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가산 광흥사(글/윤천근)



골이 깊으면 절집이 있다

높은 산, 깊은 골에는 어디에나 절집이 자리 잡게 마련이다. 인간의 삶터를 끼고 있는 높은 산, 깊은 골이라면 그러할 가능성은 한결 높아진다. 안동의 한 쪽 변경, 안동뿐만 아니라 세 고을의 변경을 한꺼번에 끌어안고 있는 학가산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학가산에는 여러 절집이있다. 그 중 광흥사를 첫 손에 꼽을 수 있다고 한다면 시비 걸 사람이 있을까? 그것이야 알 수 없는 일이리라. 줄 세우기를 하는 것은 사람의 일이고, 사람의 일치고 딱 부러지게 꼭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2004년 7월 24일. 찜통 속 같은 더위가 세상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요즈음 날씨는 참으로 이상하다. 연이어 비가 내리지 않으면, 또 계속하여 찜통더위가 휩쓸곤 하니 말이다. 올해 날씨는 봄의 초입에서부터 수상쩍은 행보를 계속하였다. 비 오는 날이 많아 농작물은 생육상태가 영 좋지 못하였다. 그러던 것이 장마가 끝나자마자 연일 계속되는 찜통더위로 변해버린 것이다.
이런 무더위 속에서 산 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절을 찾아 들어간다는 것은 어떤 인연 때문일까? 인간의 일은 언제나 스스로의 욕망이 이끌어 가는 것이지만, 그 속에서 인연의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을 느끼는 것은 좋은 일이리라.


“산 속으로 들어가면 시원해질 것이다.”


후끈거리는 열기가 가득한 자동차 안에서 나는 그런 생각만으로 더위를 쫓아내는 위업을 달성하고 있었다. 서후면소에서 풍산 쪽으로 향하는 작은 길은 텅 비어 있었고, 길 위에는 열기만 가득 피어오르고 있었다. 횡으로 뻗은 길을 얼마쯤 타고 가다가, 학가산 쪽을 향하여 종으로 파고드는 길을 택하였다. 키 낮은 산들이 올망졸망 몰려 있는 사이로 진록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 건강한 벼잎파리로 가득한 논들이 펼쳐져 있었다. 바람이 조금 불어들 때마다 무논 가득한 벼잎파리들이 작열하는 태양빛 아래서 번들거리는 것이 마치 형광빛 머금은 수초의 숲이 일렁이는 것만 같았다. 올망졸망 어울린 산들 사이로 무논이 펼쳐져 있고, 무논 한쪽을 타고 계속하여 길이 이어져 있었다. 골짜기를 타고 올라가며 사람들의 삶을 지탱하여 줄 터전들을 베풀어 놓은 것은 학가산이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 탓이리라. 골짜기 속에는 무논들에 물을 제공할 작은 저수지도 두 개 씩이나 만들어져 있었다.


대개 산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무논은 사라지고 척박한 산전들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높은 곳일수록 용수의 문제가 발생하는 탓이다. 그러나 서후쪽 학가산 기슭은 그러한 통상의 법칙을 배반한다. 서후쪽 학가산 기슭이 완만하고 깊숙하게 펼쳐져있고, 산 속이기는 하되 또 작은 산들을 무수하게 대동하므로, 그 작은 산과 산 사이에 무논을 풀어 부쳐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서후 쪽 학가산 속 마을, 자품리로 들어가는 곳에서는 멀리 하늘과 맞닿은 곳에 학가산의 철탑들이 횡으로 늘어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학가산은 측방으로 팔을 늘어뜨려 자품리 쪽의 깊은 골짜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 깊은 골짜기의 끝, 골짜기가 시작되는 학가산의 품 속에 광흥사는 자리 잡고 있다. 넓을 광자, 흥성할 흥자. 문자 그대로 크고 번성한 절이라는 의미이니, 한창 때 이곳이 어떠한 모습이었을지를 알려주는 이름이라고 하겠다.


“광흥사는 신라 신문왕( - 691) 때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원래 광흥사는 안동에서 가장 웅대한 사찰 가운데 하나였으나 1946년 큰 불로 대웅전이 소실되었고, 1954년에는 극락전, 1962년에는 학서루와 대방이 퇴락하여 무너져서, 지금은 부속 전각이었던 응진전에 석가모니불을 봉안하고 있다. 응진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다포계 건물로서 내부는 통칸으로 하였으며, 바닥에도 청단의 방향과 간격이 다른 독특한 방식으로 우물마루를 꾸몄다. 공포는 정면에만 주간포를 설치하고 나머지 삼면은 화반으로 간포를 대신하고 있어서 주심포와 다포의 중간적인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응진전 앞에 서 있는 안내판의 명문이다.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자품리 813번지,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 165호가 광흥사 응진전이다. 광흥사에 하나뿐인 안내판은 응진전 앞에 서 있고, 광흥사에 대한 정보보다는 응진전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그것은 오늘날 광흥사의 상황을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이다. 광흥사는 없고 응진전만이 있는 오늘의 광흥사, 아니면 응진전 만이 옛 것 그대로 있고 대웅전은 새로 지어지고 있는 오늘의 광흥사의 모습을 알려주는 실마리라고 하여야 할까?


퇴계와 학가산 광흥사

“병인년(1566, 명종 21) 1월 26일에 소명을 받고서 출발--- 영천(영주)에 도착해서 글을 올려 면직시켜주기를 요청--- 풍기에서 명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상께서 의원을 파견하여 증세를 물었다. 2월 13일에 예천에 도착하여 다시 사직장을 올렸는데, 15일에 공조판서에 제수되었다. 26일에 안동 땅 학가산의 광흥사에 도착해서 세 번째 사직장을 올렸다. 3월 7일에 봉정사에 도착하였으며, 14일에 네 번째 사직장을 올리고는 명이 내려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16일에 대제학에 제수되었으며, 7월 9일에 글을 올려서 소명을 사양하면서 치사시켜 주기를 요청하였다.”


1566년 한 해의 반 이상을 퇴계 이황이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를 알게 하는 구절이다. 그 중 우리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 것은 1월 26일부터 3월 14일 까지, 무려 한달 반 이상이나 투자되는 이황의 여행이다. 이것을 사직청원여행이라 부르면 어떠할까?


 


거듭되는 임금의 소명을 앉은자리에서 사직소를 올리고 마는 것은 미안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황은 일단 길을 떠난다. 그러나 서울에 올라가 임금께 사은숙배를 올리기 위한 여행이 아니라 돌아오기 위한 여행, 중간에 사직소를 올려 임금의 체면도 세워주고 스스로의 목적도 이루기 위한 여행이었다.


 


1월 26일, 이황은 죽령을 향해 길을 떠난다. 온혜에서 출발하여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죽령길을 통과하여야 한다. 이 길이 이황이 늘상 이용하였던 상 하행 노선이다. 음력 1월 26일이면 아직 늦겨울의 한기가 남아있을 때이고, 어쩌면 죽령에는 눈이 쌓여 있었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이황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죽령을 넘을 계획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영주에서 사직상소를 올리고 죽령의 턱 밑인 풍기에서 대기한다. 사직상소 속에는 늘 그가 이유로 들곤 하였던 질병을 거론하였다. 그러니 임금은 의원을 파견하여 증세를 묻는 것이겠다. 의원에게는 몸이 안 좋음을 보여주려 하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임금을 납득시킬 수 있을만한 질병의 징후는 없었던 모양이다. 의원이 돌아가고 이황은 죽령을 넘을 수 있는 기력이 없음을 시위하듯 조령 쪽으로 방향을 튼다. 물론 조령도 넘을 생각은 없었다.


 


2월 13일, 예천에 도착하여 머물기로 하고 두 번째 사직소를 올린다. 돌아간 의원이 이황의 질병이 심각함을 보증하여 주지 못한 탓인지, 임금은 사직을 받아들이기는커녕 공조판서를 제수하고, 소명은 예천에 머물고 있는 이황에게 당도한다. 두 번째 사직소를 올렸으니 그 결과를 기다린다는 핑계로 예천서 10여일 넘겨 머물다가 안동쪽으로 되돌아오며 학가산 광흥사에 거처를 정한다. 학가산 광흥사는 예천과 안동 사이의 길목에 위치하는 큰절이었음을 알게 하는 부분이다. 광흥사에서 세 번째 사직소를 올리고 10여일 머물다가 봉정사로 거처를 옮기고, 봉정사에서 세 번째 상소의 결과를 기다리며 이레를 머물고 있다가, 사직을 받아들이는 윤허가 떨어지지 않자 네 번째 상소를 올리곤 집으로 돌아온다. 풍기 군수를 내던지고 떠날 때에도 이황은 세 번 사직소를 올리고는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었다. 세 번 상소를 올린 관리의 사직은 윤허를 하는 것이 예라고 보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1566년의 사직 여행에서는 4번이나 사직소를 올린다. 세월의 흐름을 따라 더욱 노성하여진 탓이리라.


위의 이야기에서 살펴보았듯이 학가산 광흥사는 이 사직여행에서 이황이 10여일이나 머문 절이다. 그만큼 안동 예천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큰 절임을 알려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광흥사 이야기

좁직하지만 빈틈없이 포장되어 있는 길을 따라 학가산의 남쪽 품을 측면으로 파고들면 자품리, 학가산 속 깊이 안긴 마을이다.


“구한말 이 마을의 학림공이란 분이 16세에 과거에 등과하여 정 6품의 벼슬을 제수 받은 후, 공의 덕망과 인품이 이웃마을에까지 알려져 칭송이 자자하였다. 그때부터 마을 이름을 ‘재품’이라고 불렀으나 일제시대 때에 인재가 많이 태어나는 것을 두려워한 일본인들이 ‘재’(재주)를 ‘자’(놈)로 바꾸어 ‘자품’으로 부르게 되었다.”


1998년 안동민속박물관에서 펴낸 『안동의 사찰』 광흥사 부분에 보이는 구절이다.
광흥사! 신라고찰이라고 한다. 의상이 창건하였다는 말이 전한다.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 16교구 고운사의 말사이다. 그만큼 오래되고, 그만큼 영광의 역사를 안고 있는 절이었음을 의미한다.


“광흥사는 학가산 남쪽에 위치하여 그 주위의 지형이 학의 머리와 날개를 펼친 형국이다. 그 중에서도 광흥사가 자리 잡은 곳은 학이 하늘 높이 날아오르려는 것처럼 날개를 활짝 펼친 모양에 해당한다. 이곳에다 절을 지으면 넓게 일어난다고 하여 광흥사라 이름하였다.”


역시 위의 『안동의 사찰』에 보이는 일절이다. 이런 풍수적 견해는 증거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지만, 학가산이 학이 날아오르는 형상이라면, 그 남쪽 넓은 기슭을 이루고 있는 자품리 쪽은 활짝 편 날개부분에 해당한다고 하여도 시비 삼을 수는 없는 일이리라.


광흥사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 말할 수 있다. 위의 응진전 영역과 아래의 대웅전 영역이다. 위는 완성된 건물영역이고, 아래는 지금 완성시켜 나가는 건물영역이라 하겠다. 아직까지 광흥사의 중심은 응진전 영역이 담당하고 있다. 대웅전이 완성되면 중심영역이 옮겨질 것이다. 


대웅전은 크고 웅장한 모습으로 지어져 있다.


“원래 자리에서 조금 위쪽으로 올렸습니다.”


주지 스님이 들려준 말이다.


“좀 확장해서 복원한 것이지요.”


내가 보기에 대웅전은 안팎의 단청만 올리면 다 완성되는 단계였다. 하나의 건물만을 놓고 본다면 대웅전은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이지만, 조화의 측면에서는 좀 문제가 있지 않는가 여겨진다. 공간도 차단되어서 그 뒤의 다른 건물들과 어울리지 못하며, 단독건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만약에 이 대웅전과 어울리는 주변 건물을 마련하고자 한다면, 그것들 역시 크고 웅장한 구조를 갖출 수밖에 없으리라.


대웅전에는 목불을 새로 지어 모셨다고 한다.


“원래 응진전에 임시로 모신 부처님을 옮겨 모셔야 하나 운반하기 어려워서 목불을 새로 조성하여 모셨습니다.”


스님의 말씀이다.


대웅전을 돌아 조금 올라가면 초입에 누런빛 나는 절집의 개가 게으른 자세로 눕기도 하고 서기도 하며 지키고 있는 마당이 나온다. 거기서부터 본래의 절집의 영역이라고 하겠다. 이곳은 응진전 영역이니, 경사지 위쪽 정면에 이층의 누마루를 두고, 좌우로 요사채가 벌려 서서 우리의 시선을 맞아들인다. 2층의 누마루는 아래층에 문을 두고 있어서 응진전 영역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삼고 있고, 보는 이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우측으로는 횡으로 뻗은 요사채가, 좌측에는 종으로 뻗은 요사채가 늘어서 있다. 횡으로 뻗은 요사채의 동쪽 끝에는 또 문이 하나 열려 있다. 중앙의 누마루 아래 문으로 이르는 길은 13단의 계단이다.


나의 발길이 막 계단의 아래쪽에 이르렀을 때 실바람이 살랑 불어들었다. 계단 양켠의 풀잎이 슬쩍 등을 꺾고, 나의 옷자락이 덩달아 춤을 추었다. 그리고 절집의 누마루 위쪽 산기슭의 솔잎들이 우수수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 나는 비로소 시원함을 느끼고 있었다.


절집의 바람은 언제나 시원하다. 찜통더위 속이라 하여도 그 점은 마찬가지이다. 아마도 골짜기와 나무들이 그 깊은 품속에서 밤의 정기를 담아내 정성껏 길러낸 자식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계단이 끝나는 문루 아래로부터 동쪽의 요사채 끝에 열려있는 문으로 나아가는 좁직한 흙길이 요사채의 아래쪽 면을 따라 뻗어있다. 『안동의 사찰』에는 누마루의 아래 문은 닫혀 있고, 요사채 동쪽 끝의 문을 통해 응진전 영역으로 들어간다고 적고 있는데, 지금은 중앙의 문을 통하도록 되어 있다.


절집의 문루 아래층은 언제나 나지막한 키를 갖는다. 층을 이루고 있는 안쪽 마당이 눈 높이로 막아서는 것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광흥사 응진전의 문루는 유독 키가 낮다. 아마도 절집의 중앙 마당으로 들어가는 길이 아니라 후원 격인 작은 마당으로 들어가는 길인 탓이 아닐까?


문루의 2층 처마 밑에는 광흥사라는 현판이 매달려 있다. 응진전이 광흥사의 본전 역할을 하고 있는 상황을 알려주고 있는 단서이리라. 문루는 새로 말끔하게 단청이 칠해져 있다.


빈 개집이 한쪽을 지키고 있는 문루 아래쪽을 거쳐 문 안으로 들어서면 지개, 장작, 새끼, 사다리 등 생활도구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모습이 보인다. 절집의 스님들이 농사일을 함께 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도구들이라고 하겠다. 절집에서 만나게 되는 이런 생활의 모습들은 독경하고 공부하는 스님들의 모습과 어우러질 때 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한다. 그 둘이 한자리에 있을 때 절집은 아름답다. 그 둘이 따로 놓여지고, 서로 겉돈다면, 글쎄, 절집이 아무리 정갈하고 고적하더라도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문루 아래 쪽 문을 거쳐 마당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응진전이 보인다. 그러나 사실 그 보다 먼저 우리의 눈을 잡아끄는 것은 응진전의 높은 축담 앞에 양쪽으로 벌려 서 있는 두 개의 탑이다. 보는 이의 입장에서, 오른쪽은 새로 화강석으로 깎아 세운 3층석탑이고, 왼쪽은 옛 탑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새로운 석탑이다. 물론 새 석탑이 우리의 눈을 먼저 끄는 것은 그것이 아름답거나 의미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이 특별히 생경하고, 불균형하기 때문이다. 각진 돌의 모습, 흰 빛이 두드러져 보이는 화강암 석재의 색감, 특별히 크게 지어져 있는 규모, 밖으로 석재의 난간을 돌린 모습, --- 어느 하나 자연스러움과는 거리가 멀다. 도대체 이런 석탑을 여기 가져다 놓고자 하였던 것은 어떤 미의식일까? 놀라울 따름이다.


왼 쪽의 옛 탑은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게 배어 있다. 적당히 퇴색된 색감, 윗부분이 마모된 모습 --- 탑은 평범한 것이지만 그 탑을 중심에 두고 흘러간 세월은 그것을 적당히 신비화하고 벽화처럼 놀라운 아름다움으로 바꾸어낸다. 세월의 미학이야말로 언제 어디에서나 기적을 창출하곤 하는데, 여기 응진전 앞에서도 그 점은 다르지 않다.


옛 탑 앞에 머물러 한참 세심하게 살펴보았다. 서로 크기가 다른 8각의 좌대가 맨 아래에 이층으로 자리를 잡았고, 그 위에 복련과 앙련을 덧붙여 또 2층의 좌대를 만들었다. 2층으로 덧붙여져 있는 두 연꽃의 위쪽은 원형의 평면이 마련되고, 그 위에 작은 3층석탑이 올라앉아 있다. 석탑과 좌대는 본래 한 몸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과문한 탓인지 나는 이제껏 복련 앙련의 좌대에 그만한 크기의 석탑을 올린 경우를 보지 못하였다. 아마도 아래쪽 좌대는 다른 구조물을 위해 지어진 것일 터이다. 윗면이 평면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석상을 안치하였던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이야 어찌 확인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어쨌든 좌대는 오늘날은 석탑을 위한 것으로 쓰여지고 있다. 그리고 똑같이 세월의 더깨가 묻은 물건이므로, 원래 그렇게 지어지지 않았던 것인데도 두 물건은 훌륭하게 한몸으로 어울린다. 앞뒤로 늘어놓은 극히 현대적인 주먹만한 조상들은 없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말이다. 도자기 같기도 하고, 플라스틱 같기도 한 재질로 지어진 동자승 등의 조형물들은 요즈음 아무데나 자리를 비집고 들어오는데, 누군가가 믿음과 정성을 표시한 결과물이라는 점은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옛 것 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일은 삼갔으면 좋겠다. 돌의 살쩍에 배어나온 세월의 기운을 흠모한 것일까? 매미가 탑 위로 기어올라 탈피를 한 흔적이 하나, 둘, 셋 남아있다.


“이게 바로 우화등선일세!”


방장이 여전히 돌의 표면에 붙어있는 매미 껍질을 가리키며 말한다. 여름 한철의 자유를 위하여 땅 속에서 숱한 세월을 인고하였을 매미에게는 그 말이 적절한 헌사가 될 만하다. 탑의 맨 꼭대기 돌 위에 붙어있는 매미 껍질 하나는 더욱 그러하다.




옛 석탑이 앉아있는 뒤편의 축담 중앙에 마련된 13단의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응진전에 이른다. 여기 광흥사에서는 절집의 중심을 이루는 곳이고, 옛 것의 분위기와 가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응진전이 본전의 역할을 하는 시기는 대웅전이 소실되고 난 다음부터일 것이다. 그러니까 1946년의 화재 이후라고 하겠다. 대웅전을 불태워버린 화재 이후, 대웅전에 있던 석가모니불을 여기 응진전 중앙에 불단을 만들어 모신 것이라고 한다.


불단은 응진전의 좁직한 실내의 정 중앙에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다. 불단 주변에는 사방 좁직한 통로가 가설되어 있고, 그 뒤로는 또 벽으로 붙은 좌대가 세 방향으로 돌아간다. 원래 응진전의 구조 속에 사각의 불단을 집어넣어 본전으로서의 기능을 부가한 것이라고 하겠다.


중앙의 불단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봉안하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좌우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그 바깥쪽으로 아난과 가섭이 또 좌우로 시립하고 있다. 중앙의 석가모니불과 좌우 보살상을 지은 솜씨는 동일하다. 머리모양과 수인을 제외하고 세 조상의 표정과 특징은 한 몸처럼 똑 같다. 중앙불은 올챙이머리를 하고 있고, 좌우의 보살상은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다. 좌우에 협시하고 서 있는 아난과 가섭은 뒤 쪽에 둘러앉아 있는 나한상들과 같은 미학을 갖추고 있다.


벽을 따라 3면을 돌린 좌대에는 16나한의 좌상과 그들을 시립하고 있는 작은 입상들이 배치되어 있다. 16 소상들은 하나같이 흰색 피부를 가지고 있으며, 얼굴에 즐거운 표정이 떠올라 있다. 흰색 또는 엷은 주황색 피부에 인고의 흔적을 얼굴 가득 담고 있는 16나한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나한상은 몇 년 전 누군가가 침입하여 파괴한 적이 있다고 한다.


“복장 유물을 훔쳐가려고 하였다지만, 그건 왜정시대부터 이미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절집의 스님이 말하였다.


“복장유물을 훔쳐간답시고 의도적으로 파괴한 것이지요.”


스님에게는 상황이 너무나도 분명한 모양이었다.


파괴된 나한상들은 원형대로 복원되었다.


“다행히 기술이 훌륭한 분을 만나 도움을 받았습니다.”


응진전 정면의 문 양쪽편으로는 다섯 입상이 배치되어 있다. 안에서 밖을 향해 볼 때 문의 왼편에는 문쪽으로 탁한 주홍색 피부를 가진 신장상, 안쪽으로 두루마리를 바쳐들고 있는 문인상이 있고, 문의 오른편에는 신장상, 홀을 들고 있는 문인상, 합장을 하고 있는 보살상이 있다. 보살상의 합장한 팔과 가슴이 만나는 부분에는 빳빳한 천원권 서 너 장이 올려져 있다. 누군가의 기도의 흔적이리라.




응진전 바깥벽으로는 흙벽에 목우도가 그려져 있다. 7면으로 되어 있는 목우도는 동자가 소를 찾아 나서는 그림으로부터 시작되며, 소를 찾아 고삐를 잡는 그림, 소 고삐를 잡고 실랑이를 벌이는 그림, 소를 매었다가 풀어놓고 바라보는 그림, 소를 타고 가는 그림, 냇가에 소를 풀어놓고 앉았다 섰다하며 생각에 잠긴 그림, 노승이 되어 산 속 절벽바위 위에 앉아 도통을 이룬 그림 등으로 이루어진다. 제 1도에는 그림 속에는 소가 없지만 마음 속에는 소가 자리 잡고 있으며, 제 7도에는 그림 속에도 마음 속에도 소가 없다. 찾고 구하는 것이 사라진 마음의 자유와 평화를 상징하는 것이리라. 그것을 형상화한 것인지, 그림 한쪽의 여백부분에 커다란 원이 그려져 있다.


목우도 일곱 폭 속에서 우리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 것은 처음에는 누런 소였던 것이 점차 흰 소로 바뀌어 간다는 것이다. 소는 4도에서 엉덩이 부분에 흰색이 나타나고, 5도에선 뒤쪽 반이 흰색으로 변하며, 6도에서는 완전히 흰 소가 된다. 누런 소와 흰소 역시 목우도 속에 회화적으로 장치된 어떤 상징으로 이해되어도 좋을 것이다. 목우도의 여러 그림 속에 나타나는 글씨 역시 눈여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제2도에는 지수화라는 글씨가 보인다. 4도에 보이는 김지수화, 7도에 보이는 지수화라는 글씨와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그린이의 이름을 적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2도, 3도, 4도, 6도, 7도에는 다른 글씨도 보인다. 2도에는 ‘초조’, ‘처음으로 조절한다’는 글씨가 쓰여 있는 것 같다. 3도에는 ‘수제’, ‘끌어당겨 제압한다’는 글씨가 쓰여 있다. 4도의 글씨는 잘 보이지 않는데, ‘제복’, ‘제압하여 굴복시킨다’는 글씨 같다. 5도엔 글씨가 없고, 6도에는 ‘임환’, ‘맡기고 돌아간다’, 또는 ‘맡기는데로 돌아간다’는 글씨가 보이고, 7도에는 ‘쌍민’, ‘둘을 다 잊는다’는 글씨가 보인다.


“이것 좀 봐요.”


방장은 목우도에 신경을 쓰고 있는 나를 이끌어 응진전 처마 끝에 세워져 있는 명문기와를 바라보게 하였다.


“저기 기와에 새겨진 기명을 잘 살펴보면 이 절의 역사를 알 수 있을지도 몰라요.”


명문이 새겨진 기와는 응진전 뒤편, 기와를 새로 입힐 때 걷어내 쌓아놓은 옛 기와들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붕 위에 올라앉은 기와의 명문이 가장 뚜렷하였다.


순치 4년
정해 4월  일


년대를 표시하는 두 줄의 기명이 맨 앞에 있고, 그 뒤로 대시주들의 이름이 죽 나열되어 있었다. 순치 4년은 청나라 세조 4년인 정해년, 1647년이다. 명나라 의종이 자살하고 이자성이 득세하며, 청나라가 산해관에서 이자성을 격파하고 북경을 국도로 정하여 명나라 왕조를 문 닫게 한 것이 숭정 17년, 바로 청 세조 1년인 1644년이다. 그로부터 3년 후에 광흥사의 기와가 주조되고 있는 것인데, 조선의 한 지방 사찰에서 쓰여진 기와에 이토록 빨리 청나라 년호가 쓰여진 기명이 나타난다는 것은 나로서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이 명문은 응진전이 최소 360년의 역사를 갖는다는 점을 알려주는 단서라고 하겠다.


응진전의 뒤편 언덕으로 조금 올라가 응진전을 내려다보았다. 용마루 양 쪽 끝으로, 아주 끝 부분이 아니라 끝에서 1미터 정도 들어선 부분에 기괴하게 생긴 용두가 하늘을 향하고 박혀있는 것이 이채로웠다.




응진전 영역은 세 부분으로 구획된다. 응진전을 중심에 두고 전정영역과 후원영역으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후원 영역은 산령각과 응진전 뒤편을 병풍처럼 막고 서 있는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진다. 산령각은 응진전 바로 뒤에 북서쪽으로 붙어 있는데,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동쪽에 호랑이와 어울려 있는 산신을 모셨다.


전정영역은 동 서 방향으로 두 개의 크고 작은 ㅁ자형 구조가 옆으로 중첩되어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동편으로는 절집의 생활영역인 ㅁ자 형 구조가 자리를 잡고 있다. 문루와 횡으로 연결되어 있는 요사채, 요사채의 동쪽 문 너머 ㄱ자 형상으로 굽어 있는 살림채, 응진전 동쪽 끝 선을 타고 내려 요사채와 직각으로 만나는 부분까지 일선으로 뻗어 있는 건물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영역이다. 서편은 문루와 응진전을 남북으로 하고, 동쪽으로는 살림집의 요사채, 서쪽으로는 취운헌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요사채로 이루어져 있는 응진전의 마당 영역이다. 


살림영역 남쪽을 막고 서 있는 요사채 동쪽 끝에 마련되어 있는 문은 열려 있었는데, 문간에는 주먹만한 감자들이 바람을 맞을 수 있도록 펼쳐져 있었다. 스님들이 수확한 감자인 모양이었다. 우리는 절집의 살림을 맡고 있는 보살님이 막 삶아낸 그 감자를 얻어먹을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보살님은 북쪽의 그늘진 마루에 앉아 마늘을 까면서 감자를 조금 먹고, 스님 둘은 남쪽의 방 안에서 요새 인기 끄는 방송극을 틀어놓고 무슨 긴한 일을 하면서 감자를 조금 먹고, 우리는 그 ㅁ자 형 좁은 영역의 서쪽 요사채에 동쪽 편으로 붙어있는 그늘진 마루에 앉아 감자를 먹었다. 우리가 감자를 먹고 있는 절집의 ㅁ자 형의 내정, 커다란 사각의 시멘트 곽을 이루고 거기 가득 물을 담고 있는 우물간, 그 위쪽에 단을 만들어 된장독 간장독 등을 세워 놓은 장독대로 이루어져 있는 좁은 공간에서는 절집의 지붕들이 만들어낸 시원한 그늘이 지붕 위로 떨어져 내리는 태양빛을 밀어내기 위해 고투를 하고 있었다.


 


그 투쟁이야 어찌 인간이 간여할 일이던가! 사람은 다만 그 그늘의 시원함을 이용할 뿐이다. 절집의 고요한 평화는 이 그늘 속에서만 유지된다. 이 그늘을 벗어나도 절집 주변의 산골짜기 속에는 고요한 평화가 내려앉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사람이 향유할 수 있는 것이 되지 못한다. 절집에서 평화와 고요를 느끼는 것도 인간의 간사함 위에 놓여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집 요사채 안마당의 그늘 속에 들어앉아, 절집의 보살님이 제공하여 주는 시원한 물과 뜨거운 몇 알의 감자를 먹으며, 오래 그 그늘 속에 마련된 고요와 평화를 나눠가질 수가 있었다. 우리가 앉아 있는 요사채의 마루에서는 지붕 위로 사각의 좁직한 공간이 열리는 것이 보였고, 그 위로 잘 빗질된 머리처럼 똑같은 경사를 갖는 소나무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절집의 한옥 처마가 마련해 주는 그늘을 이용하여 앉아 있었지만, 그 한옥처마를 이용하는 것은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처마 끝으로 무슨 틈이 있는지, 무수한 토종벌들이 출입하며 앵앵거리는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절집 요사채의 지붕 속에 토종벌이 집을 마련한 모양이었다. 드나드는 군사의 수로 보아, 아주 큰 토종벌 집단이 분명하였다.


“전에 지붕의 틈 사이로 꿀이 흘러나온 적이 있는데 모아보니 두 되 반이나 되었어요.”


스님이 말하였다.


“지금은 천정을 빈틈없이 발라 흘러나오지 않지만요.”


그러나 스님은 토종벌을 절집으로부터 쫓아낼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무수한 벌들이 절집의 내정 공간을 어지럽게 나는 것쯤은 스님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듯 하였다.


스님은 처음 몇 마디 대화를 나눈 다음에는 우리로부터 떠나 자신의 세계로 돌아갔다. 스님은 보살님을 시켜 물과 감자와 김치를 우리에게 제공하고는 우리끼리 앉아있게 하였다. 우리는 스님이 되돌아와 우리가 인사를 차릴 수 있기를 바랬다.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었다. 그러나 스님은 방으로 돌아가 나오지 않았고, 우리는 스님을 불러내 이것저것 물어 보는 것이 예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였다. 얼마쯤 기다리다 우리는 인사말만을 던지고 절집의 그늘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응진전 외정 아래 쪽, 그 동남쪽 경사면에는 명부전 영역이 마련되어 있다.


“명부전은 인간의 사후세계 즉, 영혼이 가는 저승을 상징하는 전각이다. 명부전 안에는 저승의 10대왕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시(십)왕전’이라 부르기도 하며,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지장전’이라고도 한다. 이 법당 안에는 저승의 왕인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협시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모신다.”


『안동의 사찰』에 나오는 구절이다.


명부전 중앙의 지장보살은 금불이고, 나머지 조상들은 모두 응진전의 나한상과 같은 방식으로 지어져있다.


10왕들은 명부전 중앙불을 기준으로 일정한 법칙에 따라 배치되어 있다. 우측 가까운 자리에는 제1 진광대왕이 있다. 좌측 가까운 자리에는 제2 조광대왕이 있다. 우측 진광대왕 옆에는 제3 송재대왕이, 좌측 조광대왕 옆에는 제4 오관대왕이 있다. 우측 송재대왕 옆에는 제5 염라대왕이 있고, 좌측 오관대왕 옆에는 제6 변성대왕이 있으며, 우측 염라대왕 곁에는 제7 태산대왕이, 좌측 변성대왕 곁에는 제8 평등대왕이 있고, 우측 끝에는 제9 도시대왕이, 좌측 끝에는 제10 오도전륜대왕이 있다. 문 양쪽으로는 좌우 신장이 고리눈을 부릅뜨고 버티고 서 있다.   


명부전을 돌아보고 나서 응진전의 앞쪽 큰 마당으로 다시 나왔을 때 요사채의 직사각형 방문을 액자로 하여 방 안에 그림처럼 앉아있는 스님의 모습이 우리의 눈을 사로잡았다. 방 안에 앉아 스님이 하고 있는 일은 신도들의 주소를 정리하는 것인 듯하였다. 그것은 속세의 생활처럼 구차한 일이다. 그러나 외정 멀리 떨어져서, 절집 전체를 배경으로 하여 돌아볼 때, 절집 속까지 밀고 들어온 생활의 구차함은 느껴지지 않고, 그림 같은 평화만이 스님 주변에 내려앉아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평화는 결국 자신의 생활과 어떻게 이만큼의 거리두기를 할 수 있느냐 하는 데 있는 모양이다. 이것은 절집에 있느냐 속세에 있느냐 하는 것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활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우냐 하는 데에서 판가름 나는 문제이리라.


은행나무의 머리 위에서 시간은 흐른다

광흥사 영역을 다 돌아보고 일주문 쪽으로 나왔다. 일주문은 길 가에 비켜 서 있고, 학가산 광흥사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위의 1998년에 나온 『안동의 사찰』에는 일주문이 새로 지어져 아직 현판을 달고 있지 않다고 적혀 있다. 그러니 이것은 옛 일주문이 아닌 모양이다. 그러나 일주문의 오른쪽 기둥은 홈이 패이고 마모된 것으로 보아 옛 것을 일정하게 이용해 새로 지은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어쨌든 신축 또는 개축된 지 10년이 되지 못한 일주문인 것만은 분명하다.


일주문 뒤편으로는 길 한쪽이 밭으로 이용된다. 일주문 안쪽이니 절의 경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밭에서는 농부 내외가 경운기를 한 편에 세워 놓고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일주문이 새로 지어진 것, 일주문 안쪽 절의 경내에 밭이 들어서 있는 것은 그만큼 광흥사가 한 때의 영광된 모습을 잃고 있음을 반영한다. 오늘의 광흥사는 어제의 광흥사를 돌아보고 있을 뿐이고, 내일의 광흥사를 희망하고 있을 뿐이다.


광흥사 영역을 지배하는 시간은 일주문 위를 흐르지 않는다. 시간은 일주문 뒤편, 거대한 은행나무의 머리 위를 흐른다.


수령 400년
수고 16미터
나무둘레 7.5 미터


서후면 자품리 806-1번지 하늘을 지키고 서 있는 것은 이 은행나무이다. 1982년에 보호수로 지정된 이 은행나무는 오래된 거목이라는 것만으로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래되고 크면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청년나무라는 것이 이 은행나무의 특징이다. 크고 오래된 은행나무는 여럿 있다. 그러나 이 나무처럼 수세가 왕성한 은행나무는 없다. 이 은행나무는 썩거나 부러진 부분도 거의 없다. 시퍼런 잎들이 나무 전체를 뒤덮고 있으며, 눈길이 가 닿는 곳 어디에나 다닥다닥 은행이 매달려 있다. 아직 여름인데도 은행나무의 그늘 속에는 떨어져 뒹구는 은행들이 지천으로 깔렸다.


광흥사의 일주문은 이 4백살 먹은 은행나무를 배경으로 할 때 광채를 발휘한다. 은행나무가 버티고 서 있는 4백년의 과거 속에는 광흥사의 역사가 있고, 은행나무가 떠받들고 있는 자품리의 하늘 아래에는 광흥사의 미래가 있는 듯 하다.


학가산의 남쪽 기슭이 길게 펼쳐져 있는 곳, 자품리 계곡은 깊고 고요하다. 학가산으로부터 흘러내리는 그곳의 지맥을 눌러 앉히며 광흥사는 자리잡고 있고, 광흥사를 중심으로 하여 흘렀던 세월은 오늘 은행나무의 머리 위에 걸쳐져 있다.<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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