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가진 H의 평화(글/김재왕)무언가 잘 풀리지 않아 자신은 물론 주위의 사람들조차 항상 걱정을 하게 하던 H의 병문안을 다녀온 것은 몇일 전의 일이다. 폐에 치료되지 않을 덩어리가 생겨 입원한 H를 찾아 갈 때까지만 해도 그의 병을 걱정하기보다는 H에 생긴 또 하나의 불행과 또 그것을 이겨내지 못할꺼라는 막연한 불안에 휩싸여 좌절하고 있을 H의 마음 상태가 더 가슴아팠다. 내가 아는 H는 항상 그랬으니까.
그러나 H를 보는 순간 '아니 어떻게 저런 평온한 모습을!'하고 느낄 정도로 평소의 그가 아니었다. 그에게 불행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었는데도 H는 늘 걱정하고, 우울해하고, 불안해했다. 그래서 기쁜 일이 생겨도 즐거워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었다.
한번은 하루에도 두세번씩 보는 대변 때문에 걱정이 되어 벌써 몇 일째 잠을 설쳤으며, 대변을 자주 보니 기운이 빠지고 입이 까끄러우며 머리가 무겁다고 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대변을 자주 보아서가 아니라 H의 지나친 걱정과 그로 인한 불면 때문이었다. 오히려 잦은 변은 그의 소심하고 불안한 마음에서 오는 자율신경계의 실조가 원인이었다. 이삼일에 한번 대변을 보는 것은 변비처럼 불편할 뿐이고, 그로 인해 큰 탈이 나지는 않을 것이며, 그냥 받아들이고 안심하면 오히려 좋아질 것이니 불편감을 우선 데리고 좀 살아보라고 이야기를 해주어도 '사람은 하루에 한번 똥을 눠야지'라며 강한 거부감과 집착을 보이기도 했었다. 하여간 H는 그랬다.
그런데 오늘 H의 모습은 달랐다. 조여오는 흉통과 호흡곤란이 무척이나 심할텐데. 그리고 평소의 그라면 기질적인 고통 이상의 불안감으로 안절부절 했을텐데 내가 H의 손을 잡았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이 다 부질없었어. 모든 것을 잡으려고만 했었던 것 같아. 하나 옳게 잡는 것도 없으면서. 오히려 중요한 것을 잃어 갔어. 맡겼어야 하는 건데, 그냥 가만히 맡겼어야 했었는데..."
알 듯 말 듯한 소리를 들릴 듯 말 듯 내밷았다.
사실 H의 삶은 항상 근심의 그것이었다. 기회가 주어지기를 기다렸지만, 주어진 기회에 집중하기보다는 기회를 놓칠까 먼저 걱정하는, 시험공부에 열중하기보다는 내일의 시험을 걱정하다 초조한 마음으로 밤을 새우고는 시험을 망치는 아이처럼. 어쩌면 H는 성공기피증에 평생을 시달리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런 H가 오늘은 안정된 모습으로 앓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그 대상이 비록 고통이라 하더라도 그것에 몰두하고 있어서 일런지도 모른다. 돌아오는 길에 H의 처지가 안타깝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가 찾은 평화가 다행으로 느껴졌다. 그날 저녁 H의 말이 자꾸만 귓전을 맴돌았다. 정신없이 살아가는 그래서 생각이 많은 요즘의 나에게 던지는 말처럼.
"맡겼어야 하는건데, 그냥 가만히 맡겼어야 했었는데..."<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