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 없이도 행복하더라(글/우명식)
고요를 하늘로 밀어 올리는 새벽. 달 없는 하늘에 별들만 푸른데 작은 마당에 도란도란 피어있는 꽃들이 무심하고 평화로워 찡하니 가슴이 젖어옵니다.
아파트에서 주택으로 이사 오면서 결혼할 때 장만했던 텔레비전을 과감히 없애기로 아이들과 의견일치를 보았습니다. 문명의 이기에서 잠시나마 벗어났다는 그 느낌이 얼마나 신선한지 모릅니다. 누군가의 뒷모습만 보아온 날들은 배부름 뒤에 오는 공허감 같은 것이었습니다.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은 편리하게 생활하지만 정서는 점점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mp3를 들으면서 최신곡과 히트곡을 낸 가수들의 이름은 줄줄이 외면서 할아버지, 할머니 함자는 모르는 청소년들이 많다고 합니다.
아이들에게 물질의 중요함보다 건전한 정신을 심어 주는 것이 참된 부모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남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배타적 가족이기주의는 어쩌면 넘쳐나는 물질문명에서 기인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랑도 넘치면 깨어진다는 진리를 우리는 망각하고 살아갑니다. 너무 닮은 걸 가지고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지금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마당 있는 집에서 텔레비전 없이 살면서 마음속에 산 하나가 들어서는 것을 느낍니다. 몸 푼 듯 가벼이 마당가에 내려앉은 바람이 자오록한 꽃진 흐려 수줍게 피어난 산나리 꽃을 어루만지면 남편과 나는 약속이나 한 듯 마당가에 앉습니다. 언제 왔는지 아이들은 피리를 들고 와 ‘에델바이스’와 ‘고향의 봄’을 합주로 들려줍니다. 살면서 사랑하고 미워하는 일이 눈비 오듯 하겠지만 우린 지금처럼 따스한 마음을 주고받으며 자연의 순리대로 살고 싶습니다.
현란한 옷차림으로 통통 튀는 연예인들의 이야기나 화려한 조명을 받고 웃고 우는 드라마 속 연인들의 이야기가 아닌 이웃들의 살아가는 풋풋한 이야기를 밥상머리 교육에서 해야겠습니다.
걸러냄도 없이 방송되는 폭력이 난무하는 화면 속에 우리 아이들을 그대로 방치하고 지내 온 무지를 이제야 안타까움으로 돌아봅니다. 텔레비전이 없어지고야 우리는 서로에게 눈길을 주는 일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아이들은 엄마와 눈을 맞추면서 하루일과를 진지하게 들려주었는데 그건 깊은 신뢰를 주는 약속같이 느껴졌습니다. 피자와 햄버거가 주는 얕은맛은 모두 버리고 김치와 된장찌개가 주는 깊은 맛으로 우리의 대화는 농익어 갔습니다. 덤으로 주어진 대화의 시간이 헛되지 않게 그동안 못했던 속내를 털어놓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눕니다.
독자글밭한 알의 볍씨가 밥이 되어 우리 앞에 놓일 때까지 여든 여덟 번의 손이 간다는 이야기를 밥상머리에서 아이들에게 들려주면 아이는 흘린 밥알을 얼른 입에 놓고 팝콘같이 환한 웃음을 터뜨립니다.
달빛도 잠이 안와 세상을 휘젓고 다닐 때면 아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마당가에 둘러앉아 모깃불 피워놓고 찐 감자 먹으면서 그 옛날 논두렁길에서 하얗고 통통한 메뿌리를 캐먹던 에미의 추억담에 보태어 가물가물 하던 호롱불과 불씨 묻어둔 놋쇠화로에서 피워냈던 따스한 정을 이제 우리 아이들에게 느끼게 해 주고 싶습니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