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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배꼽<정과리 作, 문학과 지성사>(글/이광수)

"이렇게 문명의 핵심 사안이 각 개인들의 손에 거의 방치된 채로 발전해 온 상황에서 그 문명의 거기들이 어떤 용도로 쓰이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천자 문명의 기본은 지식 인프라의 구축에 있고, 그것의 쓰임새는 정보 및 지식의 신속한 대량유통과 교환되며, 그것의 궁극적인 목표는 시민민주주의의 완성(쌍방향성)에 있다고 아무리 외쳐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것을 타자기나 놀이 기구(게임, 통신 대화방, 어린 학생들의 페이저-세칭 삐삐-나 아니면 과시적 사치품으로서 '소비'하게만 되는 것이다."

기실, 지금껏 '문화'가 그 어느 언저리에서도 선두에 서서 제 목소리를 낸 적이 있었던가를 생각해보면 누구하나 선뜻 "YES!"를 외칠 수 있을까. 문화 평론가인 정과리는 그의 문화 비평서 문명의 배꼽을 통해 일상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문화에 대해 하나하나 꼬집어 들춰내고 있다.
위의 글은 저자가 바라보는 현 시점의 한국 문화의 총체적 현상이다. 그는 '현대문명'이라는 미명하에 간과되고 있는 문화의 본질을, 누구 하나에게 책임 지워지지 않고 오히려 인간이 문명의 발전에 허덕대며 쫓아가야 하는 아이러니컬한 모순을 이 책에서 말하고 있다.

문명의 배꼽은 씨네21 등 대중잡지에 썼던, 그다지 어렵지 않은 글들을 구멍, 풍경들, 가상들, 기관들 등 6개의 소제목으로 나누어 묶은 것이다. 그는 이 글에서 우리의 문명에 대한 구석구석 소소한 것에까지 접근해서 딴지를 걸고 있다.

풍경들에서는 문화가 농락 당하고 있는 현실과 새로운 문명과 미래에 대한 주먹구구식 행정과 암울한 사고(思考)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 단적으로 제시한 이동통신 광고를 들어 문명을 취미나 유희의 문제로 돌리고, 사회적 생활의 문제가 아닌 사적 생활의 문제로 혹은, 경제적 부의 문제로 그 초점을 와전시키고 있는 체계를 꼬집고 있다.

가상들에서는 이미지와 영화에 관한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어느 시점부턴가 뮤직비디오는 하나의 이슈가 되는 양상을 보인다. 영화들이 스토리가 아닌 이미지 창출에 힘을 쏟는 모습도 보인다. 지금까지 이미지를 가독성의 차원에 두고 그 이미지를 독해하려고 부단히도 애를 썼다. 그런데 이미 이미지는 가독성을 넘어서고 말았다. 그것이 영화에도 도용되어 최근의 영화는 그것의 스토리가 아닌 강력한 이미지로 남는 경우가 많다. 즉 제작자들은 이미지가 수많은 text의 개념 설명보다 더 큰 이해를 하도록 해 준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copy는 원본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copy는 원본과는 다른 독자성을 갖고 있으며, 자신이 상상하는 것이 가장 reality를 갖고 있는 것이다. 즉 실제와 copy가 대두되면서 그 구분을 못하고 환상을 reality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기 내면의 이미지를 실제로 인식하면서 발생하는 갖가지 현상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를 창조하면서 잃어버린 깊이에 대한 인문학적 비판이 문화의 진정한 역할이다. 가상들에서 필자는 이것을 말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일상사 속 지내차기 쉬운 사건들, 현 문화의 이미지에 대한 열광, 영화 등에 성찰한다. 특히 컴퓨터하고 하는 새로운 미디어 문화에 대한 성찰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 새로운 문화 속에서의 문학을 생각하는 것에도 소홀하지 않고 있다. 컴퓨터를 통한 글쓰기가 펜으로 쓰던 글쓰기와 어떻게 다른 의미를 띠고 있으며 그 문제점은 무엇인가, 네트 상의 문학동아리가 과연 문학의 민주화를 달성하고 있는가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 그 예아더, 그러면서 새로운 미디어 문화에 관한 인류학적 사유를 진행시키고 난 뒤 그것들을 살피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자국들 그리고 기관들에서 바로 그러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주마간산 격으로 그 글들을 스치다보면, 언뜻 컴퓨터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문화에 대한 그저 그런 비관론으로 일관하는 것으로 착각할 수가 있다. 그러나 저자는 새로운 현 문명, 이른바 디지털 문명에 대한 하나의 관점으로 비판의 칼질을 거침없이 해 댔지만 결코 그것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저자는 사람들을 수동적으로 문명의 흐름에 끌려 다니게 된 이유는 문명이 사람들에게 최면을 걸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러한 문명은 저절로 채워진 것이 아니라 어떤 보이지 않는 구조와 '전문가'에 의해 부여된 체제 속에서 틀 지워져 흐른다고 본다. 비록 저자가 디지털 문명의 방향을 필연으로 받아들이고 있긴 하지만 이를 그냥 받아들이려 하지는 않는다.

그의 문명에 대한 지적은 이러한 기초 사고에 근거한다. 도저히 풀릴 수 없는 그 문제점들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문명의 배꼽'이며, 그 풀리기 힘든 디지털 문명을 단순히 부정하지 않고 열린 사고를 갖고 비판적으로 투시하고 있다. 그리고 문명의 내부를 투시하는 것은 그것의 내부로부터-자신 혹은 타인의 평범한 삶에서- 해결점을 찾아내고자 하는 열망에 기인한다.

사실 문화 비평 혹은 문명 비평서를 고르는 중요한 전체 조건은 일단 그 글이 언제 쓰여졌는가 하는 것이다. 그만큼 거침없이 변화하고 발전하는 지금의 양상을 미루어볼 때 시대성은 간과할 수 없는 유력한 조건인 셈이다. 그럼에도, 거슬러 오르자면 1993년부터, 가장 근간인 1998년까지 써내려 온 글들을 엮은 이 한 권의 책을 서슴없이 소개할 수 있는 근거는 최근에 와서 이러한 현상들이 대두되고 있다는 점이다. 읽는 이들 역시 한 편 한 편 소개되는 글들을 통해 그 힘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를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짐작된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