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GO 생명의 공동체-사람과 자연은 하나의 공동체(글/이향미)
20세기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실험실이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에서도 인류의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혹자들은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주의라는 두 이념의 옳고 그름을 이 글에서 따지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국가를 기반으로 하는 권위주의적인 계급독재 대신에 자유주의적 자치사회를 모색하며 강권적 국가 지배 대신에 지역 단위의 소규모 공동체를 추구하는 아나키즘에 사람들의 관심이 늘어가고 있다. 물론 이것 역시 대안모델일 뿐이다. 21세기의 새로운 대안 이념의 하나로써 조심스럽게 거론되고 있는 아나키즘, 그 현장을 찾아가봤다.
대안을 모색하는 환경단체 생명의 공동체
5월 늦은 봄날 안동의 NGO를 찾아 예천으로 갔다. 사무실을 옮긴지 얼마되지 않는 생명의 공동체를 찾아나서는 길이다. 생명의 공동체는 안동에서 환경운동을 하는 시민단체 중 가장 실천적인 활동을 하는 곳이다. 기존의 환경운동 시민단체가 해온 활동도 중요하지만, 하지말자, 버리지 말자 중심의 환경운동에서 나아가 ∼를 하자는 대안을 모색하는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안동을 중심으로 영주, 예천, 점촌, 상주 등에 작은 소모임을 만들어 10여년 동안 활동해 오다 본부를 예천으로 옮긴 것은 지난 4월 27일이다. 현재 생명의 공동체 본부 사무실은 행정구역상 예천읍 백전리에 속해 있으며, 예천사람들에게는 한전 앞 삼거리라 불리는 곳에 노란 간판을 내걸고 있다. 원래는 목성동 천주교 성당내에 있는 사무실에 생명의 공동체 본부를 두고 있었다. 목성동 성당 담장에 검정바탕에 녹색글씨로 생명의 공동체라고 세로로 쓰인 것을 보고 이곳이 뭐하는 곳일까?하고 한 번쯤 궁금히 여겼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예천으로 본부를 옮김으로써 위치적으로도 도시지역은 물론 농촌 공동체도 1시간 안에 도달할 수 있게 됐다.
생명의 공동체는 지역별로 안동, 상주, 영주, 점촌, 예천과 11개 농촌 공동체가 있고, 현재 중간지점인 예천에 본부를 두고 있다. 회원은 안동이 499명, 영주 266명, 상주 274명, 예천 68명, 농촌지역 49명 등으로 약 1천400여명이 참여하고 있다. 주로 교사, 공무원, 자영업자 등이 주로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철저한 회원 중심의 활동
생명의 공동체 사무실에 들어서면, 고구마, 감자 상자, 쌀포대가 왼쪽으로 쭉 놓여있고 갖가지 물품들이 선반위로 쌓여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것들은 생명의 공동체에서 직접 생산한 유기농산물과 환경친화적인 생활용품들이었다. 사무실에 딸린 방안에서 낯설지 않은 남녀 두사람이 얼굴을 내비쳤다. 생명의 공동체 사무국장 김구일(34)씨와 그의 아내이자 생명의 공동체 회원인 이은경(29)씨다.
김구일씨는 안동대학교 경영학과 86학번으로 1990년 농추위원장을 지냈다. 김구일씨가 대학에 들어간 것은 농사를 짓겠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생명의 공동체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94년 생명의 공동체가 차츰 자리를 잡게되자 농업경영 전문가를 필요로 했고, 이 무렵 대학졸업을 앞둔 김구일씨 또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적절한 곳이었다.
생명의 공동체는 1989년 겨울, 농촌 9개 마을 공동체로 출발했다. 그해 봄 농촌공동체들은 생산계획 모임을 갖고 천주교 안동교구청 사무국 주관으로 안동시내에 있는 주부들이 모여 안동생명의 공동체를 결성해 약 20개의 소공동체 모임을 만들었다. 그 이후 이들의 활동이 알음알음 인근 지역에 전해져 점촌, 영주, 상주, 예천 등지로 퍼져나갔다. 드디어 90년 겨울, 조창래 신부를 대표로 추대하고 생명의 공동체 창립총회를 안동문화회관에서 개최한다.
90년 창립총회이래 매년 정기총회를 갖고 정기총회에서 회원들의 의사에 따라 결정된 사안들을 집행하는 철저한 회원중심의 시민단체로 자리잡게 된다.
생명의 공동체의 주요활동으로는 공동체운동, 생태계살리기 운동, 생활문화운동, 교육홍보활동, 물품 나누기 등이 있다. 이런 활동은 인간적 규모이어야 한다, 다양한 생활요소가 완전히 갖추어진 주거지이어야 한다, 인간의 활동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무한한 미래로 지속 가능해야 한다는 생태마을의 구성원리와도 비슷하다.
인간적 규모란 공동체 안에 있는 구성원이 서로를 쉽게 알 수 있는 정도의 규모로, 대략 500명 이내이며 서로 긴밀히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규모를 말한다. 생명의 공동체의 경우 5-10가구가 한 공동체를 이루어 소모임 활동을 펼쳐나간다.
다만 주거, 노동, 생활, 사업활동 등 일상적인 생활의 모든 부분이 완정히 갖추어진 주거지를 구축하고 있진 못하지만, 도시지역 공동체와 농촌지역 공동체간에 혹은 지역공동체 간의 네트워크를 통해 다양한 생활영역이 상호 보완되도록 하고 있다.
생명의 공동체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적당한 위치를 찾아 조화를 꾀한다. 자원을 파헤쳐 쓰고 버리는 산업사회의 직선적 세계관을 버리는 것이 중요한 원칙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달걀껍질과 같은 쓰레기를 매립지나 소각로 또는 폐수처리장으로 보내기보다는 퇴비화해 땅으로 돌려보내며, 유독성 물질을 사용하지 않는다.
또한 다양한 교육 홍보활동을 통해 건강한 인간성이 계발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산업사회에 팽배해 있는 이기주의, 개인주의를 지양하고 더불어 사는 공동체 운동을 펼치고, 공동체 외부 사회가 축적해 놓은 자본이나 반환경적 활동에 의존하지 않는 지속가능한 생활문화 운동이나 생태계 살리기 운동을 추구하고 있다.
나눔 그리고 참여와 연대라는 일상적 혁명 시도
구체적으로 생명의 공동체가 어떤 활동을 하는지 살펴보자. 생명의 공동체 운영정관을 보면, "구성원의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생산, 구입하여 구성원들에게 공급하는 일을 한다"고 적혀 있다. 생명의 공동체에서 생산하는 것들은 쌀, 보리 등의 곡류와 각종 과일채소류, 육류 등 유기농산물이고, 상주에 이런 유기농생산지가 많다. 그리고 참기름, 조청, 엿기름, 감식초, 두부 등도 직접 가공해서 판매한다. 회원들의 공동출자를 통해 생산한 것을 공동으로 소비한다. 생산에 있어서도 회원들의 소비수준에 맞게 계획생산하고 생산방법을 엄격히 규정하고 있다. 즉, 제초제나 비료 등의 화학약품을 쓰지 않고 농산물을 생산하는 유기농생산을 엄격히 지키고 있다.
생명에 공동체에 가입하는 사람은 공동체 회원의 의무와 권리, 활동취지에 대한 설명을 듣고 가입금 5천원과 공동 기금 11구좌(11만원)이상을 가입원서와 함께 제출한 뒤 공동체 형성과 자신의 생활변화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생명의 공동체 1년 예산은 약 1억 3천만원 정도다. 운영하고 남은 것은 북녘동포돕기나 국가보안법 철폐 운동 등의 후원금으로 내고 있다.
생명의 공동체는 나눔 그리고 참여와 연대라는 일상적 혁명을 시도하고 있지만, 김구일씨의 말로는 "있는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단체라는 오해도 받고 있다"고 밝혔다. 98년 12월에 우리나라에서도 생협법이 제정됐다. 생명의 공동체는 우리밀 판매장과 같은 사업자 등록만 하고 있다. "만약 생협법에 의해 법인단체가 될 때에는 외부의 지원을 받을 수는 있지만 법적 테두리에 갇혀 생명의 공동체의 모임 성격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라고 한다.
지난 6월 5일은 환경의 날이었다. 상주 생명의 공동체에서는 이날 시민들에게 합성세제 적게쓰기 서명운동과 폐식용유로 만든 비누를 무상으로 나눠주고, 생명의 공동체에서 생산하는 유기농산물을 판매했다. 인류의 대안을 만들어 나가는 이들의 작은 혁명은 이런 활동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생명의 공동체는 나와 이웃, 사람과 자연이 하나의 생명체라는 깨달음에서 출발해 함께 사는 세상을 지향한다.
"사람과 자연이, 개인과 사회, 생명체와 환경의 유기적 관계를 올바르게 깨달아 참다운 인간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전통사회의 두레 정신을 회복하자는 것이죠. 생명의 공동체가 하는 활동은 우리 내부에 이미 축적돼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의식이 커가는 게 보일 때 가장 보람차다"고 하는 김구일씨. 헬레나 노르베리의 오래된 미래는 라다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공동체 회원들과 김구일씨 같은 실천하는 아니키스트들에게서 엿볼 수 있는 것이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