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그 3년의 약속(글/강병규)중국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속해있는 태양촌, 이역만리 떨어진 이곳엔 안동,예천, 문경, 상주가 고향인 경상도 사람들이 현재 80여호 살고 있다. 이 중에 절반은 안동 사람들이다. 그래서 안동촌이라도 불려지는 곳이다. 이 글은 지난 8월 안동MBC 취재팀이 태양촌을 취재한 후, 취재팀장을 맡았던 강병규 PD가 원고를 보내온 것이다. 1937년 경상도 안동,문경,상주땅은 큰 흉년이 들었고,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비옥한 토지와 엄청난 돈이 있다는 이곳 연변마을로 찾아들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해보니 눈보라가 날리는 황무지 얼음판 뿐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그들은 1937년 혹독한 겨울을 이겨냈다. 그로부터 60여년이 지났고 그때 서너살이었던 어린 아이들은 지금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지만 아직까지 안동말을 쓰고, 안동식혜를 담가 먹으며, 어릴적 했던 놀이를 잊지 않고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혹시 살아있는 동안 고향땅 한번 밟아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실날같은 희망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편집자주>
한달만에 이루어진 첫만남
처음 만남이었다.
"어서와여. 이 먼데까지 오니라 얼매나 고생이 많았노."
처음 만난 태양촌의 성무 할머니는 그렇게 이방인들을 반가이 맞아 주셨다.
처음 연변의 태양촌을 알게 된 후 거의 한달 만에 이루어진 방문이었다. 작가와 함께 4박5일의 일정으로 들어간 태양촌은 정말 그대로의 우리 시골마을이었다. 의사소통의 어색함도 없이 산천의 낯설음도 없이 그대로 찾아온 고향이었다. 그곳이 고향처럼 느껴진 것은 단지 모습이 그래서가 아니라 태양마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7월 18일. 두 살 때, 다섯 살 때 자신들이 떠나온 고향에서 왔다는 그 말 한마디에 그분들의 눈동자에는 그리움이 묻어 나왔다. 아무리 들어도 전혀 낯설지 않는 말투, 어렴풋하지만 고향에 대한 기억, 유난히 짜고 매운 음식, 그 모든 것이 태양마을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그곳의 노인들은 고향얘기와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며, 지금의 모습들을 그려주었다. 그런 이야기로 그렇게 태양의 하루는 저물었다.
다음날 새벽 5시쯤 눈을 떴을 땐 이미 대낮이었다. 모두들 들로 나가 소풀을 먹이고 논둑을 살피고 부인네들은 아침 준비에 바빴다. 성무 할머니를 따라나선 우리들은 독보조라 불리는 마을 노인회원들을 따라 버섯밭으로 갔다. 이 동네 노인들은 공동으로 버섯을 키우면서 독보조의 경비를 마련하고 있었다. 지난해 처음 시작한 버섯은 올해도 소출이 꽤 쏠쏠해 이 마을 노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오히려 며칠 계속 내린 비로 버섯이 한껏 커져 있어 더 걱정이었다. 버섯을 따야 하는지 좀 더 말려야 할지를 놓고 노인들간에 의견이 맞섰다. 하지만 그 다툼도 잠시 모두들 공동작업에 나섰다. 노인들의 아침은 그렇게 시작됐다.
잠시 틈을 내어 돌아본 마을 한쪽에서는 집짓기가 한창이었다. 마을의 젊은이들이 모두 모여 이웃의 집짓는 일을 하고 있었다. 목수일이며 진흙을 바르고 못을 박고 모두들 자기일처럼 하나로 움직였다. 이곳에서는 뭐든 이렇게 큰일이 있으면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해결해 나간다고, 안동이 고향이라는 촌의 서기가 자랑하듯 말했다.
태양마을에서의 이틀은 너무나 빨리 지나버렸다. 떠나오는 날 상주가 고향이신 우창덕 할머니는 손수 따오신 꿀 두통과 골담초라는 약초를 선뜻 내놓았다. 넉넉한 고향마을의 인심 그대로였다. 마치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인 것 마냥, 명절날 찾아뵙는 고향마을의 외할머니인양, 우창덕 할머니의 웃는 얼굴은 계속 마음속에 남아있었다.
마을운동회날
한달이 지난 후 촬영팀은 다시 태양마을로 향했다.
다시 오겠다는 말을 지키러 온 사람들에 대한 태양촌의 환대는 흘러 넘쳤다. 그런 환영을 받으며 제작진은 촬영에 들어갔다. 마침 다음날이 몇 년만에 열리는 마을 운동회 날이었다. 마을사람들은 그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소도 세 마리나 잡고, 돼지며, 개며, 우선 이틀동안의 먹거리를 마련하느라 마을 사람들 모두가 맡은 일들을 척척 해내고 있었다. 그것도 그럴것이 이 마을의 운동회는 맥이 끊어져 버린지가 벌써 7년이 되었다 했다. 그동안 흉년에 어려움에 운동회를 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이다. 80여 호나 되는 마을 전체가 모두 세조로 나뉘어 조별로 먹을 것을 담당할 사람들도 뽑고, 경기에 나갈 선수들도 뽑고 사람들의 기분은 운동회전부터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상분들을 존중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촌의 체육기질을 발휘해 나갑시다. 즐거운 이틀을 보내십시오"라는 마을 서기의 인사와 함께 시작한 운동회는 태양을 하나로 만들었다. 한국에서는 시골학교의 가을운동회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풍경들이 계속 이어져 나갔다. 운동회는 달리기며 배구며 또 여자 축구경기까지 다양한 종목들로 이루어졌다. 특히나 눈길을 끈 것은 60여 년 전 머나먼 중국땅으로 이민 와 살면서 어렵게 살았던 생활의 지혜가 가득 담긴 종목들이었다. 아줌마들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달렸고, 바늘에 실을 꿰어 달리기도 했다. 노인들이 막대를 묶은 실을 병안에 넣어 들고 달리기하는 모습은 사람들의 입가에 웃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조별 줄당기기로 이틀간의 운동회는 끝이났다. 모두들 운동회때 탄 상금으로 그 후 사흘동안 마을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학생들 어른들 노인들 할 것 없이, 어디가 먼저라고도 할 것도 없이 서로들 나눠주고 집으로 초대하고, 저녁이면 모여 앉아 불 밝혀 놓고 춤추고 노래하고 태양 사람들은 그렇게 흥겨울 수가 없었다. 7년만의 일이었다.
그곳에 태양은 없었다
운동회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은 후 촬영팀은 마을 구석구석을 살피기 시작했다. 중국의 미신 억제 정책에도 불구하고 수십년 동안 마을을 지켜준다고 생각했던 영험스런 사람바위며, 옛날 태양마을 사람들의 어머니 아버지들이 남겨놓은 흔적들을 찾았다. 처음 태양으로 들어왔던 산길이 아직도 사람의 발길이 가시지 않은채 남아있었고, 일제가 쌓아놓은 토성의 흔적들도 보였다.
60여 년 전, 경상도 안동땅, 상주땅, 문경땅에는 큰물이 져 흉년이 들었다. 사람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때 일본의 계략은 입에 단 사탕처럼 사람들을 움직여 나갔다. 모두 218호의 가구가 중국땅으로 흘러갔다. 비록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은 없었지만 마을앞의 시냇물이며 담장안의 감나무며 뒷동산의 따스함은 따로 비유할 때가 없었지만 배고픔은 그들을 북만주로 내몰았다.
희망에 부풀어 만리가 넘는 길을 걸어 이곳에 왔을 때 태양은 없었다. 비옥한 토지와 엄청난 돈이 있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눈보라가 날리는 황무지 얼음판위에 갈대잎을 깔고 그렇게 그들은 1937년 그 추운 겨울을 이겨냈다. 아이를 낳다 죽어간 어머니며 추위를 견디다 못해 쓰러져간 아이들이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듬해부터 그들은 밭을 일구고 집을 지어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3년만 벌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두 주먹을 움켜쥐고 다시 땅을 갈았다. 그리고 태양을 일구어 냈다.
태양촌 아이들의 꿈
마을의 아이들은 우리네 시골아이들과 다름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착하고 때묻지 않은 모습 그대로였다. 방학때라 도회지로 학교나간 아이들은 집으로 와있었다. 소학교 때부터 함께 지내온 아이들은 하루종일 같이 있어도 지루한 줄 몰랐다.
마을 앞 가야하에서 멱을 감고 그물로 고기를 잡아 고기밥을 해 먹었다. 어떻게 배웠는지 고기를 손질해 밥을 끓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한여름 시원한 개울가에서 해 먹는 고기밥의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이 모두가 아이들의 아버지의 그 아버지 때부터 해 오던 천렵이라 했다.
아이들은 요즘 유행하는 한국의 노래를 들으며 춤도 곧잘 따라했다. 누굴 좋아하냐는 물음에 그들은 서슴치 않고 HOT, 핑클, SES를 외쳐댔다. 그리고 무엇이 될거냐는 물음에도 백댄서, 가수, 영화배우 등 요즘 한국의 아이들이 선호하는 것들과 똑같은 대답을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고향은 이곳 태양이었다. 태양에서 태어나고 이곳 태양소학교에서 글을 배우고 태양의 땅을 밟으며 자랐다. 할아버지의 고향은 어딘지 이제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조금은 아쉬운 생각이 들었지만 이들에게는 분명 태양마을이 고향이었고 이 아이들은 태양을 위해 커갈 것이라고 했다. 자기나라 중국에서 잘 사는 것이 꿈이라는 아이들의 생각은 그르지 않았다.
중국땅에서 이어가는 안동식혜
촬영팀이 열흘여를 묵은 성무네는 고향이 안동이라했다. 이제 아홉살인 성무는 소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집안에는 3호학생이라는 상장도 커다랗게 붙여놓았다. 늦게 얻은 외아들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한국이나 다름없었다. 성무 할머니는 문경이 고향이라했다. 세 살때 태양으로 들어와 안동이 고향인 성무 할아버지에게 시집왔다고 한다. 아직도 문경지방의 억양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손맛은 시어머니의 전통을 이어받아 안동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성무 엄마와 함께 담아 내놓는 안동식혜는 한국에서 먹는 맛 그대로였다. 고드밥을 하고 무채를 썰어 고춧가루와 함께 썩어내고 엿기름 짜낸 물을 부어 얼큰하고 시원하게 담아내는 안동식혜의 맛을 머나먼 중국땅에서 다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제는 돈화에서 시집왔다는 성무 엄마에게 그 맛이 전해져 내려가리라.
더욱 반가운 것은 이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이 안동식혜의 맛을 즐기는 것은 물론이고 만들 줄 알고 있다고 했다. 열흘을 넘게 한방에서 잠자고 먹고 생활하면서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따뜻하게 한 식구처럼 대해줬던 성무네 식구들에게 지금도 고마움을 모두 다 표시하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 특히 아홉 살난 성무는 동네에서도 소문난 개구쟁이였지만 우리들에게는 귀여운 동생이자 조카였다. 우리가 떠나올 때 울먹이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다시 오마던 3년의 약속
윤영주 할아버지는 남선면 신흥리가 고향이라 했다. 처음에는 얼굴에 깊게 패인 주름 때문에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 사신 분이 아닌가도 했었지만 올해로 일흔 둘이라 했다. 아홉 살때 태양으로 들어온 윤할아버지는 그때의 일을 너무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얼음판위에 올려지은 움막이며 소금물에 썪은 좁쌀을 끓여먹던 일들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평생 고생만 하시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앞에서는 결국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그것도 고향땅 한번 찾아가게 해드리지 못한 것이 죄송스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나이 60만 되도 고향에 가보겠다는 윤할아버지. 할아버지의 깊이 패인 주름에서 그동안 견뎌온 세월의 한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을 노인들 대부분은 거의 모두가 똑같은 바램과 한을 품고 있었다. 어릴적에 떠나온 고향이었지만 나이가 들수록 정감어린 그곳의 모습들이 훨씬 눈에 가까워진다고 했다. 산에 피던 진달래며 가을이면 온 마을을 풍성하게 했던 과일나무들, 호박덩쿨이 올라간 초가지붕까지 점점 눈에 생생해지는 것은 왜일까?
그들은 모두들 약속을 지키지 못했음을 한탄하고 있었다. 무거운 발걸음을 억지로 옮겨 놓으면서 스스로 다짐했던 약속, 3년이면 다시 오마던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제 다시는 고향 땅을 밟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도 고향에 대한 향수를 못내 아쉬워하는 것은 혹시나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한 가닥 희망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법. 그 실낱같은 희망 때문에 아직도 근근히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향을 떠나올 때 기억했던 한복을 가지런히 챙겨둔 것이며, 독보조에 징과 꾕과리 장구를 넣어두고 사는 것이며, 어릴적 했던 놀이들을 잊지 않고 나이 70이 넘었어도 즐거워하며 고리를 던지는 노인들의 모습에 우리 민족의 핏줄이 흐르고 있음을 느꼈다.
해바라기가 함박 웃음을 띠며 피어있는 마을 골목길 저편에 앉아 담배 한 대를 피우며 허공을 쳐다보는 남한철 할아버지의 뒷모습에서,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며 아직 설익은 산열매를 한바가지 따오시던 한 할머니의 쑥스러워하는 웃음에서, 한 나이라며 친구처럼 때로는 동생처럼 대해주던 마을의 젊은이들까지 태양마을의 넉넉함을 이어가고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 내리는 빗속에서도 모두들 마을 어귀까지 나와 배웅을 해주던 모습들에서 고향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제 한번 다시 온다는, 어쩌면 거짓말일지도 모르는 이야기에도 꼭 그렇게 하라는 태양마을 사람들의 바램을 읽을 수가 있었다.
돌아오는 비행기안에서 우리는 얼마간 전혀 다른 세상의 경험을 하고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달여간의 편집과 제작을 끝낸 다큐멘터리 고향, 그 3년의 약속은 예정대로 방송되었고, 그 이후에도 태양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지금도 눈에 선한 얼굴들 우창덕 할머니, 황태순 할머니, 윤영주 할머니, 김무호 할아버지, 김현삼 할아버지, 남한철 할아버지, 권분희 할머니, 김선님 할머니…… 이분들께 졸작 고향, 그 3년의 약속을 바친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