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정(글/윤천근)

 

철조망 너머에 물러나 있는 백운정

어제 비가 왔던 탓인지 주변 산천의 풀과 나무는 날아갈 듯한 색감으로 푸르름을 뽑아 올린다.주변의 산과 들에 지천으로 넘쳐나는 것은 녹색이지만, 계절은 여름을 끝을 향해 치달려 나가고 있다. 그것은 녹색의 세상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끝나리라는 점을 의미한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흐르는 시간이 참 무섭다는 느낌이 든다. 하루, 또는 한달이라는 시간이 이루어내는 역사는 관념적으로는 별 것 아닌 듯 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엄청난 것이니 말이다.


오늘은 백운정을 가기로 하였다. 항상 나를 이끌고 취재에 임하고는 있는 김복영씨가 특별히 자신만만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백운정이 가서 살펴볼만한 가치가 있는 정자라는 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가문 정자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백운정은 내앞 작은 종가의 처음 주인인 귀봉 김수일의 것이고, 김복영씨는 그 작은 종가에서 갈라져 나온 더 작은 종가의 종손이니 말이다.


 


백운정에 이를 때까지 나는 김복영씨의 무덤덤한 얼굴 속 깊이에서 은연중 번져나는 그 자신만만함이 후자 쪽에 더 큰 이유가 있을 것이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백운정에 이르러서는 전자쪽의 이유가 더 크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운정은 안동 일원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정자 전문가인 김복영씨가 자신있게 내세울 수 있는 정자로서의 품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운정은 안동대학교와 내앞 사이에 위치한다. 백운정을 가기위해서는 임하댐 조정지댐의 철문을 통과하여야 한다. 조정지댐의 철문은 닫혀 있고,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철제팻말이 마치 문패처럼 그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가 길을 벗어나서 그 팻말앞에 이르자 원형의 경비실 안에서 조정지댐을 지키고 있던 제복의 경비원이 밖으로 나와 용무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백운정을 가겠다고 하니 경비원은 백운정에 가려면 열쇠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열쇠는 김복영씨에게 있었다.


조정지댐을 통하여 반변천을 가로질러 그 너머로 이르니 댐 주변은 온통 들꽃의 세상이었다. 가장 넓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달맞이꽃이었다.


길의 한켠으로는 철조망 울타리가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댐의 경계울타리라 하였다. 길은 그 철조망 울타리 안쪽으로 펼쳐져 있었고, 한참을 올라가자 철조망 울타리가 길을 가로지르며 안쪽으로 오므라들고, 거기 철문이 앞을 막고 나섰다. 김복영씨는 차에서 내려 가지고 있던 열쇠로 그 철문을 열었다. 이른바 경비원이 말했던 열쇠가 필요하다는 말의 의미가 바로 그것임을 나는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 두 번째 철문을 열고 들어가 그 안쪽으로 한참 올라간 뒤에야 우리는 백운정에 이를 수 잇었다. 그러니까 백운정은 이중의 철문 속에 자리잡고 잇는 셈이었다. 댐이 생기면서 백운정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는 그만큼 폐쇄된 것이다. 미상불 관리는 저절로 될 수 밖에 없는 구조라 하겠다. 그러나 접근하기 어려워졌다는 것과 관리가 잘된다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커다란 의미를 갖는 것인지, 나로서는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김복영씨는 백운정에 가겠다면 경비실에서는 문을 열어 주게 돼 있다고 하였다. 열쇠는 마을에도 있고, 경비실에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제복 앞에서는 알게 모르게 주눅이 들 수 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고, 굳이 문을 열어달라는 청을 하여 제복을 번거롭게 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여러번 와 봐서 그 관행에 익숙한 사람이 나 스스럼없이 그런 요청을 할 터였다. 그러니 백운정은 나같이 번거로운 것을 질색으로 아는 소심한 사람들에게는 이미 닫혀진 공간이라고 하겠다. 김복영씨 같은 안내자를 동행하지 않고서는, 내가 또 다시 백운정을 찾을리는 만무한 일이었다.


노쇠한 향나무

안내판은 돌계단 위에 높이 서 있었다. 돌아가는 길이 있었지만 우리는 안내판을 보기 위해 굳이 계단을 밟고 올랐다.


"이 정자는 귀봉 김수일 공이 조선 선조 원년(1568)에 건립했다고 전한다. 공은 청계 김진(1500-1580)공의 둘째아들로 명종 10년(1555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향리에 남아 자연을 벗삼으며 수학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현판의 글씨는 미수 허목(1595-1682)선생의 친필이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합각기와지붕의 겹처마 구조로 되어있다."


안내판의 글이다.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에 소재하는 이 정자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75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내판을 지나 정자의 영역 속으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오래된 향나무이다. 향나무는 정자의 뜨락 끝에서 지표를 뚫고 나왔으나 막바로 허공으로 솟아오르지 못하고 땅을 기어서 뜨락 밖으로 내려선다. 그리하여 밑으로 떨어졌다가 급한 곡선을 만들며 힘들게 솟구쳐 오른다. 그러나 그 비상은 그렇게 힘차지 않고, 수세도 그렇게 좋지 못하다. 겨우 정자의 뜨락면 위로 가지를 뽑아 올려 1미터쯤의 상승을 이루어내는 것으로 그치고, 위를 향하여 뻗어 올라간 가지들의 아래쪽 반절쯤은 황색의 낙엽빛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상록수라는 의미가 무색할 정도로, 이 향나무는 언뜻 보아도 황갈색이 분명히 눈에 띄는 잎들을 갖추고 있었다면, 그것이 버텨낸 세월이 황갈색 색조의 가지들을 여럿 만들어내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향나무는 보통의 자세를 만들어 갖추지 못하고 포복하듯이 땅을 기는 어려운 자세를 하고 있었으며, 비틀리며 땅을 기는 바람에 밑둥치는 종으로 심하게 찢겨져서 마치 흩어져 있었던 것을 모아서 얼기설기 붙여놓은 듯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밑둥치가 여러조각으로 찢겨져 있으니, 그런 둥치를 통해 양분을 뽑아올리기는 수월한 일이 아닐 것이 분명하였다.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향나무의 아래쪽 가지들에서 낙엽 색깔을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그러나 향나무는 그냥 향나무가 아닌 것이다. 어디 흙과 물과 햇빛을 주물러서 자기 몸에 향기를 담아내는 일이 쉬운 것이겠는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나무라면, 특별히 인내하는 힘과 특별히 자신을 새로 만들어가는 권능도 갖추고 있으리라. 그 황갈색 색조의 위쪽으로 새로이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 너무나도 신선한 초록의 색조들은 바로 향나무가 오랜 인고의 시기를 거쳐서 이제 다시 상록수로서의 건강한 특성을 찾아나가고 있다는 암시일 것이었다. 그것은 향나무가 피워올리는 새로운 희망의 노래와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희망이라! 나의 마음 속 중얼거림은 향나무가 가느다란 새 가지의 끝에서 연초록으로 피워올리는 그 냄새를 맡으며 역설적으로 절망의 음조를 띄고 있었다. 21세기의 우리에게 무슨 희망의 조각이라도 있을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금방 마음을 고쳐 먹었다. 희망이 필요한 것은 영광 속에서가 아니라 오욕 속에서이고, 전도가 양양한 상황 속에서가 아니라 우울한 절망의 숨결이 세상을 뒤덮고 있을 때일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백운정

백운정을 보러 갔다가 행나무의 희망과 현대의 절망을 한꺼번에 떠올렸던 것은 분명 어줍잖은 일이었다. 자연 속에 어디 희망이 있을 것이고 어디 절망이 있을 것이겠는가? 자연 속에는 생명의 영광이 있고, 인간의 평화가 있을 뿐이 아니던가?


그러나 백운정에는 향나무의 연초록빛 희망처럼, 분명 어떤 희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깨끗하게 청소되고, 사람이 들어가 살아도 좋을 정도로 잘 정돈되어 있는 마루와 방들의 모습에서 희망의 숨결은 미약하나마 분명하게 감지되었다. 살아있는 백운정! 그것은 분명히 희망의 다른 모습이었다.


정자는 이미 현대적 효용성을 잃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정자를 찾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우리에게 없고, 정자를 유지하는 데 드는 경제적 비용을 감당할 의지가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살아있다는 느낌이 드는 정자를 만나기는, 정자의 고장이라고 할만한 안동에서도 그렇게 쉽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안동지방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정자는 대개 두 가지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의 유형은 잘 관리되어 있지만 박제와 같은 느낌이 들게 하는 정자, 그러니까 모셔지는 정자이다. 다른 하나의 유형은 그저 방치되어 있는 정자, 그러니까 무너져가고 있는 정자이다.


우리 주변의 정자는 그렇게 모셔지거나 방치되어 있을 뿐이다. 잘 관리되고 있으면서, 생활의 냄새를 풍기는 정자를 만나는 것은 희귀한 경우인 것이다. 그 희귀한 경우를 나는 여기 백운정에서 접하고 있는 것이다.


백운정의 마루는 잘 닦여져 있었다. 얼마 전에 바닥에 들기름을 발랐다고 하였다. 그러나 들기름을 먹인 것 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마루바닥이 너무 정갈하였다. 누군가가 며칠에 한번씩은 청소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마루의 안쪽 기둥에는 방명록이 벽에 걸려 있었고, 그 앞 마루에는 몇 개의 재떨이와 방 비가 놓여 있었다. 재떨이는 손님을 위한 배려였고, 방 비는 손님이든 누구든 이곳을 들를땨마다 흙과 먼지를 쓸어내기 위한 도구일 터였다. 정자의 마루는 정면 두간, 측면 두간의 정사각형이었다. 정자 쪽은 겹처마구조를 하고 있었는데, 바깥쪽 서까래는 각진 제재목이었고, 안쪽 서까래는 원형의 나무였다. 서까래와 그 아래쪽 사방을 두르고 있는 나무에는 연한 쑥색의 색깔이 칠해져 있었다. 그것은 세월에 의해 퇴색되어 부드러운 색감을 드러냈다. 두어개 쯤, 새로 갈아 끼웠는지 전혀 색이 칠해져 있지 않고 밝은 목재의 나신을 드러내고 있는 것도 있었다.


정자의 마루 안쪽으로는 두간 장방이 달려 있었다. 방안에는 밝은 노란색 색감을 현시하는 장판이 깔려 있고, 그 한쪽으로는 바둑판 하나와 여러개의 목침들이 놓여 있었다.


정자의 안쪽, 방 쪽으로는 또한 ㅁ자 형상의 아담한 살림집이 딸려 있었다. 정자는 동쪽을 향하여 열려 있었고, ㅁ자 형상의 살림집은 그 서쪽으로 붙어 있는 셈이다. 살림집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여럿이었다. 정자의 안쪽 방에서 쪽문을 통해 안채의 사각형 마당으로 내려서는 방법도 있겠지만, 살림집의 서편 쪽으로 큰 대문이 붙어 있으니, 정자쪽으로 출입할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는 원래는 그 방법이 가장 바람직한 것일 터였다. 그러나 지금 정자를 관리하고 있는 내앞의 의성김씨 일문에서 생각하고 있는 방법은 안채 남쪽 편 쪽문을 통하는 것인 모양이었다.


안채 남쪽편 쪽문에는 이락문, 그러니까 두 가지 즐거움이 있는 문이라는 작은 현판이 걸려 있었다. 이락문의 나무 문짝은 퍽 흥미로운 점을 갖추고 있었다. 거기에는 자물통과 함께 열쇠를 넣어둔 작은 비닐봉지, 그리고 열쇠의 사용법을 적은 코팅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코팅된 종이에는 방, 작은방, 부엌 방 열쇠가 보관되어 있으니 사용하시고 원위치에 보관하십시요라는 안내문이 컴퓨터 글씨로 씌여 있었다.


그러나 현대인은 그런 주의깊은 배려를 향유하기에는 너무 거칠고 성마르다. 어떤 사람은 주변을 찬찬히 돌아보기보다는, 먼저 문안으로 치고 들어가는데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안채의 정문은 이미 빗장을 걸수 없도록 파괴되어 있었다.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 좁은 사각형의 안마당에 서면, 아주 앙증맞은 구조의 작은 생활의 공간이라는 느낌, 한 사람이 안에서 조용히 공부를 하고, 그 한사람을 돌볼 수 있는 다른 한사람이 기거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 공간이라는 느낌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정자쪽을 등지고 서서 볼 때, 오른쪽은 한사람이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다. 정자면을 지나서 밖으로 돌출된 사각의 아주 좁은 마루가 앞에 있는데, 그것은 3면이 다 막혀 있고, 안마당쪽 한면만 터져 있다. 마루의 앞쪽으로는 정자의 마루방 밖으로 돌출된 나무문이 하나 달려 있다. 그 문은 잠겨져 있는데, 밖에서 보니까 조양문, 그러니까 아침 햇볕이 드는 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러니까 장서실에서 책을 꺼내와 그 앞마루에 작은 서탁을 놓고 앉아 조양문을 열면 새벽의 신선한 대기가 서서히 햇빛으로 물들어가는 순간의 감동까지를 느끼며 책읽기에 열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장서실에는 책이 없다. 몇 개의 주방기구가 보관되어 있을 뿐이다. 불고기를 구워먹는 불판이 눈에 들어온다. 그 문 앞에도 주방기구를 깨끗이 사용하라는 안내문이 코팅되어 붙어있다.


안마당에서 정자의 마루 쪽을 등에 지고 서서 볼 때, 왼편은 모시는 사람의 공간이다. 이락문 서쪽으로 작은 마루가 있고, 그 앞으로는 두 개의 작은 방이 횡으로 붙어서 그 옆쪽의 커다란 나무 대문과 연결된다. 정자와 살림집을 잘 관리하여 놓고, 이용할 사람이 있으면 깨끗이 이용하고 가라고 이것저것 용의주도한 준지를 하고 있는 것은, 여기 백운정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풍경이다. 그것이 내가 백운정 방문에서 느낀 백운정의 살아있음의 표징이고, 그것이 내가 앞에서 얘기한 희망의 아주 작은 움직임이다.

백운정과 내앞의 의성김문

산천은 의구하다는 시귀는 거짓이 아니다. 산과 들, 내와 하늘이야 세월이 아무리 흐른들 어디 사라져 버릴 수 있는 것이겠는가? 내앞의 하늘과 땅은 수백년 전과 같은 하늘과 땅으로 거기 의젓하게 눌러앉아 있다. 그런 것에 비하면 인간과 인간이 남겨 놓은 인공물들은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세월의 강을 통과하지 못한다. 그것이 인간과 자연이 서로 다른 점일게다. 자연이 의구한 것은, 그것이 제 모습을 따로 확정해 놓지 않은 탓이다. 인간이 의구하지 못한 것은, 그것이 제 모습을 따로 만들어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백운정은 마치 새것과도 같은 강건한 모습으로 산기슭의 한 지점에 버티고 서 있다. 표면상 그것은 의구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여전히 의구해 보이기 위해서는 인간의 많은 노력이 있어야 하였다. 그러한 인간의 노력은 <백운정보수기>를 통해서 확인될 수 있다. 1998년의 보수를 하면서 나무판에 새겨놓은 이 글은 귀봉의 14대 손이 김시박씨가 지은 것이다.


이 글에 의하면 백운정은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친듯하다. <백운정보수기>를 통해서 백운정과 그 역사의 소략하게나마 더듬어 보도록 하자.


<보수기>는 백운정은 청계공이 잡아준 터에 1580년 이전에 귀봉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 후 첫 번째 보수는 영조 19년, 1743년에 이루어졌다. 그 후에도 1971년의 경우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의 보수가 있었다고 하며, 1998년에 마지막 보수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치면서 백운정은 그 모습을 유지하여 왔다. 인간의 역사는 그렇게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이 적극적으로 수행될 때에만 그 모습이 의구하여 질 수 있는 것이다.


<보수기>에 의하면 백운정은 전암이라는 바위 위에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김복영씨는 전암이라는 바위를 범바위로 이해하고 있었다. 임하댐이 생기기 전까지는 백운정이 자리잡고 있는 언덕 아래, 반변천 물이 굽어 돌며 흘러내리는 곳에는 깊은 소가 마련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주변에는 모래톱도 펼쳐져 있고, 범바위도 버티고 서 있었으므로, 마을 아이들의 좋은 놀이터가 되었다는 것이다. 소에서 미역을 감고 놀다가 범바위 뒤로 언덕을 향하여 난 좁직한 길을 타고 올라 백운정에서 한잠 자곤 하던 기억을 김복영씨는 가지고 있었다. 그런 백운정이기에 김복영씨에게 있어서 이 정자는 더 살가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백운정은 동향을 하고 있다. 백운정 마루에 앉으면 내앞의 산천이 한눈에 들어온다. 좌측 사선으로 보이는 것은 아랫마이다. 내앞 큰종가와 그 옆의 귀봉 종가가 정다운 모습으로 한눈에 들어온다. 그 동쪽으로는 임동 나가는 길이 빗골을 따라 새로 뚫려서, 내앞 의성김씨의 삶터를 양단하고 있다. 그 길을 넘어서 임하댐 쪽으로 이어지는 삶터는 장구날이다. 그리고 그 장구날에서 위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동쪽 끝에서 우뚝하게 뭉쳐 서 있는 봉우리가 있는데, 그것이 장구봉이다.


아랫마와 빗골, 장구날 등으로 펼쳐져 있는 현재 내앞 의성김씨의 삶터, 백운정에 앉으면 그 삶터가 한눈에 들어온다. 눈을 돌리기만 하면 분지 전체가 손에 잡힐 듯이 펼쳐지는 그 자리에 백운정을 세운 것은 오래 그 분지 안에서 펼쳐질 가문의 역사를 백운정이 버티고 서서 지켜보게 하기 위함이었던가? 알 수 없는 일이다.

푸른 물빛과 흔들리는 햇살, 그리고 살며시 날아오르는 현판글씨

오래 의성김문과 함께한 내앞, 내앞의 산천을 굽어보고 서 있는 백운정. 백운정은 산기슭을 조금 타고 올라와 그 중간쯤에 자리를 잡았으므로, 그 위에 서면 마치 성루 위에 오른 것처럼 시야가 막힘없이 펼쳐진다. 그러므로 자연 속에 들어간 것과 같은 느낌보다는 자연을 거느리고 있는 것과도 같은 생각이 들게 한다.


 


백운정 주변의 자연은 빼어나지만, 그것은 우리를 무력화시키는 권능을 행사하기보다, 우리에게 자연을 관조하도록 요청하는 힘을 발휘한다고 하겠다. 온몸으로 느끼게 하여 은연중 신체의 모공 속으로, 살갗과 실핏줄 속으로 밀고 들어와 어느새 우리를 점령해 버리는 자연이 아니라, 여전히 시선 위에 떠올라서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감탄하게 하는 자연이라는 말이다. 물론 그 끝은 온몸으로 느끼게 하는 자연의 경우와 같은 자리이겠지만, 그것에로 이르는 과정은 서로 다른 것이다.


동서남북에서 매미울음 소리가 밀려든다. 그 소리들은 주변의 대기를 미세하게 흔들리게 하고, 그 흔들림의 끝쯤에서 바람이 슬그머니 주머니끈을 풀어놓는다. 산기슭 나무들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조정지댐의 수량 풍부한 물결 위로 바람이 살랑거리며 불어든다. 물결 위에 손톱 같은 크기의 비늘들이 돋고, 저쪽 물가에 서 있는 나무들의 그림자는 물결 속에 거꾸로 머리를 박고 기분좋게 몸을 흔들어댄다. 그 위로 쏟아져 내리는 부드러운 양광도 어느 사이엔가 가볍게 춤을 추고, 백운정도 그 흔들림을 따라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마치 구름처럼 두둥실 떠올라서, 주변 자연에 의해 정화되어 조금씩 승천하고 있는 백운정, 그런 백운정의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은 정자 위에 높이 매달려 있는 현판의 글씨이다.


미수 허목이 쓴 글씨들은 어디에서나 독특하다. 그러나 여기 백운정에서는 독특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회화적이기까지 하다. 세 자의 글씨는 다 꼬리를 길게 늘리며 완만한 곡선을 긋는다. 대지에 뿌리박고 있는 느낌보다는 하늘로 떠오를 듯한 형상이다. 글씨들은 가볍게 일어서며 하늘로 승천할 듯한 자세를 하고 있다. 그것은 백운정이 언덕 중간에서 몸을 일으켜 하늘로 고개를 뽑아 올릴 듯한 느낌을 주는 것과 같다.


 


그러나 운필의 완만함은 글자들이 날아오를 듯한 자세를 취하기는 하지만 정작은 눌러앉고 마는 묘를 얻고 있다. 그것은 백운정이 하늘로 날아오를 듯 하지만 결국은 내앞의 산천을 내려다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내가 보기에 90노인의 글씨라는 허미수의 백운정 세 글자는 그대로 백운정의 운치를 표현하고 있는 그림이라 할만하다.


백운정! 그 속에 앉으면 정말이지 눌러 앉고만 싶은 마음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이 점을 어떻게 구구한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한번 방문을 권할 뿐이다.<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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