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 시에 깃들여 있는 고향의 기억 -초가, 청포도, 절정을 중심으로-(글/안상학)
육사의 고향
강인한 사람은 고향을 떠나서도 잘 산다. 성정이 강하고 독립심이 강한 사람은 고향에 대해서 무덤덤할 수 있다. 홀로 자수성가하는 사람은 일찍이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듯, 어디서고 당차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일찍 고향을 떠나서 뜻을 펴며 산다. 약한 사람은 고향을 떠나서 사는 데 주저한다. 마치 어미의 품을 떠나기 싫은 어떤 새끼들처럼, 내쫓아도 주변을 맴돌며 어미의 눈길을 기다린다. 마마보이 같은 사람은 고향을 떠나서 살기 어렵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처지가 곤궁하고, 일신에 병이라도 나게 되면 마음이 약해지기 마련이다. 그쯤 되면 이미 없는 어미 품도 그립고, 어릴 때 꿈을 키우며 뛰어 놀던 고향이 아른거린다. 수구초심, 여우도 죽을 때는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머리를 둔다고 했던가. 미물이나 사람이나 그런 마음은 다를 바 없는 모양이다.
“그것은 지나간 七月입니다. 나는 매우 衰弱해진 몸을 나의 시골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東海松濤園으로 療養의 길을 떠났습니다.”
-이육사 수필「嫉妬의 叛軍城」부분. 1937.
이육사(본명 원록. 1904～1944)는 이 글의 말미에 ?十一月 五日 밤?이라고 적고 있다. 작품 발표 연도로 미루어보아 1936년 7월에 병구를 이끌고 요양하러 포항 송도 바닷가에 간 것을 알 수 있다. 이어지는 옥고와 북경 등지로 떠돌며 얻은 객고가 병인이었을 것이다. 남성적이고 지사적인 그의 결 곧은 성품도 정신적, 육체적 고통으로 눈물이 섞여들고, 향수가 파고들었던 모양이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되라고 배워온 것이 세 살 때부터 버릇이었나이다. 그렇다고 이 버릇을 八十까지 지킨다고야 아예 말하지도 않습니다.……어쩐지 이 시절이 되면 마음 한편이 허전하고 무엇이 모자라는 것만 같아 발길은 저절로 내 동리 江가로만 가는 것이었습니다.……본래 내 동리란 곳은 겨우 한 百餘戶나 되락마락한 곳 모두가 내 집안이 대대로 지켜온 이 땅에는 말도 아니고 글도 아닌 무서운 규모가 우리들을 키워주었습니다.”
-이육사 수필 「季節의 五行」부분. 1938.
그는 이 글에서 고향을 마치 세밀화를 그려가듯 정치하고 고아하게 진술하고 있다. 단아하고 꼬장꼬장한 그의 품격이 드러나는 수필의 맛도 맛이려니와 절제된 향수의 지긋한 흉통을 감지할 수 있는 내면의 흐름도 어지간하다. 눈물을 보이지 않는 사내의 길을 걸어가라는 그 가르침이 새삼 떠오르는 것은 그가 이미 눈물의 맛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눈물에 어룽대며 떠오른 것이 어머니요 고향이었다. 1930년 스물셋의 나이에 첫 시인 「말」을 발표하며 시를 쓰기 시작한 그는 서른 즈음부터 고향의 숨결을 시와 산문에 새겨 넣었다.
초가
구겨진 하늘은 묵은 얘기책을 편 듯/돌담울이 古城같이 둘러싼 山기슭/박쥐 나래 밑에 黃昏이 묻혀오면/草家 집집마다 호롱불이 켜지고/故鄕을 그린 墨畵 한 폭 좀이 쳐./(……)/피로 가꾼 이삭에 참새로 날아가고/곰처럼 어린 놈이 北極을 꿈꾸는데/늙은이는 늙은이와 싸우는 입김도/벽에 서려 성애 끼는 한겨울 밤은/洞里의 密告者인 江물조차 얼붙는다.
-이육사 시「草家」부분.『批判』.1938. 4
이 시의 말미에 幽廢된 地域에서라고 적고 있다. 병중에도 서울로 이사를 하여 생활한 그는, 1937년을 대부분 서울서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그곳에서 스스로를 유폐한 채 투병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을 오가며 실천적인 삶을 살 때와는 달리, 투병생활을 하며 얻은 갑갑한 마음을 풀어 고향으로 촉수를 내밀었다.
이 시에서 고향은 한 폭의 좀이 친 묵화 같이 선명하게만 떠오르지는 않는다. 열여섯(1920년)에 고향을 떠난 지 20년 가까이 되었으니 그도 그렇지 않겠는가. 드문드문 이미지가 선명하게 잡히지만 군데군데 기억을 잃은 듯하다. 산자수명한 고향 풍경과 그 속에서 나물 캐는 가시내, 앞내강(낙동강), 뗏목을 타고 떠나는 젊은이, 다투는 노인네들이 전설처럼 녹아있다. 그 안에 시인은 슬쩍 "곰처럼 어린 놈이 北極을 꿈꾸는"어린 날의 자신의 모습을 삽화처럼 끼워 넣었다. 고향과 어린 날의 동경이 절망 앞에 놓여 있는 현실 속에서 안타깝게 여겨진다는 다른 표현으로 읽힌다.
재미있는 것은 "洞里의 密告者인 江"이다. 이 표현은 퇴계의 시 「청량산가」에 나오는 강의 이미지와 닮아 있다. 아름다운 청량산을 나와 백구만 알고 싶은데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게 복숭아꽃이어서, 그 꽃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면 혹 어부라도 알고 올까 두려워하는 마음, 그 밀고자는 다름 아닌 강인 것이다. 동네의 소식을 알고 싶은데, 지금은 얼어붙어 강도 전할 길 없고, 시인도 전해 받을 길을 잃어버린 어두운 향수다.
이 시를 필두로 그는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쏟아낸다. 그의 시 39편 중 10편이 고향을 노래한 시거나 고향에서 얻은 서정을 바탕으로 쓰고 있다. 「江건너 간 노래」「年譜」「靑葡萄」「班猫」「日蝕」「娥眉」「子夜曲」「少年에게」가 그렇고, 새로 발굴된 「잃어진 故鄕」이 열 번째를 채우고 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시는 「江건너 간 노래」의 습작처럼 보여서 꼽기에는 마음이 쓰인다. 그러나 나름의 완성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작품으로 읽어도 손색이 없어 보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고향을 노래한 시 중 백미는 「靑葡萄」다.
청포도
내 고장 七月은/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먼데 하늘이 꿈 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흰 돛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靑袍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전문. -『文章』.1939. 8.
한 때 이 시는 작품 무대가 어디냐는 논란에 휘말린 적이 있었다. 그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이 시의 무대를 그의 고향인 원촌이라는 점에 토를 달지 않았다. 그런데 포항 문인들이 포항 바닷가에서 썼다고 얼토당토 않는 근거를 대고 나섰다. 급기야는 호미곶에 시비를 세우고 성대한 잔치를 열기도 했다.
비음에 저간의 내력을 밝힌 글은 아동문학가이자 소설가인 손춘익(1940～2000)이 지었다. 그는 시비를 세운 배경을 "1937년 포항 송도에 우거하며 요양한 적이 있고 또 이듬해에는 경주 남산 삼불암에서도 머무른 적이 있었다 그 무렵 어느 날 시인은 홀연히 현재는 해병 사단이 주둔하고 있으나 당시에는 유명한 포도원이었던 일월지 둔덕에서 그윽히 영일만을 바라보았으니 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는 청포도의 시상은 그때 시인의 뇌리에 각인된 바 마침내 1939년 명시 청포도가 발표되어 인구에 회자되기에 이르렀느니라 시인의 발길이 영일만을 찾고 일월지 포도원에 이르지 않았더라면 어찌 명시 청포도가 창작되었으리오 자칫 망각의 저편으로 연결되기 쉬운 이 문학적 흔적을 기리고 보존"하려는 데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시비를 봐서라도 이 내용이 사실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양보하고 양보해도 시의 진의를 왜곡할 수는 없는 것이다. 포항 문인들의 후배된 도리로서, 선배의 자취를 찾아, 실낱같은 고리를 걸고 선양하려는 충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시의 앞머리에 분명히 내 고장이라고 밝히고 있다. 육사의 화법에 따르면 이는 분명 그의 고향을 이르는 말이다. 수필 「剪爪記」에 보면 "내 고장 우리 집에는 그다지 크지는 못해도 허무히 적지 않은 화단이 있었다.…내 고장의 푸른 하늘 아래 봄이 왔을 것도 같으니"라는 표현이 있다. 그는 고향을 이를 때 자주 내 고장이라고 썼다. 그런 그가 낯선 포항 땅을 내 고장운운하며 시를 썼을 리 만무하다.
또 하나 근거를 대자면 이렇다. 이 시에서 고향을 지칭하는 어휘가 세 개다. 내 고장과 이 마을그리고 먼데다. 앞의 두 개는 수긍할만한데 난데없이 먼데는 무슨 먼데냐고 할지 모르겠다. 다름없이 그의 고향 마을 이름이다. 한자로는 遠村이라고 썼다. 멀 원, 마을 촌의 우리말 이름이 먼데다. 무엇을 먼저 쓰고 나중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간혹 먼데라고 부른다. 세월이 흘러 행정명칭은 원촌에서 원천(遠川)으로 바뀌었고, 속칭 먼내라고도 하지만, 육사 선생 또래 집안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 시절에는 분명히 먼데라고 불렀다고 한다.
청포도는 한 세대 전만 해도 규모 있는 집에서는 관상용으로 키웠다. 대체로 우물가에 서서 우물을 드리우거나 들마루를 놓을 자리를 덮고 있었다. 육사가 살았을 당시 이 마을에도 집집이 청포도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이냥저냥 잘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육사의 기억 속에는 어린 시절 보았던 그 청포도가 살아 있었고, 또한 그리웠던 것 같다.
포도가 드리운 넉넉한 그늘에서 바라본 햇빛 얼비치는 잎새들을 하늘 밑 푸른 바다로, 투명한 포도알에 흰 구름이 비쳐드는 것을 흰 돛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으로 표현했다.
이 시에는 유가적 분위기에서 자란 그의 일면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이라 했던가. 제사를 잘 모시고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는 규모에서 자란 그답게 손님을 정성껏 맞이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이러저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청포도」는 그의 고장을 노래한 것이다. 그가, 포항 바닷가에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포도주 공장의 포도밭을 보았을지언정 거기서 순정한 고향마을을 떠올릴 일 만무하다. 일제강점기 시대의 백성들을 박쥐로까지 비하하며 탄식했던 그가 아니었던가. 왜색을 시에 끌어들여 노래할 일 또한 만무하다.
절정
매운 계절(季節)의 채찍에 갈겨/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서다//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밖에/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전문.『文章』.1940. 1.
육사의 대표시 중 하나인 「絶頂」을 잉태한 곳도 고향이다. 대체로 시인들의 정서적 바탕은 어린 시절 눈에 익힌 고향의 풍경이 아닐까 한다. 이 시의 전반적인 이미지는 바로 고향에서 형성되었다고 본다.
마을 앞 강 건너에 있는 높은 산이 왕모산(648m)이다. 청량산과 마찬가지로 퇴적암이 융기하여 산이 되었다. 그래서 강을 끼고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이 많다. 그 가운데서 단연코 칼선대가 으뜸이다. 이 대를 갈선대(葛仙臺)라고도 한다. 칡뿌리나 캐어먹는 신선이 사는 높은 곳이란 뜻을 담아 붙인 자못 처사적 명명이다. 칼선대라는 이름은 강가에서 우뚝 솟구쳐 오른 형상이 마치 하늘을 찌르는 듯한 거대한 칼 한 자루가 서있는 것 같다는 데서 유래한 민중적 언어다.
어쨌거나 나는 갈선대를 버리고 칼선대라고 못 박은 지 오래다. 칼선대에 서면 육사의 시 「絶頂」이 절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칼선대에 서면, 마치 거대한 칼끝에 선 기분이 든다. 두세 명만 같이 올라서도 서로를 믿지 못하는 마음이 들어 오금이 저리다. 자칫하면 천길 나락이다. 거기서 육사의 고향 마을을 굽어보며 이 시를 암송해 보는 맛은 일품이다.
이 시를 쓴 곳은 북방이 틀림없다. 그러나 한 발 내디딜 곳 없는 칼날진 곳을 시에 끌어들여 당시 상황의 긴장감과 절박함을 표현한 근저에는 칼선대의 기억이 자리했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겨울날 칼선대에 서보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마지막 행도 숙제가 풀린다. 낙동강이 무지개 같은 곡선을 그리며 휘돌아 서쪽으로 빠져나가는 흐름세도 유장하다. 결빙의 강, 태양빛을 받아 산란하면 꽝꽝 얼어붙은 거대한 무지개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주(細註)를 단 이 대목도 칼선대의 정서가 깃들어 있는 육사의 품을 생각하면 절로 풀린다. 강철로 된 무지개는 결빙의 강, 얼어붙은 역사의 강이다. 그 강이 풀리기도 전에 육사는 북경에서 눈을 감았다. 결빙의 절정에서 해빙을 코앞에 둔 날이었다.
고향에 가면 그의 시가 보인다
이 밖에도 고향을 노래한 시가 더 남아 있지만, 비교적 왜곡의 정도가 심한 세 편을 골라 그의 고향과 마주보게 해서 풀어 보았다. 고향의 풍경 속에 걸어 들어가 보면 그의 시는 여기저기서 살아 움직인다. 그러니 육사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고향에 가서 그를 청하여 대화를 해 보는 것이 좋다. "고향의 황혼을 간직해 서럽지 않"(「班猫」부분)다던 진술에서 「黃昏」까지도 느낄 수 있는 노을 좋은 곳도 있다. 이렇게 여기저기 숨어 있는 육사 시의 내밀한 속살을 살펴보는 재미라니. 비록"어쩐지 이 시절이 되면 마음 한 편이 허전하고 무엇이 모자라는 것만 같아 발길은 저절로 내 동리 江가로만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누구나 그 곳에 무슨 約束한 사람이라도 있었구나하고 생각을 하면 그것은 여간 잘못된 생각이 아니"라던 그였지만, 옥고와 객고에 시달린 병구, 그 쓸쓸한 영혼을 자주 고향으로 보낸 육사의 심경, 그 씨줄날줄의 비밀을 고해줄 밀고자들이 먼데마을에 널려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안동>
---------------------------------------------------------------
안상학씨는 1962년 경북 안동 출생.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으로는 『그대 무사한가』『안동소주』『오래된 엽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