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지나온 것들에 대한(글/김만동)
산수유 샛노란 물관을 타고 왔던 봄이 둘레둘레 더욱 노오랗게 개나리를 일으켜 세우고 산기슭마다 참꽃을 불러 불질러놓고는 마침내 강변을 온통 벚꽃으로 뒤덮었다. 그 동안 목련은 홀로 처절하게 져버렸다. 하여, 지천인 저 봄꽃들도 곧 지리라. 흐르는 시간을 어이하랴. 시간은 흐르고 지나간 것들은 저마다 그리워지는 법인 것을.
영화는 1인칭 주인공인 아홉 살짜리 백여민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여준다. 집과 학교와 동네가 그의 세상이다. 미더운 아버지와 속 깊은 어머니, 그리고 ‘꾸물대는’ 동생이 있는 집은 가난하지만 따스하다.
‘지키고 싶은 여자’ 장우림과 여러 동무들이 있는 학교. 거기엔 가깝스러운 우림과의 깜찍한 사랑, 기종과의 우정, 금복의 질투, 검은 제비, 고릴라와의 싸움, 불성실하며 단순무식한 담임선생님의 폭력이 있다.
피아노 선생님, 골방 철학자, 고물장수, 안경점 주인, 신발가게 주인 같은 이들이 동네 사람들이다. 시드러운 삶 속에서 이들은 어린 여민에게 사랑을 일깨우고 돈의 중요성을 깨우치며 복수(!)를 가르쳐 주는 매개자들이다.
통속적이지만, 나는 영화를 보면서 한번 울었고, 또 한번 속이 후련했다. 벨루르가 말한 나르시즘적 동일시였을까? 후후, 굳이 어떤 장면이었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궁금하다면 영화를 보셔야 한다. 각각의 이미지들은 수많은 컷들이 쌓아올린 탑이라고 생각하니까 나는.
영화관을 나서는데 문득, ‘친구’와 ‘말죽거리 잔혹사’가 겹친다. 70년대라는 배경 탓인가, 남성 노스텔지어 때문인가?
어쩌면 우리는 모두 여민이고 우림이다. 동수이고 준석이며 현수이고 우식인 것이다. 생각해 보니 영화의 스토리라인을 따라 가는 동안 나는 줄곧 그 시절, 70년대의 한 시기를 헤맸던 것 같다.
그때 우리(나와 관계된) 모두는 얼마나 가난했고 무료했으며 아팠던가. 여름철, 하염없이 비가 내리면 어김없이 지붕이 샜고, 찢어진 신발을 아무렇지 않게 신고 다녔으며, 참말이지 어머니의 회초리는 얼마나 따끔하던지….
그래, 학교에선 우유나 빵 따위를 배급해주었고, 누구는 점심을 굶었으며, 누구는 돈을 못 내서 죽도록 두들겨 맞고 쫓겨났지. 맞아, 백엽상 뒤에 토끼장이 있었어. 여자아이들은 고무줄놀이에 열중해 있었고 우리는 그걸 툭툭 끊어버리곤 했지. 맞아, 맞아, ‘아이스케키’ 통은 꼭 저렇게 생겼어. 우리는 바가지철모를 덮어쓰고 우르르 골목을 휘젓곤 했지…. 머리를 싸매고 골방에 처박혀 고시공부를 하던, 폐병환자 같은 형들도 있었고, 술주정뱅이 남편에게 얻어맞고는 대문 밖에서 악다구니를 쓰던 아주머니도 있었어….
레너드 마틴처럼 별점을 매길 재주는 없으나 굳이 한 마디 하자면, 「아홉살인생」은 그저 그런 영화다. 아이들의 빛나는 연기를 솎아내면 아무 것도 도드라지는 것 없이 고만고만할 뿐이니까. 그러나 한 편으로 내게 「아홉살인생」은 꽤 괜찮은 영화다. 앤딩크래딧이 뜰 때까지 시나브로 추억의 빗물에 촉촉이 젖게 만든다. 이게 이 영화의 덕성이다. 덕분에 나는 내 어린 날들을 잘 돌아보고 왔다. 상기도 암암하기만 한 그 한 때.<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