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다시 돌아갈래...!(글/임세권)
1980년 5월 15일 서울 시내의 모든 대학생이 서울역 광장에 모였던 그 날, 서울역에 함께 나갔던 대학 후배는 돌아오던 길에 포장마차에서 마신 술 때문에 위장에 구멍이 났다. 16일 아침 피를 한 대야나 쏟아내고 그는 혜화동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고 이틀 후 광주에서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들이 바람을 따라 병실로 실려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매일 병실에 모여 구 풍문들을 종합하고 분석하고 흥분하고를 되풀이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뿐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술도 있었다. 위에 빵구난 사람 옆에 앉혀놓고 소주병을 기울였다.
매일처럼 우리는 지껄였고 몸을 떨었다. 그러다가 병실에 모였던 몇 몇 후배들이 구속되고 대학 은사들이 두 분이나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그 어수선한 시절, 우리는 이 상처가 아물려면 한 세기는 가야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반년이 지나서 나는 생각지도 않던 그 광주의 반대쪽 안동으로 내려와 대학선생이 되었다. 그리고 21년이 지났다.
생각하면 긴 세월, 그때 유치원 들어갔던 큰 딸아이가 대학을 졸업했으니 적지 않은 세월이지만 그 세월이 왜 그리 짧게 느껴지는지.
5월을 마지막으로 보내는 날, 비디오 테이프로 본 '박하사탕'은 나에게 지난 20년을 넘는 그 시간을 되돌아보게 했다. 그동안 난 뭘 했는지, 지금은 뭘 하는지.
한국의 5월은 너무 화사하다. 온갖 꽃들이 피고 하늘은 맑고 투명한데 한 낮의 태양은 제법 무더워 이제껏 입고 잇던 두터운 옷들을 벗게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땡볕에 나가도 그런대로 견딜만한 그런 날씨다. 학교 다닐 적 우리는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도 했다. 그 화사한 봄날 대낮에 영호(설경구)는 기찻길 위에서 자기가 온 길을 다시 돌아갔다. '나 다시 돌아갈래-!'하는 절규와 함께.
일곱 개의 토막으로 되살아난 스무해
이 영화에서 기찻길은 시간이 달리는 레일이다. 그러나 그 레일을 달리는 시간은 미래로 향하는 시간이 아니라 과거로 달리는 시간이다. 레일 위를 시간이 흘러가면 땅에 떨어졌던 꽃잎들도 다시 나무 위로 올라가 붙고 길가는 사람들도 모두 뒷걸음친다. 레일위를 거꾸로 달리는 시간은 모두 일곱 개의 토막이 되어 20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다.
영호 인생 중 후반부 스무 해의 일곱 토막은 글자 그대로 파란만장이다.
박정희가 피살되던 바로 그 가을, 사진기를 들고 들꽃을 찍고 싶다며 들꽃을 보고 눈물을 흘리던 순박한 청년이 마음씨 고운 박하사탕공장 여공 순임(문소리)을 만난다. 그러나 1980년 5월 입대해서 광주데모진압에 투입, 꽃 같은 나이의 여학생을 사살하고 제대하여 경찰관이 되고 이제는 물고문이 일상이 되어버린 악질 수사관이 된 영호는 들꽃을 찍을 사진기를 들고 온 순임을 맞이할 수 없다.
언제나 술만 들어가면 악몽처럼 찾아오는 광주의 기억에 그는 수사관을 그만두고, 전자대리점을 차린 뒤 퇴근길에 들리던 대포집 소녀(김여진)를 아내로 맞이하지만 그 소녀의 기도도 이미 더러워진 영혼의 때를 씻어주지 못한다. 결국 소녀에게 딴 남자가 생기지만 영호가 용서하려해도 소녀는 영호를 거부하고 철길 옆 비닐하우스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데 순임의 남편이 찾아온다.
병원에 입원해서 삶의 끝을 맞이하는 순임에게 박하사탕을 건네준다. 순임은 군대 간 영호에게 편지 속에 박하사탕 한 알씩을 넣어 보내곤 했는데 광주 진압작전에 나가던 날 그 박하사탕들은 병에서 쏟아진 채 군화발에 채여 흩어져 버렸었다. 영호에게 사진기를 건네주는 순임의 남편, 그러나 이미 사진기로 들꽃을 찍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사진기에는 들 꽃 찍을 필름이 들어 있지만 소용없게 된 필름은 길바닥으로 버려지고 사진기는 고물상에 팔려간다. 무기 밀매업자로부터 권총을 산 영호는 20년 만에 가리봉동 주민들이 다시 야유회를 갖는다는 라디오 소리를 듣고 20년 전 그 철길 밑 강변으로 간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20년 전에 불러대던 그 노래 나 어떡해를 목이 터져라 부르던 영호는 철교 위로 올라가 달려오는 기차와 마주선다. 나 다시 돌아갈래를 절규하며.
이 스토리는 너무 극명하게 간추린 한국 현대사다.
시간과 인간
이 영화는 역사에 대한 관심을 직업으로 삼는 글쓴이에게 두 가지 흥미로운 점을 던져주었다. 하나는 시간이란 우리에게 무엇인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시간 위에 선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라는 것이다. 이창동 감독은 영화 속의 시간을 일곱 토막으로 쪼개고 다시 시간이 끝나는 곳에서 시간이 시작되는 곳으로 시계를 역회전 시키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 일곱토막은 시간의 길이를 산술적으로 평균하여 잘라낸 것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 눈에 보이는 인간 영호에게 과거의 시간이 어떻게 영향을 주었나를 기준으로 해서 잘라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화의 토막들은 현재, 사흘 전, 5년 전, 12년 전, 17년 전, 19년 전 그리고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시간의 길이를 달리하면서 때로는 조심스럽게 때로는 뭉청 잘려져 나갔다. 이것은 오늘날 역사를 어떻게 기술할 것인가에 대해 매우 신선한 새로운 방법을 제안한 것이기도 하며 역사적 시간과 물리적 시간이 어떻게 다른가를 너무 쉽고 간단명료하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이창동이 대단한 역사학자라고 생각했다. 돌아갈 수 없는 철길 위를 위험스레 달려온 영호는 그의 인생의 끝에서 다시 오던 길을 돌아가는데 처음 지나는 것이 어둡고 긴 터널이다. 영호는 그 길고 캄캄한 터널을 지나서 이제 밝은 햇볕에 들꽆이 핀 그 강가에 도달했는데 이미 그 꽃들을 자기 것으로 잡아둘 사진기가 없었다. 그렇구나, 사진기는 바로 시간을 잡아두는 기계였구나. 영호가 찍으려 했던 들꽃들은 구 오월의 들꽃들은 지난 여름의 무더위와 가을의 스산한 바람과 한 겨울 추위를 다 이겨내고 보란듯이 자태를 뽐내는 절정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것을 필름에 담는 행위는 그 절정을 스톱모션으로 정지시켜 저장해 두는 것이다.
되찾을 수 없는 잃어버린 시간들
우리는 정말 한 인간을 이해할 수 있을까? 순임은 영호를 어떻게 이해할까? 대포집 딸 홍자는 영호를 어떻게 이해할까? 욕조 속에 쳐 박혀 폐에 물을 들이키고 통닭구이를 당하던 청년은 그를 보며 무엇을 생각했을까? 도대체 영호는 어떤 놈일까? 그러나 거꾸로 가는 시간 열차를 타고 가면서 우리는 비교적 분명하게 영호를 볼 수 있다. 역사속에 떠밀려서 개인적인 꿈을 버리고 광주의 어둠 속에서 육신에 총상을 입고 한 여자를 사살하면서 마음에 상처를 새기고, 그 육신과 마음의 상처를 안고 세월을 보내면서, 사십대 인생의 절정을 스크린 위에 스톱모션으로 못박아 놓은 그 남자를 어떻게 모른다고 할 수 있겠는가.
뉠리리야 가락에 엉덩이를 흔들어대는 40대 아줌마 아저씨들을 아침이슬을 부르던 통기타의 젊은 시절로 돌려줄 수는 없다. 다만 이따금씩 그 시절이 생각나고 그 때 자기들이 무엇을 했었는지에 가슴아파 하지만 그러는 시간은 너무 잠깐사이에 지나가고 우리는 다시 일상에 묻혀 그 어두운 터널 저편에서 보낸 시간들을 잊어버린다.
광주의 핏물이 아직도 산천에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흥건하던 81년 이후 다시 20년이 지나 나는 박하사탕으로 잃어버린 시간들을 되찾으려 애를 썼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