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딜방아와 베틀(글/조필출)햇빛이 강렬하다. 엊그제 초복이 지나고 일년 중 가장 뜨거운 여름으로 접어들었다. 며칠 동안 외출도 못하고 손녀와 함께 지내다 보니 답답해서 남편을 졸라 드라이브를 나섰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나섰지만 남편은 언제나 고향이 있는 곤지암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한참을 달려가다가 차 한잔을 하기 위해 들른 곳은 산 속에 있는 작은 찻집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마음씨 좋아 보이는 주인 아주머니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주인 아주머니가 건강에 좋다며 권하는 대추차를 시켜놓고 주위를 둘러보니 안에는 시골에서 쓰던 살림도구며 농기구 같은 것으로 장식을 해 놓았다. 디딜방아, 지게, 베틀, 함지박, 그리고 삼태기 등......
어린 시절 시골에서 보던 물건들이 작은 찻집의 장식품으로 변해 있었다. 그 물건들을 하나하나 만져 보았다. 손끝에 느껴지는 감촉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배어난다. 내가 가끔씩 꿈에서 만나보는 고향의 유년 시절이 기억 속에서 살아나고 있었다.
찻집 한쪽벽에 큰 키를 한 디딜방아가 제 몫을 못하고 우뚝이 기대어 있었다. 디딜방아는 긴 몸통과 두 개의 다리가 있어서 두 사람이 방앗간 천장에 있는 끝을 잡고 서서, 발로 디뎌 방아를 찧는다. 몇 살 때였을까. 나는 할머니가 보리방아 찧는 것을 거들기 위해서 조그만 발로 힘들여 찧었다. 그때는 정미 기술이 덜 발달되어 꼭 밥하기 전에 한번씩 디딜방아를 찧었다. 난 계속해서 같은 동작을 수없이 반복해야 하는 그 일이 하기 싫었다. 그래서 저녁때가 되면 슬그머니 나가서 땅거미가 지도록 이웃집이나 들판에서 뛰어 놀았다.
내 고향 안동은 안동포로 유명한 곳이다. 어른 키보다 더 자란 삼을 메어다가 껍질을 벗겼다. 마을 여자들은 모여서 길쌈을 하면서 늦게까지 이야기꽃을 피웠다. 겉껍질을 벗긴 속껍질을 실처럼 곱게 가르고 이어서, 그것을 풀을 먹이고 베틀에 걸어서 짰다. 발과 손을 조화롭게 움직이면서 쉴새없이 일을 하셨다. 할머니꺼서는 가는 것은 곱게 짜서 옷을 만들고, 굵은 것은 성글게 짜서는 홑이불로 쓰셨다. 까실까실한 삼베 홑이불은 한 여름 밤의 더위를 식혀주기도 했다. 그 중에서 더 좋은 것은 손자 장가 보낼 때 쓰신다면서, 기름이 발라진 고리에 담아서 선반위에 올려놓으셨다.
지게는 옛날 농사를 짓는데 많은 도움을 준 기구다. 하나 가득히 나뭇짐을 지고 오기도 하고, 볏단을 쌓아지고 오기도 한다. 지금은 경운기에 밀려서 별로 소중하게 여기지 않지만, 참으로 쓸모있는 기구였다. 이렇게 찻집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장식품으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옛시절이 그리울 것이다. 조그마한 함지박엔 옥수수와 고구마가 있고, 소 여물통엔 구수한 여물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살이 찐 황소의 울음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붉은 벼슬이 돋보이는 장닭 한 마리가 서성이는 초가집 흙 마당이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산 속 찻집 안에 흘러간 세월이 가두어지고, 잊혀진 추억이 한겹한겹 묻어난다.
난 도시의 오염된 공기에 찌든 내 가슴속에 고향의 정을 담아 두고 싶다. 이젠 기억의 저편에서 가물대고 있지만, 언제나 가슴 한 쪽에 새겨 두고 싶은 고향 풍경이다. 고향을 떠나온지 오래되지만 살아가면서 늘 그리움의 원천으로 남아 있다. 흐린 날 멀리 기차소리가 들리면, 어느덧 중앙선 열차에 앉아서, 내 고향집으로 달려가고 있는 나를 그린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