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 풍산장터의 봄날(글/권태용)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 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 신경림의 "파장" -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지만, 못난 사람들의, 못나서 더 정겨운 웃음들은 어디에서 만나볼 수 있을까. 벚꽃이 흐드러지던 어느 봄날, 타박타박 먼지를 날리며 풍산장을 찾아가면서 문득 들었던 생각이었다.
장터는 오랜 옛날부터 우리네 삶의 터전이었다. 그래서 장날은 자연스레 인근 마을사람들이 다 모이는 축제날이었다. ‘이웃집 영감이 나락지고 장에 가면, 거름지고라도 장에 가고 싶다’고 했던가?
장이 설 때면 그저 나가보지 않으면 안될것 같은 마음. 코흘리개들은 엄마 치맛폭을 부여잡고 생떼를 쓰곤 했다. 엿장수 가위질까지 가세를 하면 저절로 신이 났고, 저절로 흥에 겨웠다.
조촐한 풍산장터
없는 것 없이 다 있다는 시골장터. 그러나 없어야 할 것은 물론이고, 있어야 할 것조차 많이 사라지고 있는 쇠락한 느낌. 안동의 대표적인 재래시장이라고는 하지만, 신작로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불과 몇 분이면 다 돌아볼 수 있는 거리에 조촐하게 장이 서고 있었다.
"어이, 보래이. 상추가 희한해, 보들보들한 게... 돈나물도 맛있고, 고들빼기도 있대이."
"할매. 이건 저번에 사먹어 보니깐 해금내가 난다고 그래."
"해금내? 이게 얼마나 꼬시다고... (비료)아무것도 안주는데 이거는.. 해금내라꼬? 거 이상하다."
여느 시장과 별 다를 바 없어 보이는 낯익은 실랑이들. 소반 가득 햇살을 받은 봄은 제 풀에 녹아 누워있다가도, 점심때가 지나도록 마수조차 못했다는 할머니의 말에 햇살은 슬그머니 그늘 뒤로 자취를 감춘다.
"장이 옛날만 못해. 못하지럴. 내가 여 나온 지는 한 이십년 되는데, 사는 데는 풍천 광덕이고. 근데, 이래가지고는 하루에 만원 못 팔 때도 많아. 한 단 두 단에 천원. 저기 한무데기 천원. 다 해봐야 얼마되노. 이거 내버리나 먹나.. 어예노. 혼자 있는데. 마수를 하면 뭐하노 장사가 안되는데."
그래도 봄이라고 씀바귀며 고들빼기며 쑥이며 나물들은 지천에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 오늘은 다를까. 행여나 하는 기대 속에 또 하루를 연 시장사람들. 풍산장에서 몇 십 년을 함께 해 온 얼굴이기에, 장사꾼도 손님도 한가족 같다.
"이거? 고들빼기… 들에 가서 캤어. 직접 캐다 놨어. 이렇게 캤는거 한 소쿠리에 천원, 이천원...종일 힘들게 캐도 그것밖에 안돼. 그래도 깎아달라는 사람들 많지요. 암. 많지럴 그래도 못 팔면 소한테나 주고 버리지 뭐."
"근데 할머니 고향이 여기가 아닌 것 같아요. 위쪽에서 오신 분 같은데… 제천? 원주?"
"하하하. 제천. 어찌 그리 잘 알로? 이상하네...인제는 여기 사람 다 됐지. 한 이십년이 넘었으니."
비록 고향은 달랐지만, 넉넉한 어머니의 품처럼 사람들을 모두 받아주었던 풍산장터.
인제는 그런거 없지요
한때는 이곳에도 시끌벅적한 웃음이 있었고, 모퉁이마다 발길 잡는 떠들썩함이 있었고, 솥단지째로 얼큰하게 끓던 국밥은 냄새만 맡아도 배가 불렀었다. 동동구리무에다 꽃신에 이르기까지 눈길을 부여잡는 구경꺼리도 많았던 그 시절.
"인제는 그런 거 없지요. 옛날에는 구경꺼리가 많았죠. 사람들만 해도, 십년 십오년 전에 처음에 여기로 이사 왔을 때만 해도 많았는데, 4-5년 전부터는 도시에 그냥 시장 장 서는 것 정도 밖에 안돼. 요즘은 내 볼일만 보고, 필요한 거만 사갖고 간다는 그거지.
이제는 여기 시골장이라고 해 봐야 저기 있는 것 같이 닭이라든지 키울 수 있는 동물 나온다는 거, 자기가 농사를 지어서 장에 갖고 나온다는 거…. 그게 다르다면 다를까."
대구에서 안동으로 이사를 왔다는 이미경 씨의 이야기다. 말대로 그나마 시골장터라는 걸 알게 해 주는 것은 토종닭의 울음소리뿐.
"이거 다 파시는 거예요?"
"그럼, 다 팔지. 까만 거는 오골계. 토종닭. 칠면조, 토종병아리. 큰 거는 왕추병아리. 6개월 잘 먹이면 5킬로 이상 나가. 종자가 틀려."
이야기를 하는 틈틈이 졸린 닭은 연신 울어대고. 이런 것이야말로 시골장터에서만 볼 수 있는 흔치않은 풍경일터. 닭이 사람을 구경하는 것인지, 사람이 닭을 구경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나른한 봄날. 바야흐로 이야기보따리는 풀렸으렷다.
"나? 서울에서 살다가 대구 와서 살다가…원래 고향은 서울이야. 경상도 사람 다 됐지. 경상도 온지가 한 오십년 되니까. 학교 서울에서 댕겼고. 출생지가 서울이고. 장에 나온 지는 몇 년 안돼. 옛날에 건설업을 했는데 하다보니까 사방 다니면서 공사를 맡게 되거든. 근데 다니는 곳 마다 장이 있고. 장 댕기는 게 취미가 있더라구. 옛날부터 농촌사람들 장날이 생일날이다 보니까. 이 장 저 장 다니는 게 재미가 있어. 내가 나중에 뭔가 장사를 할 때는 꼭 장에 댕기면서 해야 되겠다 이래 생각했지. 인제는 경상도 사람 다 됐어. 길안도 가고, 사방에 가지뭐."
그러나 장이 줄기는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현재 전국에 남아있는 재래식 5일장터는 대략 400군데라고 하는데, 전남 강진장이나 구례장 이런 몇 군데를 제외하면 어디를 가도 장 자체가 많이 줄었다고 한다. 안동에는 중앙시장과 구시장, 옹천시장, 풍산시장, 구담시장, 운산시장, 천지시장, 임동시장, 정산시장, 온혜시장, 신평시장에서 장이 열리고 있는데, 그나마도, 농촌 인구가 줄고, 도로가 뚫리고, 대형 마트가 생기면서, 시골장터도 이제는 겨우 명맥만 이어가는 수준이라고 한다.
장날마다 고등어를 비롯해 해산물을 팔러온다는 아저씨의 이야기다.
"그래도 우리는 많이 팔아요. 그래도 많이 파는데도 딴 데 비교하면 적지요. 큰 장 비교하면 여기는 소비가 적기 때문에 장사 안돼요. 옛날에 비하면 모든 게 되는 게 없어. 이거 자체가 소비성이 그만큼 약해졌어.
원래 장사꾼들은 전국에서 다 모이죠. 장사 잘돼보세요 서울에서 부산에서 서로 다들 여기까지 와요. 근데 지금은 수지가 맞아야오지. 장사가 안돼. 남는 게 없으니깐"
한창 농사철이라 농기구를 수리하러 나올 법도 하지만, 농기구 수리점도 한적하기는 마찬가지.
"농사가 뭐… 젊은 사람들 없으니까 그렇지. 기계 고치러도 안와요. 장자체도 많이 줄었고. 여기서 대동센터 한지가 한 삼십년? 요새는 장이 많이 적어졌지요. 잘될 때는 이 장바닥에 사람이 꽉 찼는데, 요새는 장이 안돼요. 안돼."
농기구 센터 사장님의 이야기다. 사람자체가 줄어든 것 말고, 또 한 가지 달라진 풍경이 있다는데….
아쉬운 풍경들
"많이 다르죠. 옛날에는 사랑어른들이 다 나와서 생선사시고 장을 다 보셨지. 지금은 새댁들, 할머니들… 지금은 남자들이 장을 보던 세태가 사라졌어요. 경제권이 넘어간 탓도 있고."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근처에 계시던 할아버지들께서 다들 한마디씩 거드신다.
"옛날에는 부인들 장에 못 오고 그때는 남자 세상이랬지. 허허허."
"그라모. 그때는 바깥출입이 뭐랬노. 부인들 바깥출입 자체를 못했지. 암."
"그때는 장에 한번씩 오면 약주도 하고, 약주해서 댕기다가 길에 구부래지기도 하고…그랬는데. 옛날하고 지금하고 세월이 달라졌지. 요새는 여자들 세월이고… 것 참."
알콩달콩 주권이양(?)에 대한 하소연도 잠깐일 뿐. 내심, 그 시절 자체에 대한 그리움이 더한 눈치시다. 그 눈빛이 멋쩍어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쯤 한번쯤은 마주치는 반가운 얼굴들. 멀리 사라지는 익숙한 뒤통수에다 대고 냅다 소리를 지르신다.
"어이～ 아무개"
사람의 눈과 귀는 반가운 것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일까. 장터 한 귀퉁이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유행가 한 자락.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그 속에서 우리네 봄날도 가고 있건만, 왁자지껄 살맛나던 장터의 봄은 언제 다시 돌아올 것인가.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는데. 그 정겹고 풋풋한 웃음은 세월 속에 그대로인데.<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