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다운 삶의 모습을 찾아떠나는 긴 여정(글/심상훈)
조선시대 서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온 선비문화는 앞으로 우리 민족 모두의 문화가 되어야 한다. 조선의 선비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우리 내면의 깊은 곳에 남아있는 그 고결한 선비들의 정신문화는 앞으로 우리 사회의 기본 문화로서 자리매김해야 한다. 그래야만 눈앞의 화려한 욕망에 매몰되어 삶의 의미를 점차 천박한 쪽으로 끌어가는 흐름에 맞서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다.
작년 김대중 대통령이 '경북북부지역 유교문화권 개발'을 공식적으로 표방하였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유교문화 개발에 대한 여론이 일고 있다. 현재 치열하게 전개중인 4·13 총선에서도 안동지역 국회의원 입후보자들 입에서 이 문제가 계속 오르내리고 있다. 죽은 공자를 놓고 죽여야 될 것인지, 아니면 살려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뜨거웠던 적도 있고, 이러한 때 유교문화에 대한 재인식 문제가 제기되었다. 과연 유교문화란 무엇이고, 왜 경북북부지역에서 유교문화를 찾아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은 얼마 전 출판된 {서원-한국사상의 숨결을 찾아서}란 책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이 책은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에서 출판하였다. 과연 이 책에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고,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단순히 유교개발이라는 시대적 흐름에 따라 출판된 책일까? 여러 가지 궁금증을 안고, 책장의 첫 장을 넘겼다.
서원마다 특색있는 주제 붙여
이 책은 총 12개의 서원을 집필의 대상으로 선정하였다. 그리고 각 서원마다 특색있는 주제를 찾아서 수식어로 붙였다. 소수서원은 한국 성리학의 발원, 금오서원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 정신, 덕천서원은 경(敬)과 의(義)의 철학자, 도산서원은 한국 성리학의 초석, 필암서원은 대의와 도덕의 선비 정신, 병산서원은 진지와 실천의 경세가, 자운서원은 이론과 실천의 조화, 임천서원은 일사보국(一死報國)의 실현, 석실서원은 고난과 순절의 저항 정신, 화양서원은 춘추대의와 인륜적 문명 사회의 재건, 고산서원은 심득(心得)을 통한 도리 구현, 황강서원은 주자 존숭과 수도(守道)의 일념이라는 각 서원의 특색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12개 서원을 지역별로 나누어 보면, 경북에 5개(소수서원·금오서원·도산서원·병산서원·임천서원), 경남에 1개(덕천서원), 전남에 2개(필암서원·고산서원), 경기도에 2개(자운서원, 석실서원), 충청도에 2개(화양서원·황강서원)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인 경북에 편중되어 있고, 그 중에서도 안동지역 서원이 3개나 된다. 그리고 석실서원은 현재 터만 남아 있어 좀 독특한 면을 보여준다.
책 구성은 각 서원별로 특색 있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일정한 형식을 유지하고 있다. 각 서원별로 크게 몇 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가 서원의 위치와 내력 등 그 서원의 전반적인 내용을 다룬 것이다. 두 번째는 서원에 제향되어 있는 인물의 일대기와 사상에 대한 설명, 서원에서 배출한 문인들의 사상적 계승 부분으로 짜여져 있다. 마지막으로 필자들의 여운이 남겨진 글이다.
왜 선비정신을 강조하나
책을 구입하거나 얻으면 언제나 머리말부터 차근차근 읽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인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머리말에서 시선을 확 끄는 대목이 있었다.
"조선시대 서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온 선비문화는 앞으로 우리 민족 모두의 문화가 되어야 한다. 조선의 선비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우리 내면의 깊은 곳에 남아 있는 그 고결한 선비들의 정신 문화는 앞으로 우리 사회의 기본 문화로서 자리매김해야 한다. 그래야만 눈앞의 화려한 욕망에 매몰되어 삶의 의미를 점차 천박한 쪽으로 끌어가는 흐름에 맞서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다."
선비문화가 곧 21세기의 민족을 이끌어갈 기본 문화가 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과연 선비문화가 무엇이고, 앞으로 선비정신을 어떻게 계승해야 새로운 시대에 발맞추어 나갈 수 있는가? 그리고 물질만능주의에 물들어가고 병들어 가는 사회를 선비정신으로 지탱하고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 이 책에서 궁극적으로 내세우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일까? 단순히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경고일까? 아니면 한쪽으로 치우쳐 가는 문화의 균등적 발전인가, 세계적 보편성을 찾으며 우리의 특수성을 상실해가고 있는 현실의 아픔을 표출한 것일까?
많은 의문점을 던져주면서 이 책의 첫 장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러한 고민거리를 해결하기 위한 필자들의 나름대로 노력한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서원 부활의 방안이라는 소제목으로 시작되는 장에 이러한 고민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였다. 즉, 선비정신의 구현을 위해서는 서원을 통해 그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리고 조선조 사회 엘리트 내지 지배층의 선비정신과 청백리 정신을 오늘을 사는 한국 지도층이 본받아야하고, 이를 통해 부정부패가 난무하는 세상을 극복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부정부패의 사회사 문제는 얼마전부터 제기되었던 것이고, 부정부패는 관리들에서부터 시작하였다는 얘기들도 있다. 그리고 한 나라의 멸망은 부정부패의 만연에서 온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즉, 망하는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선비정신을 되살리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 서원은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조선 정치사의 심장을 찾지 못하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서원에 대한 너무 긍정적인 면만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서원의 기능과 인물들의 사상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였다. 서원은 당시 조선시대 유림들과 지배계층에게는 한없이 좋은 교육기관이자 관리가 되기 위한 교두보였지만, 서민들에게는 그렇지 못하였다. 서민들의 눈에는 고을 수령 외에도 그들의 목을 조를 수 있는 사람들과 조직으로 이해되었다. 특히 전국에 서원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기게 되면서, 백성들은 더 고달픈 삶을 살아야 했다.
즉, 서원이 가지는 역기능에 대해서는 선비정신이라는 애매모호한 말로 감추어 두었다. 또한 서원의 역기능 중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공론 형성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곳이 서원이다. 공론 형성의 대표적인 것이 1881년 안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영남만인소운동이다. 이처럼 정부 시책에 대한 강력한 저항을 서원을 매개로 하여 투쟁한 것이다.
서원은 조선 정치사의 심장이었다. 조선이 멸망한 것은 당을 형성하여 끊임없이 당쟁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즉, 당쟁의 소굴로 서원이 지목된 것이다. 조선시대의 정당사를 뜯어보면 현재의 정당사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른 점이라면 말을 쉽게 갈아타지 않는다는 것 정도. 이것은 당시 정치인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뚜렷한 정치관을 가지고 있었고, 사상적 논리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정치의 심장부처럼 잘못된 정책은 여럿이 모여 여론몰이로 고쳤고, 지방관의 부정부패와 탐학을 방지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다. 즉, 선비정신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주장하는 모습일 것이다. 단순히 주자의 성리학을 신봉하고, 명분론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서원에는 사상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중·후기 정치적 모습과 정치 형태가 담겨 있는 곳이다.
책은 항상 미련을 남긴다
항상 책을 읽고 나면 어딘가 모르게 가슴 한 구석이 빈 것처럼 허무한 감정을 느끼는 게 사실이다. 그만큼 기대가 크기 때문일까? 이 책은 그동안 얘기하기 어려웠던 한국 성리학의 흐름을 서원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풀어가고 있다. 이황과 조식으로 대표되는 영남성리학과 그들의 제자, 이이로 대표되는 기호성리학 등을 선비정신 구현이라는 목표로 정리하였다. 즉, 사상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현대적 계승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전통문화의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너무 사상적인 측면에서 다루다 보니 어쩐지 앙꼬 빠진 찐빵이 된 것처럼 보인다. 서원에는 사상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사람 즉, 선비들의 치열하고도 여유있던 삶의 모습과 흔적이 담겨 있다. 사람은 생각만 가지고 살 수 없다. 밥도 먹어야 되고, 잠도 자야되는 것처럼 여러 가지 요소들이 하나가 될 때 진정한 삶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서원에서 담당하였던 정치적 기능, 백성들에 대한 시각, 서원의 역기능, 서원을 매개로 빚어지는 사상적 갈등 등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리고 선비정신을 어떻게 계승해야 하는가? 옛날의 것을 그대로 이어받아야 하나, 아니면 현대적 감각에 맞춰 변화시킨 선비정신을 찾아야 하는가 등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당위성만 주장하고 있다. 너무나 설득력이 약한 모습이다. 개별적인 서원에 대한 내용은 있지만 이것을 하나로 묶어주는 총론 형식의 글이 없기 때문에 빚어진 문제일 것이다.
아무튼 이해하기 어려운 한국사상 즉, 한국적 성리학을 서원이라는 형식을 빌려 일반 독자들에게 쉽게 접근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서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상의 발전을 그려내고자 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한국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지금까지 한쪽 바퀴만으로 곡예를 하며 열심히 달리던 문화라는 수레가 한쪽 바퀴를 찾아 균형을 잡고, 미래 지향적인 문화를 창출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마지막으로 석실서원을 집필한 김용헌 교수가 남긴 여운을 생각하며, 이 책이 던지고 있는 유교와 선비정신을 각자 찾아봤으면 한다.
"이미 한세기 전에 서원의 고질적인 병폐를 척결하기 위해 대원군이 내렸던 서원 철폐령과 머리를 잘릴지언정 상투를 자를 수는 없다던 유교 원리주의, 일본 군국주의에 나라를 빼앗겼을 때 망국의 원인을 유교에서 찾았던 유교 망국론, 80년대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급격한 경제 성장의 원인을 유교 문화에서 찾았던 유교 자본주의론, 90년대 후반에 들어서 맞게 된 동아시아 경제 위기를 유교 문화에서 찾는 신근대화론, 게다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허무주의적 청산론과 이에 맞선 공자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유교 전통주의……. 과연 이 시대에 서원이, 아니 유교가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안동>
심 상 훈(경북지역사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