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사남매의 운동화(글/류선경)깔창을 드러낸 채 빨래줄에 걸려있는 운동화, 어머니는 깔창을 빼고 운동화 안 깊숙이까지 칫솔을 넣어 빡빡 빠셨을 것이다. 무척 익숙한 풍경이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 대전 변두리에 있는 초등학교는 집과 2백미터나 떨어져 있었을까?
나는 매일 매일 학교가 끝나자마자 한달음에 내달려 집 대문을 차고 들어서며 "엄마"를 불렀었다. 그러면 엄마는 언제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찜통을 열고 찐빵이나 만두를 꺼내 주셨다. 그 찐빵을 들고 마루에 벌렁 누워 한 입 베어물며 올려다 보는 하늘, 그 하늘 위로 뽀얀 운동화가 빨래줄에 걸려 있었다. 오빠 것, 내 것, 여동생 것, 남동생 것, 고만고만한 우리 사남매의 운동화와 실내화가 빨래들과 함께 섞여 긴 마당 한끝을 차지하고 바람에 흔들거린다.
한 두 살 터울인 우리 사남매는 틈틈이 그리고 무수히 옷과 신발을 더럽혔지만 엄마는 언제나 그 시중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간혹 금방 갈아입은 옷을 버리고 들어오면 성을 내며 밖에 나가지 말고 집에서 놀라고 야단도 치셨지만, 엄마는 "애들이 귀티가 나네요"하는 이웃 사람들의 인사에 신바람나고 즐거워 하셨다.
엄마는 매일 매일 바빴다. 쓸고 닦고, 빨래하고, 그 빨래를 다시 삶고, 밥하고 간식 만들고 엄마가 일을 다했나 싶으면 깨끗한 그릇들을 마당에 수북히 다시 꺼내놓고 짚세기로 반짝 반짝하게 윤을 내신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엄마는 지나치게 부지런하고 깔끔한 분이셨던 것 같다.
우리들이 학교간 뒤 한차례 치운 방을 잠들기 전 한번 더 걸레질을 해야 마음이 놓이시는 분, 그냥 자고 싶어 이불을 깔라치면 기어이 이불을 젖히고 방을 다시 훔치신다. 하루만이라도 그냥 자자는 아빠 말은 언제나 먹혀들지 않았다
그런 엄마가 지금은 일흔을 눈 앞에 보고 있다. 각자 독립해 나간 세 아들, 딸
말고, 이제 아빠 그리고 막내와 함께 사는 엄마, 지금도 여전히 아빠와 막내의 빨래를 하고 계신다. 그러나 이제 엄마는 손빨래 대신 세탁기를 사용한다. 빨래는 물론이고 운동화도 세탁기에 넣어 돌리신다. "세탁기가 제일 효자다"라는 말이 어머니의 심경을 가장 잘 드러내는 얘기 아닐까?
관절염 때문에 한쪽 무릎을 수술하고, 나머지 무릎도 좋지 않은 상태지만 여전히 종종걸음을 치며 청소하랴 밥하랴 빨래하랴 바쁘시다. 명절때나 되야 집을 찾는 아들, 딸을 위해 미숫가루를 만들고, 김치를 담그느라 바쁘시다. 가끔씩 아버지와 막내의 시중에 일이 많다고 불평을 하지만 그래도 각자 사느라 바쁜 세아들, 딸 말고 아직 당신곁에서 당신을 필요로 하는 가족이 있다는 것에 무엇보다 행복해하는 어머니.
어머니는 항상 두 딸을 향해 너희들은 일을 꼭 하라고 하셨다. 절대 집에서 살림만 하지 말라고, 그래서일까? 동생도 나도 결혼과 직장은 별개이며 일을 그만둔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IMF가 오고, 구조조정이 시작되고, 직장을 바꾸면서, 일 하는 것이 녹녹치 않음을 옆에서 느낀 어머니는 "남들 딸들은 시집가서 편하게만 사는데... 내가 쓸데없이 좋은 직장 잡아, 일 잘하게 해달라고 빌어서… 그래 그냥 시집이나 잘 가게 해달라고 할 걸"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사신다
굽이 굽이 명사찰을 찾아다니며 부처님께 수천 수만배의 절을 올린 어머니. 새벽녘 어설픈 잠에서 깨어나보면 언제나 기도하는 어머니를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잘되면 내 자식이 잘난 것이고, 못되면 당신 탓이다.
나와 내 여동생은 집안일에는 젬병이다. 너희들은 나처럼 집안 일에 유난떨지 말고 바깥일이나 열심히 하며 살림은 대충하라던 어머니의 말씀대로 대충 지내다 보니 밥은 고사하고 빨래나 청소도 대충이다.
여자는 많이 배우면 못쓴다던 어머니의 시대, 외할아버지의 요구대로 대학을 합격하고도 가지 못한 어머니의 한이 나와 내 여동생을 일에 매달리게 한다. 그래서 웬만큼 자리잡고 살게 한다. 그런데 이제와서 어머니는 후회하고 계신다. 사회적인 안정은 둘째이고, 당신 탓에 두 딸이 서른 후반에 접어들도록 시집을 못 가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이다.
빨래줄에 걸린 운동화는 그래서 상큼하고 풋풋한 어린시절의 추억과 함께 일흔을 눈앞에 둔 어머니의 모습으로 내게 다가와 가슴을 시리게 한다.
내일은 운동화를 빨아야겠다. 서울 온 지 일년여……매번 산에 갈 때마다 신어 꼬질꼬질 해졌지만 한 번도 빨지 않은 운동화를, 깔창을 빼고 칫솔로 문질러 가며 깨끗하게 빨아야겠다. 그리고 베란다 빨래걸이에 집게를 꽂고 말려야지. 퇴근길에는 요즘 한창인 찐 옥수수를 포장마차에 들러서 사다가 동생과 먹으며 옛날 얘기를 나누고 싶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