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발굴된 안동의병 기록들(글/김희곤)

한국독립운동의 서장이 의병항쟁이고, 전기(1894-1896)·중기(1904-1907)·후기(1907-1909) 의병으로 나눠 부른다. 전기의병은 1894년 중반과 1895년 12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두 차례에 걸쳐 전개되었다. 1894년, 즉 갑오의병의 발상지가 안동향교였고, 지금의 시청자리가 바로 그곳이다. 그러다가 의병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나가기 시작한 때는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이 내려진 직후인 1895년 12월부터 이듬해 초부터였고, 안동에서도 음력으로 1896년 12월에 재봉기가 있었다. 그 영향이 주변에 미쳐져 1896년 봄을 지나면서 의성과 청송 등 주변지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를 을미(乙未)·병신(丙申)의병이라 부르기도 한다.



안동에서는 안동의병과 예안의병이 존재했다. 안동의병은 양력으로 1896년 1월부터 9월 30일(음 8.25)까지 전개되었고, 예안의병도 1월에 시작하여 양력으로 6월(음 4월말) 이후까지 지속되었다. 다만 예안의병이 언제까지 활동했는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이것도 머지않아 확실하게 밝혀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안동의병은 여기에서는 안동의병과 예안의병을 구분하지 않고 함께 묶어서 안동의병이라 부르고자 한다. 시기적으로 본다면 안동은 의병항쟁이 상당히 일찍 시작되고, 또 전국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곳이라 평가할 수 있다. 가장 늦게 해산한 경우가 영양의 김도현(金道鉉)인데, 그도 역시 안동의병에서 활약하거나 그 영향권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안동의병에 대한 자료는 지금까지 다양하게 알려지고 있다. 대개 문집류가 많은데, 일제치하에서 문집으로 발간된 경우는 시대적 한계로 인해 흩어지거나 빠져버린 경우가 많아 흠으로 지적되고 있다. 또 해방 후에 발간된 것도 온전하지 못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근년에 들어 안동의병을 밝혀주는 좋은 자료들이 발굴되었다.


 


그 가운데 이긍연(李兢淵, 1847-1925)의 일기는 단연 최고의 자료이다. 안동과 예안의 의병 동향을 알려주는 가장 풍부한 자료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긍연은 안동에 자리잡은 진성이씨의 가장 큰 종가인 와룡면 주촌(周村, 두루실) 종택의 종손이었다.




이 일기는 의병기간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앞뒤가 계속 연결되어 있다. 안동의병이 처음 논의되던 상황부터 마칠 때까지 줄곧 담고 있으므로, 의병에 관련된 기록은 1895년 12월 1일(양 1896년 1월 15일)부터 시작하여 전기의병이 끝나던 1896년 9월(양력 10월)까지이다.


 


안동에 단발령 소식이 전해지던 장면, 의병을 논의하자는 청성서원(靑城書院)·경광서원(鏡光書院) 공동명의의 통문과 호계서원(虎溪書院)의 통문, 봉정사에서 열린 김흥락(金興洛)·유도성(柳道性)·유지호(柳止鎬) 등 안동지역 최고 지도자들의 거병 논의, 안동부에서 1만 명이나 모인 가운데 결성된 1차 의진과 권세연(權世淵) 의병장,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의 도전과 이를 격퇴시킨 전말, 2차 의진 성립과 김도화(金道和) 의병장 및 상주 함양의 태봉전투, 일본군의 방화로 처참하게 타버린 안동부, 1,400권이나 소실된 퇴계종택 수난과 삼백당 종가의 재난, 청량사와 오산당의 방화, 금계마을의 수난, 안동부 남문인 제남루에 올라앉아 오만을 떨던 일본군 장교, 정부의 회유정책과 여기에 동원된 인물, 이에 대한 안동의진의 끈질긴 항전 등이 하나하나 적혀 있다.



이 자료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던지는 질문이 있다. 구석진 마을에서 혼자 어떻게 그런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기록하였는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다. 자동차도 없고, 전화도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매일매일 그렇게 많은 정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기록하였는지 신기할 정도이다. 그렇지만 기록들을 살펴보면 금방 이해가 된다. 그가 직접 의병에 참가하기도 했고, 또 집안 사람이나 아랫사람을 의병에 참여시키기도 했고, 또 그들을 통해 상황변화를 주시하였다. 더구나 학연과 혈연을 통해 연결되던 당시 지도자급 인물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소식을 전했다. 그렇게 연결되던 통신망을 타고 들어온 정보를 세밀하게 기록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전설처럼 알려져 있던 이야기들이 새롭게 우리들 눈앞에 확연하게 되살아났다. 예를 들자면 1896년 음력 6월 12일에 금계마을 출신 포장(砲將) 김회락(金繪洛)이 체포되어 포살(砲殺)된 이야기는 정말 전설처럼 전해지던 장면이다. 그런데 그것을 확인시켜주는 내용이 바로 이 일기에 등장한다. 이로 인하여 역사의 뒤안길에 원한을 가득 품은 채 웅크리고 있던 주인공이 작년에 독립유공자로 포상됨으로써 비로소 밝은 세상으로 성큼 나서게 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후손들에게 민족적 교훈을 들려주기에 이르렀다.


이긍연도 올해 광복절에 독립유공자로 포상되기에 이르렀다. 자신의 일기에서 그의 활동 사실이 나오기도 하지만, 일기 외에 그가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된 사령장이 발견됨으로써 확실하게 그의 의병 참가사실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이긍연의 일기를 보완해주는 다른 기록도 근년에 나왔다. 역시 안동의 전기의병에서 서기(書記)의 직분을 가졌던 서후면 보현(甫峴)의 권제녕(權濟寧, 1850∼1903)이 남긴 [義中日記]이다. 1920년에 편찬된 {구산유고(龜山遺稿)} 제5권에 실린 이 일기는 아쉽게도 극히 일부분인 9쪽 분량만 남아있을 뿐이다. 앞쪽 7쪽 정도는 안동의진의 1차 의병장 권세연(權世淵)이 이끌던 시기라고 명시하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1895년 12월 17일(양 1896.1.31)부터 1896년 1월 26일(양 3.9)까지 40일 동안만 남아 있다. 이 무렵은 안동의진이 안동부성을 장악하다가 관찰사 김석중에게 밀리던 모습부터 다시 안동부성을 탈환하던 시기이다.


 


뒷 부분은 두 쪽 남짓한데, 2차 의병장 김도화(金道和)가 이끌던 시기임을 명시하고 있다. 특히 여기에 적힌 1896년 5월 11일(양 6.21)부터 14일(양 6.26)까지 4일 동안의 기록은 김도화가 2차 안동의진을 이끌고 안동 주변에서 고군분투하던 시기였다.


 


이 자료가 비록 짧은 글이지만, 안동의병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관군에 의한 안동부 점령과 단발령 강행에 따른 참혹한 안동의 정황, 이에 반하여 안동의병의 재정비와 안동부 탈환 시도 과정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김도화가 안동지역 주변을 움직이던 당시 안동의진의 규모와 구성 및 활동범위에 대한 사실도 담고 있다.


권제녕에 관한 이야기가 이긍연의 일기에도 등장한다. 여기에다가 그가 남긴 일기도 그의 의병활동 사실을 명확하게 증명하고 있다. 이러한 자료들이 제대로 평가되면서 권제녕도 이번 광복절에 독립유공자로 포상되기에 이르렀다.


안동 주변에서도 근년에 의병 관련 기록들이 새롭게 밝혀지거나 소개되고 있다. 예천 이규홍(李圭洪)의 [세심헌일기(洗心軒日記)], 청송 심성지(沈誠之)의 [적원일기(赤猿日記)], 의성의 김상종(金象鍾)의 [병신창의실록(丙申倡義實錄)] 등과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예안 이만도(李晩燾)의 {향산일기(響山日記)}, 영양 김도현(金道鉉)의 [벽산선생창의전말(碧山先生倡義顚末)], 예천 박주대(朴周大)의 {나암수록(羅巖隨錄)}, 맛질의 {저상일월(渚上日月)}, 봉화의 [금석주일기(琴錫柱日記)] 등의 자료가 종합적으로 분석될 때, 안동문화권 의병항쟁의 전체 구도가 파악되리라 여겨진다.[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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