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호정 이야기(글/윤천근)유원지가 되어있는 방호정 지역
방호정은 청송군 지역에 있다. 방호정 주변은 산수가 아주 수려하므로, 단풍이 드는 철에 가 보면 기가 막히게 좋을 것이리라는 것이 김복영씨의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김복영씨는 진즉부터 방호정 답사 계획을 잡아놓고 나를 찾았다.
그러나 나는 요즈음 칩거 중이다. 나는 될 수 있으면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고자 애를 쓰고, 될 수 있는 한 일거리를 밀어두고 미적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연구 중이다. 목하 산 돌보고 땅 만지는 일 외의 모든 것들을 우습게 보는 훈련, 촌 사람 되는 훈련을 진행시키고 있는 것인데, 그것도 손바닥을 뒤집는 것마냥 쉬운 일만은 아니어서 고전 중이다. 아주 미뤄둘 수 만은 없는 일거리들이 가끔씩 시간의 틈을 비집고 나와 손짓하여대기 때문이다.
정자 방문하기 역시 그런 일거리들 중 하나이다. 정해 놓고 두 달에 한번 꼴로 무슨 빚쟁이 빚 독촉하듯 찾아드는 이 일거리는 규칙적인 것이라면 경끼부터 일으키고야마는 나의 천성 같은 것쯤은 아랑곳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미적거리는 것 뿐이다. 그것은 나도 알고 김복영씨도 안다. 그러므로 김복영씨도 집요하게 나를 찾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는 미끼를 던져두고 오래 길목을 지키고 앉아있는 사냥꾼의 풍모를 갖추고 있다. 내 주변에 자신이 나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흘려놓고는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최후의 순간에 전화를 거는 것은 나일 수 밖에 없다.
이번에도 그랬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점에서야 나는 전화를 걸어 답사 시간을 정하였는데, 그것이 방호정의 단풍을 즐기기에는 너무 늦은 철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읽는 이들이 단풍철의 방호정 모습을 느낄 수 없게 만든 것은 전적으로 내 책임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방호정의 단풍을 직접 보지는 못하였지만, 만약 그것이 그토록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의 아름다운 미학을 갖추고 있는 것이라면, 차라리 그런 최상의 미학을 목도하지 않았던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창부가 되어 있는 누이의 아름다움은 우리를 몸살나도록 서럽게 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방호정은 창부가 되어 있었다. 시멘트 포장이 되고, 주차선이 가지런히 마련되어 있는 상당한 넓이의 방호정 주차장이 제일 처음 우리를 맞고 나서는 것이 그 점을 웅변으로 증명하여 주고 있었다.
방호정은 상당한 수량의 물이 이리 돌고 저리 돌며 휘돌아나가는 지역에 위치한다. 물은 북향을 하고 흘러 그 위쪽에서 길안천으로 유입되는데, 방호정 바로 위쪽에서 크게 휘돌면서 상당한 넓이의 퇴적지를 만들고, 거기에는 잘 탁마된 강돌들이 지천으로 쌓여있었다. 그리고 그 한쪽, 그러니까 방호정 쪽으로는 잘 정돈된 나무숲이 있었다. 게다가 주변은 앞도 뒤도 다 높은 퇴적암의 절벽층을 보여주는 산들로 둘러쌓여 있고, 수량 풍부한 물이 사철 흘러내리고, 물길이 휘돌아나가는 곳에는 제법 깊은 소까지 만들어져 있으니, 이런 곳에 사람들이 꼬여드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방호정 지역이 유원지로 변해있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방호정에 대해서, 방호정을 위해서 말하여야 한다. 방호정을 중심에 두고 생각하는 것은 이 글을 쓰는 나의 책무이다.
방호정을 위해서 말할 때, 주변 지역이 유원지화 하고, 식당과 상점들이 여기저기 들어앉고, 시멘트 구조물과 간이 변소가 시야 속에 흩어져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방호정의 의미와 가치, 그 미학의 순결성을 결정적으로 해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사람들까지 들벅거린다면 어떠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눈이 시릴 정도의 뇌살적인 단풍이 방호정의 미학을 완성시켜 낸다면, 그 단풍철에 방호정을 찾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방호정이 아름답고 매력있게 보이는 때일수록, 방호정 주변에는 보다 많은 사람이 찾아들 것이고, 방호정 지역을 뒤덮고 있는 인간의 흔적은 나의 마음 속에서 그 더럽혀진 아름다음에 대한 아까움만을 무한대로 증폭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정자의 미학과 상업 자본주의
오늘날 우리는 자본주의의 한가운데를 통과해 나가고 있다. 자본주의를 무어라고 한마디로 규정짓기는 어려운 문제이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팔아먹기를 꿈 꾸는 것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천민 자본주의의 지도를 받아서 문화까지를 재화로 환산해서 바라보는 의식에 철저하다. 돈이 된다고 여겨지면, 문화의 순결성 같은 것 쯤에는 눈 감아 버릴 수 있는 아량을 넉넉하게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나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도 문화를 상품으로 삼는 소위 문화관광에 대해 한마디 끼어들곤 한다.
그러나 진실로 문화가 관광, 그것도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는 산업적 규모의 관광이 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인가에 대해서 나는 결코 긍정적 답변을 마련할 수 없다. 산업적 규모의 관광은 대중 동원력을 갖추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볼거리, 놀거리, 먹을거리를 배치하여야 한다. 산업적 규모의 관광에는 문화가 뒷전에 물러앉을 수 밖에 없는 구조가 있는 것이다. 놀이터나 시장터로 바뀌어 버린 것 속에서 문화는 실종될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문화와 관광은 잘 어울리는 짝이라 할 수 없다. 문화는 정신의 자식인데 반해서 관광은 이익의 동지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문법 속에서 관광의 자원으로 전락하여 버린 문화가 그 순결성을 간직하고 있을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없다. 정자의 경우에는 특히 그러하다. 정자는 고적함, 호젓함, 탈속함 등을 그 미학의 기본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작고, 조용하고, 여유로운 공간은 정자미학의 중심에 놓여진다. 그런 미학은 놀이터나 시장터 속에는 없다. 그런 정자미학은 번잡한 세상으로부터 조금쯤 물러나 혼자서 돌아앉은 조용한 자연 속에서 은연중 드러나게 마련이다. 산 속으로 걸어들어가 인가로부터 적당히 차단된 곳, 자연의 신이 순결한 정령들을 풀어놓아 주변 산천 속에서 신화가 슬몃 제 꼬리를 들춰 보여주는 곳, 그런 자연 속으로 걸어들어가면 세간의 잡사에 찌든 우리의 속기는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스스로 계면쩍어 모습을 감추게 마련이다. 그런 자연 속에 정자가 자리잡고 있는 것은 자연 배우기, 정신의 탈속함 익히기에 그 이상 효과적인 장소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정자가 하나의 문화로서 기능할 수 있는 영역은 바로 이 자리, 자연 닮기, 자연 배우기의 공부처라는 점에서 마련된다. 그 외에 어떤 무엇이 문화로서의 정자가 제 값을 지니게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런 정자를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시장에 내놓고, 놀이터의 부속물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문화를 사랑하는 태도가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문화에 대한 신랄한 모독이다.
청송의 방호정 지역은 이러한 점을 웅변으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방호정 지역에 이제 방호정은 없다. 있는 것은 유원지 뿐이다. 방호정은 천덕구러기 얼굴을 하고 돌아서 있고, 사람들은 거기 방호정이 있다는 것조차 관심두지 않는다. 방호정이 너무 좋은 자연, 너무 넓은 공간 속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방호정의 죄가 아니다. 상업자본주의의 충실한 자식이 되어 있는 우리의 잘못이다. 소 잡는 칼을 닭 잡는 데 밖에 쓸 줄 모르는 우리의 좁은 안목 탓이다.
정자는 대중의 공간이 아니다. 정자는 혼자서 호젓하게 찾아들 때 그 신비로운 미학의 권능을 유감없이 발현한다. 아무리 대중시대라고해도, 개인의 공간으로 기능할 때 제 몫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그대로 놓아두는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굳이 거기에 대중을 끌어들여서 문화의 묘지로 만들어버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방호정을 마주보며
방호정 주차장의 시멘트 광장에 내려서며, 실망은 빛살처럼 내 마음 속을 점령해 가고 있었다. 방호정은 한번 가볼만한 데라는 선전을 내게 해 주었던 사람도 있었고, 김복영씨도 좋은 곳이라는 이야기를 두어번 하였기 때문에 나의 기대치는 너무 높은 곳까지 비상하여 있었다. 그런데 기껃 유원지라니!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방호정 살펴보기를 그만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그곳은 우리 문화의 유력한 현주소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실망을 억누르고 방호정이 직선으로 건너다 보이는 냇가에 가 서서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방호정을 유원지 지역으로부터 떼어서 사각의 사진처럼 내 시야 속에만 붙들어 놓고자 애를 쓰면서 말이다.
물은 겨울의 초입인데도 상당한 수량이었다. 그러나 물 빛은 탁하였고, 군데군데 거품조각들을 머금고 있었다. 물의 흐름은 내가 처음 내려선 냇가에서는 거의 감지되지 않을 정도로 느릿하였다. 방호정 바로 앞에서 물길은 남북으로 일선을 그리고 있었는데, 나는 처음에는 물이 남행하고 있는지 북행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물이 북행하여, 방호정 위쪽에서 휘돌아 나가서, 결국 길안천으로 유입된다는 것도 김복영씨의 설명을 듣고서야 겨우 알 수 있었다.
물길 너머에서는 낮은 산들은 남쪽으로부터 누에 등 같은 모양을 하고 꾸물거리며 흘러와 방호정 영역에서 두 가닥으로 갈라진다. 한 가닥은 석산의 형태를 갖추며 누에 머리 형상으로 맺히고, 다른 한 갈래는 동쪽으로 물러나며 높은 석벽을 형성하여 휘돌아 나간다. 물길 이쪽에서는 도로의 한끝을 따라 이어오던 산들이 뒤쪽으로 썩 넘어박히며 지금은 밭으로 이용되고 있는 넓은 산의 기슭을 만들어 내고, 그것이 방호정 영역을 넘어서면서 다시 오무라들어 높은 석산을 형성하며 잠시 동행을 한다. 그리하여 시내와 길은 그 두 갈래의 석벽이 오무려 놓은 좁은 협곡을 따라 잠시 동행하였다가 방호정 영역 밖으로 물러난다.
방호정은 산과 물이 그렇게 휘돌면서 넓게 펼쳐놓은 공간의 한가운데, 누에 머리같은 모양의 작은 석산 꼭대기에 올라서 있다. 이 석산은 물길과 산길이 이루어낸 범람원이 바깥쪽으로 멀리 호를 그리며 돌아가는 곳 한가운데를 겨냥하며 머리를 들이밀고 있다. 산마루를 타고 온 누에 한 마리가 휘도는 물이 만들어 놓은 소에서 목이라도 축이려는 듯 고개를 땅에 붙여 쭉 내밀고 있는 곳에, 무슨 머리 위에 얹힌 보관같은 형상으로 방호정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방호정이 작은 석산의 뭉특하게 맺힌 끝에 올라서 있으므로, 방호정 아래는 10여미터 높이는 됨직한 절벽이다. 절벽의 바위는 시루떡 같은 층을 이루고 있는데 남쪽에서부터 북쪽을 향해 위쪽으로 45도 정도의 사선을 그리고 있는 모습이다. 층층의 바위 시루떡들은 색깔들의 편차도 드러내고 있었는데, 아래쪽에는 떨어져 나간 것들도 있어서, 사선의 좁직하고 깊지 않은 바위굴이 몇 개 빼꼼히 얼굴을 내보이고 있다. 바위들은 물 속에 뿌리를 묻고 마치 방호정을 양육하는 수액이라도 쉬임없이 빨아올리고 있는 형상이다.
그만쯤의 거리에서 직선으로 방호정을 건너다보고 서 있을 때, 방호정은 속기에 때묻지 않은 고적함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물론 우리의 시선은 방호정으로부터 한치도 벗어나서는 안된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시선 속에는 철제 다리와 구멍가게 등이 순식간에 밀고 들어올 것이기 때문이다.
방호정
방호정으로 들어가기 편하도록 만들어놓은 철제 다리는 흉물이다. 그저 물 속에 징검다리 정도 묻어놓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나만의 것일까? 이 다리는 방대교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1990년 11월에 가설되었는데, 입구에는 이 다리를 세운 조학래라는 사람을 기리는 비석이 서 있다. 일본에 사는 사람인데 이 다리를 세울 때 자금을 홀로 부담하였다는 것이다. 조상을 기리는 마음이야 탓할 이유가 있겠는가?
다리의 폭은 좁다. 두 걸음 정도 될까? 위에는 좁직한 판자를 횡으로 죽 박아 놓았다. 길이는 130걸음 정도 된다. 위쪽으로 쇠줄을 걸어 견고하게 버팅겨 놓았지만, 발을 옮길 때마다 조금씩 흔들리는 것이 느껴진다.
다리를 넘으면 바로 방호정 앞이다. 구멍가게가 먼저 앞을 막고 나선다. 얼른 시선을 떨구니 수북하게 쌓인 나뭇잎들이 예의 단풍철의 미학을 확인시켜 준다. 단풍철에 왔으면 더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비집고 들어서는 것을 애써 차단하며 서둘러 방호정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두 걸음 앞에 안내판이 썩 다가선다.
"방호정
경북민속자료 51호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신성동
조선 광해군 7년(1615) 창석 이준, 동계 조형도, 풍애 권익, 방호 조준도, 하음 신집 등이 학문을 강론하고 산수를 즐기던 곳으로, 광해군 11년(1619) 방호 조준도가 생모 권씨의 묘가 바라보이는 이곳에 정자를 세우고 어머니를 생각하는 뜻에서 사친 또는 풍수당(바람과 나무의 집)이라 하였으며, 순조 27년(1827) 방대강당(너럭바위 위의 강당) 4간을 증축… 낙동강 상류변 절벽 위에 세운 이 건물은 ㄱ자 형의 평면이며, 측면은 팔작, 전면은 맞배지붕으로 되었다. 정자 안에는 방대문집 판각이 보관되어 있으며, 많은 제현들의 제영현판이 걸려있다."
안내판의 기록이다.
바위의 서쪽 끝, 시내 쪽으로는 방호정이 서 있었고, 그 서쪽으로는 방대강당과 부속건물이 자리잡고 있었다. 정자로 들어가는 문은 없고, 문은 방대강당 쪽으로 나 있었는데, 잠긴 채였다. 동쪽으로 돌아 들어가면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지 않는 곳이 있는 듯 하였으나, 그쪽에는 개가 한 마리 줄에 매인 채 컹컹대고 있었다. 방대강당 바로 옆의 쪽문 아래쪽은 판자가 하나 뜯겨져서 구멍하나를 만들어 놓은 형국이었다. 이름하여 개구멍이라 할 수 있었다. 나는 그 구멍을 통하여 기듯이 안으로 잠입하였다.
방대강당의 안마당이었다. 안마당과 부속건물은 대지가 한층 낮았고, 방대강당과 방호정은 한층 높은 곳, 동일 평면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사이의 단층은 폭이 넓은 시멘트 계단이 메꾸어 주었다.
방호정은 주변에서 확보한 것인 듯 각지고 평평한 자연석 초석 위에 기둥을 올려 세웠다. 작고 아담한 구조였다. 앞쪽으로 돌아가니 한 사람이 겨우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절벽 위 길이 있고, 거기 철제 난간이 세워져 있었다. 아래는 수직의 절벽으로, 그대로 물길이 내려다 보였다. 거기 철제 난간이 가설되지 않았다면 앞으로 돌아들기가 겁이 날 정도였다.
방호정이라는 현판 글씨는 살지고 부드러워 보였다. 글씨의 흰칠은 세월에 의해 들떠 비늘같은 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방호정 안으로 들어갔다. 깨끗하고 아늑하다. 철제 다리를 놓을 정도로 열성이 대단한 후손들의 정성이 느껴진다. 방문자들이 기증한 크고 긴 거울이 한쪽에 붙어서 나의 전신을 비추어 준다.
방호정은 두 영역으로 나뉘어진다. ㄱ자형의 위쪽 횡선은 남쪽으로 면해 있는데, 좁고 긴 방이다. ㄱ자형의 아랫쪽 수선은 북쪽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두간 정도 넓이의 마루방이다.
마루방 천장 밑으로는 현판들이 휘돌아 가며 걸려있다. 남쪽 중앙에는 풍수당이라는 큰 글씨의 현판이다. 현판 글씨가 담고 있는 내용들은 우리말로 번역되어 장방에 똑 같은 배치로 걸려있다. 유리가 끼워진 액자라서 느낌은 생경하지만 말이다.
장방의 동쪽에 걸려있는 번역된 풍수당기를 눈여겨보았다.
"…우리 청부(청송의 옛 이름) 역시 산골짝의 명승지인데, 방대가 그 중 하나를 차지한 것이다. 비록 장강대하나 명산거야의 웅장한 것은 없지만, 그 경계의 아늑함과 암학의 수려함은 또한 영남의 여러 명승지에 크게 양보하지 않는다. 방대 위에는 옛날 정자가 있었다. 나는 속으로 그 정자의 훌륭함은 아름답다 여겼지만, 매번 그 주인공을 미처 보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했었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그 정자는 행인의 손에 불타 버렸으니, 훌륭한 경관을 다시 보지 못하게 된지 이제 삼십년이 되었다. 기미년 봄에 나의 아우 경행이 산을 매입하고 정자를 중건하였다. 남쪽에는 방을 두고 북쪽에는 마루를 설치하여 옛 기초에 새집… 땅과 사람이 이에 서로 만났으니, 이러고보면 지난날의 화재는 하늘의 도움이 있었던 것인가?… 나의 선비(어머니)를 금대산에 장례 모셨으니, 이 정자에서 거리가 겨우 한가닥 띠를 뻗을 정도 … 이 정자를 왕래할 때 여기를 거닐고, 이 정자를 오를 때 여기를 쳐다볼 것이니, 수시로 바라보고 추모하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그 어떠하겠는가?… 경정(이민성)이 이 집의 편액을 쓰고, 이 집의 기문을 지었으니, 그는 또한 경행을 알 것이다. 임술년… 동계 중형(가운데 형)은 씀."
형이 아우의 정자에 당기를 지어 준 셈인데, 이 집의 주인은 조준도이니, 우리는 그가 방호, 또는 경행이라고 불리워졌다는 점과, 그가 여기에 정자를 세운 까닭이 비단 자연 속으로 들어가서 자신을 닦고 공부하기에만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돌아가신 모친을 가깝게 느끼기 위해서이기도 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정자 마루방에 서서 앞 문을 열고 멀리 가까이 휘돌아 본다. 널리 열리는 하늘, 그 하늘 아래 산이 멀찌기 물러나며 펼쳐낸 완만한 기슭, 그 공지의 이쪽 끝을 소리도 없이 휘돌아가는 물길… 인간의 때가 묻지 않았을 때에는 한없이 좋은 장소, 한없이 좋은 정자였을 것이리라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 옛 정취를 늦게 온 내가 느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워 다시 정자에 걸린 편액들 중 주변 모습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해 주는 시귀가 없는가를 찾아 보았다. 주인의 시가 있었지만, 그것은 화답 형식의 것이어서 소개하기에는 너무 길어 보였고, 학봉 김성일이 적어놓은 짧은 시가 여기 소개하기에 적절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골짝은 첩첩이 겹쳤는데
시냇물은 몇굽이를 흐르느냐?
외딴 마을은 골짝 어귀에 있고
높은 정자는 바위머리에 솟았다.
울타리 가에서 개는 짖고
모래 위에서 갈매기는 존다.
손으로 와서 오래 앉아 있노라니
봄날의 해그림자 물가로 내려간다."
방대바위와 느티나무
학봉 김성일의 시 속에는 오늘날 인간이 망쳐놓은 방호정의 자연적 정취가 고스란이 담겨 있다. 철제 다리와 콘크리트 구조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가건물들이 앗아가 버린 과거의 모습이다. 그렇게 인간이 너무 가까이 다가갈 때 자연은 그 순결성을 상실하고 물 간 생선같은 후줄근함을 내보일 따름이다. 인간에 의해 지치고 병든 방호정도 그 옛날을 웅변으로 증거해 주기에는 힘이 많이 딸리는 모습이다.
무엇이 그 옛날 방호정의 이야기를 전해 줄 수 있을까? 돌아보니 방호정이 깔고 앉은 방대바위가 남쪽으로 좀 우뚝하게 솟구쳐 그 너머 산기슭과 이어지는 곳이 눈에 들어온다. 거기 느티나무가 용트림하듯 걸터앉아 방대바위를 휘감고 있었다.
마른 풀들의 머리를 밟으며 그곳으로 올라가 보았다. 그리 높지 않은데도 방호정 지붕의 기왓골들이 아래로 내려다 보인다. 방호정 영역이 가장 분명하게 내려다보이는 곳이 바로 그 지점이었다.
그런데 그 느티나무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가? 커다란 너럭바위를 타고 앉아 절벽 끝으로 사선을 그으며 고개를 내밀고 그 아래 물결을 내려다 보고 있는 형상이다. 그리고 그 뿌리는 너럭바위를 감싸안으며 겉으로 또는 속으로 치달려서 동서남북으로 또 다른 둥치를 뽑아올리고 있었다. 대 여섯그루의 느티나무 둥치들이 바위면 여기 저기에 솟구쳐 올라와 있었는데, 그 모든 둥치들이 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것만 같았다.
하나의 질기디질긴 생명력이 최악의 환경 속에서 수백년을 고투하여온 결과물, 생명력의 놀라운 신화가 거기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모든 빛깔들이 사라져간 공간 속에서, 회갈색으로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무는 그 고투의 이야기들을 들어봐 달라고 하소연하는 듯 하였다. 그 이야기들 속에는 방호정과 방호정을 찾아 들었던 사람들의 모습도 담겨져 있으리라!<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