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판인쇄기 돌리던 때를 아시나요?(글/서지연)이번에는 인쇄사를 찾아 나섰다. 이날 따라 바람이 많이 찼고 시청 앞을 지나다가 '마침내 겨울이구나' 하는 느낌과 마주치기도 했다. 찬바람 속을 천천히 코끼리처럼 걸어가 다다른 곳은 '경안인쇄사'. 나지막한 미닫이문을 통해 들여다보이는 실내에는 보기만 해도 딱딱한 나무 책상이 두개, 낡은 소파가 하나. 군데군데 녹이 쓴 양철 캐비넷이 하나, 안쪽 살림집으로 통하리라 짐작되는 작은 쪽문이 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분이 천천히 문을 열고 나오신다. 연세가 꽤 되신 듯 해 여쭈어 보니 올해 일흔 둘이라고 한다. 인쇄사를 시작한 지가 어언 40년이 다 됐다고 하니 창창했던 젊은 기억들을 부탁드려야 할 모양이다.
60년대 경안인쇄사의 활판인쇄
1961년, 사장 김태억(72)씨는 지금의 세무서 부근에서 경안인쇄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인쇄업을 시작했다. 인쇄업에 있어서는 베테랑으로, 그는 안동의 인쇄문화와 40년을 함께 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 시절에 있었던 인쇄사는 상공인쇄사 와 동양인쇄사 정도를 들 수 있는데, 두 곳 다 주인은 바뀌고 간판 이름만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군을 제대하고 무심코, 형님의 권유로 일정 때부터 건재해 온 20년 된 인쇄사를 물려받아 지금에 이르렀다.
그 당시의 인쇄 방법을 이야기 할 때면 제일 먼저 등장하는 이름이 활자이다. 납에다 글자를 그 크기에 따라 하나하나 팠다. 글자크기도 초호, 1호, 2호…6호까지 초호가 가장 큰 글자였고 숫자가 커질수록 글자의 크기는 작게 되어 있었다. 잔 글자고 큰글자고 간에 글자를 하나씩 만들었다면, 책 한 권속에 수억 개의 글자가 들어있으니 결국 그 수량만큼의 활자가 필요했던 셈이다. 활자체로는 명조체와 해서체의 두 가지를 많이 사용했고 고딕체도 있었다. 그러니까 그 수억 개의 글자에도 서로 다른 세 개 서체의 활자가 필요했다는 이야기다. 실로 어마어마하다. 이런 하나 하나의 글자를 모두 모아서 하나의 판에다 늘어놓는다. 이것을 짠다 고 하고 이런 과정을 조판 이라고 한다. 활자를 만드는 것은 인쇄사의 일이 아니어서 대구와 같은 대도시에서 활자를 만드는 공장을 통해 구입해서 쓴다. 글자는 납으로 만들었지만 학교나 관공서의 마크는 동판을 이용했다. 활자 높이와 같게 새기는 것인데 이것 역시 대구에서 기계로 만든 것을 구입한다.
판을 짜는 기술 역시 금방 익혀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문서에 해당되는 활자들을 뽑아내는 일을 활자 줍는다고 하고, 이 일만 담당하는 전문기술자도 따로 있었다. 워낙 활자의 종류가 많으니 뽑는 일도 여간 힘든 것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활자를 줍는 기술자와 주운 활자를 다시 끼워 맞추는 기술자, 맞춰진 활자를 기계에 넣고 기계를 직접 돌리는 기술자, 그리고 마지막 단계로 책으로 만들어 내는 기술자인 제본사까지 이렇게 인쇄 한번을 하는 동안에도많은 기술자들이 필요했다. 상당히 까다롭고 어려운 작업이며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이인쇄방법을 이름하여 활판 인쇄라고 한다.
모든 인쇄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은 교정 이다. 하지만 활판 인쇄의 경우는 특히 더 힘들다. 요즘처럼 키 하나로 단박에 지웠다 썼다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조판된 활자들을 다시 빼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꼭 필요한 도구가 있다. 바로 핀셋 이다. 그것도 굉장히 강하고 끝이 뾰족한 것이어야 한다. 김사장은 이제 인쇄사를 그만두었는데도 아직도 그 강하고 뾰족한 핀셋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꽉 짜여진 활자의 틀린 부분을 골라내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강해야 한다. 이곳에서 고치지 못하면 대구로 보내져 그곳 기술자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납으로 된 단단한 활자의 틀린 부분을 가려내고 집어냈을 그 핀셋만큼이나 세밀하고 꼼꼼해야 하는 게 인쇄 기술자다.
밤낮으로 선거용지 찍던 시절
옛날, 인쇄업은 학교와 관공서를 화려하게 누볐다. 안동이 유독 학교가 많은 고장이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통지표와 생활기록부, 졸업장, 각종 상장, 출석 명렬표 등등의 인쇄물들을 인쇄사에서 단독 점령하고 학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성장해 왔던 모양이다. 시청 근교에도 유독 인쇄사가 많다. 지금은 그 작업을 컴퓨터라는 디지털 기계가 독점하고 있지만 인쇄업이 성행하던 30년 전쯤에는 선거 인쇄 용지와 선거 선전물을 찍기 위해 활판 인쇄기를 밤낮없이 돌려대던 때도 있었다. "한 7∼8년 정도는 주야도 돌렸었지"라며 김사장은 그때를 회상한다. 24시간 돌아가는 기계 덕분에 기술자들이 밤낮을 교대해가며 일하기를 밥먹듯 했다. 특히 선거에 사용될 용지는 시간이 중요하기 때문에 시간을 칼같이 지켜내야 했던 것이다. 그 당시 경찰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찍었던 투표 용지는 대단한 작업이었다고.
그렇다면 그 많은 기술자들이 하나의 인쇄사에서 먹고 자며 인쇄업을 일구었을 터인데 지금의 가게는 그 열기가 식은 지 오래된 듯 황량하기만 하다. 사람을 쓰지 않느냐는 물음에 작년부터 인쇄를 그만두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아직까지 가게문은 열어두고 있지만 인쇄일은 이미 정리한 듯하다. 그러고 보니 앞에서 말한 그 많은 활자들도, 활자를 놓고 돌렸다는 활판 기계도 보이지 않는다. 고물로 다 처분한 상태다.
인쇄업이 사양의 길을 걸었던 것은 컴퓨터의 등장으로 학교와 관공서에서 자체적으로 작업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김사장은 무엇보다도 사람을 고용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고 말한다. 옛날에는 가게 뒤에 공장이 붙어 있었는데 그 공장에서 먹고 자면서 일하는 기술자가 최고 12명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시골에서 짐 싸들고 올라와 인쇄 기술을 조금이라도 더 배울려고 한푼 보수 없이도 삼 사년을 일했던 적도 있었는데 요즘은 고용할 때 보수를 먼저 따지고 조금이라도 더 편할려고 눈치를 본다는 것이다. 시대가 변한 것이다.
그러나 시대에 뒤지지 않으려면 컴퓨터를 할 줄 아는 사람도 고용해야 한다. 발전하는 기술과 문명을 따라잡지 못하는 탓 보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시대를 타고 변해간다는 것, 그 틈을 메우고 변화하는 관계에 적응하는데 익숙하지 못한 김사장의 힘듦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안동에서 유일한 활판인쇄기
책과 문서를 접하는 직업인만큼 한자와 영어에도 어느 정도의 소양은 지니고 있어야 했다며 그가 보여주는 옥편은 40년이나 돼 닳을 데로 닳아 너덜너덜하다. 손때가 까맣고 손을 많이 타서인지 군데군데가 반들반들 하다. 그의 인쇄업과 흥망을 같이 했을 옥편, 인쇄사와 함께 물려받았다는 60년이나 됐지만 아직도 튼튼한 책상…, 인쇄업을 그만둔 그는 이전 보다 훨씬 더 미묘하고 복잡한 문제들을 가슴에 안고 전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다시 새로운 여행을 떠나는 외로운 사람의 입장에 서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스터 기계라고 불리는 자동 인쇄 기계에게 주연을 빼앗겨 버린 활판 인쇄기이지만 아직 그것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딱 하나 있다. 습자지 혹은 롤러지 라고 불리는 법원에서 등기인감증명을 할 때 필요한 종이인데, 이것은 자동 인쇄기에서는 돌돌 말려 버린다. 덕분에 활판 인쇄기가 아직도 안동에 한군데, 동양 인쇄사에 버티고 있다. 번거롭고, 손도 많이 가고, 활자들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는 뒤처리가 더 고생스러울텐데 동양인쇄사 신사장은 그것을 떨치지 않고 있다. "활판 인쇄야말로 오리지널 인쇄요, 모든 인쇄를 할 수 있는 작업"이란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주연을 빼앗긴 인쇄기는 쓸쓸하다. 24시간 펄펄 날뛰며 돌아가던 시절이 그립기는 한 걸까.
시간도 훨씬 절약되고 고생도 그만큼 덜한 자동 인쇄기의 활약으로 그만 뒷전으로 밀려난 운명이 활판인쇄기라면, 학교와 관공서, 다른 곳곳을 점령한 컴퓨터의 등등한 기세로 요즘은 일반 청첩장이나 인사장, 광고 전단을 찍어내기에만 급급한 운명인 것이다.
컴퓨터와 디지털 기술의 발빠른 보급에 사양의 길로 접어든 산업이 어디 한 두 가지일까. 사람의 온기 섞인 손으로 이리 저리 매만지던 예전과는 달리 쇳소리 나는 고철들이 이 땅을 점령했다고 생각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철이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디지털의 코드인 비트(Bit)이거나 간에 그것들이 이 땅을 점령할 때마다 우리들은 자의든 타의든 새로운 문명의 주도자가 되기를 요구받게 된다. 인쇄작업 전부를 담당했었던 활판인쇄기가 문명의 뒤안길로 물러나는 것과 같이.<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