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길 단상(글/반윤희)| 용마산 자락에 조각조각 떠도는 구름들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모습이 마치 삶의 무늬같다. 창가에 기대어 하릴없는 생각으로 흘러가는 구름에 마음을 맡기고 서성이다가 전화벨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강원도 태백에서 걸려온 반가운 소꿉친구다. 아들 장가도 보냈으니 며느리에게 집안 일을 맡기고 이번 여름방학 땐 훌훌 털고 내려오란다. 사십 년 전 초등학교 6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도 찾아 뵙고, 동창들도 만나고, 어릴 때 뛰놀던 이곳저곳도 들러보자며 넌지시 유혹을 한다.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유년 시절의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청량리역에 나가 차표를 예매했다. 초로의 여인이 되어 철없던 시절을 찾아나서는 마음이 오히려 초조하기만 하다. 태백역에 닿으니 친구가 승용차를 세워놓고 기다리고 있다. 반가운 마음이 앞서 우린 서로 얼싸안고 어린아이들처럼 껑충껑충 뛰었다. 우선 선생님부터 찾아 뵙기로 했다. 이튿날, 지금은 정년퇴직을 하시고 영주에 살고 계시는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찾아뵙겠다고 하니 놀라시면서도 무척 반가워하신다. 선생님 댁 있는 곳에 도착하여 전화를 드렸더니 단숨에 달려나오셨다. 인사를 드리자 대뜸 내 손을 잡으시며 아무개 아니냐고 하신다. 선생님도 나도 만남의 기쁨에 말을 잊지 못하고 글썽이는 눈만을 서로 바라보았다. 한참만에 건강은 어떠시냐고 여쭸더니, 목소리도 여전하다며, 아버님의 안부를 되물으셨다. 아버님이 역장으로 계실 때 학교를 많이 도우셨다며 이제껏 잊지 않으시고 고마워하셨다. 작년 여고 동창회 때, 당시 교감 선생님의 딸이자 초등학교 동창인 숙을 만났을 때 반갑게 손을 잡으며 내게 하던 말이 떠올랐다. 폐를 앓고 계시던 자기 아버지를 입원시키고 돌봐주신 은혜를 가슴에 안고 살고 있노라고, 아버지의 후덕함이 자식에게 미쳐, 딸인 내게 모두들 고마워하는 거다. 그러한 아버지를 모시고 있다는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에 가슴이 벅차 오른다. 선생님께 큰절을 올리니 송구하다며 어쩔 줄 몰라 하신다. 사모님과 두 분이 살고 계셨다. 이렇듯 성장한 여학생(?)들이 찾아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두 분은 보람과 기쁨과 고마움을 감추지 못하신다. 그러시면서 어릴적 단짝이던 동무가 지금껏 아름다운 우정을 쌓으며 지내는 걸 보니 참으로 보기가 좋다시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교직의 외길로 살아오신 얘기며, 영주에 살고 있는 동창들의 근황을 소상히 얘기해 주셨다. 어릴 때 무척 고생을 했던 장 아무개가 지금은 중앙통에서 양복점을 경영하면서, 동창 회장을 맡고 있다며 전화를 걸어 나에게 바꿔 주셨다. 전화를 받는 순간 무조건 자기네 양복점으로 오란다. 무상한 게 세월이던가! 스승과 제자가 같이 늙어가는 모습에 격세지감을 느끼면서 뿌듯한 행복감을 안고 훗날 다시 찾아뵐 것을 약속드리고 선생님과 헤어지고 동창들을 만나보기 위해 승용차에 올랐다. 교직에 몸담고 있는 내 아들에게 말해주리라. 열과 성을 다해 마음에 깊이 남는 선생님이 되라고......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숙이가 양복점 앞에다 차를 세웠다. 벌써 사방은 캄캄하다. 어느 사이 연락들을 하였는지, 초로의 남정네와 여인네가 여럿이 모여있다. 낯설어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숙과 나를 반갑다고 얼싸 안으며 혈육처럼 대해 주니 얼떨떨하다. 큰언니 같았던 G도 부석에서 왔다. 어린 시절로 돌아가 얘기꽃을 피우다보니 예전 모습이 하나하나 살아났다. 전학 온 나를 잘 보살펴 주었던 언니같은 동무들이다. 나를 울렸던 남학생들도 지금에야 안 일이지만 서너살씩 위였단다. 끝없는 추억담으로 시간은 어느덧 자정이 넘었다. 아침에 부석 동창에게서 전화가 왔다. 하회마을을 들러 도산서원으로 갔다 올 예정이라 하였더니 거두절미하고 부석으로 오란다. 여러 명이 당도하니 진수성찬을 차려놓았다. 동창회장도 곧 온다고 했다. 식사 후 자기네 과수원으로 데리고 갔다. 눈이 모자라 다 볼 수 없을 정도로 큰 사과밭이다. 사과 따는 법을 일러주며 재미로 따보고 가져가란다. 한상자 이상을 땄다. 아낌없이 베푸는 인심에 고향이란 이런 것이구나 가슴이 찡했다. 두 차에 나누어 타고 우리는 들러볼 예정이던 도산서원으로 향했다. 잘 가꾸어 놓은 주변이 예전같지 않아 낯설었지만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물줄기는 변함이 없다.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고 있는 어린 날의 이야기처럼…… 서원을 꼼꼼히 둘러보며 기념촬영도 하고 쪄온 옥수수도 맛있게 먹었다. 돌아오는 길에 봉화 경찰서에 근무하는 동창 D를 찾았다. 무척 반가워하며 저녁을 사주었다. 꿈같은 시간은 흘렀다.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삼거리에서 손을 흔들며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영롱한 별빛이 총총히, 우리들의 우정에 갈채를 보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숙은 태백으로 동창회장 일행은 영주로 나는 서울로... 짧은 시간에 긴 정을 나누었던 고향길의 아름다운 추억을 음미하고 있는 사이, 숨가쁘게 밤하늘을 뚫고 달려온 열차가 어느 사이 안개 자욱한 첫새벽의 청량리역 플랫폼에 들어서고 있었다.<안동> 반 윤 희(수필가, 서울 중랑구 면목동) |