을, 그 예쁜 이름을 두고 두꺼비 섬(蟾)자를 써서 섬진강으로 불리우기 시작한 것이 고려 우왕 때부터라 했다. 그 강 하늘 위를 유영하는 새떼를 보자니 으레 자유란 것에 대해 한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으로서 삶을 영위하는 자유. 어느 무엇하나 쉽게 자유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결코 쉽지 않은 화두다.
저 멀리로 보이는 강을 끼고 도는 겹쳐진 능선들의 운치는 나를 또 얼마나 설레게 하는지…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그런 경험이 있는가? 지금보다 덜 어린 날의 언젠가 지리산을 찾았을 때 다들 잠이 든 새벽, 홀로 능선 사이로 비쳐오는 산맥일출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턱하고 가라앉는 소릴 들으며, 그렇게 나도 몰래 눈물이 흐르던 경험을 했다.
주위에 아무도 없고 이 세상에 오직 혼자라는 느낌과 그러기에 궁극에 이르러서는 고독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대면해 자연스레 흐르던 눈물섞인 감동. 아, 말로나 글로나 다 표현할 수 없음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인 순간이었다. 그 외경(畏敬)을 대한 이후로 난 그렇게도 먼 발치로 뵈는 산의 능선들이 미치도록 좋은 것이다. 다행 이번 여행에서도 나를 능선만큼이나 설레게 하는 광경이 있었으니(역시 지리산 끝자락 매화마을 얘기다) 같이 가지 못한 분들에겐 그림의 떡과 같이 핀잔만 들을 소리러니 여기에서 일단락.
광평마을-하사마을-강변 신촌마을을 지나면서 우리가 도착한 곳은 지리산 반야봉 법왕대 밑 연곡동에 위치한 연곡사였다. 이른바 피아골 입구. 가슴 선연한 이름 피아골. 떠오르느니 붉은 단풍이요, 나아가니 역사의 상흔으로 남은 빨치산. 잠시의 얼룩진 감상을 접고 경내를 향해 걷는다.
연곡사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없는 실정이지만 {지리산화엄사사적}의 부록으로 실린 [연곡사적]에 의하면 신라 진흥황 때 인도스님 연기조사가 창건하였다하고 중창을 거듭해 오늘에 이르게 된 사찰이라 했다. 무엇보다 이 사찰을 찾은 반가움을 꼽으라면 다양한 형태의 부도를 한 자리에서 눈요기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답사 구성원 중에 이쪽으로 전문지식을 가진 분들이 있어 설명을 해주시니 한결 이해가 수월하다.
풍화에 시달림이 있어 닳아 버린 일부 가장자리를 제외하더라도 그 치밀하고 정교한 조각 솜씨가 살아있는 -전체적으로 불국사의 다보탑을 연상케 하는-동부도는 통일신라말의 화려한 양식적 특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었고, 그에 반해 좀더 수더분하게 생긴 것이 서부도(소요대사 부도), 비신은 없고 귀부와 이수만 남은 동부도, 산사태 관련으로 안타깝게도 볼 수 없었던 것이 북부도 였다(혹자는 도굴때문이라고도 했는데 진위여부는 모른채 떠나왔다).
비교적 근래에 세워진 부도에서부터 통일신라시대의 화려한 양식을 간직한 부도, 숭유억불시책에 의해 그 규모나 양식이 사발이나 종 모양 등으로 단촐해진 조선시대 부도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부도를 보면서 보다보니 부도도 이처럼 아름다울 수 있구나 생각든 것이 처음인 듯 하다. 다만 어쩌면 죽음의 흔적에 다름 아닐 무덤 조차가 시대의 조류를 형성하는 문화적 기반이 무엇인가에 따라 융숭한 대접과 홀대를 겸하는 모습을 보니 짧은 식견으로나마 왕조의 융성과 흥망에 따른 격세지감이 엉뚱하게도 부귀와 영화를 쫓는 인간의 심성을 이해하는 일단의 외도로 전이되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경내를 다 둘러보고 난 뒤에 보니 역시 여인네들의 손길이 빠르다. 버스에 오르기 전의 그 짧은 상간에 그네들은 벌써 나물캐는 처녀가 아닌 나물캐는 아줌마(?)가 되어 있었는데 그 뜻은 꽃만 말고 이내 맘도 함께 따가주?!란 의미였을까. 버스에 올라서니 봉지에 들린 나물내음이 상큼하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연곡사에서 출발한 시각이 11:21, 점심식사를 하기로 한 화개장터 도착하니 12시가 되어 있었다. 개성파 가수 조영남의 유일하다시피한 자작곡 노래 화개장터로 더 잘 알려지게 된 화개장터였지만, 장터에 세워진 화개장터유래비의 말마따나 거기엔 그 터만 남았을 뿐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 따라 화개장터엔 아랫말 화동사람 윗마을 구례사람 닷새마다 어우러져 장을 펼치네……"와 같은 옛 시골장터의 정경은 그저 옛일일 따름이었다.
쌍계사
12:40 출발하기 시작해 오후 1시쯤해서 우리는 세번째 목적지인 쌍계사에 도착했다. 이 십여 분간을 걸어 본당에 도착하니 법당 마당에 만개한 매화나무 한 그루가 찬연하다.
경내를 돌아보는 내내 고개를 한 45도쯤 위로 쳐들고서 우러러 봐야 할만큼 규모도 웅대하고 계단도 높던 사찰로 기억된다.
두 시 쯤 대웅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솔방솔방 올랐던 사찰길을 다시 걸어 내려왔다. 내려오시던 어른들이 섬진강 동동주에 묵한사발 걸치는 모습이 군침을 흘리게도 하였으나, 한 잔 이면 홍단이요, 두 잔이면 세상이 돌고, 석 잔 이면 갈 지(之)자가 절로 그려지는 못난 체질이라, 입맛 다심만으로 아쉬움을 접어야 했다.(오, 바쿠스여 동동주 향그러운 예서까지도 그대는 내 원망을 벗어나질 못하는 구료...)
버스에 오르기 전 방장님이 한 말씀 하시기를 "피아골은 가로수가 단풍, 쌍계사는 가로수가 벚꽃, 산수유마을은 가로수가 산수유, 이처럼 마을마다의 특색을 그런식으로 살린 사실이 인상적이지 않느냐?"는 말씀에 동감하면서, 부인네들의 장보는 틈에 끼여 나도 다기를 파는 집에서 엽서를 골랐다. 옛날 우리 선생님은 노란부처님이 그려진 엽서를 고르게 해 주셨는데 세월이 흘러 내가 누군가를 위해서 쓰여질 무언가를 고르는 일이 참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산, 강, 매화의 삼중주
예정보나 20분이나 늦어 쌍계사를 출발했다(2:40). 버스에 오르니 선생님들이 고로쇠물을 한 잔씩 권해주셨는데 텁텁했던 입안이 시원해진다. 이제 마지막 코스인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 제 5회 매화꽃 축제가 열리고 있는 청매실 농원을 찾아가는 길이다. 그런데 이런 낭패가 있을까. 차라리 걸어가는 것이 더 빠를 정도로 길은 벌써부터 막히고 있었다.
쌍계사에서 한 잔 걸하게 하신 분들이 한 번 걸러 줄 때가 됐는데 하시며 본능적인 고통을 속으로 삭히실 즈음, 차는 달려갈 기미를 영~ 보이지 않고, 드디어 뒷춤에 앉아 부인께서 뜯어오신 쑥을 차분히 다듬으며 공처가임을 공고히 하고 계시던 잘생긴 김0안사장님께서 앞쪽으로 냅다 소리치신다. "거∼, 앞에 체면차리지 말고 누고 옵시다. 나랑 같이 갈 사람?" 했는데, 역시 지고하신 분들이라 아무도 손을 들지 않다가 여차저차 잘쌩긴 사장님 원초를 자극하는 말빨에 꾀인 한 분을 동행하여 동락(同樂)한 뒤에 따르는 동고(同苦)의 결과물을 해결하려 버스를 내려 급기야 시원스레 배출하고 오신다.
한 선생님께서 내려서 걸어가자는 제안에 차 안이 답답하기도 하거니와 잘 됐다 싶어 걷기를 좋아하는 나도 내려 걸었다. 강바람 봄바람 맞으며 걸어가는 길 내내 매화향기 끊이지 않음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내 비록 특정종교인은 아니지만 아~, 두 발 달아 걸을 수있게 해 주신 신의 은총이여...하는 감탄이 절로 터져 나왔다. 향그런 바람 덕분에 힘들이지 않고, 더하여 마을에도 일찍 도착할 수 있었는데 드디어 감동의 사건이 시작되나니, "하~악!" 입구에 들어서기 시작하면서부터 뚱그래진 것은 4개 였다. 눈과입! 그리고 콧구멍 2개!!
만개한 매화도 매화려니와, 매실마을 마당을 온통 채우고 있는 1200여개의 옹기들, 매화를 배경으로 사진찍기에 분주한 관광객들을 피해 위로 위로 걸어 오르니 나의 눈을 맞이하는 것은 흰 매화나무 사이로 건너다 뵈는 강을 안은 지리산 자락! 그 앞을 흐르는 섬진강 줄기, 그처럼 산-강-매화가 엮어내는 부드러운 삼중주 실루엣이다.
너무 아름다워서 그래서 어쩌면 더 숙연한 것, 너무 파래서 서글픈 하늘처럼, 무한히 펼쳐진 지리산 끝자락 매화 향기, 진한 그리움, 그 끝에 남는 것은 마음에 툭 내리 꽂히는 매화향기 깊은 눈물이다.
이 순간 자연의 위대함이란 어쩌고 하는 그런 거창한 말을 나는 모르겠다. 그저 의외의 곳에서 발견된 경이로움 앞에 나는 살아 있으면서도 다시금 살아야겠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살아있음이 너무도 소중하게 생각되어 누군가한테라도 감사를 전해야 할 만큼 가슴이 벅차 오르던 기운. 세계 최고(最高)의 봉우리를 정복한 뒤에 그 정상에 꽂는 태극기만한 감동에 견줄바는 못되더라도 어쨌든 그처럼 아름다운 광경에 눈물이 다 날 수 있다는 말을 재차 실감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 되어 있었다.
관심(觀心)법-혹 어떤 독자는 이 단어 때문에 필시 태조왕건 드라마를 연상해 먼저 웃으셨을지도 모르겠다-으로, 펼쳐진 풍광명미(風光明媚)을 조망하다 보니 과거사 미천한 나를 스치고 지난 그렇게 따뜻한 웃음을 지녔던 사람들, 그 깊디 깊은 속내로 나를 감동시킨 다들 고만고만하게 고마운 사람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좋은 것을 대하니 그런 모양이다. 가슴을 뻐근하게 하는 묵직한 자연의 무게감 앞에 반사된 자신의 주눅. 당연스레 나에게 겸손을 가르치셨던 우리 산수유 선생님의 인자한 미소가 매화향기에 어린다.
혹여 사는 동안에 크게 되는 일이 있더라도 그 때에 네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보다 겸손을 지키는 일이라고 꼭 산수유꽃만한 음성으로 들려주시던 소중한 말씀. 크게되지 않더라도 살다보면 겸손의 미덕만한 것이 없음을 아는 나이에 이미 다다랐다는 사실은 나를 벌써부터 그토록 서글퍼지게 했다.
그 고마운 순간들이 자꾸만 눈에 어림을 어쩌지 못하는 난감함을 피해 애꿎은 그리움들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나는 끙소리를 내며 앉았던 자리를 털었다.
참, 여기서 잠깐 홍쌍리여사와 관련한 이야길 하나 해야겠다. 언젠가 모 방송사의 인터뷰에서 "어떻게 이렇게 엄청난 일을 이룩해 내셨냐?"는 질문에 여사는 이렇게 답했다. "화가나 작가들만 작품을 만드는게 아니라 나는 산 작품을 만든다 생각했어요."
독자들은 [흰소] 로 유명한 이중섭의 그림을 본 일이 있을 것이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생동의 기운이 넘쳐나는 화폭 이면에 진하게 배어나는 그리움과 슬픔과 열정을 한꺼번에 목도하게 되는 순간과 맞딱드리게 된다. 그리움은 함께 살지 못하는 가족들을 향한 것이요, 슬픔은 자신을 둘러싼 채 이제는 생활이 되어 버린 고달픔과 몸부림칠 수 밖에 없는 처절한 가난의 굴레에서 비롯된 것이요, 열정은 이 셋 중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이 모든 고통을 아울러 그의 질박한 삶을 끈을 놓치지 못하게 하는 그림에 대한 열정이었다.
오로지 그려야만 자신의 존재 가치가 유지될 수 있다는 혼의 정신! 그것의 투영 때문에 희비가 교차되는 그의 그림에서 염세적인 슬픔과 이를 포섭하는 거친 느낌의 밝은 색채를 찾아내는 일 만큼이나 쉽게 우리는 그림을 통해 표출된 화가의 감정에 전염되곤 한다. 이른바 필자는 이것이 중섭 자신이 혼을 던져서 삶을 투영해낸 결과하고 생각해 왔기에, 그처럼 홍쌍리 여사의 말에서도 특히 "산 작품"이란 말에 주목하게 됐다.
오로지 매화나무, 매실 밖에 몰랐던 한 촌부가 예술을 목표에 둘 리 없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 산 작품을 만들어 냈고, 그것은 우리에게 확실하게 살아 숨쉬는 느낌을 경험케 해 주는 것이 었으며, 삶을 채우는 진지함의 실체였다. 그녀의 작품은 자신의 혼을 바쳐서 일한데 따른 결과물인 동시에 당신 자신의 고된 외길의 삶을 그대로 던져 넣은 것이었기에 그 자체로 충분한 예술혼으로서의 전이가 가능한 것이었다.
나의 확실한 믿음 중에 하나는 이처럼 자기철학이 있는 모습에서만이 누구에겐가 가르침이 되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귀감을 이렇게 또 발견케 되니 참 반가웠다. 삶을 채우는 그 어떤 진지함에 당면해 또 그만큼 힘들게 고민해야 하는 까닭은 어쩜 우리 모두는 제 인생을 산 작품으로 가꾸어 가야만 하는 책임을 숙명처럼 지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니까.
이렇게 계획된 일정을 마치고 매화축제장을 벗어나는 길(5:30). 역시 막히고 있다. 덕분에 안동으로 돌아가는 길도 많이 늦어졌지만, 연풍휴게소에서 이동규위원장님의 전적인 후원 덕택에 따로 계획에 없었던 저녁식사가 해결되었다. 반찬만으로도 만찬이 될만큼 푸짐한 늦은 저녁을 먹고 다시 차에 오르니 9:40 이다.
이전부터 열정적으로 이어지던 차내 노래방타임 사건을 빼놓으면 서운해 할 이가 너무도(?) 많을 듯 하여 한 대목 쓰고 넘어가야겠다.
분위기메이커로서의 활약상이 남달랐던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의 트레이드마크는 커다란 카메라 앵글과 빨간색 등산조끼. 민국장님! 덕분에 차 안엔 박장대소는 물론 안동에 도착하기까지 흥경운 노래소리가 넘쳐났다.
민국장님의 권유 덕분에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무색케 할 만큼의 풍부한 저음을 지니신 윤원장님의 초련도 들을 수 있었고, 그에 광적인 팬임을 자청, 열광하다 버스 밑이 빠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을 조성했던 김재왕내과의 젊고 이쁜 언니들과, 카스바의 여인을 불러서 카스바의 왕자가 되어버린 청일점도 빼놓을 수 없다. 덕분에 우리 차는 기름이 없어도 쓩쓩~ 달려갈 것만 같았다. 땅거미가 무르익어 흑거미가 돼있을 안동으로.
발착지였던 안동시청 앞에 도착할 즈음해서 마무리 인사가 있었다. 아무 사고없이 잘 다녔왔음에 대한 자축과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은 방장님과 순간순간 후원을 아끼지 않은 여러 선생님들, 그리고 여러 행사를 통해 익히 보아온 가이드선생님의 성실한 준비와 사랑방 안방녀의 꼼꼼함 덕분에 이번 여행이 편안한 여행이 되었음에 다들 감사했다.
언젠가 난키우기를 즐겨하신다던 선생님께서 난이란 녀석은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자에게만 그 향내를 맡게 해준다는 말씀을 해 주신 적이 있다. 이 번 여행에서 얻은 것 또한 선생님의 말씀과 다르지 않았다. 나이가 드는 탓인가 몰라도 결국 여행이라는 것도 같이 늙어가는 사람의 주름살을 살피는 일처럼 자연이란 얼굴에 새겨진 세심한 주름을 살피는 작업임을 새삼스레 느낀다.
난한테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고, 끊임없는 애정을 베풀고, 꽃을 피우기까지의 설레임을 인내하는 과정처럼 결국 여행이란 작업을 통해 우리는 그동안 자신이 살아오면서 무심히 지나쳤던 일들을 돌아보는 오랜 해후(邂逅)의 마음과도 같은 설레임으로 돌아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때문에 아름다운 사람이 머무른 곳은 그 자리도 아름다워야 하는 까닭 또한 사람과 자연은 서로 공존의 질서 속에 있으면서 공생적 존재임을 기반으로 하는 때문일 것이다. 서로의 존재 가치를 존중하고 애정을 가지는 가운데서 만이, 그 속에서 빚어지는 감동의 실체를 서로가 공감할 수 있게 될 테니까 말이다.
이는 살면서 존재의 이유가 될만한 사람을 만나는 일 만큼이나 그렇게 중요한 일일 게다. 분명 세상엔 존재의 이유가 될 만한 사람이 있고, 다만 꼭 있을 것이라는 그 믿음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의지적인 측면이 힘들게 다가올 때도 있긴 하지만, 그것이 또 우리를 살게하는 원동력이 되지 않던가!
구성지면서도 옴팡진 전라도 사투리를 많이 경험하지 못했단 소소한 아쉬움이 남기 하지만, 이런 쉽게 잊혀지지 않을 감흥들 때문에 이 번 여행을 위해 고생하신 여러 분들의 마음이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고맙게 다가든다. 그나저나 다음 여행 때도 그리운 얼굴들 볼 수 있으려나. 바람같은 사람이 있어 나의 도반이 되어 주기나 할까.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