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에 대한 엄숙한 감수성(글/이동백)시에는 음악이 있고, 그림이 있다. 그리고 거기엔 철학도 있고, 값진 보물도 숨겨져 있다. 그래서 시는 아름다운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죄다 들어 있는 시를 읽는 일은 축제에 참가하는 것과 같이 즐거운 일이다. '피 한 봉다리 뽑아 줬다'라는 유안진의 시 한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우선 어릴 때 한약방 천장에 조롱조롱 매달린 약 봉다리를 마음속에 그리며, '봉다리'하고 소리를 내 보았다. 그 울림이 알싸한 참꽃 향기처럼 좋았다. 유안진의 『봄비 한 주머니』는 이런 느낌을 주는 시집이었다.
유안진은 41년 안동출생으로 65년 현대문학에 추천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70년 첫번째 시집 달하를 펴낸데 이어 물로 바람으로, 달빛에 젖은 가락, 영원한 느낌표, 월령가 쑥대머리, 구름의 딸이요 바람의 연인이어라, 누이 등의 시집과 그밖의 시선집이 있다. 96년 한국펜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98년에는 정지용 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사람이 자신의 나이를 깊이 생각할 때는 언제일까. 아마 중·장년을 넘어서는 그 어디쯤일 것이다. 청년은 젊음을 이야기하되 자신의 나이를 들먹이지는 않는다. 불혹의 길목을 넘어 그 어름을 서성이다 보면 저절로 자신의 나이를 들여다 보게 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시집 봄비 한 주머니에서 나이를 살피는 시인의 모습을 만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무릎 정강이 뼛골 속으로 귀뚜라미가 울었쌓습니다. 라는 시구에서 시인의 나이가 짐작되기는 하지만, 넘고 나면 하늘 뜻도 절로 깨닫게 된다는/ 쉰 고개 마루턱에 들어섰음을 시인 스스로 자신의 나이를 실토하고 있다. 지명(知命)에 든 나이 쉰은 진달래는 마침내 참꽃으로 꽃 피더라고 얼마쯤은 향수가 배어든 독백을 할 나이인 것이다. 이렇듯 연륜에 대한 민감한 감수성을 지닌 시인은 이 나이에 삶을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 것일까.
우선 지적하고 싶은 것은 시인은 자신의 현실을 진솔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우리 세잔느 속 마른 인물이 되어
우리 같이 서로 편한 소주나 홀짝거리며
목줄기 뜨겁게 뎁혀보자꾸나
쓰거웁고도 들큼하게 사는 맛에 절어 들며
더불어 껴안고 목메이고 말자 말자
-「소주」-
시인은 포도주잔보다 소주잔을 기울이기를 소망한다. 이것이 시인이 꿈꾸는 멋이다. 이 멋은 결국 시인에게 그 마음을 위무(慰撫)케 하고, 삶을 진솔하게 수용토록 한다. 이때 이웃은 가까이 다가오게 되고, 앓는 것도 자랑거리로 삼게 된다. 현실적 삶을 진솔하게 수용하던 시인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발전적 변신을 도모한다. 마침내 시인은 세상이 비록 혐오스러울지라도 미소로 대응하는 여유와 원숙미를 체득하게 된다. 살기 등등하게 짙푸른 여름날의 살생적 젊음 앞에서 시인은 오히려 서리 까마귀의 저녁밥이 되어주고 싶어한다. 시인은 자신의 마음자리를 이런 모양으로 닦아 놓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도 좀 보자.
안 보이던 아잇적에는 무섭기만 했던 이런 귀신들이
한 이웃 한 식구로 다정스러지니
멀지 않아 하늘의 신도 보이실까요
내 눈이 이리 점점 좋아지다니요.
-「시력」-
자신이 자신을 두고 경탄할 만큼 시인은 원숙경에 들어 있다. 이런 모습은 「귀뜨임」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것은 물론 찢겨서 난 안팎의 피멍자국을 지니고서야 다다를 수 있는 세계이다. 세파의 곡절을 간파한 뒤에 획득한 원숙성을 시인은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전화(轉化)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자기 존재의 확인일 것이다.
이러한 존재의 확인 양태는 삶의 엄숙성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누구한테 왜 당했을까
짓뭉개어진 하반신을 끌고
뜨건 아스팔트길을 건너는 지렁이 한 마리
죽기보다 힘든 살아내는 고통이여
너로 하여
모든 삶은 얼마나 위대한가 엄숙한가.
-「전율」-
대상에 대한 탁월한 관찰력도 돋보이지만, 삶을 향한 고통스런 장정(長征)에 나선 미물에게 보이던 경이감을 순발력있게 생의 엄숙성으로 옮겨 파악하는 예리한 시인의 안목이 독자로 하여금 오히려 전율케 한다. 시로 하여 눈물방울만치라도 우리 세상이 밝아지고 맑아지고 따뜻해질 수 있다면, 스스로를 뼈가 녹아지는 어디론가 유배 보내고 싶고, 유배살이하듯 살고 싶다는 시인의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천명이 일러주는 歲寒行 그 길이다.
누구의 눈물로도 녹지 않는 얼음장 길을
닳고 터진 알발로
뜨겁게 녹여 가라신다.
매웁고도 아린 향기 자오록한 꽃진 흘려서
자욱자국 붉게붉게 뒤따르게 하라신다.
-「세한도 가는 길」-
냉혹한 현실을 닳고 터진 알발 하나로 뜨겁게 헤쳐나가려는 의지를 노래하고 있다. 이 시에서는 치열하고 열정적인 삶에의 의지를 신의 계시에 의탁함으로써 시적인 분위기를 한층 더 엄숙하게 끌어올리고 있다.
쉰 마루턱에서 삶을 이토록 살아낼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 비밀은 아마 「봄비 한 주머니」,「아이로 돌아가서」와 같은 시에 나타나는 봄, 아이 등의 시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생명의 재생을 상징하는 봄과 생명에의 가능성과 순결성을 상징하는 아이를 찾아냄으로써 시인은 삶에 대하여 이토록 자신있어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시인의 삶에 대한 엄숙성과 치열성은 한(恨)의 세계에 닿아 있음이 감지되는데, 「구미호」가 여기에 적용되는 작품이다.
어렵사리 서럽사리 사노라 사랑하노라, 천년을 묵어도 아니 풀릴 원한으로, 꼬리가 아홉 달린 구미호라도 되어, 꽃피는 서낭고개 타고 앉아서 캉캉 울었으면, 서리 치는 밤 하늘을 피칠하며 새웠으면.
-「구미호」-
지독한 서러움과 한(恨)에 사무친 서정적 자아의 모습을 매우 감각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서정주의 「문둥이」에서 환기되고 있는 생명에 대한 처절성이 이 작품에서도 느껴진다. 이는 서정적 자아의 원죄 의식을 표출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데, 이러한 원죄 의식의 표출도 따지고 보면 무의식적인 자기 확인 행위이다. 결국 서러움과 한(恨)에 대한 의식 또한 자기 존재의 확인 행위임이 분명하다.
이 엄숙성은 생명체에 대한 애착과 아이에 대한 사랑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이런 경향을 대표하는 시로는 「용서받는 까닭은」, 「아이로 돌아가서」 등이 있다. 이들 시는 순수성 내지는 순결성을 지향하는 자신의 인생관과 관련을 맺고 쓰여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쯤에서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시를 언급해야 될 것 같다.
가장 마지막 끝날 끝순간에
말째로 지으신 바 사람아
가장 잔인스럽고 흉물스런 짐승아
-「사람」-
미물 버러지에게도 외경심을 감추지 않던 시인이 인간을 왜 이렇게 혐오하는 것일까. 속물화된 인간에 대한 배신감이 시인으로 하여금 이런 반응을 보이게 한 것일까. 이것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짐짓 어깃장을 놓은 것이다. 어깃장을 놓은 것으로 보이는 까닭은 그의 시가 시사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뜨거운 눈물로 참회하기 위하여/ 봄이 오면 다시 지을죄도 마련하겠습니다.로 끝나는 「어깃장」이라는 시도 있지만, 표제작 「봄비 한 주머니」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320밀리리터짜리
피 한 봉다리 뽑아 줬다.
모르는 누구한테 봄비가 되고 싶어서
그의 몸 구석구석 속속들이 해돌아서
마른 데를 적시어 새살 돋기 바라면서
아냐아냐
불현 듯 생피 쏟고 싶은 自害衝動 내 파괴 본능 탓에
멀쩡한 누군가가 오염될라
겁내면서 노리면서 몰라 모르면서
살고 싶어 눈물나는 올해도 사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짓거리뿐이라서.
-「봄비 한 주머니」-
생명 탄생의 힘이 되어주고 싶어하다가 느닷없이 자해충동에 사로잡히고 만다. 삶은 위대하고 엄숙하다고 선언하던 시인이, 이 세상을 천국이라 선포하던 시인이 갑자기 이런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대단한 어깃장이다. 자해는 삶에 대한 안티테제인데, 저간(這間)의 사정을 고려해보면 이를 단순한 갈등 논리로만 볼 수 없다. 오히려 아이러니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즉 자해충동은 삶에 대한 강한 충동이다. 그러니까 자해충동 또한 자기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반어적(反語的) 행위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 시집에서 시인은 자기 존재에 대하여 엄숙하면서도 치열한 감수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는 점이고, 쉰고개 마루턱에서 단아한 경륜을 암팡지게 모아쥐고 선 시인의 구경적(究竟的) 모습을 접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작가는 자기를 참 사랑하는 분이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수준에서 감상문을 쓴다는 것은 작가나 독자들에게 되를 짓는 일인 줄 안다. 송구스럽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